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크 판타지의 마안기사-194화 (195/225)

194화 교차로 (16)

***

눈부신 섬광과 칠흑의 마력이 격돌했다. 굉음과 충격파가 퍼지고 땅이 파헤쳐지며 풀잎과 돌멩이가 휘날렸다. 사람도 예외는 없었다.

격렬한 충돌 속에서 눈에 들어오는 것은 많지 않았다. 병사들은 그저 소수의 기사와 멀찍이 떨어진 마법사들이 주문을 날리는 것만을 보았다.

그것은 얼핏 전설상의 반인반수와 비슷한 외견을 가지고 있었다. 인간의 상체에 허리 아래로는 전갈과 비슷한 몸통과 여덟 개의 다리, 커다란 가시가 여기저기 솟아있는 길쭉한 꼬리를 가진 반인반수.

처음에는 그럭저럭 인간과 비슷한 이족보행의 신체를 가지고 있던 괴물은 갈수록 몸을 변이시키더니 지금은 저런 모습이 되어 날뛰었다.

여덟 개의 다리 중 몸통을 지탱하는 여섯 개의 다리를 뺀 두 집게다리는 괴물의 허리 부근에서 돋아나 있었고 그 집게는 무지막지하게 컸다. 거기다 단단하기까지 했다.

가공할 속도로 휘둘러지는 집게다리를 미처 피하지 못한 기사가 그대로 피떡이 되어 허공에서 산산이 부서졌다. 생물이 한 번에 무생물이 되는 과정은 너무 빨리 일어났고 그렇기에 현실감이 없었다.

“캬하하하하! 싸워라! 죽어라! 싸워라! 죽어라!”

전갈의 머리가 있어야 할 부분에서 길쭉한 허리와 근육질의 상체가 돋아난 괴물이 입가가 찢어져라 웃으면서 외쳤다. 그 음성에 달린 저주와 사악한 마력 탓에 평범한 병사들은 감히 접근하지도 못하고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닥쳐-!”

그때 맑고 청명한 소리가 그 사악한 마력과 음성을 내리누르고 산산이 부수며 등장했다. 유리아 황녀였다. 그녀는 모든 마력을 폭발시키며 달려들어 검을 내던졌다. 빛살과도 같은 속도였다.

데이론이라는 이름을 가진 그 괴물은 가슴팍에 날아오는 검을 미처 막지 못했다. 칼자루만 남을 정도로 깊숙이 들어간 칼날에 괴물이 입에서 피를 토했다. 피를 토하면서도 데이론은 입가의 미소를 지우지 않았다.

“크흐흐흐······ 조금만 더 시간이 있었으면, 좋았을 것을.”

그때 남은 기사들이 돌진했다. 몸이 성한 자는 없었다. 한쪽 팔이 없는 자도 있었고 옆구리가 뜯겨 내장이 그대로 드러난 자도 있었다. 다리가 잘려 나간 기사는 남은 발로 뛰면서 덤벼들었다.

전투 마법사들이 남은 마력을 쥐어짜네 불꽃의 채찍과 바람의 사슬, 냉기로 만든 밧줄을 만들어 데이론의 사지를 구속했다.

마지막으로 유리아 황녀가 달려 나갔다. 바닥에서 나뒹굴고 있는 강철 검을 주워든 그녀가 높이 뛰어올랐다가 허공을 박차고 아래로 쏘아졌다.

전갈 꼬리가 뱀이 머리를 쳐드는 것처럼 끝에 달린 날카로운 독침을 떨어지는 유리아에게 날렸다. 공중에서 독침을 쳐내는 데 성공한 그녀가 온몸에 마력을 두른 채 전갈의 등허리에 떨어졌다. 굉음과 충격파가 일어났다.

콰아아아앙!

다시 한번 풀과 흙먼지가 휘날리고 사람들이 날아갔다. 빠르게 땅에 검을 꽂아 넣거나 두 손을 박아 넣어 몸을 지탱한 기사나 흙벽을 세워 충격파를 막아낸 마법사들이 예외였을 뿐이다.

곧 충격파가 잦아들고 다시 주위는 캄캄해졌다. 여기저기서 불타고 있는 천막이나 쓰러진 공성 탑의 자재들에서 나는 탁탁거리는 소음을 제외하면 조용했다.

