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드래곤 푸어-80화 (80/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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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1. 전장을 달리는 드레이크 (3)

결국 애초에 김선혁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정해져 있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중대 기상! 전원 전투 준비!”

그 어느 때보다 무거운 중대장의 외침에 간이 막사에 늘어져 있던 기병들이 반사적으로 복창했다.

“전투 준비!”

“전투 준비!”

습관처럼 중대장의 말을 반복한 사내들이 부리나케 무장을 챙기고는 막사 앞으로 모였다.

“클라크 조장. 주둔지의 책임자를 찾아 적이 접근하고 있음을 알려라!”

금세 상황을 알아차린 클라크가 적의 규모를 물었다.

“최소 3개 중대 이상이다.”

기병 3개 중대라면, 이곳에 남은 보병들과 민간인들을 눈 깜짝할 사이에 짓밟고도 남을 정도의 전력이다. 사태의 심각성을 알아차린 클라크가 황급히 연대 지휘관의 막사를 찾아 내달렸다.

“전 중대, 전투 준비! 궁수들은 망루로! 민간인들은 중앙으로 모아라!”

“빨리 움직여! 새끼들아! 빨리!”

소식이 전해진 것인지, 금세 보병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부산하게 움직이는 보병들을 보며 민간인들이 불안한 얼굴을 해 보였다. 하지만 소란을 피우는 일 없이 침착하게 병사들의 지시를 따랐다.

과연 녹테인에게 오랜 세월을 시달려 가면서도 서부를 떠나지 않은 서부의 주민들다운 태도였다.

“한스. 조심해.”

“엄마, 내 걱정 말고 빨리 안쪽으로 들어가라니까.”

“테오, 이 새끼, 맨날 거들먹거리더니 오늘 드디어 실력 발휘하는 거 보겠네.”

“닥치고 빨리 들어가기나 해. 이게 지금 장난인 줄 알아.”

그 대부분이 병사를 가족으로 둔 이들이었던 걸까. 많은 이들이 제 나름대로 병사들을 격려했다.

“음….”

애써 태연을 가장한 채 제 가족들을 주둔지 깊은 곳을 향해 안내하는 병사들의 모습을 보며 김선혁은 한층 더 마음이 무거워졌다.

“대체 어떤 상황입니까.”

허겁지겁 달려온 연대장이 상황을 물었다.

“적 기병대가 접근 중입니다. 규모는 최소 3개 중대이며, 곧장 이곳으로 달려오는 게 아무래도 이곳이 목표인 것 같습니다.”

“일단 목책을 보강하고, 장기전을 대비해야겠군요. 저들도 아군의 영역 안에서 오래 시간을 보낼 수는 없을 테니까요.”

연대장은 3개 중대 규모의 적이라면 자신들이 드레이크 기병대를 지원하여 어떻게든 주둔지를 지켜낼 수 있을 거라 여긴 것인지 크게 당황하는 기색 없이 대답했다. 하지만 상황은 연대장의 생각처럼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적들 중에 심상치 않은 자들이 있습니다. 최소한 선임 기사 급 이상의 강자입니다.”

기운에 민감한 아티야가 이미 확인한 사안이었다.

“녹테인이 미치지 않고서야 선임 기사씩이나 되는 자를 이런 전쟁에 보냈을 리가 없습니다.”

“선임 기사 급이라고 했지, 선임 기사라고는 하지 않았습니다.”

검력의 수발이 완숙한 고참 기사들에 못지않을 정도의 강자이면서, 전면전을 우려하지 않아도 되는 인물들, 김선혁은 그런 자들을 알고 있었다.

“아마도 이방인이겠지요.”

이방인들이 이계에 떨어지고도 벌써 몇 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만약 이방인들이 죽지 않고 단련을 게을리만 하지 않았다면, 어지간한 선임 기사들에 준하는 실력을 갖추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그런 이들이 하나도 아니고 여럿이 적 기병대에 섞여 있다는 것은 절대로 좋은 소식이 아니었다.

“녹테인 놈들이 잔머리를 굴렸군요. 그래도 마침 드라흔 자작과 기병대가 이곳에 머물고 있어서 안심입니다.”

연대장은 상황에 어울리지 않게 웃으며 대답했다. 사령부가 전선의 사기를 고무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부풀려 선전한 전과(戰果), 그리고 그라두스의 기사라는 허울이 연대장을 맹목적으로 만든 것이다.

이래서는 안 된다. 지휘관만큼은 명확하게 상황을 인지하고 있어야 한다.

그 불편스러운 기대감에 막 입을 열려던 그는 문득 주변이 기이할 정도로 조용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

망루 위의 궁병도, 주둔지의 낮은 목책을 보강하고 있던 보병도, 창을 잡고 불안하게 만지작거리고 있던 창병도, 모두가 손을 멈추고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수백 쌍의 시선에 담긴 감정이 연대장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 사실을 인지한 순간 그는 갑작스레 숨이 턱, 하고 막혀왔다.

