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크 판타지의 마안기사-211화 (212/225)

211화 군령들 (5)

***

오드팔 성의 성주, 디오칸 탈바스 남작은 해묵은 기억을 떠올렸다.

디오칸은 열여섯 살 때 첫 살인을 저지른 적이 있다. 그가 아직 성주도, 그리고 성주가 될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던 나이의 그는 술집에서 시답잖은 시비에 휘말렸다.

시비를 건 남자가 여급을 희롱했다던가, 그가 이전부터 유명한 건달이었다던가 하는 속사정은 그리 중요치 않았다.

몇 차례의 욕설과 고성이 오간 다음, 누가 먼저일지 모를 주먹을 날린 후부터의 장면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떠오르는 것은 입안에 가득한 단내와 터질듯이 쿵쾅거리는 심장이었다.

귀청이 떠나가라 시끄러웠던 술집이 돌연 잠잠해졌을 때 디오칸은 손에 깨진 술병을 든 채 헐떡거리며 서 있었다. 그의 아래에는 목의 경동맥이 배인 남자가 목을 양손으로 감싼 채 누워 있었다.

술김이었는지 자의였는지 모르지만 디오칸은 발을 올려 남자의 가슴팍을 밟았고 힘을 주었다. 자연히 드러누운 남자의 목에서 핏줄기가 압력 때문에 울컥울컥 쏟아져나왔다.

힘없는 발버둥을 치려던 남자는 곧 눈에서 생기를 잃었다. 그게 디오칸의 첫 살인이었다. 그때 그는 기쁨이 아니라 공포를 느꼈다.

하지만 느끼는 감정과는 별개로 디오칸은 두려움을 내비치지 않으며 손을 번쩍 들었다. 술집 사람들은 환호를 보냈다.

디오칸은 그때의 일을 후회하지 않는다. 그때의 여급은 같은 날 그의 첫경험 상대가 되었고 다음 날에는 그를 눈여겨보았던 기사의 몸종이 되어 살인 기술을 배울 수 있었다.

그날을 후회한 적은 없지만 디오칸은 그때 느꼈던 것과 거의 동일한 느낌의 공포를 다시금 느낄 수 있었다.

성벽 아래에는 시체들이 오와 열을 맞춘 채 서 있었다. 꿈에서라도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음을, 혹은 볼 수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한 광경이었다.

뼈만 남아 있는 게 그나마 가장 온건했다. 대부분은 썩어가는 내장을 골반뼈 위나 갈비뼈 안에 담고 있었고 몇몇은 흘러내리는 가죽을 뒤집어쓰고 있기도 했다.

부하가 이빨을 딱딱 부딪치며 말했다.

“서, 성주님······ 언데드들입니다······. 어, 어찌 할까요?”

디오칸은 부하 병사의 울음 섞인 말을 듣자마자 내려야 할 명령들을 골랐다. 하지만 곧바로 말하지는 않고 시체들을 찬찬히 살피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리고는 병사를 차분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그러자 놀랍게도 병사의 떨림이 차츰 가라앉았다. 딸꾹질이라도 할 것처럼 힉힉거리긴 했지만, 디오칸은 명령을 내렸다.

“전투를 준비해라.”

병사는 경례를 붙이고는 후닥닥 뛰어 내려갔다. 곧 고함소리가 울려 퍼지며 성안쪽이 소란스러워졌다.

각자 맡은 임무와 배정된 자리로 향하기 위해 병사들이 갑옷을 입으며 뛰었다. 횃불들이 확확 타올랐다.

하지만 성루와 벽에 가득 늘어선 횃불의 밝기는 성벽 아래 열을 맞추고 서 있는 언데드 무리의 맨 앞까지 밖에 비추지 못했다.

광원의 바깥쪽에서 안광도 내보이지 않은 채 서 있는 해골들은 어찌 보면 한없이 비슷하게 조각된 석상처럼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전날만 해도 분명 없었던 살아있는 시체들의 무리가 성벽 앞에 진군해왔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디오칸은 도대체 저들이 어떻게 여기까지 소리없이 다가올 수 있었던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어둠 속에 잠겨 제대로 보이지는 않지만, 드러난 것만 하더라도 발자국 소리를 숨길 수는 없는 규모였다.

