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크 판타지의 마안기사-163화 (164/225)

`163화 자하드 영지 (5)

***

갑옷을 입은 라하르트가 내성문을 나서며 말했다.

“상황은 어떻게 되어 가고 있나?”

“그리 좋지 않습니다. 영지 곳곳에서 괴물들이 날뛰는 중입니다. 일단 상황을 먼저 보여드리겠습니다. 비쳐라.”

라하르트의 물음에 마법사 시모스가 빠르게 대답하며 수인을 맺었다. 시모스가 손을 교차했다가 펴자 그 위로 수분이 모여들며 거울이 만들어졌다.

거울은 곧 영지에서 날뛰는 괴물들을 비췄다. 검은 피부를 가진 괴물들이 건물과 바닥을 부수며 사람을 잡아먹고 있었다.

“형태가 일정하지 않군. 지금도 계속해서 변화하고 있어.”

한시가 급한 상황임에도 라하르트는 먼저 괴물의 외견과 움직임, 그리고 무엇을 우선해서 달려들고 있는지 파악했다.

“평범한 마수나 마물이 아니야. 피부는 검은색에 사람을 우선해서 달려들고 있고. 산맥의 마수들처럼 인간의 심장이나 뇌를 통해 생을 연명하거나 힘을 키울 수 있는 종류일 수 있다.”

“주의하겠습니다.”

가만히 거울 속의 괴물들이 팔을 길게 늘여 사람을 잡아다가 커다란 입으로 삼키는 꼴을 보던 라하르트의 표정은 무섭도록 굳어져 있었다. 하지만 그는 감정에 매몰되지 않고 괴물들을 노려보았다. 10초가 지났다.

그 사이 자하드 가문 내의 모든 기사들과 병사들이 연병장에 모두 모여 명령을 기다렸다. 오십 명의 기사와 오백 명의 병사들이었다.

그리고 라하르트는 고개를 들었다.

“현재 괴물의 수와 위치는?”

시모스가 빠르게 답했다.

“······현재 열다섯 마리까지 늘어났습니다. 위치는 각각 여관 거리에 셋, 장인 거리에 넷, 그리고 식당 거리와 주택 밀집 구획까지 여덟 마리가 퍼져있습니다. 가만히 놔두면 계속해서 늘어날 겁······ 오.”

시모스가 감탄사를 내비쳤다. 막 그가 투영한 거울 속에서 러셀이 세 마리의 괴물을 단독으로 단숨에 해치우는 모습이 비친 참이었다.

키가 2미터에 터질듯한 근육질로 몸이 덮인 검은 피부의 괴물들이 재빠른 속도로 주먹을 휘두르고 날카로운 손톱이 돋아난 손가락을 길게 늘이며 러셀의 공간을 에워싸고 있던 순간이었다.

러셀의 왼손이 휘둘러진 주먹을 쳐내고 오른손에 들린 커다란 묵색의 대검이 여섯 개의 손가락을 잘라내더니 그대로 팔뚝을 세로로 길게 베었다.

덮쳐든 괴물들이 현란한 검광에 횝싸인다. 한 수에 목이 베이고, 두 수에 허리가 쩍 갈라지며 아무것도 없이 텅 빈 몸통 속에서 연기가 우수수 쏟아졌다.

순식간에 세 마리를 해치운 러셀은 곧장 어딘가를 쳐다보더니 몸을 날렸다. 마법의 거울마저도 그 움직임을 다 잡아내지 못했다.

“막 여관 거리의 괴물 셋이 죽었습니다.”

“······나도 눈 있네.”

알 수 있다. 지금 러셀이 어떤 경지에 올라, 얼마나 강력한 마력을 쌓아 올린 것인지. 사십 년을 넘게 몸과 마력을 단련한 라하르트 자신마저도 일순 러셀의 검 끝을 놓쳤다.

그 찰나에 도대체 몇 번이나 공간을 벤 것일까? 라하르트는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저 괴물을 베어 넘기는 검 끝이 자신에게 향할 순간을.

