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크 판타지의 마안기사-210화 (211/225)

210화 군령들 (4)

***

일련의 새들이 하늘 위를 빙글빙글 돌았다. 피와 시체 냄새를 맡고 온 청소부들이다.

독수리와 까마귀는 오랜 시간 이어져 온 대립 관계를 잠시 잊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만큼 땅에는 시체들이 넘쳐났다.

그 시체들의 기괴한 용모-여러 짐승들의 머리나 몸통, 사지가 아무렇게나 섞이고 뒤틀린-는 새들에게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사냥이라는 번거로운 일을 하기보단 이미 죽은 사체의 고기를 뜯는 걸 더 선호하는 그들의 습성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시체들의 피에 짙게 스며들어 있는 마력이 짐승들을 꾀여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었다.

까만 부리로 콕콕 찌르며 살점을 찢고 길게 늘어지는 신경다발을 꿀꺽 삼키는 독수리, 새의 눈은 이미 벌겋게 물들어 있었다.

“에이, 또 있네.”

쉬익! 퍽!

누군가 던진 돌에 까마귀의 머리가 박살 나며 뇌수와 피를 흩뿌렸다. 죽어 나자빠진 까마귀에 놀란 다른 까마귀가 홰를 치며 날아올랐다.

날아오른 까마귀는 비스듬하게 무너진 돌벽의 위에 내려앉아 돌을 던진 사람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애미.”

돌을 던진 사람이 다시 바닥에서 돌을 주워들려 하자 까마귀는 다시 날개를 펴고 다른 곳으로 날아 갔다.

높이 날아오른 까마귀의 까만 눈에 둥근 시야가 비쳤다. 곳곳에서 연기가 솔솔 새어 나오며 꺼지지 않은 잔불이 타올랐고 그 주위로는 병사들이 모래를 뿌리며 불을 끄고 있었다.

그 밖에는 기다란 장대에 기름먹인 천을 장작 삼아 타오르는 횃불과 모닥불이 보였다.

오후로 접어 들어가는 시간에 태양은 겨울의 재촉을 받으며 빨리 지평선 너머로 사라지는 중이었고 먹구름 가득한 하늘은 지상의 생명들에게 그 배웅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래서 하늘 아래는 무척 어두웠다.

어쩐지 보다 밝아진 시야와 고기에 대한 강렬한 열망을 가지게 된 까마귀는 곧 다른 사체를 찾아 몸을 돌렸다.

인적이 드문 곳으로 날아가는 까마귀를 보던 실리오는 던질까 말까 가늠하다가 쥐고 있던 돌을 툭 내던졌다. 그리고는 까마귀가 뜯어먹던 시체를 질질 끌었다.

“얼마나 기어 나온 거여? 치워도 치워도 계속 나와 어떻게.”

새가 뜯어먹던 시체는 괴물 시체였다. 살아있을 때 뭐였는지 짐작이 안 갈 정도로 갈린 그 괴물 시체는 혀를 길게 내민 채 축 늘어져 있었다.

칼리아는 그녀와 다른 사람들에게 까마귀나 독수리 같은 날짐승이 괴물의 살이나 피를 먹으려 하면 되도록 저지하라는 말을 했었다.

로셀소는 괴조가 된 새들이 가축이나 어린아이를 잡아 먹을 수 있데 된다는 말에 잔해를 치우는 일과 새를 쫒는 일 두 가지를 나눠서 병사들에게 지시했다. 그리고 실리오와 바이젠에게도 새들이 보이면 죽이는 일을 우선해달라고 밝혔다.

이미 죽은 시체 위에 쌓여 있던 것은 어떤 건물의 벽이었던 돌덩이였다. 장정 서너 명은 모여야 겨우 옮길 수 있을 만한 크기의 돌이었지만 실리오가 힘을 주자 손쉽게 들리면서 옆으로 치워졌다.

뿌옇게 일어난 먼지를 손으로 홰홰 저으며 가라앉힌 실리오가 투덜거렸다.

“에구, 내 팔자야. 왜 하겠다고 해 가지고 이 고생인지.”

“그야 돈 준다고 하니 그런 거 아니겠소? 어이차.”

