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9화 군령들 (3)
***
두 마리의 말이 거친 숨을 내쉬었다. 갑옷을 입은 남자와 사제복을 입은 여자가 지친 말의 등에서 내렸다.
“언덕이 바로 앞이니 내리는 게 좋겠습니다.”
“동감이예요.”
하얀 갑옷을 입은 남자는 갈색 머리카락과 눈을 가진 젊은 청년이었다. 흉갑과 견갑에 새겨진 태양을 형상화한 문양을 보면 청년이 태양신 루테온의 성기사임을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마찬가지의 문양이 작게 그려진 사제복을 입은 여자 또한 그랬다. 하지만 더러워진 갑옷과 피에 물들었다가 물에 흐려진 자국이 가득한 옷을 보면 그 둘이 만만찮은 여정을 지나왔음 또한 알 수 있을 것이었다.
두 사람은 지친 말을 배려하며 숲을 왼쪽에 낀 언덕을 올랐다. 도시가 근처에 있는 것인지 관리가 잘 된 넒은 도로가 깔려 있었다.
지도를 보던 청년, 제스가 언덕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 언덕만 넘으면 브라실트가 보일 겁니다.”
“예상한 것보다 하루 빨리 도착했군요. 다행이에요.”
“그야 성녀님이 하루도 쉬지 않고 걸으셨으니까······.”
“지쳤나요?”
“아뇨, 아닙니다. 저보다는 성녀님이 좀 쉬셔야 할 것 같은데요.”
금발과 맑고 푸른 눈을 가진 여자, 엘레노아가 고개를 젓고는 발걸음을 옮겼다.
“괜찮으니 계속 걷죠.”
제스는 고개를 내저었다.
두 사람은 수림을 빠져나오자마자 가까운 마을에서 말을 구입한 다음 달리게 했다.
그렇게 달려 다음 마을에 도착하면 지친 말을 판 다음 새 말을 구입해서 다시 달리게 했다.
그런 식으로 서너 번을 반복하자 보름은 넘게 걸렸을 거리를 닷새로 압축할 수 있었다. 물론 성력을 쓸 수 있는 성기사인 제스와 엘레노아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기절하거나 골병이 들었을 강행군이었다.
승마는 체력을 많이 빼앗는다. 그냥 말을 걷게 하고 그 위에 타고 다닌다면 상관없지만 질주는 다르다.
말의 흔들림에 맞춰 하체를 안정시키고 상체를 자연스럽게 반동에 맞추는 것은 많은 체력을 요구한다. 거기에 떨어지는 기온과 매섭게 부는 바람은 체온을 순식간에 앗아간다.
다행히 기도문과 신성 마법을 통해 몸 주위의 온도를 올릴 수는 있지만 성력의 발현 또한 체력을 잡아먹는 만큼 상시 유지는 힘든 일이었다.
그럼에도 엘레노아는 성녀라는 이름에 걸맞게 평범한 사제나 신도들은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방대한 신성력을 가진 사람이었고, 덕분에 제스와 엘레노아는 긴 거리를 단축 시킬 수 있었다.
“제스?”
“예, 말씀하십시오.”
“저를 성녀라고 부르지 않아도 돼요. 대교회에서도 더 이상 성녀라고 여기지는 않을 테니.”
아마 척살령이 떨어졌을 것이다. 성기사를 위시한 추적대를 모두 죽였으니 달리 생각할 도리가 없다. 엘레노아의 말에 제스가 고개를 갸웃했다.
“설마 정말 죽이려고까지 하겠습니까? 명색이 성녀님이시고, 제국민들한테도 인기가 많으신데.”
“죽는 게 더 나은 몸으로 만들 수는 있을 테죠.”
“예?”
제스의 의문성에 엘레노아가 잠시 걸음을 멈췄다. 그녀는 어두운 하늘을 보다가 말했다.
