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언데드
그녀가 무엇이 온다고 했는지는 러셀도 알 수 있었다. 그건 음습하며 사악한, 바닥에 낮게 깔리는 차가운 마력이었다. 그리고 그 차가운 마력을 몸에 두르고 다니는 놈들은 많지 않다.
“하일른. 제스. 일어나시오.”
러셀의 낮은 목소리는 단박에 하일른의 깊은 잠을 쫓아냈다. 벼락같이 일어나 검과 방패를 든 하일른이 아직 눈도 뜨지 않은 채 말했다.
“러셀님? 무슨 일입니까?”
“적이오.”
러셀은 그 말이면 충분하다 여겼는지 부연 설명을 덧붙이지 않았고, 하일른도 묻지 않았다. 다만 손으로 눈가를 거칠게 비벼 졸음을 씻어낸 뒤 아직 비몽사몽 중인 제스를 흔들었다.
“제스. 적이다. 무장해라.”
“···아, 알겠습니다···.”
제스 또한 눈을 비빈 후 옆에 놓아두었던 무기를 들었다. 러셀은 천천히 일어났다. 울카는 먼저 일어나서 암흑만이 가득한 숲 저편을 노려보고 있었다.
“뭐가 보이나?”
“아니. 하지만 냄새가 나. 시체 썩은 냄새. 차가운 마력의 향. 코가 떨어져나갈 것 같아.”
울카는 개처럼(안타깝지만 이렇게 밖에 표현할 수 없는) 코를 킁킁거렸다. 러셀도 숨을 깊이 들이마셔 보았으나 모닥불에서 나는 숯 향과 차가운 공기 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실망하지 않았다. 그에게는 다른 방법이 있었다.
러셀은 오랜만에 ‘눈’을 떴다. 이전 칼리스덴의 지하 미궁에서 말고는 처음이었다. 러셀은 ‘눈’을 뜨는 일을 되도록 지양해왔다.
마치 사람 눈이 불이라도 된 것처럼 타오르는 괴상한 모양새 또한 그러했지만, 결정적으로는 이 ‘눈’을 뜨고 난 후 그의 정신에 벌어지는 일들, 또 다른 사람들의 정신에 벌어지는 일들이 썩 유쾌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걸 가릴 때가 아니었고, 러셀은 스스로가 가진 능력이 두렵다고 꽁꽁 가두는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었다. 칼날에 베일 것이 두려워 칼을 잡지 않는다면 사람은 자신을 찔러오는 칼날을 막을 수 없다.
지하 미궁에서의 그때처럼 다시 한 번 보라색의 도깨비불이 러셀의 눈에서 타올랐다.
보였다. 깊은 어둠과 냉기가 가리고 있던 존재들이. 그것은 죽음을 거슬러 대지를 밟는 자들이었다. 따뜻한 심장과 폐를 잃은 자들이었다. 뜨거운 피 대신 썩은 기름을, 숨 대신 서리를 내뿜는 자들이었다.
“언데드들이군.”
“맞아. 어떻게 알았······, 너 눈 왜 그래?!”
울카가 끄덕이며 러셀에게 눈을 돌렸을 때 비명 같은 고함이 터져나왔다. 당연히 그의 눈을 봤기 때문이었다. 울카는 당장 그에게 무슨 일이 생긴 줄 알고 손을 뻗어 러셀의 양볼을 잡았다.
러셀은 울카를 내려다봤다. 그러자 이전에는 보이지 않던 것이 보였다.
울카의 몸을 감싸고 있는 흰 늑대의 영(靈). 또한 은은히 느껴지는 월광까지. 그녀는 진정 달의 자식이었다. 러셀은 오랫동안 울카와 눈을 마주하지 않으려 주의하며 그녀의 손을 잡아 내렸다.
“괜찮아.”
“···사람 눈에 불이 나고 있는데?”
“괜찮아. 지금은 앞의 일을 먼저 신경 쓰자고. 책 줘.”
“어? 어.”
울카는 삽화집을 건네면서 다시 전방을 쳐다봤다. 그러면서도 곁눈질로 러셀을 힐끔힐끔 보았다.
