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화 로고스 협곡
머리통을 차올린 즉시 러셀은 몸을 비틀었다. 머리를 잃은 기사가 칼을 내지른 탓이었다. 시야가 보이지 않을 텐데도 둘라한은 마치 보이는 것처럼 러셀을 찾아 검을 휘둘렀다.
우에서 좌로 베어오는 칼을 도끼로 막은 러셀은 오른손의 대검을 올려쳤다. 둘라한은 다급히 뒤로 굴러 대검을 피해냈다. 허나 완전히는 피하지 못해 복부부터 가슴팍까지 긴 검상을 입었다.
러셀은 양 손목을 휘휘 저었다. 아까부터 느꼈던 것인데, 도끼가 잘 먹히지 않았다. 산 생명은 갈가리 찢어 얼린 다음 부술 수 있는 흉악한 도끼였지만, 그렇기 때문인지 죽은 자들에게는 별 소용이 없었다.
도끼가 내뿜는 서리와 냉기는 시체들이 자체적으로 내재한 사기와 냉기에 큰 타격이 되어주지 못했다. 오히려 약간이지만 서리를 흡수하고 더 단단해지는 것 같기도 했다.
러셀의 막대한 마력과 근력으로 어거지로 부서트리기는 했으나, 그렇기에 더 마력과 힘의 낭비였다. 그래서 러셀은 도끼를 코트 자락에 넣고 대검을 양손으로 쥐었다.
둘라한은 뒤로 굴렀던 몸을 일으켰다. 문득 둘라한이 왼손을 허공에 뻗자, 곧 그 자리에 머리가 나타났다. 아까 러셀이 하늘로 날려버린 그 머리였다.
“회수 기능도 있고. 편리하겠어.”
러셀이 이죽거리자 둘라한이 분노로 몸을 떨었다.
“이놈, 편히 죽을 생각은 마라!”
끼아아아아악!
머리 없는 기사의 말을 긍정하듯 하늘을 떠돌던 서너 마리의 레이스들이 귀곡성을 내질렀다. 한창 싸우고 있던 성기사들과 울카가 귀를 막으며 비틀거렸다. 귀곡성이 가지고 있는 사악한 마력과 소리가 고막을 넘어 뇌리를 직접 흔드는 것이었다.
레이스들이 지르는 비명은 작아지지 않고 점점 커졌다. 거기다 시체들도 낮고 음울한 음성을 보태기 시작했다. 단 하나, 생명에 대한 처절한 질투와 증오가 깃든 음성이었다.
공명이 울리며 온 세상에 소리만 가득한 착각이 일었다. 러셀의 눈이 불타올랐다.
거대한 무언가가 러셀을 중심으로 해서 터져 나왔다. 그건 외침이었다. 거인의 고함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거대하고, 마력이 스며든 외침.
예전, 용족 카루곤이 나타나자마자 병사와 용병들을 전멸시키기 위해 공격했던 것을 소리로 치환한 것이었다. 반구형의 충격파가 일어나며 레이스들의 귀곡성을 날려버렸다. 충격파에 밀려난 건 다른 시체들, 둘라한도 마찬가지였다.
성력이 담긴 것이 아니라 레이스나 다른 시체들을 재로 만들지는 못했다. 다만 밀려나게 만든 것 뿐이었다. 하지만 그것만 해도 대단한 위용이었다. 러셀이 으르렁거렸다.
“씨발, 시끄럽게.”
그는 바닥을 박차 뛰어올랐다. 레이스는 코앞까지 다다른 러셀을 보며 비명도 내지 못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수십 번 허공을 가른 대검이 레이스를 찢어발겼다.
그가 한 마리의 레이스를 처치할 때, 그의 외침에 놀라 잠시 멈췄던 귀곡성이 재개됐다. 오직 살아있는 자만이 영향을 받는 저주받은 소리가 시야를 어그러트리고 환청을 부르며 균형을 흔들었다. 하지만 이곳에는 러셀만이 있는 것이 아니었다.
“성전의 각오를 외치리라, 성역의 선율을 노래하리라, 그리하여 멸악의 기치를 다시 세우리라!”
귀에서 피를 흘리는 두 성기사의 이중창이 전장에 울려퍼졌다. 황금색의 기류가 파도처럼 일어나 정면에서 레이스의 비명을 흩어버림과 동시에 수평으로 넓게 퍼져나갔다.
호수에 떨어트린 돌맹이가 무수히 그리는 파문처럼 덮쳐오는 성력의 파도에 수많은 언데드들이 휩쓸려 불타올랐다.
아우우우우-.