아들이라고 생각하지만, 동시에 커가는 모습을 모두 보아왔던 것은 아니다. 러셀은 혼자서 컸다. 그가 봐왔던 아기일 적, 혹은 소년일 적의 러셀은 모두 나이에 맞지 않을 정도로 성숙하고 어른스러웠다.

이루실이나 다른 그의 자식들과 비교하지 않으려 해도 할 수밖에 없다. 거기에 그 자색 눈. 오래 마주 보고 있으면 기분이 이상해지고 두려움과 거리낌이 느껴지는 보석 같은 자안.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 건가?”

시모스는 바로 거울의 시야를 높게 비췄다. 거울에는 막 또 하나의 괴물을 커다란 도끼로 얼렸다가 터트린 러셀이 골목 안쪽으로 사라지고 모습이 비쳤다.

마법사의 주문으로 만들어진 마력의 눈이 러셀을 쫓으려 하지만 그는 벌써 저만치 멀어지고 있었다. 시모스는 점차 눈과 연결되어있는 마력의 끈이 얇아지는 것을 느끼며 눈을 불러들였다.

“도련님의 달리는 속도가 너무 빨라 마법으로도 따라잡기가 힘듭니다. 가시는 방향은 영지의 북쪽입니다.”

라하르트는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북쪽은 놔둬라. 남은 동쪽과 서쪽, 남쪽을 맡는다. 그리고 시모스 자네는 이제 마력을 아끼게.”

“아가씨는 살펴보지 않아도 되겠습니까?”

“그 아이는 괜찮을 걸세.”

라하르트가 연병장을 돌아보았다. 그의 바로 앞에 정렬된 기사와 병사들이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마력으로 커진 목소리가 연병장을 울렸다.

“영지가 공격받고 있다. 흉수는 현재 내 아들, 러셀이 쫓고 있다. 우리는 북쪽을 제외한 구획으로 가서 영지를 공격하고 있는 괴물들을 상대한다. 산맥의 마수들과 싸울 때를 상정하되 유연하게 대처하라. 인명 대피를 우선시하나 무리하지는 마라. 중요한 것은 놈들이 더 커지거나 수를 불리기 전에 처리하는 것이다. 영지를 구해라! 너희는 자랑스러운 자하드의 병사들이다!”

쿵!

오십 명의 기사들이 가슴에 주먹을 치자 커다란 울림이 울렸다. 환호나 함성도 없었다. 수십 년간 괴물들과 맞서 싸워온 기사들은 곧장 삼인 일조로 조를 맞춘 다음 내성을 나섰다. 범인을 뛰어넘은 신체의 초인들이 무시무시한 속도로 성에서 벗어나 사방으로 흩어졌다.

갑옷을 입고 기다란 도끼창을 든 병사들은 다섯으로 나뉘어 구획으로 향했다.

검은 연기와 둔중한 소음이 끊임없이 일어났다. 아스라한 비명이 모든 곳에서 메아리쳤다.

***

으적, 으적.

기분 나쁜 소리가 들려왔다. 무언가가 질긴 고기를 잡아 뜯어먹는 소리. 그 소리의 정체는 커다랗고 두꺼운 팔에 검은 연기가 풀풀 날리는 몸통을 가진 괴물이 사람을 먹는 모습이었다.

“아, 아아······.”

가슴과 배가 쩍 갈라진 곳에는 톱날 같은 이빨과 날름거리는 수십 개의 초록색 혀가 촉수처럼 날름거린다. 그 수십 개의 혀는 상체밖에 남지 않은 여자를 잡아서 안쪽으로 밀어 넣고 있었다.

이미 숨이 끊어져 동공이 풀린 여자를 주저앉은 소녀가 멍하니 바라보았다. 소녀의 엄마는 딸을 밀치고 자신이 괴물의 손아귀에 붙잡혔다.

고통은 짧지 않았을 것이다. 일그러진 표정, 핏줄이 터진 눈에서 흐르는 피눈물과 입에서 뚝뚝 떨어지는 핏물이 그를 증명한다.