바로 옆에서 바이젠이 말했다. 큼직한 돌덩이를 잡은 그가 이미 언덕을 이루며 쌓여있는 돌 더미에 그것을 획 집어던졌다.

“이제 새로 백작이 된 로셀소라는 양반 부탁 아니요. 다른 도시에서 살 것도 아니면 치우긴 해야지. 돈도 준다는데 뭐가 문제요?”

“새끼, 언제부터 이렇게 입을 잘 털었지? 한 대 맞고 싶냐?”

“어어, 나 아직 등짝 아프오. 때리지 마쇼.”

바이젠이 너덜너덜해진 옷을 가리키며 손사래를 쳤다. 실리오는 코웃음을 치며 잔해 아래 묻혀 있던 괴물 시체를 들어 한 곳에 놓았다.

그들의 주위로는 병사들이 쭈뼛거리며 같이 잔해를 치우거나 괴물 시체, 사람 시체를 골라 치우고 있었다.

아까까지 전 백작의 명령을 받고 칼을 들이밀다가 지금 와서는 같이 도시를 정리하고 있는 것이 영 적응되지 않는 얼굴들이었다.

“아엘라, 그 애는 괜찮겠지?”

“뭐 용족이랑 칼리아 아가씨랑 다 붙어서 치료하고 있다고 하니까······ 그리고 거 뭐냐, 성녀라는 여자도 오지 않았소.”

“그러고 보니 그 사람들은 어떻게 온 거야? 뭐 들은 거 있어?”

실리오의 물음에 바이젠이 고민하다 답했다.

“나도 교회 사람들이랑은 친하질 않아서. 그 순박하게 생긴 성기사가 뭐 언데드 침공 어쩌고 하던데, 잘은 못 알아들었소.”

“시체들은 여기도 많은데. 세상이 어떻게 되긴 하려나 보다. 아주 미쳐 돌아가.”

그러는 한편, 무너진 건물들을 싹 치워 넓은 광장으로 만든 곳에는 천막이 줄지어 서 있었다. 곳곳에 세워진 횃불 덕에 어두워진 저녁 시간에도 대낮처럼 밝은 이 대피소에는 다친 사람들이 앉아있거나 드러누워 쉬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유독 사람들이 많이 모인 곳이 있었다. 머리나 가슴, 배, 팔다리에 붕대를 감거나 목발 겸 지팡이를 짚은 사람들이 경이에 찬 눈으로 한 곳을 바라보았다.

“이제 괜찮을 겁니다.”

“다음 분!”

“뜨거운 물이랑 깨끗한 천 다시.”

“알겠습니다.”

엘레노아와 성갑을 입은 제스, 그리고 흑요정 렉시가 가장 커다란 천막에서 다친 사람들을 돌보고 있었다. 병사들이 정신없이 뛰어다니며 붕대와 천, 물을 수급했다.

사람들의 시선은 그중에서도 엘레노아에 쏠려 있었다.

신성력을 일으킬 때마다 머리카락에서 빛이 반짝이고 당장 죽을 것만 같았던 사람이 멀쩡해지니 시선이 안 갈 수가 없었다.

당장 그녀가 치료한 사람들은 대개 목숨이 경각에 달한 자들이 대부분이었다.

머리가 깨져 피를 철철 흘리거나, 날아온 돌에 가슴뼈가 부러져 허파가 찔리고 있거나, 사지 중 하나가 잘려나가거 뜯겨져 나간 자들이 부지기수였다.

엘레노아는 그들 모두를 치료해냈다.

피가 멎었고, 부러진 가슴뼈와 그 조각들은 몸속에서 저절로 다시 조립되어 붙었고 잘려 나간 사지는 너무 오래 방치한 것이 아니면 다시 붙기까지 했다.

불구가 될 뻔했던 사람들은 그 믿을 수 없는 기적에 눈물 콧물을 쏟으며 감사 인사를 표했다.

제스 또한 많은 눈길을 받았는데, 갑옷을 입고 무장한 성기사가 직접 상처를 치료하는 모습이 워낙 신기한 터였다.