러셀은 울카에게 건네받은 삽화집을 코트에 넣었다. 다시 손을 뺐을 때는 나힐니르의 긴 칼자루가 쥐여져 있었다. 러셀은 다른 손도 코트 속에 넣어 마지막 서리도 빼내었다.
왼손에 거대한 외날 도끼, 오른손에 대검을 든 러셀은 그 자체만으로 무시무시했다.
“언데드들이라고 하셨습니까?”
무장을 마친 하일른이 러셀의 곁에 다가와 섰다. 러셀은 그를 쳐다보았고, 하일른도 반사적으로 그를 보다가 흠칫 놀랐다. 오랫동안 악마와 악마 숭배자, 마물들을 잡아온 하일른도 처음 보는 눈이 거기 있었다.
“···러셀 님. 그 눈은?”
러셀은 성기사의 머리 뒤에서 새어나오는 광휘를 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한 번 본 것들은 계속 볼 수 있었기에 그랬다. 보라색 도깨비불이 사라지고, 대신 마력이 부여된 눈빛이 어둠 속에서 번뜩였다.
“나중에 말하지.”
“···알겠습니다.”
하일른은 일의 경중을 가늠할 수 있는 사내였다. 동료의 불길한 눈빛보다는 바로 앞의 언데드에 대해 검끝을 돌리는 것이 낫다고 판단했고, 하일른은 자신이 한 번 정한 판단을 뒤로 물리는 법이 없었다.
뒤늦게 무장을 완료한 제스가 떡진 머리를 긁으며 다가왔다.
“뭘 나중에 말씀하신다는 겁니까? 아, 드디어 저 가방의 정체에 대해 말할 생각이 드신 건가요?”
강맹한 하일른의 주먹이 다시 한 번 제스의 정수리를 강타했다. 단말마를 지른 제스가 쭈그리고 앉아 정수리를 마구 비볐고, 러셀은 잠들기 전 제스가 한 시간 마다 가방에 뭐가 들었냐고 물었던 것을 떠올리며 쓴 웃음을 지었다.
제스는 러셀의 코트가 아공간이 부여되어 있는 귀한 마도구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렇기에 코트에 넣지 않고 굳이 어깨에 매고 다니는 러셀의 가방을 궁금해 했던 것이다. 러셀이 말했다.
“아까도 말했지만, 기회가 되면 말해주겠소. 지금 말한다고 해봐야 믿기도 어려울뿐더러, 그 진실 여부를 확인해줄 능력이 나한테는 없으니. 그보다는 점점 더 다가오는 저 시체들에 대해 먼저 생각해봅시다.”
“예? 시체?”
되묻는 제스에게 하일른이 엄숙한 얼굴로 말했다.
“제스, 네가 빛을 따르는 성기사라면, 혹은 그런 성기사가 되고 싶다면 내면의 빛을 짚어보아라. 그리고 느껴지는 바를 말해봐라.”
그 말에 제스는 눈을 감았다. 어렸을 적 아버지를 전쟁에 잃고, 뒤이어 어머니조차 병에 잃은 소년은 교회에서 자랐다. 빛의 교리를 자장가로 삼으며 살아온 소년은 꿈을 가지게 되었다. 그렇기에 청년은 이 자리에 있었다. 제스는 가슴의 빛을 느꼈다.
제스는 눈을 떴다. 그 갈색 눈에 일순 맑은 정광이 어렸다가 사라졌다.
“정말 언데드로군요. 제 주위에 가득한 사기(死氣)가 보입니다.”
하일른은 대견한 눈빛으로, 하지만 그것을 입 밖으로 말하진 않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하지만 이토록 짙은 사기라니. 헤로케닌의 능력이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을 텐데.”
“부상도 입었다고 하지 않았어?”
“그렇습니다, 울카님. 저희 교회의 성기사와 사제들이 팔 하나를 잘랐지요. 허나 지금의 상황을 보면 힘을 회복했거나, 혹은 그 이상의 것을 얻은 것으로 보입니다.”
그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무기를 손에 쥔 채 어둠을 직시했다. 모닥불의 광원은 그들의 바로 뒤에 있었다. 그렇기에 앞의 설원과 나무에는 그들 네 사람의 그림자가 바람에 흔들리는 불길에 맞춰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었다.