가륵.

이윽고 소녀의 엄마를 완전히 집어삼킨 괴물의 몸이 더욱 커졌다. 사람의 심장과 그 안에 내재되어 있는 생명력, 그리고 소량의 마나 덕분이다. 생명력도 생명력이지만 마나가 더 필요했다.

하지만 마나를 단련한 사람은 드물고 마나에 재능을 가진 사람은 더 드물다. 괴물의 본능은 더 많은 인간을 잡아먹으라 충동질했다. 그리하면 이 끝없는 허기와 이어지지 않는 생각의 고리를 가질 수 있다는 것처럼.

소녀의 몸통을 통째로 쥐고도 남을 검은 손아귀가 아래로 향했다.

촤르르르륵!

바닥에서 하얗고 단단한 쇠사슬들이 솟아오른 것은 그때였다. 쇠사슬은 마치 소녀를 보호하듯이 튀어 올라오더니 그대로 사슬의 장벽을 형성했다.

가륵?

그 신기한 현상에 고개를 갸우뚱거린 것도 잠시, 괴물의 손가락과 손목, 그리고 팔과 어깨까지 수십 개의 사슬이 연결되며 팽팽하게 잡아당기기 시작했다.

가르르르르르···!

괴물의 네 개의 발이 바닥을 강하게 디디자 그 주변이 움푹 패면서 지면이 쩌적 갈라졌다. 그러나 사슬이 잡아당기는 힘이 더 강했고, 괴물의 몸이 붕 떠올랐다.

콰아앙!

네 개의 다리를 가진 하체에 커다란 상체를 지닌 괴물이 장난감처럼 들렸다가 반대편 바닥에 내리꽂혔다.

포석이 물결을 치면서 충격파를 받아냈다가 우수수 깨져나가며 막대한 파편을 흩뿌리고 자욱한 흙먼지가 일어났다.

“괜찮니?”

사슬의 장벽에 보호받던 소녀를 어떤 여인이 안아올렸다. 검은 머리카락이 등허리까지 닿고 검은 눈을 가진 미인이었다. 소녀는 멍한 얼굴로 여인을 올려보다가 곧 눈물을 주르륵 흘렸다.

“흑, 흑, 으아아아앙······.”

이루실은 착잡한 표정으로 눈물을 뚝뚝 흘리는 소녀를 내려다다 보았다.

눈앞에서 가족이 죽는 슬픔은 겪어보지 못했으나, 비슷한 경험은 많았다. 산맥의 마수들은 인간의 고기와 심장, 뇌를 먹는데 혈안이 된 괴물들이다.

온몸이 기사의 검과 창에 잘려 나가도 걸신들린 듯이 병사의 머리를 부수고 뇌를 씹어먹는 것을 숱하게 봐왔다.

그 병사들은 그녀를 아가씨라 부르며 인사하고, 간식을 주고, 같이 훈련하며 말을 몰았던 사람들이었다.

이루실은 뒤를 돌아보았다. 그녀가 달려온 거리에도 두 마리의 괴물이 죽어 널브러져 있었다. 핏물과 끈적이는 고깃덩이만 남은 사람들의 사체가 바닥과 벽, 건물의 외벽과 간판에 걸려 하염없이 흔들렸다. 괴물이 날뛰면서 미처 피하지 못한 사람들이 부서진 흔적들이었다.

괴력 앞에 평범한 사람들은 너무나 쉽게 부서지고 망가졌다. 사람은 잘못 넘어지는 것만으로도 죽을 수 있었다. 그리고 괴물은 그런 사람들에게는 자연재해나 마찬가지인 존재였다.

괴성이 흙먼지를 뚫고 나왔다. 흙먼지가 걷힌 자리에는 부서진 어깨와 팔을 끼워 맞추는 괴물이 서 있었다.

가아아아아악-!

직후 네 개의 거미 같은 다리를 가진 괴물이 바닥을 우그러뜨리며 이루실을 향해 괴성을 질렀다.