늑대의 하울링 소리가 낮게 퍼졌다. 어느새 수인화를 한 울카가 거대해진 체격으로 시체들을 내려다봤다. 거칠게 솟아난 회색 털에 은은한 은빛의 광채가 깃들었다.
황금빛과 은빛이 전장을 지배했다. 가까이 있던 시체들이 불타올라 재가 되었고, 사기와 흑마력이 충만한 강력한 언데드들도 주춤주춤 물러섰다.
“하압!”
하일른이 냅다 방패를 던졌고, 그것은 정확하게 날아다니던 한 마리의 레이스를 격추했다. 성력이 가득 깃든 방패에 정통으로 얻어맞은 레이스가 회색의 불꽃에 타오르며 지상으로 떨어졌다.
“크르릉!”
역관절로 변한 다리가 용수철처럼 튕기며 울카의 거체를 공중으로 쏘아냈다. 그러나 울카의 표적이 된 레이스는 앞선 두 레이스의 죽음을 보고 높이 날아오르고 있었다. 울카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높이 뛰어올랐지만, 이미 하늘 저편의 레이스에게 닿기에는 거리가 멀었다.
레이스는 비틀린 미소를 지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동작을 해보였다. 레이스는 영체이고, 그렇기에 그것은 육체를 지닌 산 것에 대한 모독적 표현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하지만 곧 그 표정은 다섯 갈래로 나뉘어져 더 이상 미소도 뭣도 아니게 되었다.
쿵, 하고 울카가 땅에 착지했다. 그녀의 오른손에는 월광이 깃든 다섯 개의 손톱이 찬연히 빛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빛은 울카의 손톱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쾅! 쾅! 쾅!
하일른과 제스, 울카가 굉음의 진원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러셀과 둘라한이 검을 맞부딪치고 있었다. 누가 우세한지는 한 눈에 알 수 있었다. 러셀의 검, 나힐니르의 검신에서 흰 색의 룬이 빛나고 있었다. 룬의 빛은 묵색의 칼날 위를 덮는 은색의 기류가 되었고, 그것은 둘라한의 장검을 인정사정없이 깎아냈다. 둘라한이 침음성을 흘렸다.
“그 빛은···!”
마나가르마가 새겨주었던 월광의 룬. 그것이 빛을 내기 시작한 것이었다. 러셀은 씩 웃었다. 이제야 좀 쓸 만하군.
러셀의 대검, 나힐니르가 월광을 휘감고 휘몰아쳤다. 검은 코트와 검은 머리, 검은 칼에서 뿜어지는 은빛을 매달고 움직이는 러셀의 모습은 거대한 붓을 들고 어둠에 흰 그림을 그리는 화가 같았다. 그러나 바로 앞에서 검을 맞대는 둘라한에게는 더 없이 끔찍한 비현실주의의 극치였다.
장검의 칼날에 이가 빼곡이 나가고, 결국 깨져나갔다. 러셀은 시마렌이라는 숲지기를 모르고 또 그를 죽이고 몸을 차지한 이 둘라한 또한 모른다. 다만 알 수 있는 것은 이 머리 없는 기사의 몸놀림과 검술이 의외로 뛰어나다는 것이지만, 그 이상은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게 시마렌이 원래 갖고 있던 실력인지, 아니면 둘라한의 혼이 가지고 있던 실력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리고 러셀은 상관하지 않았다. 이놈은 칼을 들고 그를 찌르려 하고 있었다. 그것이면 충분했다.
까아앙!
둘라한의 검이 비명을 질렀고, 검신은 완전히 부러졌다. 부러져서 회전하는 하얀 검신의 반쪽에 둘라한의 공포에 질린 얼굴이, 그 반대편에는 무표정한 러셀의 얼굴이 번갈아 나타났다.
“안돼!”
대검이 둘라한의 시체를 양단했다. 목부터 사타구니까지 일직선으로 가른 일격이었다. 머리 없는 기사의 절단면에서부터 회색의 불꽃이 타올랐다. 언데드를 소멸로 이끄는 월광의 발현이었다.
카아아아아아악!
둘라한의 육신이 불타 스러지고, 그 불씨는 한 손에 들고 있던 머리에도 옮겨 붙었다. 단말마를 내지른 둘라한도 곧 허연 숯 같은 것이 되었다. 발로 짓밟자 가볍게 퍼석, 소리를 내며 부서졌다.
이히히힝.
끼아아아아.
말 소리와 레이스의 소리가 멀어졌다. 남아있던 한 기의 둘라한과 레이스가 전장에서 도망치는 소리였다. 놈들은 러셀의 검이 시마렌의 머리를 가졌던 둘라한을 가르자마자 뒤도 안 돌아보고 도망쳤다.