나무 사이로 춤추는 그들의 그림자는 마치 어둠 틈에서 손짓하는 망령들의 유혹 같았다. 이리 와서 하나가 되자는.
그리고 눈밭을 해치는 수많은 발걸음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제스가 말을 더듬었다.
“어, 이건, 그러니까.”
러셀이 간단하게 말했다.
“포위됐군.”
네 사람을 중심으로 빼곡한 무리가 에워싸고 있었다. 죽음을 거부한 망자들의 군대였다.
대부분은 괴물들이었다. 거대한 놈, 중간 놈, 작은 놈, 네발로 선 놈, 두 발로 선 놈들 등 다양했다. 하지만 모두 신체의 한 부위, 많게는 세 부위 이상을 잃은 모습들이었다.
러셀은 그 중에서 구울들의 시체들도 발견했다. 아마 전날 그와 성기사들이 해치웠던 놈들일 것이다. 알뜰하시군.
시체들의 피부는 모두 창백했다. 피가 흐르지 않아서 그렇다. 얼굴들 또한 밀랍인형처럼 딱딱했다. 표정 없는 괴물 시체들의 군대.
시체들은 하나 같이 사기와 냉기를 뿜으며 다가왔다. 근처에 흐르던 시냇물은 이미 얼어붙은 듯 물소리를 내지 않았다.
광원의 크기가 점점 줄어들었다. 뒤를 돌아본 하일른은 시체들이 내뿜는 기운에 모닥불이 점차 힘을 잃어가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어둠이 실체를 가지고 빛을 잡아먹고 있었다. 나무들도 어둠 속으로 잠겨 사라지고, 밤하늘의 별빛도 먹혀 깜박거렸다. 이대로 가다가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암흑 속에서 시체들과 싸워야 할 것이다.
하일른은 곧장 신성주문을 외웠다.
“나 여기서 어둠을 가를 휘광의 성채를 세우리라!”
하일른의 성갑 표면에서 황금빛 문자열이 새겨지더니 그대로 갑주를 타고 발아래로 흘렀다. 바닥을 타고 번진 문자들은 기하학적인 문양과 거대한 원형진을 그리며 빛을 밤하늘로 치솟아 올랐다. 삽시간에 수십 개의 조명탄을 쏜 것처럼 사위가 밝아졌다.
흐아아악!
카흐우아!
다가서던 시체들이 손이나 팔로 눈가를 가리며 물러섰다. 몇몇 놈들은 피부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기도 했다. 제스 또한 하일른의 의도를 읽고 전신에서 신성력을 밝혔다. 거기서 멈추지 않고 뒤편의 모닥불에 신성력을 불어넣어 원료로 하여금 타오르게 만들었다.
모닥불은 이제 나무가 아니라 성력을 장작으로 타올랐다. 하일른이 고개를 끄덕였다.
“잘했다.”
“예. 하지만 시체가 너무 많습니다.”
러셀이 시체들을 둘러보더니 울카에게 말했다.
“거의 다 괴물 시체들이군. 인간은 보이지 않아. 네가 이 숲과 산을 수호한다고 하지 않았나?”
“그러니까 시체들밖에 없는 거지. 아마 나랑 어머니, 다른 늑대들한테 죽은 놈들일 거야. 상처들을 보면 알 수 있어.”
과연 구울 외의 괴물들의 결손된 신체 부위들은 날붙이 같은 것에 잘려나간 것이 아니었다. 그보다는 이빨이나 발톱에 의해 뜯겨져 나갔다고 표현해도 좋을 정도의 상처들이었다.
“먹어치우진 않았나보군.”
“맛도 없는 걸 왜 먹어?”
입에는 대보았냐는 물음이 나올 뻔 했지만, 러셀은 다음 기회로 미뤘다. 시체들이 길을 터고 있었다. 그들은 무기를 든 채 시체들의 정렬된 길 가운데로 오는 것을 살폈다. 하일른이 신음성을 내뱉었다.
“둘라한······.”