그는 이제 막 배가 쩍 갈라져 내장이 드러난 어린 아이를 치료하는 중이었다. 부모로 보이는 남녀가 땟국물로 지저분해진 얼굴에 하얗게 그려진 눈물 자국을 그대로 보이며 숨도 쉬지 못하고 그 모습을 내려다 보았다.

제스는 신성력으로 내장이 드러난 환부를 훑은 다음 준비한 실과 바늘로 상처를 꿰맸다. 날카로운 바늘이 여린 아이의 피부를 가를 때마다 신음을 내뱉던 어머니 쪽이 먼저 실신했다. 아이의 아버지는 굳은 얼굴로 아내를 부여잡았다.

실로 살을 완전히 꿰맨 제스가 아이의 이마에 신성력을 쬐자 식은땀을 흘리던 아이의 거친 숨이 조용해졌다. 제스가 아이의 부모에게 말했다.

“다행히 살가죽만 깊게 배여 내장이 드러났을 뿐, 안쪽은 괜찮습니다. 열은 내렸지만 피를 많이 흘렸으니 물을 많이 마시게 하고, 식사는 되도록 묽은 것으로 대채하십시오. 실밥은 알아서 떨어져 나갈 겁니다.”

아이의 부모가 연신 감사하다며 고개를 숙이다가 물러갔다. 세 사람은 빠르게 움직이며 환자들을 치료했다.

유래가 없을 정도로 강력한 신성력을 가진 엘레노아와 외과 수술을 맡은 제스, 그리고 팔팔한 흑요정 렉시가 돕자 그 많던 환자들은 빠르게 줄었다.

한참 후 횃불을 한 차례 갈아끼우고 날 때가 되어셔야 그들은 쉴 수 있었다.

자신의 피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피를 한껏 묻힌 채로 그들은 자리에 앉아 빵과 데운 스튜를 먹었다.

렉시가 제스에게 물었다.

“아까 보니 신기하더라고. 바늘이랑 실로 상처를 꿰맨다니, 신기한 치료 방법이던데. 성기사가 그런 것도 할 줄 알아?”

“모든 성기사가 할 수 있는 건 아닙니다. 렉시 님은 흑요정이시니 자연치유력이 무척 높으시죠. 하지만 인간은 그만큼 자연치유력이 높지 않아서 불가피하게 그런 시술 방법을 배웁니다. 저 같은 경우에는 하일른 경이 많이 알려주셨습니다. 신성력에만 너무 의존하게 되면 나중에 큰일이 났을 때 대처할 수가 없게 된다면서 가르쳐주셨지요······.”

제스가 말을 흐렸다. 엘레노아의 얼굴이 어두워졌기 때문이었다. 렉시가 말했다.

“그 강령술사인지 흑마법사인지가 있는 곳으로 가야 하는 거 아니었어? 여기서 이래도 되는 건가?”

그녀의 물음에 제스가 말했다.

“저희는 러셀 님을 만나러 온 겁니다. 다행히 여기 계셨지만 동료 중 한 분이 크게 다치셨고, 또 이 도시 또한 여러모로 힘든 상황이니 도와야지요. 주께서는 도움이 필요한 자들을 외면하지 말라 하셨습니다.”

“그렇다면야 내가 할 말은 없지. 그 용 꼬마애는 잘 치료된 거야?”

물을 마시던 엘레노아가 물통을 기울여 손을 씻으며 말했다.

“눈에 띄는 외상은 모두 치료했습니다. 주로 좌반신에 상처가 있더군요. 원래라면 용으로 있을 때의 상처가 인간의 모습으로 변신하면서 같이 줄어든 모양입니다. 하지만 인간이 아닌 용이라는 종족이기도 하고, 태어날 때의 경위를 들어보니 러셀 님과 많이 맞닿아 있기 때문에······ 내부의 불길을 잡아내는 데는 러셀 님이 더 도움이 되시겠지요.”

“흠.”

렉시는 고개를 돌렸다. 그 난장판 중에서도 도시가 완전히 박살 난 것은 아니다. 피해가 심한 곳은 주로 영주성과 그 주변이었고, 거인이 날뛰면서 바깥으로 튕겨 나간 돌이 애꿎은 집이나 창고를 박살 난 게 다였다.

