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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크 판타지의 마안기사-193화 (194/225)

193화 교차로 (15)

***

돌격 나팔이 불었다. 웅장한 소리다. 밤하늘 아래의 이름 모를 잡초들이 부르르 몸을 떨었다.

가장 앞에 자리한 기수가 짧게 말했다.

“돌격!”

기다란 창을 한 손으로 쥔 기수가 말을 출발시켰다. 그 뒤로 육백 기의 기수가 따라갔다.

대열을 맞춰 걷는 것으로 시작된 출발은 곧 속도를 높였다. 다가닥, 다가닥 하면서 일정한 박자를 가지던 소리는 곧 드다다다 하는 빠른 연속적인 굉음으로 바뀌었다.

맨 처음 앞으로 뛰쳐나갔던 기수를 꼭짓점으로 쇄기꼴의 형태가 만들어졌다. 똑바로 세웠던 창들이 하나둘 앞을 가리켰다. 날카롭게 갈린 창끝은 어두웠다. 숯을 발라 반사광을 줄인 것이다.

밤하늘에 가득한 구름 덕분에 달빛은 그리 밝지 않았지만 반드시 해야 하는 조치였다. 기수들이 입고 있는 갑옷과 말의 갑옷 또한 검게 칠했다.

황자의 군대는 밤중에 울려 퍼진 돌격 나팔 소리와 대지를 전율시키는 말발굽 소리에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성문이 열릴 때부터 혼란이 번진 군영은 기병대가 뛰쳐나왔다는 것을 깨닫자 시끄럽게 고함을 지르고 갑옷을 입느라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투구를 썼다기보다는 걸친 것에 가깝게 쓴 장교가 목책 뒤에 세운 감시탑으로 뛰어올랐다. 그는 어둠 속에 잠겨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평원을 향해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숯칠과 마법의 도움으로 어둠에 동화된 기병대는 소리만 내고 모습은 보이지 않는 유령 기사단 같았다. 분명 다가오고 있는 것은 확실한데 보이지 않으니 두려움은 배가 되었다. 장교가 지시를 내렸다.

“궁병!”

막사에서 뛰쳐나온 궁병들이 3열로 섰다. 한 열 당 쉰 명이 서야 했으나 나온 숫자는 그 절반밖에 미치지 못했다. 하지만 장교는 지체하지 않았다.

“직사!”

어둠을 뚫고 화살들이 날아올랐다. 곡사가 아닌 전방을 향해 올곧게 쏘아진 화살들이다. 그리고 아주 가까운 곳에서 팅, 티팅 하고 화살이 튕겨나는 소리가 울렸다. 장교의 안색이 창백해지는 것과 군영이 세운 횃불 아래 기병대들의 모습이 비친 것은 동시였다.

“때려 부숴!”

누군가가 외쳤고, 그리 되었다.

망치가 호두를 쪼개는 듯한 기세로 황녀의 기병대는 어설프게 전열을 갖춘 황자의 군대를 파괴해 들어갔다. 겁에 질려있던 병사들은 칼 한 번 휘두르지 못하고 말발굽에 짓밟혔다.

전쟁의 화려함을 맡고 있는 기병대답게 그들이 지나간 자리에 혈화가 피었다.

“맞서 싸워라! 맞서 싸워! 멍청한 놈들아, 칼을 들고 싸워라! 도망치는 놈은 용서하지 않겠다!”

얼굴과 목이 벌게진 채로 고함을 지르며 한 기사가 말을 타고 달려왔다. 그 기사가 검을 휘두르자 곁을 스쳐 지나가던 자신의 병사들이 피를 뿌리며 쓰러졌다. 군인 정신은 뛰어나지만 과했다.

파죽지세로 군영을 짓밟던 기병대 중 가장 앞에 서 있던 기수와 그 기사가 시선을 마주했다. 서로 투구를 쓰고 있었지만 둘은 상대방과 눈이 마주쳤다는 것을 알았다.