인간 해골만 있는 것이 아니라 트롤이나 만티코어처럼 커다란 뼈를 지닌 언데드 또한 있기에 더욱 이해가 가지 않는 현상이었다.

디오칸은 떨리는 손으로 허리춤을 더듬었다. 언제나 그의 마음을 편하게 만들어주던 충직한 칼자루가 그곳에 있었다. 그럼에도 디오칸은 안도감을 느끼지 못했다.

부하의 다급한 외침에 올라왔기에 디오칸은 제대로 된 무장도 갖추지 못하고 칼만 들고 나왔다. 그러나 갑옷으로 완전 무장을 하고 나왔더라도 떨리는 다리를 감출 수는 없었을 것이다.

병사 하나가 그의 전용 갑옷을 들고 올라와 빠르게 입혀주었다. 끈이 조이고 묶여지는 느낌이 생경했다.

-문을 열어라.

디오칸이 갑옷을 차려입고 한밤중에 깬 병사들이 벌겋게 충혈된 눈으로 성벽 위에 도열했을 때, 커다랗고 낮은 목소리가 허공에 울려 퍼졌다.

성벽에 가득 선 병사들이 화들짝 놀랐다. 몇몇 기사들은 거의 칼을 뽑을 뻔했다. 칼집에서 빠져나오다 만 칼들이 서늘한 소리를 말하다 잠잠해졌다.

그들이 들고 있는 횃불 또한 목소리에 놀란 것처럼 세차게 흔들리며 사방으로 그림자를 뿌렸다. 날뛰는 그림자들은 그 주인보다 더 다급한 몸놀림으로 이리저리 움직였다.

디오칸이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며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짐작하려 했다. 쉽지 않았기에 결국 포기한 그가 입을 열었다.

“당신은 누구요!”

-문을 열어라. 그렇게 한다면 큰 보상을 내려주겠다.

목소리는 낮았고 음산했으며 냉기를 담고 있었다. 웅웅 거리며 바람이 불고 귀신들의 비명과 웃음 소리가 어두운 밤의 저편에서 속삭거렸다.

이히히히, 끅끅끅끅, 같은 귀곡성에 병사들은 벌써부터 도망치고 싶다는 표정들이었다.

몸이 흔들릴 정도의 공포 속에서도 디오칸은 질문했다. 성주이니까.

“무슨, 무슨 보상 말이오?”

=죽음의 공포로부터의 자유.

디오칸과 병사들의 얼굴이 해쓱해졌다. 죽음을 거부하고 되살아난 망자들의 군대 앞에서 죽음의 공포를 벗겨주겠다고 말하는 자의 의도를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디오칸은 거절했다. 성주였으니까.

“성문은 열 수 없다, 이 마물아! 물러가라!”

“꺼져라, 삿된 것들!”

디오칸은 자신과 겹치게 말한 목소리의 주인을 찾았다. 독실한 루테온의 신자이기에 디오칸은 그 목소리의 주인이 성당 사제인 체프를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체프는 정수리가 훤히 드러난 머리를 시뻘겋게 물들이며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고 있었다.

“위대한 순환을 어그러뜨리고 더러운 발로 대지를 밟는 놈들!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오는 것이냐! 네놈들에게 열어줄 성문 따위는 없다! 썩 꺼져라!”

낮은 목소리가 다시 울렸다.

-열어줄 수 없다는 말이지?

“태양빛의 은혜도 받아들일 수 없는 삿된 것들이 감히-”

-되었다.

훅-

체프 사제의 말을 끊은 직후 강한 바람이 불었다. 그 바람에 횃불이 당장이라도 꺼질 것처럼 위태로워졌고 병사들은 불을 꺼뜨리지 않기 위해 몸을 수그렸다.

-직접 문을 열지 않게 된 것을 후회하게 될 것이다.

목소리가 떠났다. 어떤 징조도 없었지만 사람들은 어떤 징조를 느꼈다. 그들은 아래를 바라보았다.

하나둘씩, 죽은 듯이 서 있던 언데드들의 눈구멍에 빛이 깃들기 시작했다. 연녹색의 빛이었다.

