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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2. 가장 찬란하게 빛나는 촛불 (3)
꽃 봉우리가 여물어 꽃이 피듯, 소녀가 자라 여인이 되는 것은 순리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왕녀 오필리아의 변모한 모습은 그 정도 수준이 아니었다.
기품 있었지만 소녀다운 호기심을 미처 숨기지 못했던 동그란 눈매는 더 없이 차분하고 그윽한 여인의 그것이 되었고, 앙증맞던 콧볼과 콧날은 미려한 선을 그리는 성숙한 모습이 되었다. 갸름하게 굽은 턱선 역시 섬세하게 변해 도저히 과거의 젖살 남아 통통하던 왕녀의 모습을 떠올릴 수 없었다.
소녀는 김선혁이 보지 못했던 몇 달 사이에 완연한 여인이 되어 있었다.
“아….”
저도 모르게 내뱉은 탄성에 왕녀가 고개를 돌렸다.
“오랜만이로구나.”
새가 지저귀듯 사랑스럽던 과거의 음색과는 완전히 달랐다. 그래서 더욱 치명적이었다. 과거 그녀의 음성이 흐뭇한 미소를 짓게 만드는 그런 것이었다면, 지금 그녀의 음성은 듣는 것만으로도 사람을 홀릴 것처럼 아찔한 마력을 품고 있었다.
“정말 왕녀십니까?”
너무도 놀라운 변화에 무심코 묻자, 왕녀가 눈을 가늘게 뜨고 물었다.
“나 말고 기다리고 있던 여인이 있었던 것이냐.”
농담인 것을 뻔히 알면서도 어쩐지 가슴이 욱신거리는 것이 큰 죄라도 지은 듯한 기분이었다.
미친 심장 놈아. 적당히 좀 해.
진탕되어 주책없이 뛰어대는 심장을 욕했다. 그렇게 해서라도 왕녀가 흘려대는 마성에 저항해야 했다.
정말이지 왕녀의 미색과 음성은 그가 겪어보지 못한 치명적인 것이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작정하고 마음을 다스리자 마구잡이로 뛰어대는 심장이 조금씩 진정이 되기 시작했다.
“다행이구나. 혹시 나 혼자만의 그리움이었을까 염려했노라.”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을 뿐이다. 왕녀가 건넨 한마디에 간신히 진정되었던 심장이 다시 주체를 못하고 뛰어대기 시작했다.
“많이 보고 싶었노라.”
곱게 접어올린 입매와 반달처럼 변해버린 눈매, 정신이 아득해질 것만 같은 미소에 김선혁은 저도 모르게 심장을 움켜잡아야 했다.
잠깐 보지 못한 사이에 왕녀는 심장건강에 영 좋지 않은 요물이 되어 있었다.
“약혼자만 눈에 보이고, 아비는 이제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 게로구나.”
만약 테오도르 국왕이 중간에 끼어들지 않았다면, 용을 만나기도 전에 심장이 멈춰버렸을 것이다. 그만큼 왕녀의 매력은 치명적이었다.
“그럴 리가 있겠사옵니까. 폐하.”
“쯧. 딱딱하기는.”
아무래도 국왕은 자신의 딸이 약혼자에게 보이는 부드러움의 반만큼이라도 자신에게 보여주기를 바라는 눈치였다.
“드라흔 백작. 그대 역시 할 말이 많겠지만, 지금은 부녀간에 나눌 이야기가 있노라. 잠시 자리를 피해주겠는가.”
“뜻대로 하겠나이다.”
김선혁은 망설이지 않고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대로 더 있다가는 저도 모르게 왕녀에게 홀릴 것만 같았던 탓이다.
숙소로 돌아온 그는 참았던 숨을 길게 내뱉었다.
“후아.”
이미 아데스덴의 혈통이 성인식을 전후로 완벽하게 각성한다는 사실을 들어 알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왕녀의 변화가 놀랍기만 했다.
