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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크 판타지의 마안기사-164화 (165/225)

164화 제국의 손길

“제국? 제국 어디?”

“끄으으으······.”

러셀의 질문에도 페르쿠스는 제대로 답하지 못하고 벌벌 떨기만 했다. 그쯤에서 러셀은 마안을 거뒀다. 요사스럽게 소용돌이치던 안광이 사그라들었다. 여기서 조금만 더 몰아붙히면 아예 정신이 파괴되어 버릴 것이다.

전에 오크 주술사를 상대로 정신에 직접 침투해서 정보를 뽑아내는 것도 방법이겠지만, 그 방법은 시간이 오래 걸렸다. 아직 영지의 소란들도 해결하지 못했는데 한 곳에서만 시간을 끄는 것은 현명하지 못한 처사다.

푸화아아악!

러셀의 왼손이 옆으로 뻗는 동시에 시뻘건 화염이 그가 있던 자리와 골목을 휩쓸었다. 불꽃의 열기가 얼마나 강한 것인지 삽시간에 바닥이 지글지글 끓어오르고 담벼락이 녹아내렸다. 나무로 지어진 집은 순식간에 검은 재로 화했다.

그러나 화염은 일정 거리 이상 더 밀고 나가지 못하더니, 곧 한 점으로 수렴하기 시작했다. 화염이 일으키던 열기까지 빨아들이자 방금까지 활활 타오르던 건물과 벽, 바닥에는 도리어 냉기와 서리가 얼었다.

꽃봉우리처럼 활짝 열린 머리에서 화염을 뿜어내던 네크놀은 뭔가 잘못 돌아가고 있는 것을 깨달았는지 머리를 여몄다. 괴물의 앞에는 쭈그려 앉은 채 왼손을 옆으로 뻗고 있는 남자가 있었다.

왼손바닥 앞으로 축구공 만한 화염의 구체를 만든 러셀의 눈길이 괴물에게 닿았다.

“그래. 자고로 큰 일을 하려면 작은 일부터 처리하라 그랬지.”

꽤 멀리 있음에도 지근거리에서 말하듯 닿는 목소리에 다시 괴물의 머리가 촤르륵 펼쳐졌다. 그 안에서 집중되는 마력은 이전보다 더 강력한 화염을 뿜어내기 위해 겹치고 압축되어갔다.

퍼억-!

러셀이 쏘아낸 화염의 구체가 꿰뚫은 것은 꽃봉우리 대가리를 가진 괴물이 아니었다. 시야의 사각에서 은밀하게 기척을 감춘 커다란 거미 같이 생긴 네크놀이었다.

키샤아아아아!

여덟 개의 다리를 굽힌 채 러셀을 덮치기 위해 준비하던 거미의 몸통에 커다란 구멍이 뚫리고 불이 붙었다. 데굴데굴 굴러다니는 거미에게 어느새 러셀의 손에 쥐어진 하얀 도끼가 날아들어 몸을 동강냈다.

우루루루루룽!

기괴한 소리를 내며 꽃봉오리 대가리를 가진 괴물이 골목 저편에서 몸을 날렸다. 비정상적일 정도로 길쭉한 팔다리를 가진 놈이 좁은 골목을 부숴가면서 달려드는 모습은 호러에 가까웠다.

두 팔을 뒤로 당겼다가 쏘아내는 모습이 마치 투창을 쏘아내는 것 같다. 러셀은 굽혔던 무릎을 펴고 일어섰다. 물러서지는 않았다. 뒤에는 사지 관절이 부러진 흑요정 페르쿠스가 널브러져 있었다.

러셀의 오른손이 잔상을 일으키며 움직이자 그의 머리와 가슴을 노렸던 두 개의 팔이 타탁-튕겨졌다. 강철도 꿰뚫을 위력이 담긴 공격이 너무나 쉽게 와해되는 것을 느낀 네크놀이 다리에 제동을 걸었다.

지능은 그리 높지 않아도 생존에 대한 감각만큼은 여느 생명체 못지 않게 높은 것이 네크놀들이다. 괴물은 당장 길쭉한 팔다리에 힘을 주며 펄쩍 뛰어오르려 했다. 러셀이 불러들인 도끼가 몸통에 틀어박히지만 않았어도 뛰어오를 수 있었을 것이다.