텅 빈 눈구멍에서 피워올린 연녹색의 불꽃을 마치 동공처럼 획획 움직이던 망자들은, 곧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하늘에 대고 고함을 질러댔다.

카아아아아-

끼아아아아-

통일되지 않는 괴성들이 겨울바람을 타고 오드팔 성에 날아들었다. 심력이 약한 자들은 갑자기 턱 멈추는 심장에 가슴을 부여잡고 쓰러졌고, 그보다 강한 자들도 온몸이 덜덜 떨려오는 것을 막지는 못했다.

그리고 공세가 시작되었다.

디오칸 남작은 사력을 다해 저항했다. 열일곱 살 때부터 뼈가 부러지고 살이 터져가며 익힌 검술과 축적한 마력을 사정없이 난사하며 싸웠다.

성의 병사들 또한 갖추고 있던 물자를 아낌없이 쏟아부으며 저항했다. 그러나 그 저항은 저항 상대가 최소한 생명체이기는 한다는 전제가 성립될 때에나 효과적인 것이 대부분이었다.

오드팔 성은 이천의 병력이 주둔과 병영 관리가 될 정도로 커다란 성이었고, 그렇기에 성을 공략하려는 잠재적인 적군에 대한 대비가 뛰어난 편이었다.

성이 자리한 위치 또한 산이 아닌가 의심스러울 정도로 커다란 언덕 위에 자리하고 있었기에 지대가 무척 높았다. 완만한 경사로에는 자갈과 흙모래, 그리고 쪼개지고 부서진 날카로운 돌조각이 많아 단순히 걷는 행위조차도 까다롭게 만들었다.

비축된 화살과 기름, 투석구와 투석구에 쓰일 돌까지 충분히 마련되어 있으니 대대로 오드팔 성을 역임해온 성주들은 난공불락의 요새를 지녔다고 자부하기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오늘날에 이르러 디오칸은 그 기록을 자신의 대에서 깨야 할지도 모른다는 깊은 예감을 느꼈다.

날카로운 화살은 썩은 살점이나 다 드러난 뼈에 아무런 타격을 주지 못했다. 끓는 기름과 뜨거운 물 또한 마찬가지였다. 언데드에게는 통각이 없으니까.

그나마 투석구에서 쏘아지는 투석들이 달리는 시체들을 갈아버리거나 부쉈지만, 그마저도 연녹색의 빛이 어른거리면 다시 재조립되어 일어나버렸다.

끈질기게 기어오른 시체들이 기어코 흉벽의 튀어나온 요철이나 돌을 잡고 성벽에 올랐다.

성벽에 오른 좀비와 뼈만 남은 스켈레톤, 살점이 덕지덕지 붙은 플래시 좀비, 그리고 길쭉한 팔다리와 덩치를 가진 구울이 흰 눈알을 데굴데굴 굴리며 기어올랐다.

디오칸과 기사들이 성루와 성루 사이를 건너다니며 병사들을 독려했지만 중과부적이었다. 성벽의 아래에는 수천은 가볍게 넘길 듯한 시체들이 물결을 이루며 다가오고 있었다.

“아아악!”

“이, 이거 놔! 놔, 웁, 우우웁!”

병사들은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최선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것도 분명 있었다.

살아있는 시체들이 성벽을 타 넘어와 난전을 벌였다. 굼뜬 동작은 문제 되지 않았다. 언데드의 숫자는 그 자체만으로 병사들을 압도했다.

아래에서 올라왔음에도 시체의 물결이 병사들에게 몰아닥쳤다. 회색과 검은 물결 사이에서 이따금씩 파란 섬광과 함께 기사들이 분전했지만 그마저 얼마 가지 못했다.

병사들과 함께 서서 검을 휘두르거나 철퇴를 휘두르던 사제들이 하나둘씩 시체들의 손길에 찢겨나가며 죽었다.

이히히히힝!

별안간 커다란 말의 울음이 들렸다.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든 병사와 기사들이 허공을 올려다보았다.

새카만 갑옷을 입은 기사가 해골마를 탄 채 허공에 떠 있었다. 수십의 시체들을 한 번에 박살 낸 기사 한 명이 그 검은 갑옷 기사를 보고 경악의 신음을 흘렸다.

“데, 데스 나이트······!”

