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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 가장 찬란하게 빛나는 촛불 (1)
“그대와 더욱 많은 이야기를 하고 싶지만, 사정이 여의치 않다. 그러니 서운해 말라.”
테오도르 국왕은 꽤나 피로가 쌓인 모습이었다. 이제껏 대외적인 업무의 상당 부분을 담당하는 식으로 정무를 도와왔던 왕녀가 성인식을 앞두고 두문불출하는 상황인지라, 홀로 격무에 시달리는 듯한 눈치였다.
“그럼 보중하소서.”
이럴 때는 빨리 피해주는 게 서로를 위하는 길이라 김선혁 역시 길게 끌지 않고 작별을 고했다.
“뭐가 또 놀라워?”
작은 아룡은 그의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날개를 펴고 낮게 목을 울려댔다.
구구구구구.
어디선가 많이 들어본 듯한 울음소리에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 하지만 그는 턱 끝까지 치밀어 올랐던 웃음을 도로 삼켜야만 했다.
화악!
게하임니스가 나비의 것과 똑같은 날개를 활짝 펼쳤다. 화려한 날개에 가득 새겨져 있던 기하학적인 무늬들 중 몇 개인가가 빛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내 3차원 도형처럼 툭, 하고 튀어나와 허공중에 환상적인 빛을 뿜어댔다.
이제껏 수다쟁이 아줌마처럼 떠들어대던 게하임니스의 모습은 그 자리에 없었다. 오직 신비로운 요정용이 있었을 뿐이었다.
김선혁은 그 환상적인 광경에 작은 감탄을 토해내려다 말았다.
구구구구.
홀딱 깨는 아룡의 울음소리가 그를 도무지 눈앞의 광경에 집중할 수 없게 만들었다.
그런 그의 내심을 아는지 모르는지, 섬광을 다시 갈무리한 게하임니스가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곳은 대화하기에 좋지가 않아. 그래서 나름대로 조치를 취해야 했어.]
“왕성에서 마법 사용은 금진데.”
당장 정령만 소환해도 왕가 수호대의 기사들이 숙소에 들이닥치는 곳이 왕성이었다. 그런 곳에서 이런 요란한 마법을 부렸으니, 소란을 피할 수가 없게 되었다.
[이게 그냥 마법으로 보여?]
하지만 그와는 달리 게하임니스는 전혀 걱정하는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아냐?”
[보이지 않기에 무지할 수밖에 없는 것, 설령 제 눈으로 목도한다 해도 끝내 지나치고야 마는 것, 그게 바로 나의 근원이자 원천이란다.]
배배 꼬아 말하기는 했지만, 그 정도도 알아듣지 못할 김선혁이 아니었다.
“그러니까, 지금 네가 한 짓을 왕성의 마법사들이 알아차릴 수 없다는 거지?”
[신비마법(Arcane Magic)은 시전자가 원하지 않는 이상, 절대로 흔적이 남지 않지.]
왕성에 웅크리고 있을 괴물 같은 마법사들조차도 알아차릴 수 없는 은밀한 마법이라니, 그저 말만 많은 수다쟁이라 무심코 생각하고 말았던 게하임니스가 달리 보이는 순간이었다.
“그래서 뭐가 그렇게 놀라운 일인데?”
하지만 언제까지고 작은 아룡의 힘에 감탄만 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조심성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게하임니스가 이렇게 신비마법이라는 것까지 부려가며 유난을 떨어야 했던 이유가 몹시도 궁금했다.
[가져서는 안 되는 것을 갖고 있었으니까.]
**
숙소에 틀어박혀 여독을 푼 김선혁은 다음날 조찬에 초대받았다.
“뭘 그렇게 깊이 생각하길래 멍하니 있는가.”
음식이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도 모르고 다른 생각에 골몰하던 김선혁은 웃음기 가득한 테오도르 국왕의 음성에 퍼뜩 생각에서 깨어났다.
“아. 죄송합니다. 잠깐 다른 일을 생각하느라.”
“나를 앞에 두고 한 눈을 팔았으니, 그 죄를 물어야겠구나.”
짐짓 엄한 어조였지만, 농담기가 가득한 음성과 표정은 친근하기만 했다.
“농담이다. 그러니 그렇게 굳은 표정 할 것 없다.”
국왕의 말에 그는 저도 모르게 얼굴을 매만지고 말았다. 아닌 게 아니라 정말로 팽팽하게 당겨진 안면 근육이 손끝에 느껴질 정도로 도드라졌다.
‘한 인간에게 허락된 재능은 많지 않단다. 검을 다루면 마법으로부터 멀어지고, 마법을 탐구하면 검으로부터 멀어지듯이, 인간에게는 명백하게 한계가 있지.’
게하임니스는 말했다.
