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화 교차로 (14)
***
“와 시발, 끝내주는데······.”
바이젠이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암적색으로 물든 밤하늘이 모든 별빛을 잊고 붉게 타오르고 있었다. 얼마나 강력한 화력인지 그가 서 있는 자리까지 따뜻한 기운이 전해져올 정도다.
“익숙한 마력의 냄새가 나······. 이게 무슨 냄새지?”
아엘라 또한 그의 옆에서 멍하니 불기둥을 올려다보았다. 그녀의 코에 잡히는 냄새에서 친근한 기운이 느껴졌다. 오래된 시간 속에서 퇴적된 단층이 풍기는 듯한 냄새다. 아엘라시스의 몸속에 흐르는 피가 그 기운에 반응하고 있었다.
그때 하늘 끝까지 날아갈 듯 치솟던 불기둥이 사그라들었다. 하지만 그것이 발쿠르티스 안쪽의 상황이 끝났다는 걸 의미하지는 않았다. 그 내부는 여전히 패도적인 마력과 마력이 부딪치는 장소였다.
“틀렸다. 완전히 막혔군. 내 주문으로도 열 수가 없어.”
혀를 차며 칼리아가 중얼거렸다. 그러자 옆에 선 실리오가 오른쪽 어깨를 휘휘 돌리며 마력을 끌어올렸다.
“비켜봐, 언니. 마법이 안 되면 힘으로 깨부수면 되지!”
“어, 누님? 괜히 헛짓하지 말고 물러나는 게······.”
“간다아!”
바이젠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남은 마력을 주먹에 집중시킨 실리오가 바닥을 거세게 차며 달려갔다. 목표는 방금까지 칼리아가 열기 위해 이런저런 주문을 걸던 정문.
문지기도 없이 방치된 문은 겉보기로는 평범한 떡갈나무로 만든 나무 문으로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그들이 몇 분 동안 열지 못한 문이기도 했다.
“이야아아악!”
기합성을 지르며 달려가던 그녀의 왼발이 바닥을 쿵 밟았다. 지면에서부터 전달된 반발력과 체중의 절묘한 이동, 관절과 관절의 연계 동작을 통해 어깨가 쭉 뻗어지며 주먹이 문을 가격했다.
콰앙-!
“으아악! 내 손!”
그런 동작들이 무색하게 실리오는 오른손을 감싸 쥐며 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얼마나 무식하게 힘을 실었던 것인지 퉁퉁 부어오른 손에서 피가 줄줄 흐른다.
“에헤이, 그러니까 하지 말래도. 뼈 다 부러졌네 이거.”
“끅, 씹, 만지지마, 개새꺄! 으악!”
바이젠이 실리오의 상처를 살피는 사이 칼리아는 자신이 뚫지 못한 문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이 안에 러셀이 들어간 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겹겹이 쳐져 있는 주문이 건물 내부의 상황을 꽁꽁 감추고 있어 들여다보는 것은 불가능했다.
이런 고난도의 주문을 쓸 수 있는 인간 마법사, 마녀는 드물다. 한 손에 꼽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터. 하지만 주문 개개에 스며들어있는 이질적인 마력은 인간의 것이 아님을 보여주고 있었다.
“안에 러셀이 있는 거지?”
그때 아엘라가 다가오며 물었다.
“그래. 하지만 동시에 강력한 뭔가가 함께 있는 것 같다. 천장을 뚫고 나온 불기둥만 보아도 심상찮은 마력을 가진 존재야. 내 힘으로는 해주하기가 어렵구나.”
그녀의 말에 아엘라는 소매를 걷어부치고는 자신만만하게 두 손을 들었다.
“그럼 내가 도와줄게. 할 수 있을 것 같아.”
말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아엘라의 눈이 세로 동공으로 길쭉해지고 이빨이 살짝 날카로워지며 머리 사이에 뿔이 돋아나기 시작했다.
“간다.”
***
“간다.”
친절하게 경고한 아샤린이 두 손을 박수치듯 합장했다. 손바닥을 떼자 그 자리에는 입방체의 술식이 주홍빛을 뿌리며 돌아가고 있었다.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꼬부라진 문양과 문자가 서로 이어지며 그림을 그리고 그 그림이 다시 삼각형과 사각형, 그리고 원을 그린다.
입방체를 그리던 마법진은 곧 다각도로 벌어지면서 마치 봉오리를 틔우는 꽃잎처럼 입을 쩍 벌린 채 러셀을 노렸다.