눈과 코, 귀와 입에서 피를 흘리며 병사들은 비척거리며 일어섰다. 격돌의 중심지에서 멀었음에도 평범한 인간들은 충격을 이겨내기 쉽지 않았다.

쿵 하고 거구의 육체가 땅에 쓰러지며 소리를 냈다.

그 위에는 전갈의 등 부분에 칼을 꽂아 넣고 숨을 헐떡이는 전사가 있었다. 깨져 나간 투구와 절반만 남은 안면 가리개가 전투의 치열함을 보여줬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투구를 건들자 투둑, 하는 소리를 내며 부서졌다. 드워프들이 제국의 황녀를 위해 만들어준 방어구가 힘이 다한 것이었다.

깨진 투구 말고도 전사의 모습은 처참했다. 왼팔은 기이한 방향으로 꺾여있고 이마가 찢어진 것인지 왼쪽 눈가와 볼은 피에 젖어 있었다.

유리아 황녀는 성한 오른손으로 피와 땀에 젖어 엉키고 덩어리 진 은발을 뒤로 쓸어넘겼다. 그러다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았다.

반인반수 괴물의 시체 위에 주저앉은 그녀가 위를 바라보았다. 하늘은 새카맣고 별자리는 그 위치가 조금 바뀌었다.

예전에 사람들은 하늘이 반구형의 모습을 띤 천장이라고 생각했다. 땅은 평평하며 쭉 걸어가면 낭떠러지가 나온다고 여겼다.

마법사들이 그 생각을 부정했다. 그들은 달과 태양의 움직임, 별자리의 운행을 보며 그들이 선 땅은 사실 둥근 구라는 것을 증명했다. 하늘이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땅이 회전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는 유리아는 영락없이 하늘이 움직이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완전히 소모된 마력과 체력 탓에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멍한 기분 속에서 유리아는 차츰 사라져가는 별들과 아주 희미하게 푸른 물이 배는 동쪽 어딘가를 짚었다.

아드리칸 황자는 남부 지방 영주들로 규합한 군대 태반을 잃어버렸다. 최소한 절반 이상은 잃었으며 소속된 영주들 또한 목숨을 잃었다. 제국 암부의 주인이 황녀에게 붙었다는 소문은 빠르게 번져나갈 것이다.

서와 동으로 양분된 제국의 넓은 영토에서 이제 남부까지 손에 들어왔다. 하지만 아직 변경과 국경에 있는 도시 중 한 곳은 공공연히 황자의 편을 들고 있다.

물러난 황자는 이제 건곤일척의 싸움을 준비하려 할 것이다. 무슨 수가 있을까? 황성으로의 돌진?

하지만 황성은 황제의 금군과 호위 기사단이 철통같이 지키고 있으며 황자와 황녀 중 하나가 남지 않는 한 황도의 문은 열리지 않을 것이다.

황제라는 자리를 위해 형제자매가 피와 살이 터지도록 싸워야 하는 이 후계 전쟁은 제국의 달갑잖은 전통이다. 이제까지 이런 후계 전쟁이 벌어졌던 적은 몇 없었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앞으로 남은 거점은 펜드린, 지콜마이트, 올렌타. 헤로플······.

그런 생각과 상념은 유리아가 0.3초간 이뤄진 것이었다. 어느 순간 유리아는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무참하게 죽어간 시체들 사이에서 숨을 고르던 기사와 마법사, 참모와 귀족들이 비명과 신음, 고함과 숨 참는 소리를 내며 달려갔다.

***

경매장 건물 안은 어둠으로 가득했다. 인위적인 어둠이었다. 그 어둠이 자리하고 있는 곳은 광활한 복도다. 돌아다니는 사람은 한 명도 보이지 않는 조용한 복도.

그 복도의 벽에는 유서 깊은 그림들이 걸려 있다. 그때 발걸음 소리가 중첩되는 소리가 들렸다. 뚜벅뚜벅, 타박타박, 또각또각, 사박사박.

곧 어둠이 빛에 의해 물러나며 잠겨 있던 장식물들이 드러났다. 선반에 올려진 도자기, 화려한 액자 속의 그림, 전신 갑옷을 입은 인형들. 하지만 발걸음 소리의 주인공들은 경매장에 장식된 그런 예술품보다 다른 것에 조금 더 주의를 기울였다.