사람이 단시간 내에 저 정도로 변할 수 있다는 사실이 차라리 경이로울 지경이었다.
김선혁은 알고 있었다.
왕녀의 변화는 축복이 아니었다. 변모한 그녀의 아름다움은 애초에 그녀가 갖고 있던 본질이었으며, 언제고 시간이 흐르면 자연스레 찾아올 그녀의 미래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그 지극히 자연스러운 시간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일국을 이끌어야 하는 왕족에게 미성숙한 육신과 정신은 치명적인 약점이었다. 아데스덴의 선조들은 그러한 약점을 성장의 가속으로 극복해왔다.
각성을 통해 미성숙한 심신을 단번에 전성기로 끌어올려 온 것이다.
[어쩌면 섭리(攝理)를 거스르는 행위로 인해 그들에게 주어진 천형이 더욱 무거워진 것일지도 모른단다.]
게하임니스는 그런 부자연스러운 성장 역시 그들의 명을 짧게 만드는 이유 중 하나일 거라며 그 어리석음을 비웃었다.
하지만 김선혁은 게하임니스의 말과는 다르게 아데스덴의 혈족들이 그런 부작용을 몰랐을 거라 생각되지 않았다.
그가 보기에 아데스덴의 혈족들은 타고난 지배자였으며, 군왕들이었다. 그런 그들이기에 기꺼이 자신의 삶의 일부를 포기하는 것을 선택했을 것이다.
“네가 말했잖아. 때로는 자신의 생명보다 중요한 것이 있다고.”
그의 반박에 게하임니스도 반박하지 않았다.
[네 운명이 참으로 얄궂구나.]
이번에는 김선혁이 입을 다물었다.
아데스덴의 혈족들이 하나같이 생을 연장하는 대신 군왕으로 군림하는 것을 선택했고, 그의 약혼녀에게도 그들과 같은 피가 흐르고 있었다.
그 말은 그녀 역시 자신의 혈족들과 똑같은 선택을 할 가능성이 높다는 말이나 다름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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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녀께서 늘 계시던 곳에서 기다리겠노라 말씀하셨습니다.”
시녀의 전언대로 왕녀는 늘 그와 티타임을 가져왔던 내원의 한 켠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왕녀는 그가 도착했다는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눈을 감고 햇살을 음미하고 있었다.
새하얀 햇살을 받아 반짝거리는 왕녀의 머리는 금빛 실타래를 풀어놓은 듯 신비로웠고, 오랫동안 햇빛을 받지 못한 피부는 핏줄이 보일 것처럼 투명해 보였다. 고운 눈두덩이 끝에 가지런히 놓인 속눈썹은 참으로 곱기만 했다.
햇살 아래 눈을 감은 왕녀의 모습은 마치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다웠다.
“흥흥.”
이따금씩 코를 찡긋거릴 때마다 흘러나오는 아무 것도 아닌 흥얼거림이 마치 세이렌의 노래처럼 묘한 매력이 있었다.
그래서 김선혁은 왕녀에게 인사를 건네는 대신 한참이나 그 노래를 듣고만 있었다.
만약 시녀의 발소리에 왕녀가 눈을 뜨지 않았다면, 그는 언제까지고 하염없이 그대로 있었을 것이다.
“왔구나.”
눈을 뜬 왕녀는 그제야 김선혁을 발견하고 인사를 건네 왔다.
“기분이 너무 좋아 보이셔서 방해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솔직하게 대답을 해주었더니 왕녀가 그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오후의 햇살이 아무리 따스하다 한들, 풀잎의 생생한 향기가 아무리 싱그럽다 한들, 그리운 이와의 재회보다 기분이 좋겠더냐.”
예상치 못한 직설적인 감정 표현에 일순간 말문이 막힌 그가 어버버 거리자 왕녀가 꽃 같은 미소를 베어 물었다.
“그대는 여전히 그대로구나.”
한참이나 그를 바라보던 왕녀가 기꺼운 음성으로 말했다.
“그래서 이리도 내 마음이 기꺼운 것이리라.”