쫓을까, 했던 러셀은 미친 듯이 달려오는 시체들을 보며 단념해야 했다. 놈들은 마지막으로 새겨진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몸을 돌보지 않고 뛰어들었다.
“이 미친놈들이!”
“크헉!”
“하일른님!”
울카와 성기사들마저 육탄돌격을 감행하는 시체들에 질려 있었다. 거기다 하일른은 무리한 성력의 운용 때문인지 한 쪽 무릎을 꿇고 기침하고 있었다. 러셀은 뒤돌아서서 시체들을 향해 대검을 휘둘렀다.
시체들은 대검의 칼날에 닿기도 전에 월광에 바스러졌다.
러셀은 폭풍처럼 검을 휘둘러 길을 터고 시체들에게 압사당하기 직전의 울카와 성기사들을 구출해냈다. 러셀의 원군에 울카와 성기사들도 무거운 몸을 이끌고 시체들을 학살해갔다.
이윽고 모든 시체들을 재로 만들었을 때는 이미 숲 저편에서 동이 트고 있였다.
“하악, 하악, 하악······.”
“헉, 헉······.”
네 명은 모두 전신에 재와 눈이 묻어 더러운 몰골이었다. 어느새 수인화가 풀린 울카가 무릎을 짚고 허리를 숙인 채 숨을 골랐고, 두 성기사는 바위에 기대 앉아 헐떡였다.
러셀도 지친 기색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숨을 헐떡이지는 않았다. 그는 눈을 한 움큼 주워 검신에 묻은 재와 시체 조각을 닦아냈다. 그리고 코트를 털어 재를 털었다.
러셀은 하늘을 올려다봤다. 푸른 하늘은 보이지 않았다. 그저 희었다. 구름은 밝음과 어두움, 두 명암으로만 구분되었고 해의 위치는 짐작 가지 않았다.
“언데드는 태양 아래서 움직일 수 없지 않소?”
“예. 시체들은 더 이상,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겁니다.”
러셀의 물음에 앉아있는 하일른이 답했다. 안색이 창백한 것이, 조금은 쉬어야 할 듯 했다. 러셀이 말했다.
“울카.”
“어?”
“협곡까지 얼마나 남았지?”
“음. 어제도 말했지만, 여기까지 온 거면 거의 다 왔다고 봐도 돼. 두 시간이면 도착할 수 있어.”
“그럼 아침은 쉬고, 이른 점심을 먹고 출발하지. 하일른과 제스는 제대로 자지도 못했으니.”
“찬성, 찬성입니다아······. 쿨.”
제스가 힘겹게 손을 들어 올렸다가 곧 곯아 떨어졌다. 하일른도 차마 반대 의견을 말하진 못했다.
***
“엘레노아의 소개장이라고 하셨습니까?”
하일른이 그릇에 담긴 스튜를 떠먹다가 고개를 들었다.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러셀은 코트에서 소개서를 꺼내 건넸다. 하일른은 그릇을 내려놓고 그것을 받았다.
“퍽 친근하게 말하는군. 아는 사인가?”
“······.”
하일른은 소개서를 읽느라 정신이 없어 러셀의 말을 듣지도 못했다. 제스가 대신 말했다.
“하일른님은 엘레노아 사제님의 오라버니 되시는 분입니다, 러셀님.”
오빠라고? 러셀도 놀란 눈이 되어 하일른을 쳐다봤다. 그러고보니 금발과 푸른 눈, 수려한 용모가 들어오긴 했다. 러셀은 그 얼굴에서 엘레노아의 얼굴을 부분 부분 찾을 수 있었다.
소개장에 들어갈 기세로 읽던 하일른은 곧 다 읽고는 그것을 다시 러셀에게 돌려주었다.
“러셀님이······. 말해도 되겠습니까?”
러셀은 고개를 끄덕였다. 굳이 비밀로 하고 다니지 않아도 여기저기서 떠들고 다닐 것들이다. 그럴 바에는 그냥 인정하는 것이 나았다. 하일른은 고개를 끄덕였다.
“러셀님이 소문의 그 용살자셨군요.”
“예?!”
“뭐?”
제스와 울카가 놀라 소리쳤다. 하일른은 작은 미소를 띄고 말했다.