의지를 가진 것처럼 물러나는 어둠을 보며 칼리아가 말했다.

“배려가 깊은 마법이구나.”

“뭐요? 말도 안 되는 소리 다 들어보겠군. 이게 무슨 배려가 깊은 마법이란 말이요? 장님 된 기분이구만.”

바이젠이 투덜거렸다. 아엘라시스가 마법으로 띄워 올린 빛의 구슬이 있음에도 가시거리는 10미터를 벗어나지 못했다. 10미터는 마력을 사용하는 기사나 용병, 마법사들 같은 초인에게는 없는 거리나 마찬가지다. 급박한 상황에서 1초가 생사를 가르듯 1미터, 아니 10센티의 차이 또한 생사를 가르는 지표가 된다.

당장 30분 전 잠깐이라도 방심하면 목이 달아나거나 심장이 박살 날 수도 있는 전투를 치르고 온 바이젠에게는 영 미덥지 못한 거리였다.

안에서 어떤 게 튀어나올지 모르는 상황에서 좁은 가시거리는 끊임없는 긴장을 강요하는 요소다. 아직 붕대 괴인과 싸웠을 때 입은 상처가 다 나은 것도 아니라 더욱 그랬다.

칼리아는 설명했다.

“이 어둠은 안에서 일어나는 충격과 마력의 파동을 억제하는 마력이 깃든 마법이다. 설령 바로 앞에서 화염구가 폭발해 터지더라도 네게 미치는 영향은 미미할 것이다. 어둠이 막아줄 테니까. 그러니까 그렇게 꼬리에 불붙은 강아지마냥 낑낑대지 마라. 꼴사납다.”

“으하하하! 바이젠, 너 꼴사납대! 아하하하!”

“······거 너무하는구만.”

실리오가 포복절도하며 웃어젖히고 바이젠은 뒤통수를 긁적거렸다.

“그럼 누가 이런 마법을 썼단 말이오? 그것도 이렇게 넓게. 우리가 정문으로 들어온지 30분은 지났는데 아직도 헤매고 있잖소. 보통이면 두 번은 왕복해도 남았을 것 같은데.”

그의 말대로 일행의 속도는 느리지 않았다. 오히려 빠르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 평범한 사람이 달리는 것보다 약간 느린 걸음으로 길을 걸어가고 있었으니까. 칼리아가 말했다.

“무언가를 보호하기 위해 이런 마법을 펼친 것 같다. 그리고 공간 확장 주문 또한 포함시킨 것 같은데, 그건 이 건물 자체가 마력을 받아들이기 쉬운 마력석이나 마정석으로 지어진 것 또한 주문의 구현에 도움을 준 것 같구나. 아마 노예들을 관리하고 귀족들의 수발을 돕기 위한 편의 장치 때문인 것 같은데······ 어쨌든 대단한 술사가 있는 것이 틀림없다. 아마 용족이겠지.”

“용족?!”

바이젠이 작게 비명을 질렀다. 몇 주 전 회색 계곡 마을에서 겪었던 전투를 떠올린 것이다.

“그때 같은 전투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니 걱정마라. 오히려 이 용족과는 우연히 얽히게 된 것 같은데······.”

“이쪽이야. 여기서 냄새가 났어.”

아엘라시스가 한 곳을 가리키며 계단을 올랐다. 층수가 5층에다가 면적 또한 방대한 건물이다보니 그들은 거의 미로를 헤매는 수준으로 길을 찾고 있었다.

어둠이 뭉쳐진 복도와 어디론가로 이어지는지 알 수 없는 공간 술식 또한 러셀의 탐색을 어렵게 하는 것 중 하나였다. 하지만 그들은 별다른 어려움 없이 길을 찾아 나아갔다.

갈림길이나 막다른 길이 나올 때마다 아엘라시스가 가리키는 곳으로 가면 길이 나왔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막힌 벽도 그녀가 뭐라 중얼거리면 모래알로 흩어지며 건너편의 길이 나타났다.

“이봐 언니, 저 꼬마는 뭐야?”

“아엘라 말이냐?”

“그럼 누구겠어.”

아엘라시스를 필두로 바이젠과 칼리아, 실리오 순으로 일행들은 나아가고 있었다. 실리오가 슬쩍 다가와 칼리아에게 속삭였다.