콰앙!

위에서부터 내리꽂힌 도끼에 괴물은 정수리부터 사타구니까지 갈라지며 둘로 나뉘었다. 털썩, 하고 바닥에 떨어진 괴물은 처음 러셀이 죽였을 때처럼 가루로 변하지 않고 그대로 남았다.

러셀은 둘로 나뉜 단면에서 흘러나오는 막대한 피를 보며 눈가를 찌푸렸다. 최소한 수십 명은 잡아먹은 듯한 피의 양이었다.

우우웅!

러셀의 몸에서 투명한 파동이 터져 나왔다. 그의 몸에서 터져 나온 파동은 순식간에 주변을 타고 넘어 영지 전역으로 흩어졌다.

‘스물둘.’

그새 네크놀의 수는 스물둘로 불어나 있었다. 지금 막 두 네크놀의 기척이 사라졌지만, 다른 곳에서 다시 셋이 출몰했다. 인간을 잡아먹고 그 양분으로 새로운 개체를 생산하는 방식이 너무 빠르다. 어떤 매커니즘으로 작동하는지 알고 싶을 지경이지만, 러셀은 그런 학구적인 태도로 마법을 연구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러셀은 페르쿠스를 집어든 다음 간단한 치료를 통해 생명의 끈을 붙잡아 놓았다. 그리고 여전히 옅은 연기를 내고 있는 네멘스토의 숨결을 코트 속에 넣었다.

“이놈은 어떻게 하지.”

-뭔가 곤란한 것이냐?

“칼리아?”

러셀이 페르쿠스를 두고 어떻게 할지 고민할 때 칼리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러셀이 그 목소리가 들린 곳을 바라보았다. 자신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담벼락이었다.

담벼락에 드리워진 그림자가 일렁이더니 희미하게 칼리아의 형체가 어른거렸다.

-무언가 곤란한 기색이 감지되어서 말이다. 맞지 않느냐?

“그렇긴 한데.”

러셀은 어깨를 으쓱이고는 쥐고 있던 흑요정을 내밀었다.

“이 흑요정이 원흉이다. 심문을 해보니 제국 측에서 파견된 놈 같아. 데리고 가줄 수 있나?”

-물론.

대답과 함께 그림자로 만들어진 손이 쑤욱 튀어나와 흑요정을 잡았다.

“아, 그건 안 되는데.”

그 순간, 러셀의 감각을 울리는 경종이 있었다.

낯선 목소리와 함께 찾아든 강대한 기척. 러셀은 자신의 마력 감지에도 잡혀 들지 않은 타인을 감지한 순간 몸을 비틀고 도끼 자루를 역수로 쥔 다음 옆구리를 가렸다.

까앙!

그의 배를 노렸던 공격이 옆구리를 타고 흘려지며 날카로운 파공음을 흘렸다. 그러나 늦지 않게 도낏날에 가로막히면서 허공만을 베었다.

“오호.”

감탄사를 흘린 타인을 향해 러셀의 주먹이 날아들었다.

쾅!

러셀의 주먹이 스친 담벼락이 와르르 무너지고 공격을 날렸던 적이 뒤로 훌쩍 물러났다. 몸이 가볍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두 번이나 공중제비를 돌며 사뿐하게 바닥에 내려선 남자가 중얼거렸다.

“네크놀들이 그리 발광을 하며 달려가는 걸 따라왔더니 이런 게 다 있네. 북쪽 촌구석에 이런 강자가 있다는 말은 듣지 못했는데.”

턱을 쓰다듬으며 남자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거친 가죽 자켓을 걸친 그는 온몸에 날붙이를 주렁주렁 매달고 있었다.

등에는 교차되어 있는 두 자루의 칼, 양쪽 옆구리에도 각각 검과 도가 한 자루씩. 가슴팍 안쪽에도 단도와 단검이 수납되어 있는 것이 보였다.

러셀을 노렸던 장도는 어느새 허리춤의 칼집에 납도되어 있다.

나이를 짐작하기 어려운 얼굴이다. 머리카락은 짙은 남색이었고 표정은 시종일관 가벼운 웃음이 떠올라 있다.