기사는 고함을 내지르며, 기수는 묵묵하게 말을 돌진시켰다. 창과 검이라는 전쟁사 가장 많이 부딪치고 깨져나갔던, 어떤 것이 더 우위에 있는지 숱한 호사가들과 전문가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던 두 무장이 맞부딪쳤다.

기사는 자신의 검에 마력을 담았다. 푸른 불길이 일렁거렸다. 제대로 정제되지 못한 검기다. 초마다 막대한 마력을 허공에 내다 버리는 짓이었다.

검이 허공을 날았다. 기사는 천천히 돌아가는 자신의 팔과 손, 검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멀어지는 자신의 등과 말의 꼬리털도.

데구르 바닥에 떨어진 기사의 머리는 두 번 더 눈을 깜박이다가 완전히 감겼다.

기사 하나를 침묵시킨 기수는 투구 속의 황금빛 눈을 돌렸다.

“돌파한다!”

주인의 명에 이곳저곳 날뛰며 병사를 죽이던 기병대가 한곳으로 모였다. 유리아 황녀는 다 모이는 것을 기다리지 않고 말을 출발시켰다. 알아서 모여들 것이기 때문이었다.

와아아아아-

군영의 뒤편에서 성문을 나온 병사들의 목소리가 밤중의 평원을 뒤흔들었다. 일주일이 넘는 공방 속에서 초췌해진 그들은 처음의 숫자보다 절반이 줄어있었다.

하지만 눈빛은 누구보다 형형했다. 그들은 이제 누구와 함께 싸우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 그들의 앞에서, 그들의 곁에서 싸우고 있는 것은 그들의 군주였다. 그녀는 그들과 함께 있었다. 그건 어떤 군주도 감히 하기 어려운 일이다.

줄고 줄어들어 이제 1만 가량 밖에 남지 않은 병사들이 평원 위를 달렸다. 공기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사위가 환했다. 기름통이 쏟아지고 그 위로 횃대가 넘어졌다.

기습의 묘미는 예상치 못한 공격에 있다. 클레이도스 백작이 총지휘관으로 있는 황자의 군대는 때 아닌 밤중에 성문을 박차고 뛰쳐나온 황녀의 기습을 고스란히 받아내야 했다.

그렇게 넓게 깔린 군영의 한가운데 이르렀을 때였다.

우우우우웅······!

문득 주변에서 울리는 기이한 소리에 유리아 황녀가 번쩍 고개를 들었다. 전신을 훑고 지나가는 이 불길하고도 꺼림칙한 느낌.

다급히 그 소리가 나던 곳을 찾아 주위를 두리번 거리던 그녀는 곧 발견할 수 있었다. 바닥에 한쪽 무릎을 세우고 앉아 땅에 두 손바닥을 대고 있는 여자를.

짙은 검은색 머리카락을 치렁치렁 늘어뜨리고 있는 여자가 바닥을 보던 시선을 들어 유리아 황녀를 바라보았다. 생긋하는 미소가 지어졌다.

“이겼다고 생각하고 있었겠지. 유감이지만 아니야.”

“너······!”

꺄아아아아아악-!

노호성을 지르려던 유리아 황녀의 외침은 갑작스러운 괴성에 묻혔다.

“윽!”

“끄아악!”

머릿속을 통째로 뒤흔드는 짙은 사기(邪氣)에 자리한 모든 병사가 귀를 막고 몸을 움츠렸다. 다음 순간 마녀 지젤의 의념에 이끌린 짙은 사기와 혼백이 회색 기운을 흘리며 현실에 구현되었다.

하아아아악!

히이이이이!

죽은 인간의 영혼은 그들 곁에 가득했다. 그리고 시체 또한 많았다.

유리아 황녀는 즉시 말을 박차고 뛰어올랐다. 두 손으로 쥔 창대 전체에서 하얀 마력의 기운이 솟구쳐오르며 단단한 형상을 이뤘다.