‘구해줘.’, ‘우릴 지켜줘.’, ‘당신이라면 할 수 있어.’, ‘나를 가족의 품에 돌아갈 수 있게 해줘.’, 마치 환청과도 같은 병사들의 음성에 현기증마저 느껴질 지경이었다.

맹목적인 신뢰와 기대가 딱 병사들의 수만큼 삶의 무게가 되어 그를 숨 막히게 만들었다.

“드라흔 자작?”

“일단 척후를 보내 정확하게 적의 무장과 규모를 파악하겠습니다. 제 능력으로는 대략적인 적의 규모 정도밖에 알 수가 없으니까요.”

억지로 가다듬어 내뱉은 한마디, 다행스럽게도 목소리는 떨리지 않았다.

“일단 병사들을 먼저 다독여주십시오. 작전 회의는 그 뒤에 하도록 하지요.”

그의 말에 연대장이 알았노라 대답을 하고는 제 병사들을 챙기기 위해 사라졌다.

“퇴각을 염두에 두어야 할 정도로 상황이 좋지 않은 겁니까?”

목소리를 잔뜩 낮춘 클라크의 질문, 아무래도 어설픈 연기로는 오랜 동료의 눈까지 속이지는 못한 모양이다.

“철저하게 준비를 하고 오는 적들이다. 아마도 나와 골디에 대한 방비도 충분히 했겠지.”

당장 아티야가 콕 짚어 이야기를 해준 초인의 수만 해도 무려 일곱이었다. 만약 그들이 일시에 달려든다면 그로서도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다.

“그걸 왜 혼자 상대하려고 합니까?”

상황을 전해 들은 클라크가 못마땅한 얼굴을 해 보였다.

“저한테 배운 거 전부 까먹은 겁니까? 혹시 제가 전에 한 말 기억합니까?”

“뭐라고….”

따지듯 묻는 클라크의 기세가 더없이 진지했다.

“속도가 최고조에 오른 중갑 기병대는 상급 기사라고 해도 어지간하면 정면에서 대적하지 않는다고 말입니다.”

그러고 보니 기병 교육을 받던 도중에 그런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우리가 뒤를 받치겠습니다. 대충 상대하다 좀 버겁다 싶으면 후열로 떠넘기십시오. 창으로 아주 벌집을 만들어줄 테니까.”

평소 진중한 클라크답지 않게 허세 가득한 말, 다른 고참병들도 금세 달라붙어 한마디씩 했다.

“안 그래도 요 근래 혼자 다 처리해서, 창에 녹이 슬 지경입니다! 이제는 적당히 양보도 좀 하십쇼!”

“옳소! 악덕 중대장은 혼자만 재미 보지 말고, 부하들도 챙겨라!”

그 말을 듣고서야 김선혁은 스스로가 교만에 빠졌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스스로도 모르는 사이에 강적들은 오직 자신만이 상대할 수 있다고 생각했고, 그렇기에 병사들의 신뢰와 기대감이 부담스럽게 느껴졌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그는 더없이 머리가 개운했다.

“당장 기사단을 상대해도 말 위에서만큼은 안 질 자신이 있습니다! 그러니 맡겨주십쇼!”

“어, 그건 좀 과장이 심한 것 같은데. 아무리 그래도 기사단은 좀….”

“닥쳐! 말 위에서만큼은 우리가 최고야!”

“기사가 별거냐! 대충 창 찔러 넣고 말에서 떨구면, 기사라고 별수 있겠어!”

이제는 중대장을 격려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스스로의 허풍과 허세에 도취되어버린 기병들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뻣뻣하게 굳었던 목이 스르르 풀리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저놈들도 최소한 지 살기 위해서라도 한 사람 몫은 할 겁니다.”

클라크의 손짓에 고개를 돌리니, 결전을 앞두고 목책을 보강하고 제 무기를 점검하는 보병들의 모습이 보였다. 오직 구원을 기다린다고 생각했던 그들의 눈빛에 투지가 가득했다. 저들 역시 저마다 지켜야 할 것을 등 뒤에 두고 필사적인 것은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아….”

병사들은 부담스러운 짐 따위가 아니었다. 스스로 제 삶을 지키기 위해 기꺼이 창과 검을 잡을 용사들이었고, 또한 함께 싸울 전우들이었다.

“그러니, 영웅 놀이도 적당히 하시고 이제 대장 노릇 좀 하시죠.”

“그러게. 그라두스니, 드레이크 나이트니, 너무 떠받들어주니까 내가 잠깐 정신이 나갔던 모양이다.”

“영웅병에는 약도 없답니다!”

기병들이 낄낄대며 웃어댔다.