무시무시하게 빠른 발도. 가만히 서 있음에도 남자에게서 덮쳐나오는 마력의 기세는 거세게 타오르는 불꽃과도 같았다.

거기다 러셀의 감각권에서 느닷없이 나타난 것으로 보아 은폐와 관계되어 있는 능력이 있거나, 혹은 그런 능력을 제공하는 마법 유물이 있는 것으로 보였다.

범상치 않은 외견에 강대한 마력. 거기다 흑요정을 탈취하려는 시도까지. 어느 순간부터 급하게 어디론가로 가려던 것은 알고 있었다. 그게 저 남자가 있는 곳이었을까.

그때 남자가 말했다.

“거기 잘생긴 분? 미안하지만 그 흑요정은 내가 데려가야겠는걸. 아, 그리고 혹시 향로 못 봤어? 이만한 크기에 악마의 얼굴 같은 게 검은 연기를 내쉬고 있는 모양인데.”

“이걸 말하는가 보군.”

러셀이 코트에서 향로를 꺼내들자 남자가 반색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 맞아! 이야, 이거 이렇게 친절한 사람을 만나다니. 역시 잘생긴 사람들은 다 인물값을 한다니-”

“무슨 착각을 하는지 모르겠는데.”

남자의 수다스런 말을 끊은 러셀이 향로를 다시 품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왼발로 나뒹굴고 있던 흑요정을 걷어찼다.

데굴데굴하고 굴러간 흑요정의 몸이 러셀의 그림자에 닿았다.

그러자 그림자에서 칼리아가 구현한 검은 손 수십 개가 튀어나오더니 그대로 흑요정을 끌고 그림자 속으로 사라졌다.

“······.”

순식간에 일어난 일에도 불구하고 남자는 여전히 싱글거리는 웃음을 그렸다. 하지만 입가가 살짝 굳어진 것이 남자로서도 예상하지 못한 사태인 건 분명했다.

“유감스럽게도 넌 어떤 것도 가져갈 수 없다. 그러니 얌전히 꺼지는 건 어떤가?”

“그래? 내 생각은 그렇지 않은데.”

싱글거리는 남자의 대답에 러셀이 씩 웃었다.

“그래, 나도 그냥 해본 말이었다.”

드드드드드-.

남자가 마력을 끌어올리자 바닥이 떨리면서 돌조각들이 위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주변의 공기가 끓어오르며 아지랑이가 일렁였다.

남자가 말했다.

“나한테 지명 의뢰를 건 사람이 꽤 까다로운 사람이라서 말이야. 의뢰를 제대로 이행하지 않으면 꽤나 골치 아파지거든.”

“그렇군. 제국의 황자쯤 되는 모양이지?”

불쑥 튀어나온 러셀의 물음에 순간이지만 남자의 웃음이 사라졌다가 다시 떠올랐다. 하지만 그 찰나를 인지하지 못할 러셀이 아니었다. 그리고 남자 또한 러셀이 자신의 동요를 알았다는 것을 눈치챘다.

“이런 썅. 이래서 누님이 나섰어야 하는 건데. 사업은 너무 어렵다니까. 야, 너 이름 뭐야?”

“그건 왜 묻지?”

“왜긴. 내가 본 것 중에 가장 누님 취향의 얼굴을 가져서 그렇지. 얼굴 가죽만 똑 떼어다가 누님한테 가져가면 좋아라 할 것 같아서 그래. 이름표는 달아둬야지?”

“······.”

러셀은 픽 웃으며 대답했다.

“러셀.”

“오? 의외로 순순하게 말해주네? 그럼 나도 답해주는 게 인지상정. 난 바이젠라고 해. 잘 부탁한다?”

러셀은 대꾸하지 않았다. 그리고 두 사람은 대화를 멈췄다. 러셀이 마력을 끌어올리자 그가 서 있는 바닥에서도 돌조각과 건물 잔해들이 부르르 떨리며 떠올랐다.

파지지지직!

두 사람의 마력이 지배하는 권역이 겹쳐지는 곳에서 불꽃이 튀면서 지면이 흔들렸다. 서로가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고 방어하는 공방에 의해 허공에서 더 무수한 불꽃이 일어났다가 사라졌다.