‘하지만 그 자는 너무도 많은 것을 갖고 있어.’
테오도르 국왕이 지닌 무궁무진한 잠재력과 재능은 결코 정상적이지 않다고.
“곧 큰일을 앞두고 있기 때문인가. 오늘따라 생각이 많아 보이는구나.”
“죄송합니다.”
한 나라의 지배자를 두고 두 번이나 같은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도무지 잡념을 떨쳐낼 수가 없었다.
“그래. 심란할 만하다. 그대에게도 조금은 시간이 필요하겠지.”
친근한 어조로 말을 건네는 국왕의 눈 밑이 유달리 거뭇거뭇했다. 처음에는 그게 왕녀의 부재로 인해 떠맡아야 했던 업무의 과중함 때문이라 여겼다.
‘촛불 하나에 너무도 많은 심지가 달려 있으니, 다른 초보다 더 밝게 빛날 수밖에. 하지만 그 대가는 스스로의 생명, 그 자에게 할당된 초는 다른 이들의 것보다 빨리 타오를 수밖에 없단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국왕의 낯빛에 드리워진 그림자는 죽음의 전조나 다름이 없었다.
‘조금이라도 때를 늦추려면 너무 많은 심지에 불을 붙이지 않는 것, 아마도 본인 역시 자신의 운명을 알고 있었을 테지.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자신의 재능을 저 정도로 억눌렀을 리가 없었을 테니까.’
게하임니스는 심지어 테오도르 국왕이 자신의 운명을 이미 알고 있을 거라 말했다.
“하지만 그대가 겪는 심란함은 뭇 남자들이 하나같이 거쳐 가는 의례와도 같은 것이니, 오래 가지 않으리라.”
국왕은 장난스러운 어조로 그를 타이르듯 말해주고는 손을 휘저었다.
“돌아가서 쉬도록 하라. 식을 치르기도 전에 신랑의 몸에 탈이 나는 일은 없어야겠지.”
테오도르 국왕이 돌아가보라 말했지만, 김선혁은 쉬이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사실 테오도르 국왕과 개인적으로 친교를 다진 적은 없었다. 그저 왕과 신하로서 서로의 관계에 충실해왔고, 그마저도 거래라는 개념으로 각자가 필요로 하는 것을 챙겨왔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 시한부를 선고받은 왕의 죽음이 안타까웠다.
자신을 많이 부려먹기는 했어도 테오도르 국왕은 늘 합리적인 대가를 제시해왔고, 약속을 모두 지켰다. 왕과 신하가 아니라 설령 일반적인 직장 상사와 부하직원의 관계라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런 테오도르가 사라진다고 하니, 마음이 무거워질 수밖에 었었다.
‘다음번에 만날 때는 오필리아라고 부르거라.’
얼핏 왕녀 오필리아의 모습이 스쳐갔다. 애늙은이처럼 조숙하고 의젓한 척을 하는 게 몸에 밴 왕녀였지만 아비의 죽음 앞에서까지 초연할 수는 없을 것이다.
국왕의 양육법은 서민들의 그것과는 방식이 달랐으나, 그 안에 담긴 부성까지 다르지는 않았다. 어쩌면 왕녀의 결혼식을 서두르려고 했던 것은 국왕 스스로가 자신의 죽음이 멀지 않았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음….”
주저앉아 눈물을 흘리는 소녀의 모습을 떠올라, 가슴이 자꾸만 갑갑해져왔다.
“폐하.”
“뭔가 할 말이라도 있는 건가?”
죽음을 선고받은 시한부 인생이라고는 믿겨지지 않을 정도로 테오도르 국왕의 눈동자는 평온했다.
“아닙니다. 그냥 폐하께서 많이 피곤해 보이셔서….”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내 걱정은 말고 그대는 스스로의 몸을 돌보라. 앞으로 그대의 몸은 그대 혼자만의 것이 아니게 될 테니.”
그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자 테오도르 국왕이 별 싱거운 사람 다 봤다는 눈길로 쳐다보다 피식 웃었다.
“폐하.”
김선혁은 다시 한 번 국왕을 불렀다.
“따로 할 말이 있는가. 만약 할 말이 있다면, 망설이지 말고 기탄없이 이야기하라. 그대와 나 사이에 못할 말이 뭐가 있겠는가.”
설령 그것이 겉치레에 불과할지라도, 테오도르 국왕의 말에는 신뢰가 가득했다.
“이상하군. 정말 이상해. 내가 아는 드라흔은 말을 할 때, 절대로 망설이는 자가 아니다. 그런데 오늘의 그대는 마치 다른 사람 같구나.”