죽음의 기사가 말에서 내린 다음 성벽에 떨어져 내렸다. 주변의 시체와 병사들이 그 충격파에 나동그라졌다.

천천히 몸을 일으킨 데스나이트가 갑옷만큼이나 새카만 칼날을 들어 올렸다. 학살이 시작되었다.

비명과 비명이 메아리를 치고 유혈과 내장이 난자하게 쏟아져 바닥을 검게 칠했다. 유려하게 날아든 칼날은 단단한 돌바닥과 성루도 단번에 갈라내며 시체를 양산했다.

쓰러진 시체들은 미간과 목, 심장, 배에 수십 개의 구멍이 뚫린 채였다. 철저하게 상대방을 확실하게 사살하는데 맞춰진 살인 기술의 정점이었다.

“이, 빌어먹을 마물!”

동료 사제들과 병사들이 우수수 죽어 나자빠지는 것을 발견한 체프가 고함을 내질렀다. 그의 눈과 코, 귀와 입에서 밝은 빛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마치 빛의 화신이라도 된 것처럼 신성력을 몸 안에서 불태운 성당 사제 체프가 흉벽 위에 올라섰다. 그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성력으로 인해 그의 몸이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이 한 몸 바침에 있어 티끌만큼의 미련도 없나니, 빛이여 내 육신을 삼켜주오-”

기도문을 외운 사제가 데스나이트를 향해 돌진했다. 데스나이트와 함께 동귀어진하겠다는 기세가 가득 실린 돌진이었다.

데스나이트는 그 돌진에 정면으로 대응하지 않았다. 칼에서 길쭉하게 솟아난 사기가 뭉쳐진 마력이 채찍처럼 휘어지며 자폭하려는 사제를 붙잡았다.

“으아아악!”

비명을 지르며 사제의 몸이 허공을 날아 성벽 바깥, 비탈길에 떨어졌다. 밀려오는 망자의 군대 속에 하얗게 불타오르는 체프가 닿자 그 주위의 시체들이 한순간에 녹아내렸다.

그리고 그의 몸이 섬광과 함께 폭발했다.

콰앙-!

잠시지만 주위를 환히 밝힐 정도의 광량이 밤하늘과 성을 비췄다. 그 폭발에 횝쓸린 망자들은 적게 잡아도 수백은 되었다.

뼈와 썩은 살더미들이 신성력에 닿으며 타오르다가 재가 되어 흩날렸다. 그러나 병사들은 사제의 분투에 기쁨이나 감동을 느끼지 못했다.

일순 주위가 환해지면서 뒤쪽을 밝혔다. 그곳에는 이제까지 밀려든 시체의 배가 넘는 망자들이 넘실거리고 있었다. 그 짙은 밤바다 같은 풍경 속에서 아귀의 초롱불 같은 녹색 반점들이 우수수 떠올랐다.

생자들은 희망을 잃었다. 디오칸은 결단을 내렸다.

“후퇴, 후퇴해라! 여기 있는 건 개죽음이다! 후퇴해라-!”

성주로서 성을 버리는 건 크나큰 치욕이자 귀족의 정통성을 잃을지도 모를 짓이었으나 디오칸은 망설이지 않았다.

그의 명령을 받은 병사들이 땀에 푹 젖은 얼굴들로 뛰어 내려가며 사람들을 깨우고 대피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명령이 전달되는 속도보다 망자들이 성벽을 넘는 속도가 더 빨랐다.

해일 같은 기세의 죽음이 오드팔 성을 집어삼켰다. 성에서 도망쳐 살아남은 자들은 천을 넘지 못했다. 단 두 시간 만의 일이었다.

밤과 어둠 자락을 틈타 이뤄진 시체 군단의 진격은 닷새 간 세 개의 성과 여섯 개의 마을, 하나의 도시를 박살 냈다.

간신히 도망친 사람들은 서부나 중부, 동부로 뿔뿔이 흩어졌다. 그리고 저주받은 망자의 군대가 북서부에서 내려오고 있다고 말했다. 그 선봉장에는 죽음의 기사가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소문은 날개 달린 말처럼 제국 전역을 달렸다. 망자들은 점령한 도시나 마을, 성에 어떤 병력도 남기지 않았다. 남은 건 오직 죽음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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