그것은 해골마에 탄 중갑의 기사였다. 그 말 외에도 특이한 점이 있다면, 어깨 위가 허전했다. 기사는 한 손에 커다란 칼을, 다른 손에는 투구 없는 머리를 들고 있었다. 울카가 눈을 크게 떴다.
머리 없는 기사가 입을 열었다. 목구멍 아래에 허파가 존재하지 않음에도 철을 긁는 듯한 목소리가 나왔다.
“무도한 침입자들이여. 여기서-.”
“너, 숲지기 시마렌이잖아. 왜 그러고 있는 거지? 네 아들은?”
둘라한의 말은 울카에게 끊겼다. 울카의 얼굴은 일그러져 있었다. 노란 눈빛은 활활 타올랐고 입에는 송곳니가 빠득거렸다. 둘라한은 그런 울카를 물끄러미 보다가 말했다.
“이 몸의 원 주인과 아는 모양이군.”
그 말은 많은 뜻을 내포하고 있는 말이었다. 둘라한은 단정하듯 말했다.
“숲지기 시마렌은 죽었다.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아.”
울카가 이를 악물었다. 그때, 둘라한 뒤로 또 다른 머리 없는 기사가 말을 타고 걸어 옆에 섰다. 울카는 새로 나타난 그 둘라한에게서도 익숙한 얼굴을 보았다.
“이 자가 아마 아들이겠지. 이름이 쥬드였던가. 허나 생과 삶의 고리, 관계는 이미 끊어졌다. 여기에는 죽음의 기수이자 선고자인 둘라한만 있을 뿐이다.”
끼아아아아아!
성기사와 울카가 흠칫하며 놀라고, 유일하게 반응을 보이지 않은 러셀이 위를 올려다봤다. 투명한 몸체를 가지고 바람처럼 자유롭게 이곳저곳을 날아다니는 유령이 보였다. 레이스였다.
지상 위로는 괴물들의 시체 군단과 그들을 이끄는 머리 없는 기사 둘. 그리고 밤하늘 아래에는 고막을 찢어버릴 듯이 비명을 지르는 레이스들. 둘라한이 다시 말했다.
“무도한 침입자들이여. 순순히 무장을 해제하고 우리를 따르라. 그리하면 위대한 의지의 질서 하에 영광된 자리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러셀은 픽 웃고는 도끼와 대검을 바닥에 꽂고는 팔짱을 꼈다.
“어떤 자리?”
“러셀!”
“러셀님!”
“어, 러셀님?”
나머지 사람들이 놀라 외쳤지만 러셀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둘라한은 왼손에 든 머리를 마치 등불처럼 러셀에게 향했다. 창백한 피부에 파랗게 질린 입술이 다시 열렸다.
“너, 전사. 넌 대악마 로고스 님의 충실한 오른팔이 될 것이다. 널 얽매고 있는 자유라는 거짓된 사슬을 끊고, 진정한 구속을 선물할 것이다. 군단을 지배할 것이다. 성기사, 너희 둘에게는 타락의 환희를 온몸에 새겨줄 것이다. 빛을 짓밟고 어둠을 찬미하는 기쁨을 알게 해줄 것이다. 작은 늑대, 너에게는 로고스 님의 자식을 낳게 할 것이다. 악마와 신을 섬기는 사제의 결합, 그 사이에서 태어날 저주받을 아이가 너의 존재의 증명이 될 것이다.”
울카와 두 성기사의 표정이 희게 질렸다. 모두 저 머리 없는 기사가 내뱉은 불길한 예언의 첫 장을 상상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러셀은 둘라한의 첫 마디에서부터 지루하다는 기색을 띄더니, 마지막에 이르러선 하품을 하는 시늉까지 했다.
“뻔한 레퍼토리군.”
러셀은 주저 없이 도끼와 대검을 들어올렸다. 하일른도 검을 치켜세웠다.
“악마들 하는 말이 다 그렇습니다.”
울카는 두 손을 늑대의 것으로 변화시키더니, 그 끝에서 단검보다 날카로운 다섯 개의 손톱을 빼내었다.
“끝나면 귀를 씻어야겠어.”