지이이이이-!
그 중심에서 섬광이 번쩍이며 선명한 광선이 뛰쳐나왔다.
콰아아아아아!
막대한 열기를 담은 화염이 일직선으로 뿜어지며 러셀을 덮쳤다. 러셀은 그 광선을 피할 수 없음을 깨닫고 눈살을 찌푸렸다.
‘손바닥을 살짝 트는 것만으로도 따라잡힌다. 여기서 상쇄해야겠군.’
아무리 러셀이 빨리 움직이며 광선의 타점을 피해도 그 광선의 끝을 잡고 있는 아샤린은 손을 약간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넓은 공간과 거리를 휘저을 수 있다.
러셀은 곧장 마지막 서리에 있는 대로 마력을 때려 박은 다음 높이 들었다가 바닥을 내리쳤다.
쩌저저정-!
마치 거센 바람에 의해 출렁이는 파도가 쓸어 덮치는 듯한 모양새로 얼음의 해일이 도끼를 중심으로 일어났다. 러셀 그조차 이만한 규모로 펼친 것은 처음인 대규모의 빙결 마법이다.
광선이 쏘아진 것과 그 광선을 피할 수 없다는 것, 그리고 마지막 서리에 마력을 주입해서 바닥을 때리는 과정은 그야말로 찰나에 진행됐다.
1초도 되지 않는 시간 속에서 공격자의 의도를 파악하고 그에 맞는 대처 방법을 실행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러셀이 이제까지 마법사를 상대로 많은 경험을 쌓았다는 증거다.
도끼가 내리꽂힌 자리에서 막대한 양의 빙벽이 해일처럼 공간을 횝쓸며 자라나 천장을 뚫을 기세로 솟구쳤다. 광선과 빙벽이 충돌한 순간 충격파와 함께 수증기가 구름처럼 일어났다가 삽시간에 무너지길 반복했다.
막대한 열기에 의해 그대로 증발하고 또 빙벽의 한기에 응결되어 얼음이 된다.
지이이이······ 쓰아아아!
끝도 없이 이어질 것 같던 화염의 줄기가 사방으로 맥없이 흩어졌다. 수십, 수백 개의 매끈한 얼음 조각이 거울처럼 반사되며 화염의 몸체를 조각내고 그 위력을 낮춘 것이다.
러셀이 마지막 서리를 통한 얼음을 전투에 쓸 때 깨달은 것이 몇 가지 있다.
그중 하나는 마력을 매개로 액체 없이도 얼음을 생성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미 공기 중에 존재하는 수분과 마력을 결합시켜 응결한 얼음 조각을 다루는 것이 훨씬 편하다는 것은 이루 말할 수 없다.
그러나 지금처럼 수분기 하나 찾아볼 수 없는 메마르고 건조해진 공간에서는 다른 방법이 없다. 수준급의 빙결술사라도 이곳에서는 어떤 마법도 쓸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러셀은 가능했다. 그의 손에 마지막 서리라는 희대의 보구가 있었기에. 서리거인이 자신의 몸을 부수고 단조해 만들어내게끔 만든 이 도끼는 응결할 수분이 없음에도 얼음을 생성할 수 있었고, 오랜 시간 동안 그 도끼를 사용해온 러셀 또한 그 원리를 터득한 상태였다.
두 번째는 구현된 얼음을 통해 물리적인 타격이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바닥을 타고 번져나간 마력이 순식간에 빙판으로 얼어붙자 순간 마찰 계수가 0으로 변하며 균형을 무너뜨린다. 하지만 아샤린은 그것을 허공에 몸을 띄우는 것으로 간단하게 해결했다. 하지만 그 빙판에서서 굵직한 얼음 뿔이 튀어나오는 것까지는 막지 못했다.
“윽.”
사방에서 쏘아지는 얼음 뿔을 막으면서 주문을 전개하기는 힘들었는지 화염 광선 주문이 흔들렸다. 무너진 균형은 그대로 광선의 타점이 빗나가는 결과를 가져왔다. 러셀은 그를 놓치지 않았다.
콰아앙!
자신이 만든 빙벽을 부수며 뛰쳐 나온 러셀이 얼어붙은 팔을 움직이며 왼손에 쥐고 있던 마지막 서리를 내려쳤다.
그를 반투명한 역장을 끌어모아 막아낸 아샤린이 입매를 비틀며 말했다.