원래 크기보다 세 배는 커진 기둥 같은 창대와 단두대처럼 거대해진 창날을 휘둘렀다. 하지만 순식간에 모여든 회색의 기운이 방패가 되어 그녀의 일격을 막아냈고 도리어 유리아 황녀를 후려쳐 멀리 날려 보냈다.

“컥!”

“전하!”

“전하를 지켜라!”

신음과 함께 유리아 황녀가 나가떨어지자 기사들이 비명을 지르며 달려갔다. 무너진 천막 위를 데굴데굴 구른 유리아 황녀는 곧장 일어나려다가 입에서 피를 뿜었다.

“쿨럭! 아니야! 내가 아니라, 저 마녀를······!”

지젤을 저지하라는 명령이었지만 그때도 사위는 귀곡성이 울려퍼지고 있었고 기사들은 듣지 못했다.

그 사이 시체들이 저절로 땅에서 일어났다.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 생기있는 피를 가진 시체들이 일제히 몸을 돌려서 한 방향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일말의 지성을 보이지 않는 꼭두각시 인형처럼 모여든 시체들은 맹목적으로 자신의 육신을 상대방의 육신에 들이밀었다. 살이 짓눌리고 뼈가 부러지며 커다란 살덩이가 엉기기 시작했다.

겨우 유리아 황녀의 명령을 알아들은 전투 마법사 몇이 화염과 바람을 일으키며 살덩이를 향해 날렸지만 겉의 시체 몇 구만 불태웠을 뿐이었다. 사악한 마력이 땅바닥을 의지를 가진 것처럼 거슬러 올라가며 살덩이를 향해 모여들었다.

인간의 형체는 온데간데없이 붉고 푸른 반점 같은 것이 섞여있는 살구색의 덩어리. 하지만 군데군데 삐져나와 있는 검은 머리카락과 털은 그것이 몇 초 전까지만 해도 죽은 인간의 시체였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푸쉬이이이이-!

그때 그 살덩이의 표면에서 구멍이 뚫리더니 그 사이로 검은 연기를 뱉어냈다. 순식간에 살덩이의 겉표면이 녹아내리면서 끔찍한 악취를 흩뿌렸다.

정신을 아득하게 하고 속을 뒤집는 악취에 수십 명의 병사들이 구역질을 하며 쓰러졌다. 아예 정신을 잃은 자들도 있었다.

“물러나! 물러나라!”

녹아내린 살덩이 속에서 나타난 것은 인간과 닮은 것이었다. 하지만 인간은 아니었다. 시체처럼 창백한 피부와 허연 머리카락이 바람도 불지 않는데 위로 나풀거렸고 입은 죽 찢어져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고 있었다. 새카만 각질로 뒤덮여 곤충의 외피처럼 번들거리는 피부를 드러내고 붉은 빛을 흘리는 눈을 뜬 그것이 입을 열었다.

“급했나 보구나 지젤. 이렇게 많은 영혼을 내게 바쳐도 되는 거냐?”

“이곳에 썩어 넘치는 것이 시체다. 시간을 벌어라. 살육해.”

“바라마지 않던 명령이군.”

씩 웃은 데이론이라는 이름의 괴물이 몸을 웅크렸다가 폈다. 그러자 등에 감춰져 있던 커다란 피막 날개가 옆으로 펼쳐쳤고, 날개의 부속지에 달린 날카로운 발톱이 병사 둘을 꿰뚫었다.

비명과 신음이 채 땅에 떨어지기도 전에 이족보행하는 괴물은 자리에서 벗어나 있었다.

데이론의 오른손에 커다란 칼날이 들렸다. 널찍한 도신에 붉은 핏줄이 솟아올라 있다. 자신의 오른팔을 외날의 칼로 변형시킨 것을 본 유리아 황녀가 자신을 붙잡고 있는 팔들을 뿌리친 채 바닥을 박찼다.

“그만둬!”