물론 거인과 러셀이 싸운 곳은 반경 300미터가 완전히 무너져 있었다.

성한 건물들은 하나도 없었고 지반이 내려앉아 매우려면 꽤 큰 공사가 필요할 것이 분명했다.

러셀과 아엘라시스, 칼리아와 아샤린은 로셀소의 개인 저택에 있었다. 공격을 받은 아엘라시스의 치료를 위해서였다.

“큰 상처가 아니어야 할 텐데.”

***

누운 아엘라시스의 오른편에는 칼리아가, 왼편에는 러셀이 앉아 있었다. 아샤린은 혹시 모른다며 그들 주위에 강력한 결계를 쳐놓고 있었다.

그들이 있는 곳은 로셀소의 저택의 방이었다. 호화로운 가구와 예술품들이 장식되어 있는 커다란 방이었지만 그들 외에는 일체의 사용인도 보이지 않았다.

방의 가운데에는 마법진이 그려져 있었고 아엘라시스는 그 위에 누워 있었다. 희미한 빛을 뿜어내는 마법진 위에서 아엘라시스는 열병에 걸린 환자처럼 뜨거운 숨을 내며 식은땀을 줄줄 흘렸다.

“시작하지.”

러셀은 아엘라시스의 왼손 손목을 왼손으로 쥔 채 오른손으로는 그녀의 이마에 손바닥을 댔다.

눈을 감은 러셀의 시야에 새로운 광경이 펼쳐졌다. 한없이 길고 어두운 통로에 이따금씩 붉은 기운이 스치고, 다시 푸른 섬광이 교차했다.

붉은 기운은 사악한 기운을 여지없이 내뿜으며 사방으로 몰아치고 있었다. 그때마다 아엘라시스의 몸이 움찔거렸고 피부가 거멓게 물들었다.

러셀은 이를 악물었다. 마력이 회복되는 대로 다시 소모시키는 과정이기에 뱃속이 뒤틀리는 고통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하지만 지금이 아니면 아엘라시스는 완전히 흑마력에 잡아먹히거나 이지를 잃은 광룡이 되어버릴 수 있었다. 그녀의 어머니가 그랬던 것처럼.

다만 악마의 마력에 상성을 가진 용이기에 버티고 있었고, 그 시간 동안 러셀은 아엘라시스의 근본이 되었던 자신의 마력을 다시 밀어 넣으며 그녀의 몸속을 파괴하고 있는 기운들을 박살 내는 중이었다.

남들에게는 10여분, 하지만 러셀에게는 하루가 아닌가 싶을 정도로 기나긴 체감 시간 끝에 그는 모든 악마의 마력을 불태울 수 있었다.

러셀은 손을 떼었다. 맞은편에서 아엘라시스의 오른손목을 쥐고 있던 칼리아가 러셀의 표정을 살피며 말했다.

“급한 불은 꺼졌다. 이제 아엘라의 의지력이 관건이구나.”

“악마의 마력이 정말 끈질기더군. 종족 특성인가?”

칼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지도 모르지. 혹독한 환경에서 살아가는 놈들이니. 그들의 입장에서는 이 세상이 더없이 달콤하고 감미로운 낙원이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끝난 거야?”

“대충은.”

러셀의 답에 아샤린이 아엘라시스를 살폈다. 목밑까지 스멀거리며 차올랐던 검은 기운이 거의 사라져 있었다. 군데군데 점처럼 박혀있는 것들이 있었으나 그마저도 희미해지더니 사라졌다.

***

대도시의 영주이자 성주인 제이비르 백이 괴물이 되어 날뛴 지 하루가 겨우 지난 시간. 해가 물러간 밤은 달빛조차도 보이지 않는 어둠으로 가득 차올라 있었다. 먹구름이 걷히지 않은 까닭이다.

정오부터 시작된 잔해 수습과 사상자 처리는 저녁이 되어서야 대강 끝난 참이었다. 로셀소의 저택에 모여든 사람들은 오랜만의 만남에 대한 해후를 드디어 나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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