“어린 나이에 수준급의 마법 실력도 그렇고 언동도 특이하잖아. 난 처음에 머리가 좀 모자란 얘 아닌가 싶었다고.”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그런 것이다. 아직 대화에 미숙한 건 당연한 일이지.”

“······농담이지?”

아엘라시스는 아무리 봐도 십대 후반으로 보이는 소녀였다. 머리카락 색깔이 은발에 가까운 백발이라는 희귀한 머리카락을 가지긴 했지만 그 정도야 선천적인 특질 때문이라면 이해하지 못할 것도 아니었다. 실리오는 다 년간의 용병 생활에서 몸에 식물 줄기를 꽂아 넣고 사는 놈이나 동물 이빨로 온몸을 장식하는 놈도 본 적 있었다.

“농담 아니다. 저 아이는 정말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아이야.”

“······인간이 아니라는 말이야?”

“쉿. 잠깐.”

붉고 도톰한 입술에 손가락을 세워 막은 칼리아가 고개를 들어 아엘라를 불렀다.

“아엘라?”

“뭔가가 오고 있어.”

그녀의 경고에 칼리아는 위를 보았다. 그들의 머리 위에서 빛을 뿌리는 구슬이 칼리아의 마력을 받아 한순간 더 큰 빛을 내뿜었다.

10미터의 가시거리가 순식간에 4, 50미터로 늘어난 순간 그들은 다수의 적들에 의해 포위되어 있음을 깨달았다. 하나같이 날카로운 예기를 풍기는 시퍼런 날붙이 수십 개가 갑작스레 비친 빛에 눈을 가리며 물러났다.

어둠 속에 숨어서 달려들 준비를 하고 있던 그들은 경매장 바깥에서 혼란을 일으킨 뒷골목의 범죄자들이었다.

실리오와 바이젠이 눈을 가린 채 물러나는 그들의 면면을 보다가 익숙한 얼굴들을 보고는 눈살을 찌푸렸다.

“로비드, 데팜, 랑부토······. 많기도 하군. 이놈들이 미쳐 가지고 단체로 약을 빨았나.”

“뒷세계를 장악해서 체스 말로 바꿀 정도의 사업이라. 어떤 간 큰 놈인지는 모르겠지만 꺼내 보고 싶을 정도야.”

시답잖은 대화를 나누지만 손에는 이미 검이 들려있고 마력이 퍼지며 전투태세를 갖춘다. 한 손을 허리에 얹은 채 포위한 뒷골목 범죄자들의 마력을 가늠한 아엘라가 침착한 어조로 말했다.

“오랫동안 어둠에 막혀서 신체 기능이 저하되어 있어. 지금 우리를 찾아낸 것도 생기와 빛을 쫓아서 온 거야.”

아엘라시스의 말을 알아들은 실리오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일말의 이성도 없다는 소린가?”

“그건 모르겠어. 하지만 인간의 보편적인 생명 징후는 느껴지지 않아.”

이미 심장과 내장이 멈추고 숨 또한 쉬지 않는다. 살아 움직이는 시체가 된 그들을 움직이는 것은 약물에 녹아들어 있는 주문과 먼 곳에서도 그들을 조종하는 강력한 의지의 투사다.

“아엘라 말이 맞다. 심장이 억지로 뛰고 있군. 이미 저들은 생의 의지를 잃었어. 남은 건 다른 산 자들을 향한 갈망과 질투뿐이야. 어찌 보면 되살아난 사자(死者)와 같구나. 살이 썩어 흐르지도 뼈만 남은 것도 아니지만, 어떤 면에서는 더 지독해.”

쉬리리리릭.

칼리아가 오른손을 들어 올리자 그 손바닥 위에서 혈액으로 만들어진 소용돌이가 나타났다.

***

“졌어.”

드래코니안 아샤린이 말했다. 턱 아래 거대한 칼날을 두고 있는 사람치고는 담담한 목소리였다.

한 손으로 나힐니르의 칼자루를 쥐고 아샤린의 목을 겨냥하고 있던 러셀이 입을 열었다.

“제이비르 백작의 아들은?”

“차가운 사람이네. 미인의 목에 칼날을 겨누고 있는데 용건만 말하는 건가?”

러셀은 대꾸하지 않았다. 그저 칼날을 앞으로 1센티 전진시켰을 뿐이다. 그것만으로도 검극이 아샤린의 하얀 목을 내리누르며 핏줄기를 만들었다.