거대한 칼날이 한 기사의 가슴과 말의 목을 단숨에 절단했다. 아래에서 위로 비스듬하게 베어진 탓에 말의 목과 기사의 잘려나간 상반신이 하늘로 날아올랐다. 양팔을 휘적이며 튕겨 올랐던 시체는 곧 땅에 떨어지며 대량의 핏물을 병사들에게 뒤집어씌웠다.

“약해.”

그리 내뱉은 괴물은 길게 찢어진 입가를 더 늘리며 몸을 움직였다. 소름끼치도록 파괴적인 검격이 이어서 작렬했다. 두 번을 감당할 수 있는 병사는 아무도 없었다. 두 번을 견뎌낸 기사 또한 세 번째에 반으로 잘려나갔다.

그때 강력한 마력이 담긴 일격이 하늘에서 쏘아졌다. 막 오른팔을 휘둘러 앞쪽의 병사 셋을 박살 낸 돔은 무시할 수 없는 감각에 갑피를 쫙 세웠다.

섬광에 횝싸인 유리아 황녀와 돔이 맞부딪치며 장대한 충돌이 일어났다. 흙과 풀이 사방으로 흩날렸다.

“뭐야?”

땅에 드러누운 데이론이 어리둥절한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다가 앞을 향했다. 그곳에는 더럽혀진 전신 갑옷을 입은 유리아 황녀가 자세를 갖추고 서 있었다.

“아, 꽤 강한 인간이군. 내 시간이 많이 줄어들겠어.”

“입 닥쳐라, 괴물아.”

그리 말한 유리아가 재빨리 지젤이 있던 자리를 훑었다. 어느새 도망친 것인지 보이지 않았다. 거기에 시야의 가장자리에서 말발굽이 일으키는 흙먼지가 보였다. 필시 귀족과 영주들이 몸을 내빼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어딜 보나?”

지척에서 들린 목소리에 유리아가 재빠르게 마력을 끌어올렸다.

우우우우웅!

체내의 마력이 맹렬하게 회전하면서 마력 회로를 통해 전신으로 퍼져나갔다. 그녀가 가진 근력의 한계가 순식간에 넓어지며 마치 거인과도 같은 힘을 부여했다.

왼발로 지면을 비틀어 밟자 땅이 움푹 패이면서 늘어난 유리아의 체중을 버텨냈다. 그리고 왼쪽에서 휘둘러지는 반월형의 칼날에 간신히 자신의 검을 갖다 댈 수 있었다.

백색의 파도가 몰아치며 반구형의 구체가 그려졌다.

***

화아아아악!

사방에서 불길이 쏟아졌다. 하늘이 아니라 천장에서 내리는 불의 비에 사방은 불바다가 되었다. 기온이 견디기 어려울 정도로 상승하고 공기에는 유황 가스가 퍼지며 숨도 쉴 수 없는 환경이 되었다.

아무런 전조도 없이 러셀이 있던 자리에 폭포수 같은 화염이 떨어졌다. 마지막 서리를 휘둘러 그 궤적에 얼음의 방패를 세워 화염을 막아낸 러셀은 곧장 자리를 벗어났다. 몇 초도 버티지 못한 얼음 방패가 자욱한 수증기를 남기고 무너졌다.

파지지직!

순백색의 섬광을 머금은 벼락이 러셀의 오른손에 어렸다. 빙뢰였다. 손가락 사이를 노니며 꿈틀거리던 전격이 손바작 중앙에 모여들었다가 눈부신 한 자루의 창이 되었다.

눈부신 백색의 창을 움켜쥔 러셀이 그것을 그대로 쏘아냈다.

꽈릉-!

압도적인 열기에 한순간 공기가 팽창하고 천둥을 만들어냈다. 소리가 들렸을 때는 이미 늦었다.

아샤린의 몸이 기역자로 굽혀졌다. 원형의 충격파가 터져 나오며 육중한 갑옷을 입은 아샤린의 몸이 장난감처럼 수십 미터를 날아갔다. 스치는 바닥과 벽이 박살 나며 잔해를 뿌리는 그때 오른손에 쥐고 있던 톱날 대검을 땅에 꽂으며 그녀가 속도를 줄였다.