“제스. 난 그냥 교회에 잡혀 있기만 한 게 아니예요. 저와 같은, 최소한 지금의 교회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는 사제들도 분명 있었어요. 그들에게 도움을 받았기에 나올 수 있기도 했고요. 그 과정에서 난 심기를 거슬린 사람들이 어떻게 되었는지도 알게 되었어요.”
“그게 무슨······.”
“아주 오래전에는 자신이 믿는 신에게 제물을 바치는 의식이 있었죠. 잡기 어려운 동물이나 괴물일수록 그 가치가 커요. 하지만 그 중에서도 제일의 가치를 지닌 건 사람이었죠.”
제스가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
“설마, 인신공양이라도 했다는 겁니까?”
“제대로 본 건 아니지만, 그들이 돌아오지 못했다는 건 확실해요. 그리고 교회 전체에 사악한 기운이 한층 더 증가하는 것도 느꼈어요. 인간의 목숨을 바치는 금술에 의해서만 나는 고약한 냄새도 같이.”
“아니, 어떻게 신을 모신다는 자들이 그런 짓을? 사람을 창조한 것은 주 루테온 님과 다른 만신들의 도움으로 이뤄졌다는 게 성서에도 적혀 있지 않습니까?”
엘레노아가 말했다.
“루테온에게 바친 게 아니예요. 악마에게 바친 겁니다. 계약이거나 힘을 빌리는 종류의 의식일 확률이 높아요.”
제스가 탄식했다.
“하······. 정말 그렇게 짧은 사이에 개판이 났군요.”
“교활한 거죠. 그렇게 짧은 시간 만에 개판을 만들 수 있을 정도로 뿌리부터 차근차근 중독시켰다는 뜻이니까.”
언덕을 오르며 그들은 자연스럽게 하늘을 보게 되었다. 하늘은 회색빛이었다. 먹구름이 가득 낀 것이다. 하지만 비가 내릴 것 같지는 않았다. 제스가 농담을 했다.
“이거 횃불을 켜야 할지도 모르겠는데요.”
제스의 농담이 더 이상 농담이 아니라고 여겨지게 될 때쯤 그들은 언덕 정상에 올라 아래를 내려다볼 수 있었다. 듬성듬성 이어진 숲과 삐죽삐죽 튀어나온 암반들, 작은 협곡과 개울이 번갈아 가며 펼쳐진 대지가 보였다.
하지만 하늘이 회색빛의 먹구름에 점령당한 탓에 그 모든 것들은 그림자에 덮인 것처럼 보였다. 겨울이 다가옴에 따라 생기를 잃은 풀들 또한 누렇게 말라 있었고 개울은 갈라진 바닥을 내보인 지 오래였다.
그리고 저 아래에 브라실트가 보였다. 그리고 도시의 모습은 기묘했다.
멍하니 도시를 바라보며 눈살을 크게 찌푸리고 있던 제스가 입을 열었다.
“지금 제가 보고 있는 게 거인이 아니라고 해주시겠습니까?”
엘레노아가 가볍게 부정했다.
“거인이네요. 예전에 모두 죽은 줄로 알았는데, 어떻게······.”
그때 거인을 조금 더 자세히 보려던 엘레노아의 얼굴 앞에 황금빛 불꽃이 튀었고 엘레노아는 비틀거렸다. 제스가 놀라 다가와 그녀를 부축했다.
“이런! 괜찮으십니까?”
고개를 끄덕인 엘레노아가 미간을 좁혔다.
“거인의 눈들을 마주 보려 하지 마요. 강력한 저주와 외계의 기운이 스며들어 있어요. 평범한 자라면 미치거나 스스로 목숨을 끊을 정도로 지독하군요. 거인의 형상을 한 악마라고 불러도 될 정도입니다.”
그때 한편에서 작은 섬광이 번뜩였다. 두 사람은 동시에 움찔 떨었다. 섬광과 함께 퍼져 나온 마력의 파동이 심상치 않았던 탓이다.
“어, 이거 어디서 겪어봤던 건데?”