왕녀가 말간 눈으로 잠시 주변을 돌아보았다. 마치 테오도르 국왕의 그것처럼 속을 들여다보듯 투명한 시선이었다.
“다행이로다. 세상 모두가 변했는데, 오직 그대만이 그대로구나.”
왕녀의 음성에 짙게 배인 안도감은 그로서는 도무지 이유를 짐작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물어볼 수도 없었다. 어쩐지 그녀의 목소리에 서글픈 기색이 느껴져 그는 가만히 그녀가 하는 말을 듣고만 있었다.
“많이 궁금했노라. 그대가 과연 왕실과의 약속을 지켰을지. 그대로 인해 또 왕국에는 어떤 변화가 생겼을지. 너무도 궁금했도다.”
하지만 왕녀의 음성에 담긴 쓸쓸함은 금세 사라졌다.
“폐하께 간략하게 사정을 듣기는 했지만, 직접 그대에게 듣고 싶었노라.”
그녀는 금세 싱글싱글 웃는 낯으로 그에게 그간의 사정을 물었다.
“그간 무슨 일이 있었는지 나에게 말해줄 수 있겠느냐.”
성숙하게 변해버린 외모였지만 지금만큼은 과거 무용담을 들려달라며 졸라대던 꼬맹이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왕도를 나선 저는 곧바로….”
김선혁은 기꺼이 왕녀의 부탁을 들어주었고, 그간 있었던 일들을 자세하게 설명해주었다.
“호오. 그런 일이.”
아무래도 듣는 귀가 있는 공간이니만큼 적당히 숨길 것은 숨기고 이야기를 해주어야 했지만, 이미 테오도르 국왕에게 간단한 내막을 들어 알고 있던 왕녀는 알아서 이야기를 끼워 맞추며 그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손뼉을 쳐대며 기뻐하거나 탄성을 내뱉는 왕녀의 호응에 신이 난 김선혁은 순식간에 이야기를 끝마쳤다.
“참으로 장하구나.”
온화하게 웃으며 자신을 바라보는 왕녀의 얼굴을 보고 나니 머쓱해지고 말았다. 스스로가 철없는 자랑을 늘어놓는 아이처럼 느껴지기도 했고, 어쩐지 왕녀가 연상처럼 보이기도 했다.
아무래도 왕녀의 각성은 그저 육신의 성장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왕녀께서는 어찌 지내셨습니까.”
“성인식에 앞서 심신을 정갈히 하기 위해 명상에 몰두했노라.”
왕녀는 웃으며 자신이 보내온 나날들을 설명해주었다. 그다지 특별할 것도 없는 명상뿐인 시간들이었다. 하지만 그는 마치 그게 대단한 이야기라도 되는 것처럼 귀를 기울여 경청했다.
그렇게 김선혁과 왕녀 오필리아는 둘 사이에 놓인 몇 달간의 공백을 서로에게 털어놓으며 다시금 채워갔다.
“그래. 폐하께 모든 이야기를 들었다지.”
그리고 그 모든 것이 다시 메꿔졌을 때, 차마 그가 먼저 꺼내지 못했던 거북스러운 화제를 왕녀가 먼저 꺼내 들었다.
“먼저 그대에게는 미안하다는 말을 하고 싶구나.”
왕녀는 자신에게 허락된 길지 않은 시간이 그에게 지워줄 부담에 대해 진심으로 미안해하고 있었다.
“그것 말고도 그대에게 미안한 것 투성이구나. 나는 그대의 반려이기 이전에 아덴버그의 여왕이 될 자, 어쩌면 그대는 정말로 좋지 못한 반려를 얻은 것일지도 모른다.”
처음부터 각오했던 일이었다. 한 나라의 차기 왕위 계승자와 결혼을 한다는 건 어쨌건 간에 평범한 연인의 결합과는 다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래서 나는 그대에게 약속하겠노라. 나는 그대에게 더 없이 진실될 것이며, 충실할 것이다.”