그 괴성에 소녀의 울음이 뚝 그쳤다. 이루실은 그런 소녀를 천천히 바닥에 내리며 물었다.

“이름이 뭐니?”

“훌쩍, 네?”

“이름이 뭐야? 난 이루실이라고 해.”

당장 저 앞에서 괴물이 네 개의 거미 같은 다리를 뻗으며 오는 와중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의 침착함이었다. 하지만 소녀는 훌쩍거리고 딸꾹거리면서도 작게 말했다.

“라나요. 라나 프란델.”

“라나. 예쁜 이름이네.”

미소를 지으며 이름을 칭찬한 이루실은 곧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라나, 여기 가만히 있어. 알겠지?”

아직 그녀가 죽이지 못한 괴물들이 도처에 있었다. 거리는 도망친 사람들로 인해 썰렁했으나 저 멀리서는 여전히 아스라하게 비명이 들려왔다. 인간을 먹고 힘을 키우는 동시에 분열하며 동족을 만드는 괴물.

칼리아의 언급대로라면 네크놀이라는 이름을 가진, 이차원을 찢고 나타나는 이물이었다.

다음 순간 쿵쿵 거리며 다가오던 괴물이 번뜩 몸을 날렸다. 햇빛을 빨아들이는 검은 피부는 마치 시야 한쪽이 검게 칠해진 채 다가오는 것 같았다.

송곳처럼 형태를 변형시킨 오른손이 곧게 이루실의 가슴을 찔러왔다. 단순하지만 무척 빠른 일격이었다. 이루실조차도 집중을 최고조로 끌어올리지 않으면 놓칠 정도로.

쉬아악-하고 공기를 가르며 날아오는 길쭉한 오른팔에 아까처럼 하얀 쇠사슬이 감겼다. 이루실의 손바닥에서 튀어나온 가느다란 마력의 실은 끝으로 갈수록 하얗고 굵으며 단단해진 쇠사슬로 구현되어 있었다.

그녀의 왼손이 괴물의 오른손을 잡아당기는 동시에 자세를 낮췄다. 오른손이 허리춤으로 갔다 싶은 순간, 번뜩이는 하얀 섬광이 괴물의 가슴을 대각선으로 갈랐다.

그어억!

콰지직-하는 소리가 나며 괴물의 피부가 쫙 갈라지고 우그러졌다. 하지만 물러선 것은 두 개의 다리뿐이었다. 그녀의 검격을 받아내며 충격을 받은 상체가 앞으로 훅 숙여왔다.

괴력을 발휘하기 시작하자 사슬에 감긴 오른팔이 억지로 움직이며 힘줄과 근육이 뜯겨지는 소리가 났다. 반쯤 갈라져 있던 왼쪽 어깨의 단면에서 수십 개의 검은 줄기가 멀어진 반대쪽 단면에 걸리며 서로를 잡아당겼다.

이루실은 그것을 가만 바라만 보고 있지 않았다. 괴물의 오른팔에 감긴 사슬을 완전히 조여 박살내는 동시에 오른손에 들린 검을 그대로 괴물의 머리에 박아넣었다.

마치 달걀처럼 아무런 이목구비가 없는, 그저 목 위가 허전해서 달려있는 것인지 모를 머리가 미친 듯이 흔들렸다.

괴물의 가슴에 달린 커다란 입이 쩍-하고 열리며 비명을 토해냈다. 동시에 가까이 붙은 이루실을 노리며 가느다란 촉수들이 입에서 튀어나오며 그녀를 끌어당기기 시작했다.

가아아아아-!

육편으로 얼룩진 붉은 이빨들이 자아를 가진 것처럼 물결치며 이루실을 씹어 삼키기 위해 파들거렸다.

직후 이루실은 머리에 꽂아 넣었던 칼을 위로 올려 베며 네크놀의 머리를 반으로 갈랐다. 양쪽으로 갈라진 머리에서 검은 피와 모래 같은 것이 폭포처럼 흘러내렸다.