“저도 근 한 달간은 제스와 함께 헤로케닌을 찾기 위해 이곳저곳을 떠돌던 참이었습니다. 그럴 때마다 가끔씩 먼 북동부의 도시에서 용이 나타났고, 또 그 용을 죽인 전사에 대한 이야기도 들었죠. 외형은 모두 가지각색이었지만요. 그 근처에 엘레노아가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오랫동안 나와 있다 보니 편지를 받아 읽지 못했는데. 다행히 빛의 인도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이렇게 동생의 인연을 만나고, 또 은인도 만나게 되다니.”
소개서에 그런 것도 적혀 있었나? 러셀은 소개서를 펼쳐 읽지 않았기에 무슨 내용이 적혀 있는지는 몰랐다. 그렇다고 지금 읽는 것도 때가 아닌 것 같았기에, 그저 코트에 다시 갈무리했다.
“남매가 모두 교회의 일원인가.”
“예. 저와 엘레노아 모두 어렸을 적 부모를 잃고 수도원에서 자랐습니다. 다행히 신의 은총이 적지 않아 저는 성기사가, 동생은 사제가 될 수 있었지요. 과분하게도 성녀 후보로도 말이 오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만. 하하.”
하일른은 이후로도 동생의 행적을 칭찬했다. 벌써 5년 넘게 각지를 떠돌아다니며 마물을 퇴치하고, 악령을 구마하고, 병든 자들을 치료하고······. 엘레노아에 대해 말하는 하일른의 표정은 이전보다 더 밝았다.
제스는 그 표정을 보고 ‘엄숙한 하일른’ 이라는 별명 대신 ‘팔불출 하일른’이라고 고쳐 불러야 하는 건 아닌지 고민했다. 울카가 말했다.
“아까 용살자라는 건 무슨 말이야?”
“아, 그건 말이죠.”
지루하다는 얼굴을 하던 제스가 냉큼 설명했다. 오오, 하고 울카가 눈을 반짝이며 이야기를 들었다. 러셀은 제스의 말에서 여럿 과장된 이야기(용의 크기가 백 미터가 넘었다느니, 내뿜은 불이 칼리스덴의 성벽 하나를 완전히 태워서 무너트렸다느니 하는)를 들으며 피식거렸지만 굳이 첨삭하진 않았다.
울카가 새삼스러운 눈으로 러셀을 쳐다봤다.
“엄청 세구나···.”
러셀이 말했다.
“이만 일어나지. 협곡이 알아서 다가와주길 기다리는 게 아니라면.”
다른 이들도 씨익 웃으며 자리를 정리하고 일어났다. 모두들 푹 쉬고 밥을 먹어서인지 쌩쌩한 몸놀림이었다. 성기사들이야 성력으로 치유할 수 있는 자들이고, 울카는 재생력이 트롤과 맞먹는다는 수인족이다. 러셀은 말할 것도 없었다.
울카가 다시 앞장섰다. 그 뒤로 러셀, 두 성기사가 뒤따랐다. 발 아래로 버석거리는 소리가 났다. 눈과 쌓인 낙엽이 바스라지는 소리였다.
시간은 정오에 가까워지고 있었지만 구름은 여전히 두터운 층을 이루고 있어 해의 위치는 짐작되지 않았다. 그저 정수리 어딘가 떠 있지 않을까 추측할 뿐이었다.
어느 지점에 이르러서 나무들의 간격이 듬성듬성해지기 시작했다. 낙엽과 눈보다는 이제 돌들이 더 많이 밟혔다. 그리고 시야가 갑자기 확 넓어졌다.
“후아······.”
제스가 감탄사를 내며 위를 올려다봤다. 까마득한 회갈색의 절벽이 눈앞에 있었다.
수만 년 전의 대지가 나눈 격렬한 대화로 솟아오른 절벽이었다. 깎아지를 듯 높은 절벽은 올라가기도 쉽지 않아 보였다. 절벽을 타고 흐르는 바람이 그들의 머릿결을 휘날렸다.
울카가 손가락을 들어 가리켰다.
“저기야. 로고스 협곡.”
손가락을 따라 세 쌍의 시선이 모였다. 양쪽 절벽 사이로 넓게 트여있는 갈라짐이 보였다. 그들 네 사람 뿐만 아니라 열 명이 나란히 어깨를 대고 가도 넓은 길이었지만, 좌우의 광대한 길이의 절벽 때문에 상대적으로 좁아보였다. 하일른이 눈을 찌푸렸다.
“저거, 제 눈에는 안개 같이 보입니다만.”
“저도 그렇습니다, 하일른님.”
러셀과 울카도 그들이 발견한 것을 보았다. 협곡의 바닥 부분에 낮게 흐르는 흰 안개. 자연적이라 보긴 힘들었다. 그 안개는 협곡 안쪽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러셀이 말했다.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거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