“알았어, 알았다고.”

아샤린이 손을 휘젓자 마력이 웅-하고 울면서 파동을 흩뿌렸다. 러셀은 비정상적으로 거대했던 공간이 수축하는 것을 느꼈다.

건물에 부여되어 있던 아샤린의 마법이 해제되면서 멀게 느껴졌던 지하의 공간이 빠르게 줄어들고 거리감이 정상으로 되돌아왔다.

용족의 마법은 싸울 때 말고는 그리 접해본 적 없는 러셀도 지금 펼쳤던 마법을 해제하고 다시 마력을 회수하는 작금의 과정이 얼마나 매끄럽게 움직이는지 알 수 있었다. 칼리아도 이만한 수준의 마법을 보여준 적은 없었다.

마법이 해제되는 것을 지켜보던 러셀이 아샤린에게 물었다.

“실력을 숨기고 있었군. 왜지? 육탄전으로 밀고 들어오지 않았어도 승산이 있었을텐데.”

“내숭 떨기는. 그쪽도 마찬가지면서.”

아샤린이 코웃음을 쳤다.

“당신 눈 정말 이상한 거 알아? 보는 족족 다 마법을 파훼하는 데다가 내 공격 궤도까지 다 읽어내고. 뭐하는 눈깔이야? 인간이 그런 눈을 가질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난 이해가 안 간다고.”

“네가 알바 아니야.”

그때 마법이 모두 풀리고 어둠과 바닥에서 활활 타오르던 불꽃, 그리고 사방에 몰아친 얼음의 흔적이 완전히 지워졌다. 러셀은 자신이 완전히 부서진 경매장 건물의 무대 아래, 그러니까 노예뜰을 철창 안에 가두고 있던 지하 공간에 있음을 알았다.

보기보다 넓은 지하는 격렬하게 싸웠던 흔적이 거짓말인 것처럼 멀쩡했다. 그리고 그 한구석에 기절한 게이비르 백작의 아들, 로셀소와 그 부하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러셀은 그들이 의식을 잃었을 뿐 살아있다는 걸 확인했다. 아샤린이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나야 노예 상단주를 죽이고 다른 엘프 노예들을 풀어주려고 온 거지만, 넌 여기 왜 온 거지? 저 인간 귀족은 왜 찾는 거고?”

“생각해둔 게 있으니까.”

러셀은 나힐니르를 끌어당겨 갈무리 한 다음 바닥에 꽂혀 있던 마지막 서리도 주워서 코트 속에 넣었다. 기절한 로셀소 앞에 쭈그려 앉은 러셀은 손을 뻗어 그의 정수리에 손바닥을 가져갔다.

“깨 있는 거 안다. 일어나라. 소리는 지르지 말고.”

그의 나직한 어조에 로셀소는 천천히 눈을 떴다. 불안하게 흔들리는 동공이 여기저기 움직이다가 정면에 고정됐다. 오랫동안 어둠에 방치되어 있었기에 시야가 어물거렸다. 하지만 그 시야 속에서도 시퍼런 빛을 흘리는 자청색의 눈을 가진 남자의 모습은 쉬 잊기 힘든 것이었다. 로셀소는 덜덜 떨리는 턱을 애써 움직이며 물었다.

“요, 용건이 뭐요? 왜 이런 짓을······?”

“내가 이런 난리를 일으킨 게 아니다, 로셀소. 마녀가 일으킨 것이지.”

“마, 마녀라고? 저 뒤에 있는······?”

로셀소의 눈동자가 뒤편에 서 있는 아샤린을 보다가 그녀가 손을 흔들자 몸을 움츠렸다. 러셀은 고개를 저었다.

“저 여자는 상관없는 자다. 내 용건을 말하지, 로셀소. 당신의 아버지에게 몇 달 전 들러붙은 남자가 있을 테지. 온몸에 붕대를 감고 얼굴을 잘 보이지 않는. 알고 있나?”

로셀소는 놀란 얼굴로 러셀을 바라보았다.

“당신이 그걸 어떻게······.”

“내가 그놈을 쥐어팼으니까 알지. 그놈이 어딨는지 알려줬으면 좋겠군. 이왕이면 당신 아버지도.”

“내, 내 아버지는 왜?”

“받아야 할 빛이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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