괴물은 턱밑까지 닥친 죽음을 직감하기라도 한 듯 이루실을 매단 채로 난동을 부렸다. 식당과 잡화점, 뭐를 파는지 알 수도 없이 박살난 물건들이 주위로 무수하게 날아갔다. 나무판자와 돌이 부서지며 먼지와 돌조각이 내던져졌다.

촤아악!

그때 괴물의 머리를 갈랐던 검날이 이번에는 끈적거리는 혀들을 베어내고 이루실을 자유롭게 했다. 공중에 떠 있던 이루실은 곧 뒤로 훌쩍 공중제비를 돌며 바닥에 내려섰다.

콰앙!

이루실은 앞으로 몸을 날리지 않았다. 이미 괴물이 온몸을 내던지듯이 돌진해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오른발을 앞으로 내디뎠다.

갈무리한 검은 그녀의 왼편 허리춤에 걸렸다. 호흡이 멈추고, 시간이 느려졌다.

언젠가 보았던 러셀의 움직임을 떠올렸다. 그가 어떻게 움직이는지, 어떤 식으로 다리를 놀리고 허리를 비틀며 상체를 뻗었는지.

그 정교한 마력의 흐름을 떠올렸다.

언제 감았는지도 모르게 감겼던 눈꺼풀이 뜨였다. 섬뜩하고도 오싹한 감각이 전신을 내달렸다. 그 감각은 곧 오른손에 쥐어진 검끝으로 향했다.

다음 순간 검날이 괴물을 집어삼켰다.

······!

비명은 없었다. 무엇인가 괴물의 몸을 사선으로 그었다. 그리고 그것이 무엇인지 괴물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앞으로 열 정도만 더 먹었으면 알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정립되지 않은 본능에 가까운 상념만이 잠시 남았다가 사라졌다.

곧 둘로 나뉜 괴물의 상체와 하체가 후두둑 바닥에 떨어져 내렸다.

***

“페르쿠스가 네 이름인가?”

“······그.”

파지지지직!

“끄아아아아악! 마, 맞습니다!”

“한번만 더 늦으면 심장이 멈추는 기분을 맛보게 해주지. 물론 다시 심장 마사지 해서 살려낼 거야.”

페르쿠스는 고개를 정신없이 끄덕였다. 러셀은 여전히 흑요정의 목을 쥐고 있던 왼손을 풀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뿌드드득!

“아아아악!”

번개같이 움직인 러셀의 손이 흑요정의 사지 관절을 비틀고 뽑아버렸다. 끔찍한 고통에 흑요정의 눈이 돌아가고 곧 힘없이 골목 벽에 기대며 주저앉았다.

“으흑, 으흐흐흐흐흐······.”

비명조차도 나오지 않는 목에서 웃음인지 울음인지 모를 신음이 새어나왔다. 그 앞에서 러셀이 쭈그려 앉았다.

“목적이 뭐냐?”

“······북부를 지키는 가문들의 멸망.”

“왜?”

“모든 것은······ 새로운, 세상을······ 위해서.”

“누가 시켜서 한 거냐?”

“큭, 큭. 죽여라.”

바들거리며 고개를 든 흑요정이 겨우겨우 입가를 비틀었다. 마치 이렇게 고통을 주고 심문한다 해도 피할 수 없는 결과라는 것처럼.

러셀은 가만히 흑요정을 바라보다가 근처에 떨어져 있던 향로를 주워들었다. 그의 눈에서 자청색의 빛이 휘몰아쳤다.

신비로운 안광을 뿜어내는 러셀을 흑요정 페르쿠스가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이 향로를 준 놈이 누구냐.”

“극, 그으으윽······”

페르쿠스의 입에서 하얀 거품과 붉은 피가 섞여서 흘러내렸다. 그의 정신과 몸이 파괴되면서 그 잔여물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눈 똑바로 뜨고 답해라. 누구냐?”

페르쿠스의 더러워진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제······ 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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