커다란 것이 빛무리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그 정체를 알아본 제스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어, 아엘라시스?”
“예?”
제스와 마찬가지로 성력을 눈에 집중시켜 안력을 키우고 있던 엘레노아가 시선을 돌렸다. 사실 돌릴 필요는 없었다. 갑작스레 나타난 용은 날개를 퍼덕이며 거인에게 날아가고 있었으니까.
“세상에······.”
“제스, 아는 용인가요?”
제스가 감격과 경탄이 어린 얼굴로 설명했다.
“러셀 님이 가지고 있던 알에서 부화한 용입니다! 아엘라시스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지요. 하일른 경과 같이 니펠하임에서 올라온 빙계의 악마들을 무찌르는데 도움을 줬고, 몇 달 전에는 라함 영지에서 겔리오투스와 같이 싸웠습니다.”
엘레노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소문만 무성하던 그 용이었군요. 대교회도 저 용을 찾기 위해 혈안이었던 걸로 아는데······.”
“대교회도 말입니까?”
“어쨌든 전설이 다시 현세에 나타난 것이니까요. 정체를 확인하고, 진실이라면 붙잡을 계획이었죠. 아니라면 용의 모습을 빌린 악마를 퇴치했다고 선전했을 테고.”
그녀의 눈에 날개를 펼친 채 도시 위를 날아가는 용이 보였다. 언덕에서 도시까지 짧은 거리가 아니었음에도 용과 거인의 모습은 뚜렷했다.
그건 단순히 크기 때문이 아니라 존재감, 그리고 거대한 마력 파동 탓이었다. 신으로부터 신성력을 받아 기도를 통해 구사할 수 있는 엘레노아는 보다 그런 파동의 감각을 크게 느꼈다.
“아엘라시스가 브라실트에 있다면 러셀 님이 저기 계시는 것도 확실할 겁니다. 거참, 러셀 님이 있으면 당연히 아엘라시스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야 했는데. 제가 이렇게 멍청하게 느껴진 적이 없군요.”
유독 어두워진 하늘이 무겁게 내려앉은 탓에 언덕에서는 도시가 먹구름에 금방이라도 잠길 것만 같은 모습으로 보였다.
그때 구름이 광분을 시작했다. 내부에서부터 붉은색으로 빛나던 먹구름은 잠시 후 파란색으로 빛나기 시작했다.
그 파란색에서는 생명의 의지와 감정이 느껴졌다. 구름에서 느껴지리라 상상도 할 수 없던 그 커다란 자연물에서 지상을 향해 쏘아내는 것은 격노였다.
거대한 뱀이 하늘에서 뒤트는 것처럼 요동치던 구름들은 곧 브라실트 위에서 격돌하며 괴성을 내질렀다.
“윽!”
“꺄악!”
제스와 엘레노아가 귀를 막았다. 천둥이 천둥을 잡아먹고 벼락이 벼락을 이었다. 그 끝은 하얀 비늘의 용이 거인을 향해 내뿜는 눈부신 광선이었다.
그 섬광이 지나가고 난 후 제스와 엘레노아가 눈을 떴을 때는 거인과 용 모두 사라진 후였다.
“내려가죠. 최대한 빨리.”
말을 마친 직후 엘레노아는 언덕 정상에서 다시 말에 올랐다. 지친 말이 투레질을 했으나 그녀가 손에서 금빛을 내뿜으며 말의 머리를 쓰다듬자 곧 진정했다.
“이랴!”
“가, 같이 가요!”
먼저 출발한 엘레노아를 따라 제스 또한 말에 오른 다음 고삐를 잡았다.
***
도시를 불태우던 불길은 이미 모두 꺼졌다. 남은 것은 잿더미에서 피어오르는 하얀 연기와 무너진 잔해뿐이었다.
브라실트의 영주성과 1킬로미터 이내의 시가지, 지구들이 파괴되었지만 인명 피해는 많지 않았다.