국왕은 그의 태도가 이상한지, 의아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듣는 귀가 신경 쓰이는 거라면 사람을 물리도록 하겠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식사를 시중들던 이들이 조찬장을 빠져나갔다. 이제 남은 것은 그와 국왕뿐, 망설이던 그는 그제야 입을 열었다.
“솔직하게 말해주십시오. 정말로 괜찮으신 겁니까?”
“내 근래 들어 고단함을 느끼고는 있으나, 그대가 염려할 정도는 아니….”
“만약 폐하께 무슨 일이 생긴다면 왕녀께서 슬퍼하실 겁니다.”
한 나라의 군주가 하는 말을 중간에 툭, 하고 잘라먹었으니 이보다 더 큰 무례는 없었다.
“그러니 솔직하게 말씀해주셔야 합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가.”
딱딱하게 굳은 국왕의 표정이 전에 없이 굳어 있었다. 날이 선 음성이 마치 귀족파의 귀족을 대하듯 첨예하기까지 했다.
“만약 폐하의 몸에 생긴 변화를 늦출 수 있다면 어찌하시겠습니까?”
하지만 김선혁은 국왕의 날카로운 말투에도 굴하지 않고 내내 참아왔던 한마디를 꺼내들었다.
“그대. 말하라. 대체 뭘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건지.”
역시나 예상대로 테오도르 국왕의 반응은 차갑기만 했다.
“폐하의 몸이 정상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군주의 생명이 경각에 달했다는 것은 절대로 가벼운 일이 아니었고, 함부로 입 밖에 꺼낼 이야기도 아니었다. 하물며 그 사실을 군주 스스로가 숨겨왔음에야 두말할 나위도 없이 금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대체 뭘 알고 있는 것이냐.”
국왕은 결코 소리를 치지도 위협을 하지도 않았다. 그저 나직한 목소리로 그에게 물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 조용한 음성에 담긴 추상과도 같은 위엄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그라두스 넘버 4의 강자 레인하르트 후작에게도 느껴본 적 없는 강렬한 기세에 김선혁은 이를 악물었다.
주사위는 던져졌다. 이제 와서 물릴 수는 없었다.
“생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내 그대를 어여삐 여긴다 해도 그 말은 가벼이 넘길 수가….”
“또한 경각에 달한 폐하의 생명을 연장하는 방법을 알고 있습니다.”
당장에라도 왕실의 기사들을 불러들일 기세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테오도르 국왕이 그 말에 그대로 굳어버렸다.
“대체….”
“제가 뭘 어떻게 알았는지는 중요한 게 아닙니다.”
김선혁은 딱딱하게 굳어버린 테오도르 국왕을 똑바로 올려다보았다.
“저와 거래해보시겠습니까?”
조금 과격하기는 했지만, 지금의 대화 역시 평소 국왕과 자신이 나눠왔던 것과 그다지 다르지 않았다.
“물론 제가 드릴 것은 다 타버린 심지를 대신할 수 있는 새로운 심지입니다. 폐하께서는 제게 뭘 주시겠습니까.”
테오도르 국왕은 그의 말이 끝이 났음에도 한참동안이나 말을 하지 않았다.
“놀랍구나.”
한참 만에 한마디를 내뱉은 테오도르 국왕은 털썩 의자에 주저앉았다.
“그대가 이 사실을 어떻게 알았는지, 또한 그 해결책을 갖고 있다는 사실이 너무도 놀랍구나.”
“이제 솔직하게 말해주시는 겁니까?”
“이제 와서 무얼 숨기랴. 그대의 말이 맞다. 나에게는 시간이 많이 남지 않았다.”
솔직하게 자신의 죽음이 멀지 않았음을 말하는 그 순간에도 국왕의 눈빛은 전혀 흔들림이 없었다.
“이건 아데스덴의 핏줄이라면 의당 짊어져야 할 천형(天刑)과도 같은 것이다.”
“아….”
게하임니스에게 많은 이야기를 들었지만, 그게 설마 아데스덴의 혈족이 지닌 유전적인 문제인지까지는 그도 상상하지 못했다.
“이야기가 길어지겠구나.”
테오도르 국왕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에게 따라오라 손짓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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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대로 아데스덴의 혈족들은 단명해왔다. 하지만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내성에서도 가장 깊숙한 곳에 마련된 밀실, 테오도르 국왕은 모든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아데스덴의 혈족이 단명하게 된 것은 지금으로부터 약 200년 전 부터다.”
국왕은 말간 눈으로 그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을 이어갔다.
“200년 전, 그대와 같은 자들이 이 세상에 나타났지.”
국왕이 무엇을 이야기하는지 깨달은 김선혁은 저도 모르게 신음을 내뱉었다.
“설마 대소환?”
그의 억눌린 음성에 국왕이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그러하다. 모든 것의 시작은 200년 전의 대소환이었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