머리를 절절 흔들며 충격과 먼지를 털어낸 아샤린이 고개를 들더니 보이지 않는 미소를 씩 지었다.

“화끈한데······.”

퍼엉!

무게와 힘을 견디지 못한 지표가 폭발하며 아샤린의 신형이 흐릿해졌다. 무시무시한 속도로 돌진해 온 그녀가 톱날 대검을 내려쳤다. 그 톱날 대검에 맞서며 러셀 또한 도끼를 들어올렸다.

콰아아아앙!

단 한 번의 충돌에 수십 미터가 휩쓸리면서 무너진 건물의 잔해가 일제히 허공으로 솟아올랐다. 그 잔해를 통째로 불사르며 화염의 그물이 러셀을 덮었다.

그 화염 그물에 맞서며 러셀 또한 빙뢰를 일으키며 사방으로 난사했다. 전격의 속도에 닿는 모든 것을 얼리는 냉기가 더해지자 불꽃의 형태 그대로 마력이 얼어붙으며 바닥에 떨어졌다. 산산이 부서지는 마력 결정이 눈부시게 반짝였다.

“아하하하!”

기합인지 웃음인지 알 수 없는 소리를 내뱉으며 아샤린이 톱날 대검을 휘둘렀다. 단순히 날붙이를 휘두르는 동작. 하지만 그 안에 실린 마력은 톱날 대검의 바깥쪽 공기를 음속의 속도로 밀어내고 대기 중에 균일하게 분포하는 마나 입자마저 흐트렸다.

러셀조차 그대로 받아낼 경우 사지 하나가 잘려 나가도 이상하지 않을 검격. 검 같지도 않은 생김새지만 그 칼날은 순식간에 러셀의 몸을 반으로 절단해버릴 수 있었다.

그러나 러셀은 지면을 미끄러지듯이 움직이며 그 검격을 종이 한 장 차이로 피하며 궤적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미리 발아래에 깔아두었던 빙판이 그런 러셀의 움직임을 보조하고 있었던 것이다.

톱날 대검과 하얀 도끼가 공중에서 춤을 추었다. 톱날 대검과 손잡이 사이의 가드가 파공음을 내며 러셀의 머리를 쪼개려 들었다.

러셀의 오른손이 자루를 대신 받아낸 다음 왼손이 움직였다. 아샤린과 그의 거리는 지극히 좁았고 도끼날을 상대방의 몸통에 댈 수는 없었다. 그래서 러셀은 자루를 쥔 왼손을 그대로 아샤린의 몸통에 때려 박았다.

둘은 서로가 가한 충격으로 인해 뒤로 비틀거리며 물러났다. 아샤린은 갑옷을 뚫고 들어온 충격에 신음하며 목구멍으로 올라오는 핏물을 삼켰고 러셀은 부러진 오른 손가락뼈를 힘겹게 맞췄다.

오가는 대화는 없다. 서로의 실력을 재는 것도 없다. 솔직히 그런 시시콜콜한 것들을 따지기에 아샤린과 러셀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은 그런 것들이 아니었다.

‘재밌다.’

단 한순간의 실수가 죽음으로 직결되는 줄타기 위에서만 느낄 수 있는 삶의 체감. 150년 넘게 살아온 장수종인 용족과 100년도 살지 못하는 인간이 찰나지만 같은 감정을 공유했다.

쿠우웅!

아샤린이 오른팔을 치켜올렸다. 내부를 훑고 지나간 러셀의 마력이 아직 요동치고 있었지만 멈출 수 없었다. 그녀의 오른팔을 중심으로 묵직한 마력이 소용돌이 치며 격렬하게 회전했다.

물리적인 실체가 없는 마력이 형태를 띄면서 구현되기 시작한다. 나타난 것은 타오르는 화염의 나선이었다. 강한 회전력을 더해 맨땅마저 종잇장처럼 갈아버리는 위력의 화염의 원뿔이 톱날 대검을 타고 형상을 구현했다.