물론 육백 명 가까이가 죽은 것이 적은 숫자는 아니지만, 그 피해의 범위나 나타난 괴물들의 양을 보면 없다고 해도 좋을 정도였다. 자칫하면 도시 전체가 소멸했을 수도 있는 것이다.
잿빛의 거인이 일어나면서 폐허가 된 영주성에 시체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오래된 고성에는 주인들을 위한 비밀 통로가 있고, 그 통로의 존재와 위치, 여는 방법을 아는 자들은 많지 않다.
로셀소는 그 많지 않은 인물 중 하나였다. 로셀소는 비밀 통로를 통해 무너진 영주성의 정문 앞에서 발을 동동거리고 있던 사용인들을 대피시켰고 그 또한 빠져나왔다.
하얀 먼지와 거미줄을 머리에 뒤집어 쓴 그들이 성 바깥으로 빠져나왔을 때는 커다란 울림과 함께 모든 것이 고요해진 직후였다.
지쳐서 헐떡이는 사용인들을 지나친 로셀소는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사십 몇 년에 이르는 자신의 생에서 변함없이 서 있을 거라고 굳게 믿었던 상식이 통째로 박살 나는 것을 느꼈다.
완전히 무너진 성과 키가 낮아진 언덕, 초토화된 시가지와 무너진 건물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사방에는 불온한 공기가 웅웅거렸고 하늘은 먹구름으로 무척 어두웠다. 그렇기에 횃불이나 촛불이라도 필요할 지경이었지만, 로셀소는 무너진 도시의 풍경을 헤아릴 수 있었다.
“아버지······.”
성의 잔해에서 로셀소는 아버지가 죽었음을 깨달았다. 아니, 마지막에 보았던 그 날뛰는 모습만 보아도 제이비르는 정상이 아니었다.
리벤부스의 꼬임이 그렇게 유혹적이었을까? 젊은 나날과 전성기의 무력을 되찾고, 죽음을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게 되는 것이 그렇게 탐이 났던 것일까?
평생을 아버지의 그늘 아래서 살아왔던 로셀소로서는 쉽게 납득되지도, 공감이 가지도 않는 주제였다. 다만 그의 눈에 보이는 것은 수많은 시체들이었다.
거리에 가득한 시민들의 시체. 아이를 안고 죽은 젊은 부부나 젊은이들, 노인들이 도처에 널려 있었다. 사지를 아무렇게나 놔둔 채.
“백작님.”
그때 그의 호위기사 중 한 명이 다가와 말했다. 멍하니 서 있던 로셀소가 퍼뜩 시선을 돌렸다.
“나한테 한 말인가?”
“예. 아버님께서 돌아가셨으니 이제 로셀소님이 백작의 위를 계승하십니다. 명령을 내려주십시오.”
로셀소는 호위기사와 뒤편의 사용인들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말했다.
“······성과 도시를 수습하도록 하지. 도망친 병사들에게 집결 명령을 내리고, 잔해를 치우도록 하게. 죽은 시민들의 유해는 따로 모아 장례 준비를 할 수 있게 하고. 다친 사람들은 따로 모아 의사와 사제들에게 치료받도록 하지. 그리고······.”
그때 로셀소의 눈에 거리 저편에서 걸어오는 남자가 보였다. 남들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키와 덩치에 단단한 군화와 코트를 입은 남자였다.
호위기사가 경계하며 칼을 잡았지만 로셀소는 그를 말린 다음 러셀에게 다가갔다.
“살아 있었군. 다행이야. 죽었으면 어쩌나 했네.”
“보시다시피. 당신 아버지는 죽었소. 유감이오.”
“어차피 그게 목적 아니었나?”
“그렇다고 그 아들한테 잘 죽었다고 말하는 건 도리가 아니지.”
로셀소는 고개를 저었다.
“괜찮네. 나 또한 아버지의 모습은 충격적이었으니까. 무엇이든 말하게. 내가 도울 수 있는 건 뭐든지 돕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