가만히 왕녀의 말을 듣고 있던 김선혁은 묘한 표정이 되었다. 이러한 레퍼토리가 왠지 모르게 어디선가 들어봤었던 것 같은 기분이 들었던 탓이다.
“이런 나라도 괜찮다면, 받아주겠는가.”
기분 탓이 아니었다. 어디서 들어본 것 같은 게 아니라, 실제로 들어본 이야기였다.
“나와 평생을 함께 해주겠는가.”
왕녀는 그에게 청혼을 하고 있었다.
황당하다고 해야 할지, 그도 아니면 놀랐다고 해야 할지, 뭐라 형용할 수 없는 감정에 김선혁은 할 말을 잊고 말았다.
하지만 왕녀는 그냥 넘어갈 생각이 없었는지 포기하지 않고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이미 저와 왕녀께서는 미래를 약속한 사이가 아닙니까.”
스스로가 생각해도 멋대가리 없는 대답이었지만, 이미 남녀의 역할이 바뀐 시점에서 모양새를 챙기기에는 글러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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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녀 오필리아가 칩거를 깨고 나온 지 한 달이 채 되지 않아 성인식이 시작되었다.
혼란스러운 대륙의 상황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왕국의 특사들이 아덴버그의 차기 지배자의 성인식을 축하하기 위해 왕국을 방문했다.
“나 테오도르 티베리우스 로 아데스덴은 왕실의 적통이자 하나뿐인 나의 장녀, 오필리아 라우렐 로 아데스덴에게 모든 일을 일임하고 그녀가 아덴버그를 이끌 여왕으로 적합한 자질을 갖고 있는지 지켜볼 생각이다. 그녀가 섭정을 하는 동안 중대한 실수를 저지르지 않는 한 아덴버그의 왕좌는 그녀에게 돌아갈 것이다.”
그 자리에서 테오도르 국왕은 왕녀의 자질을 확인하여 양위 여부를 결정할 것이라 발표했다.
어려서부터 테오도르 국왕의 대리인으로 왕국 내의 대소사를 도맡아왔던 왕녀이니만큼 국왕의 말은 사실상 왕위 계승을 공식적으로 선언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다소 급작스럽기는 했지만, 왕녀가 그간 보여주었던 수완과 성인식을 전후하여 나타난 아데스덴 혈통 특유의 금안(金眼)은 왕국의 귀족들로 하여금 국왕의 결정을 반대할 수 없게 만들었다.
게다가 아데스덴 왕실의 양위라는 게 대부분 이른 나이에 이루어져 왔으니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는 반응이 태반이었다.
간혹 가다가 우려를 표하던 이들이 있었으나, 드라흔이라는 걸출한 영웅과 차기 여왕의 결합 소식에 금세 입을 다물고 말았다.
수많은 귀족들과 백성들 앞에 선 김선혁은 왕녀의 새하얀 면사포를 걷어냈다.
대담하게도 먼저 식을 서두르자며 청혼을 해왔던 여장부는 어디 갔는지, 면사포 아래 곱게 성장(盛粧)을 한 왕녀는 눈을 내리깐 채 수줍어하고 있었다.
처음 보았을 때의 어린 모습은 온데간데없는 성숙한 여인의 모습, 감회가 새로웠다.
그때는 정말 이런 꼬맹이와 결혼을 하게 될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나는 준비가 되었으니 망설이지 말지어다.”
그가 잠시 그대로 멈춰 있자 오해라도 한 것인지 왕녀가 그를 독려(?)했다. 정작 본인의 음성이 얼마나 떨리고 있는지는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그는 피식 웃으며 발갛게 상기된 왕녀의 뺨을 잡았다. 그리고 부드럽게 이마에 입을 맞췄다.
“이로서 아데스덴의 장녀 오필리아 라우렐 로 아데스덴과 라인펄의 선혁 라인펄 김 드라흔의 혼인이 원만하고 진실하게 이루어졌음을 선포하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