그리고 두 남자가 탐색전을 마치는 것과 동시에.

콰작!

서 있던 바닥이 진흙처럼 짓뭉개지며 움푹 패여들었다. 그러나 깨진 바닥의 파편이 채 솟아오르기도 전에 골목의 중심에서 충격파가 일어났다.

꽈아아아앙-!

폭금과 함께 지면을 타고 충격파가 원형으로 퍼져 나갔다. 반경 오십 미터의 땅이 통째로 뒤집어지고 박살나면서 건물 수십 채가 일거에 밀려났다.

그리고 그 속에서 바이젠이 움직였다.

달칵.

검이 칼집을 벗어나며 나는 아주 작은 소리. 그러나 충격파에 의해 흙먼지가 자욱하게 일고, 위로 치솟았던 잔해들이 쿵쿵-하고 떨어지며 소음을 내는 와중에 들리는 소리였다.

러셀의 감각이 다시 위협을 감지했다. 그리고 섬광은 찰나에 찾아왔다.

쉬아아아악!

소리가 들렸을 때는 이미 흙먼지가 둘로 갈린 후였다. 러셀의 뒤로 비스듬하게 잘려 나간 건물들이 자신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미끄러지다 바닥에 떨어졌다.

하지만 바이젠은 눈을 크게 떴다.

“그걸 막아?”

“보였으니까.”

러셀은 중단세를 취한 자세로 답했다. 그의 손에는 묵색의 대검이 흠집하나 나지 않은 채로 우뚝 세워져서 빛을 빨아들였다.

서로가 상처 하나 없는 것을 안 바이젠이 헛웃음을 흘리더니 검을 들었다.

“쉽지 않은데.”

그리 말한 바이젠의 신형이 한줄기가 그림자가 되어 러셀을 향해 질주했다.

쐐애액!

아직 가라앉지 않은 흙먼지 사이로 신형을 감추자 그의 기척이 삽시간에 희미해진다. 러셀의 눈은 단박에 그 원리를 꿰뚫었다.

체내에서 움직이는 마력의 흐름과 자연지물이 자연스럽게 동화하며 감각이 보통의 사물로 인식하게 만드는 효과. 별다른 마법 유물을 발동하는 낌새는 보이지 않았으니, 스스로가 가진 고유 능력이거나 무예의 일종으로 보였다.

러셀의 눈이 빛을 발하는 것과 동시에 시야의 시각에서 튀어나온 바이젠의 칼날이 번뜩 섬광을 그렸다.

까가가가가강!

1초도 되지 않는 순간에 이뤄진 수십 합의 공방. 범인의 눈으로는 감히 볼 수도, 인지할 수도 없는 간극에서 나눠진 검격이었다.

러셀이 물러서자 그를 놓칠세라 바이젠의 몸은 더욱 가까이 따라붙으며 검을 휘둘렀다.

꽈앙!

다시 한번 터져나온 파동과 충격파. 이번에는 일어났던 모든 흙먼지를 일거에 바깥으로 밀려 보낸 충돌이었다.

“이거이거, 정말 쉽지 않겠어.”

“뭐가?”

“네 얼굴 말이야. 난도질 되지 않은 깨끗한 상태로 벗겨가는 건 힘들겠다고.”

바이젠, 그의 손은 정신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오른손에는 장도, 왼손에는 장검을 쥐고 휘두른다.

제자리에 선 러셀이 모든 공격을 튕겨내고 흘리고 빗겨내자 바이젠의 얼굴에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그의 공격이 점점 더 처절해졌다. 나힐니르가 두 자루의 검과 도를 부러뜨리자 등 뒤에 교차되어 있던 검이 뽑혀져 나오고, 품 안쪽에 걸려있던 단검들이 쏜살같은 빠르기와 위력을 가지고 러셀을 향해 날아들었다.

마치 두 팔이 아니라 네 개의 팔을 가진 인간을 상대하는 것 같다. 때에 따라 수시로 바뀌는 날붙이들이 동시다발적으로 러셀이 사지를 노리고 쇄도했다.