“칼잡이치고는 잔머리를 잘 굴리는데.”
“피차일반이다.”
콰아앙!
아샤린이 전개한 역장이 산산이 터져나가며 날카로운 끝을 러셀에게 향한 채 쏘아졌다.
경시할 수 없는 역장 화살의 세례에 도끼를 두 번 휘둘러 모든 공격을 막아낸 러셀이었지만 그 사이 아샤린은 다음 마법을 구현하고 있었다.
아샤린의 발치에서 수증기가 피어올랐다. 그리고 그녀의 오른쪽 발이 살짝 들려졌다가 바닥을 탁, 하고 밟았다.
붉은 파동이 그녀의 발아래에서 퍼져나온다. 아샤린의 발밑을 중심으로 전개된 지면이 순식간에 끓어올랐다.
돌과 나무, 그밖의 연금술을 통해 제조된 물질들이 조합되어 세워진 무대 바닥이 진흙처럼 흐르기 시작했다. 마그마가 된 곳이다. 녹아내린 염열의 마그마가 러셀을 향해 쏘아졌다.
여섯 갈래로 갈라지며 허공으로 머리를 들이민 마그마는 찰나에 자신의 몸을 수십 개의 불꽃의 새로 만들며 날카로운 화염 날개에서 깃털을 흩뿌렸다. 뿌려진 깃털이 폭발하며 사방에 불꽃을 피워냈다.
지면을 녹여 마그마를 쏘아낸다는 발상도 그렇지만 그 마그마가 허공에서 다시 분화하며 화염 새로 형태를 변형, 더 큰 화염을 일으킨다.
러셀이 마력을 얼음으로 생성한 것처럼 아샤린은 작은 손동작만으로 마력을 불씨로, 불씨를 마그마로, 마그마에서 화염으로 변화시키며 공간을 장악했다.
이미 주위는 숨쉴 수도 없을 만큼 타오르는 불꽃과 달궈진 공기, 흩날리는 재로 가득하다. 몸의 일정 반경을 두고 보호 영역을 구축한 아샤린은 그 속에서 신선한 공기를 내쉬며 눈을 반짝였다. 여기서 어떻게 빠져나갈 테지? 라는 눈빛이다.
‘후우.’
불꽃은 러셀이 많이 다뤄보지 않은 속성에 속한다. 물론 접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트롤의 화염이나 용의 숨결을 직접 맞아보며 팔이 불타본 적도 있다. 다만 손에 쥐고 있는 무기의 특성과 벼락이 조금 더 손에 맞았을 뿐이었다.
러셀은 마력을 끌어올린 후 그것을 조립했다. 마력에 대한 그의 통제력은 이제 그 자신조차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을 할 수 없는지에 대한 가닥을 잡기 힘들만큼 그 지평선이 넓어져 있었다.
하고자 하면, 될 것이다. 아니 된다.
그의 눈에서 자청색의 빛이 희미하게 흘러나오며 마안이 전개되었다. 눈앞에서 몰아치고 화려하게 확산하는 마력의 흐름이 시각화되며 그에게 전혀 다른 세상의 일면을 제공했다.
그 순간 러셀은 열을 시각화해서 볼 수 있는 뱀이나 도마뱀의 심정을 완벽히 이해할 수 있었다.
사방으로 확장하고 일그러지며 무수한 마력과 마력의 교환이 이루어지고 그 위로 열기와 한기가 한데 어우러지며 다시 없는 몽환적인 풍경을 자아냈다.
평범한 자라면 단숨에 그 광경에 압도되어 넋을 잃었을 테지만, 이미 일전에 우주와도 같은 암흑 공간 속에서 별들을 마주한 적 있던 러셀은 그 충격적인 모습도 가벼이 넘길 수 있었다.
러셀은 그 눈앞을 가득 메우는 마력의 교환 속으로 거침 없이 오른손을 뻗었다. 그의 손에 흐름이 잡혔다. 물리적인 것이 아니라 러셀의 눈으로만 볼 수 있는 형태 없는 흐름이었지만, 그의 손에 잡힌 이상 그것은 더 이상 현상으로 있지 않았다.
파아아아아앗!
그 순간 아샤린이 화염 세례를 퍼부은 공간의 중심에서 원형의 파동이 일어났다. 모든 곳이 불꽃과 재로 흩날리던 공간에 냉기가 가라앉는다.