“조기에 치료돼서 다행입니다! 거 영웅병 말기는 죽어야 고쳐진….”

신나서 떠들어대던 기병 하나가 도로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이미 찬물이 끼얹어진 분위기는 나아지지 않았고, 결국 사내들의 거친 응징이 뒤따랐다.

“주둥이 함부로 놀리는 새끼들이야말로 죽어야 고쳐진다더라. 그러니 너도 죽어, 이 새끼야!”

**

댕댕댕!

망루 높은 곳에 매달려 있던 종이 시끄럽게 울어댔다.

“적이다! 녹테인 놈들이다!”

망을 보고 있던 병사가 고래고래 악을 지르며 적의 접근을 알렸다.

“제길. 3개 중대가 아니고 4개 중대였어.”

중대장이 말해준 것보다 100명은 더 많은 적의 수에 클라크가 인상을 찌푸렸다.

“그래도 어쩔 수 없어. 이미 바지는 내렸고, 노상방뇨라도 하는 수밖에.”

그렇게 말한 클라크가 드레이크 기병대의 대원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딱 우리 네 배다. 쫄리는 놈은 빠져도 좋아.”

하지만 이제 와서 물러설 정도로 겁이 많은 자는 드레이크 기병대에 없었다.

“그래 봐야, 살 무른 경기병들 놈 아니요? 그런 놈들이야 네 배든 다섯 배든 무슨 상관이요.”

“어차피 죽을 때까지 붙들고 늘어질 것도 아니고, 한번 대충 휘저어주고 돌아오면 되는 거, 말 참 많아. 우리 조장.”

고참병들이 이죽거리자 클라크가 피식 웃었다.

“나중에 죽고 나서 원망하지 말아라. 이 정신 나간 새끼들아.”

곁에 서서 대화를 듣고 있던 보병들이 간을 배밖에 둔 듯한 기병들의 대화에 얼이 빠진 얼굴을 해보였다. 기병들은 네 배나 되는 적들을 향해 뛰어드는 위험천만한 작전을 무슨 옆 동네 산책처럼 여기는 기색이었다.

“자네들은 목숨이 한 세 개쯤 되는 모양이군.”

방어전에 앞서 적의 기세를 꺾고 오겠다던 기병대를 독려하기 위해 나와 있던 22연대장도 마찬가지 생각인지 감탄을 토해냈다.

“우리 목숨이 세 개뿐이었으면, 진즉에 죽어 나자빠졌을 겁니다. 근데 안 죽은 걸 보니 그보다 몇 개 더 있는 모양입니다.”

이를 드러내며 웃어 보이며 하는 클라크의 대꾸에 연대장이 다시 한 번 감탄했다.

“정말 제 정신이 아니야. 자네나 자네들의 중대장이나. 전부 보통 정신 나간 게 아니야.”

“만약 정신이 나가야 기병이 될 수 있다면, 단언컨대 여기 있는 이놈들이 왕국 최고의 미치광이들입니다.”

“그중에서도 최고로 미친 건, 아마 자네들의 중대장이겠지.”

그러고 보니 김선혁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뭐, 당장 죽을 생각은 없는 분이니, 아마도 자신이 있어서 일을 벌였겠지요.”

하지만 클라크와 연대장은 그걸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마치 뭔가 꾸미고 있는 것이라도 있는 것처럼 의미심장한 미소를 주고받았을 뿐이었다.

“기병 1개 중대 접근 중!”

“사격 준비!”

망루의 병사가 고래고래 악을 지르는 소리에, 연대장이 궁수들을 준비시켰다. 미리 목책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궁병들이 한껏 허리를 뒤로 제치며 활시위를 끌어당겼다.

“한 발 쏘고, 그 다음부터는 장전된 사수들부터 연이어 사격한다. 사격 지점에 대한 지시는 각 조장들이 맡도록 한다.”

궁병들이 사격준비를 완료하자 연대장이 드레이크 기병대를 보며 가볍게 고개를 숙여보였다.

“부디 살아서 다시 만나기를 바라겠네.”

클라크는 대답대신 마주 고개를 꾸벅 숙여 보이고는 기병들을 도열시켰다. 언제든 목책을 떨치고 나갈 수 있도록 입구에 선 기병대원들이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긴장하지 마. 새끼들아. 땅개들 보기 쪽팔리니까.”

그 순간 조금씩 움직이던 적들이 속도를 올리기 시작했다. 그들은 화살의 사정거리를 재듯 원을 그리며 목책 주변을 돌았는데, 그 원이 조금씩 작아져 가고 있었다.

“쏴!”

거리를 가늠하던 연대장이 버럭 소리를 지르자, 궁병들이 한껏 끌어당겼던 시위를 놓았다.

쐬에에엑!

그렇게 전투의 시작은 궁병대의 사격으로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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