거기다가 러셀의 감각이 예상하는 지점보다 미세하게 호흡을 늦추거나 더 빠르게 몰아붙이는 공세. 1초의 단위에서 주변을 인지하는 러셀의 대처를 헷갈리게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발버둥이다.

그러나 그 처절한 공세를 이어나가는 바이젠은 속으로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좆됐다좆됐다좆됐다좆됐다좆됐다좆됐다좆됐다좆됐다······!’

닿지 않았다. 아무리 빨라져도, 마력 회로가 불에 타는 것 같은 고통을 호소해도 그의 검격은 러셀에게 닿지 않았다.

더 무서운 것은, 러셀은 바이젠의 공세를 받아내기 시작할 때부터 일정 거리 이상을 두고 멀어지지 않았다. 그 반경은 정확히 그의 보폭을 기준으로 세 걸음. 러셀은 딱 세 걸음이 닿는 원형의 공간에서 바이젠의 공격들을 받아내고, 넘기고, 흘려내고 있었다.

“꽤 흥미로웠다.”

러셀이 말했다. 바이젠의 공세가 느려지기는커녕 점점 더 빨라지고 있는 순간에서도 그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이렇게 많은 무기를 다루는 놈은 처음이라서 말이다. 어떤 경로와 궤적을 그려올지 수싸움을 하는 것도 그렇고. 하지만 슬슬 밑천이 다 떨어진 것 같군.”

쿵!

러셀의 왼발이 앞으로 한발자국 내디뎠다.

쩌저저저적!

발바닥이 바닥에 다은 순간 허공을 망치로 깨는 듯한 비틀린 소음이 울리고, 그의 왼발을 중심으로 냉기가 퍼져나갔다.

“큭, 이건 또 뭐야······?”

균형을 잡기 어려울 정도로 마찰 계수가 0에 가까울 정도로 얼어붙은 바닥에서 바이젠이 당혹스런 신음을 토했다. 그러나 그도 마력을 한계까지 단련한 전사.

곧바로 다리에 마력을 강하게 불어넣고 바닥에 내리꽂아 미끄러지는 몸을 지탱했다. 그 와중에도 상체는 계속해서 움직이며 러셀의 살갗을 훑어내기 위해 비집었다.

그리고 러셀의 나힐니르가 아래에서 위로 그어졌다.

콰차창!

그 한 수에 수십 번을 오가던 바이젠의 날붙이들이 모두 지워졌다. 제각기 다른 방향으로 비틀린 단검과 장검이 깨진 쇳조각을 흩뿌리고, 바이젠의 정면이 훤하게 열렸다.

그럼에도 바이젠은 도망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앞으로 달려들었다. 허공에서 비산하는 무기들에 대한 미련 따위는 진작에 버린 채 양손에 또 다른 단검을 쥔 채로 서슴없이 접근했지만, 러셀의 손이 그의 목을 움켜쥐는 것이 더 빨랐다.

바이젠의 목을 잡자마자 그의 손에서 쏘아진 날붙이를 고갯짓만으로 피한 뒤, 러셀은 바이젠의 몸을 바닥에 내리꽂았다.

충격이 먼져 터지고, 소음은 그 다음이었다.

콰아아아앙-!

귀청이 뚫릴 것만 같은 소닉붐이 일어나며 주변의 공기를 반구형으로 밀어냈다. 충격에 의해 밀려나온 공기와 그 바깥의 정체된 공기가 서로 맞부딪치며 하얗게 일어나면서 막대한 굉음과 2차 피해를 낳는다.

콰득, 콰득. 쿠궁. 후두두두두······.

잔해가 떨어지는 소리가 아련하게 퍼지는 가운데 커다란 그림자가 크레이터에서 몸을 일으켰다. 남들보다 머리가 한 개 반에서 두 개는 커다란 신장.

머리끈이 풀려 치렁치렁하게 쏟아진 검은 머리카락과 태산 같은 어깨와 등을 지닌 남자. 러셀은 고개를 이리저리 꺾다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반경 이백 미터 이상이 둘의 싸움의 여파로 휑해져 있었다. 싸우는 와중에도 사람이 없는 영지의 외곽 쪽으로 여파를 몰았기에 인명 피해는 없었지만.

“처음부터 다시 지어야겠는데, 이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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