“쿨럭. 버텨낼 수 있을까?”

남은 핏물을 기침 한번으로 뱉어낸 아샤린이 씩 웃으며 말했다.

“······.”

러셀은 대꾸하지 않고 자세를 잡았다.

가볍게 무릎을 튕긴 아샤린의 몸이 그 자리에서 사라지고, 뒤늦게 터져나간 바닥의 잔해가 그 속도를 간접적으로 증명했다. 화살보다 빠른 속도로 튀어나간 아샤린이 냉기와 전격을 두른 러셀과 격돌했다.

콰과과과과과과!

두 사람이 전력으로 손을 내젓는 것과 동시에 몰아치는 화염을 두른 톱날 대검과 푸른 전격을 감은 도끼가 맞부딪친 해일처럼 튀어오르며 사방으로 충격파를 토해냈다.

진작 건물을 무너뜨리고 박살내도 모자란 충격파와 폭염이 지면을 타고 퍼져 나가며 사방을 환하게 밝혔다.

눈 한 번 깜박일 때마다 상대방의 움직임이 다르게 보인다. 연속되는 사진 속에서 무작위로 사진을 빼는 것처럼 동작과 동작의 연결이 간략화되고 축소되며 때로는 아예 사라진다.

하지만 러셀은 그 모든 장면을 밝게 빛나는 자안으로 담으며 모든 공격에 대응했다. 톱날 대검의 날카로운 이빨이 러셀의 급소를 물어뜯기 위해 다채로운 각도로 파고들어온다.

“몰아쳐라!”

그 와중에 주문을 외운 아샤린이 전신에서 마력을 뿜어냈다. 그 기세를 따라 아지랑이처럼 일어난 마력이 곳곳에 응집체를 만들어내더니 러셀을 향해 날카로운 끝을 그리며 쏘아졌다.

1초에 수십 번의 공방을 이어나가면서 동시에 마력을 투사해 응용 공격을 펼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아샤린의 높은 마력 운용과 체술을 뒷받침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러셀은 그 모든 맹공을 모조리 받아낸다. 받아내는 것을 넘어서 더 빨라지고 있었다.

“끝내지.”

“누구 맘대로······!”

시종일관 담담한 러셀의 목소리에 흥에 겨운 아샤린이 답한다. 무시무시한 속도로 움직이고 있기에 둘의 목소리는 길게 늘여져서 중간중간이 끊겨서 들리고 그 소리마저 변조된 것처럼 기괴하게 들렸지만 둘 모두 알아듣고 있었다.

짜자자자작!

허공을 찢는 소리와 함께 다듬어진 벼락의 줄기가 러셀의 오른손을 타고 회전했다.

직후 아샤린의 코앞에서 터진 전격의 소용돌이가 그녀의 육체를 침범하며 근육과 신경계를 오그라들게 만들었다.

“끄으으윽!”

눈앞을 새햐앟게 물들이는 섬광과 꽝꽝 울리는 머릿속의 충격을 애써 무시한 아샤린이 마력과 톱날 대검을 거두며 뒤로 물러난 그때.

러셀의 왼손에 들린 마지막 서리가 대지에 꽂히며 주변 일백 미터 반경을 새하얗게 물들었다. 그러자 주위에 넘실대던 폭염이 일시에 사그라들며 결정화된 마력이 우박처럼 툭툭 떨어졌다.

동시에 러셀의 오른손이 코트 속에 들어갔다가 빠져나왔다. 그 손에는 격렬한 공방 속에서 차마 꺼낼 수 없었던 묵색의 대검 나힐니르였다. 그 대검을 본 아샤린의 눈이 놀람으로 인해 떠진 순간.

쐐애애애액!

나힐니르의 검극이 날카롭게 휘어지며 아샤린의 왼쪽 어깨를 꿰뚫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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