그리고 허공에서 거대한 형상의 얼음 도끼가 나타나며 아샤린을 그대로 내리찍었다. 그에 맞서며 아샤린 또한 함박웃음을 지으며 마력의 불꽃을 일으켰다.
그녀의 검지와 중지를 타고 뻗어 나온 화염이 그대로 회전했다. 두 갈래의 화염은 마치 두 마리의 뱀이 서로 몸을 배배 꼬는 듯한 형태로 나선이 되더니 그대로 한 자루의 창이 된다.
화염 창을 이루고 있는 불꽃이 사방으로 튀며 불씨를 일으키고, 그 불씨는 다시 불꽃이 되며 폭발해 그 몸집을 키웠다.
가느다랗던 화염의 창은 이제 여느 거목이 부럽지 않은 기둥이 되어 있었다.
아샤린이 디디고 서 있는 지반이 그 불꽃의 창의 마력을 견디지 못하고 움푹 패여 들었다.
“주르트르의 창.”
나선의 화염 창과 떨어지는 거대한 형상의 도끼가 충돌했다.
콰아아아아앙-!
거대한 울림과 진동을 일으키며 무대가 완전히 가라앉고 지반이 무너졌다.
자욱하게 피어오른 먼지구름을 바라보며 러셀이 공중에서 떨어져 바닥에 내려섰다. 뭉게뭉게 일어난 먼지는 여간해선 한번에 가라앉을 것 같지 않았다.
그래서 러셀은 마법의 주문을 외웠다.
“해치웠나?”
직후 먼지구름이 푸확 트이며 사라졌다. 그 중심에는 갑옷을 입은 거구의 인영이 하나 서 있었다. 인간과 다른 점이 있다면 흉갑 부분이 유달리 크고 거대한 것과, 다리 뒤쪽으로 살랑거리는 철갑 형태의 꼬리가 보인다는 것이었다.
투구 속에서 노란 안광이 번득였다. 투구 속에서 아샤린의 목소리가 웅웅거리며 흘러나왔다.
“인상적이야. 인간이 맞나 싶을 정도로. 나와 같은 용족이 인간 행세를 하고 있는 건 아니지?”
“난 인간이다.”
아직은. 뒷말을 삼킨 그를 보며 아샤린이 웃음을 흘렸다.
“아, 정말. 역시 신기한 종족이야. 그렇게 하잘것없어 보이지만 때때로 이렇게 놀라운 개체를 만들어낸다니까. 재능의 편차라는 게 이렇게 압도적이고 비효율적으로 탄생할 수도 있는 걸까?”
그리 중얼거린 아샤린이 어깨 뒤로 손을 가져갔다. 러셀은 그제야 야샤린의 등 뒤에 거대한 손잡이가 삐죽 튀어나와 있는 것을 깨달았다.
당장 아샤린의 존재감이 너무나 거대해 러셀조차 미처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소름끼치는 소리를 내며 튀어나온 그것은 삐죽삐죽한 톱날이 달린 커다란 검이었다. 아니, 그냥 큰 톱칼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나 세상에 저렇게 생긴 톱은 없다. 저런 톱칼을 써서 잘라내야 할 나무가 있다면 그건 나무가 아닐 것이다.
“마법은 다 봤고. 이제는 땀내를 좀 맡아보자고.”
***
“하, 진짜. 뭐 하고 있는 거야, 이 빌어먹을 뿔대가리는······. 그냥 우리 애들만 풀어달라니까.”
밤하늘의 저편에서 솟아올랐다가 사그러진 불기둥의 잔재를 바라보며 한 흑요정이 투덜거렸다. 높은 산등성이의 위에서 도시를 내려다보고 있는 그녀는 흰색의 머리카락과 표범 같이 잘 짜인 몸매를 달빛 아래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어느새 정수리 위까지 올랐다가 천천히 지평선 너머로 가라앉아가는 달빛을 한몸으로 받으며 흑요정, 렉시가 거리를 가늠했다.
“이 정도면, 한 삼십 분? 좋아.”
육안으로 확인되는 것만도 까마득한 거리였지만 렉시는 개의치 않는 태도로 밟고 서 있는 가지의 탄력을 시험했다. 수십 년을 살아오면서 올빼미보다 커다란 생물을 가지 위에 올려둔 적이 없었던 나무지만, 나무는 훌륭하게 그 무게를 지탱했다.
곧 밤하늘을 가르며 그림자가 빠르게 산과 산을 주파했다. 요정 같은 몸놀림 그대로의 모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