제스는 한숨을 푸욱 쉬더니 성갑을 추스르고 방패와 검을 들어 자세를 잡았다.
“모두 살아서 아침을 보자고요.”
시체들이 달려들었다.
***
“제스! 왼쪽!”
“우아악!”
하일른의 경고에 제스가 냅다 방패를 휘둘렀다. 신성력이 담긴 공격에 시체가 한줌 재로 화하며 부서졌다. 언데드와 신성력은 극상성인 까닭이다. 수가 군대에 필적할 정도로 많음에도 성기사가 버틸 수 있었던 것은 그런 힘의 논리 덕분이었다.
난전 중에 제스에게 경고를 날릴 수 있을 정도로 하일른의 공격과 방어는 매끄러웠다. 방패와 검은 때때로 서로 반대의 공격법을 가지며 언데드를 박살냈다.
검으로 시체 트롤의 몽둥이를 막고, 방패로 정강이를 친다. 정강이는 단번에 부러져 숲 저편으로 나가떨어졌다.
다리가 날아가 앞으로 넘어지는 시체 트롤을 피하는 동시에 검을 휘둘러 머리를 날렸다. 또 하나의 언데드가 가루가 되어 하얀 눈 위에 쌓였다.
하일른은 제스의 무사함을 확인하고 다른 동료들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울카는 그야말로 숲을 자기 안방처럼 날뛰었다. 태어나 자란 곳이니 당연했다. 땅 위를 달리다가도 나무를 밟으며 뛰어올라 가지와 가지 사이를 타넘었다. 그러면서 달빛이 깃든 손톱을 그으니 시체들은 퍽퍽 쓰러졌다.
그녀 또한 달의 여신을 섬기는 사제로서 신성력을 다룰 줄 아는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하일른은 한쪽을 바라봤다. 그곳에는 전차가 있었다. 도끼와 대검을 휘두르며 다가오는 모든 것을 분쇄하는 전차.
제스는 방패로 공격을 막다가 일격일격 확실한 검격을 날리고, 하일른은 방패와 검이 일체가 된 매끄러운 연격을 휘두른다.
울카는 늑대처럼 날쌘 몸놀림으로 나무 사이를 타는 입체적인 기동으로 시체들의 목숨을 수확한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화려한 건 단연 러셀이었다. 양손에 쥐어진 무기들은 한순간도 머무르는 법이 없다.
시체들의 틈바구니 한가운데서 분투하는 러셀의 위용은, 어울리지 않을지 모르나 아름다웠다. 최소한 하일른은 그렇게 느꼈다. 전투가 아름답다니. 누더기 같은 몸뚱아리들을 도끼로 박살내고 대검으로 양단하는 모습이 아름답다니.
아름다움을 느낀 건 하일른 혼자가 아니었다. 울카 또한 느꼈다.
울카는 두 개의 시체 오크가 날린 창과 검을 손으로 잡은 후 바스라트리고, 각각의 목을 틀어쥐었다가 한 번에 뽑아냈다. 그녀 주위의 언데드는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한숨을 돌린 사이 울카는 러셀을 시선으로 쫓았다.
무기를 들지 않고 좁은 원 안에서 자신의 모든 공격을 받아냈던 러셀이다. 그런 그가 모든 제약이 사라진 곳에서는 어떻게 움직일까? 울카는 내심 그런 궁금증을 가졌고, 지금 그 답을 얻었다.
창날을 옆구리로 비틀어 피하고, 마지막 서리를 내리쳤다. 시체는 반으로 갈라져 죽었다. 전방에서 무수한 칼, 발톱이 전진해왔다. 똑같이 러셀은 자신의 커다란 발톱을 들이밀었다. 대검이 선형을 그리며 칼과 손목을 자르거나 뭉갰다.
뒤에서 덮쳐 목을 깨물려는 놈은 팔꿈치를 내질러 아래턱을 날렸다. 윗턱 밖에 남지 않은 놈이 아직도 씹을 수 있다고 믿는 것처럼 이빨을 코트에 콩콩 찧었다.
물론 이빨은 코트에 박히지 않고 오히려 부서졌다. 시체는 도끼의 칼날에 걸려 바닥으로 내리쳐졌다가 러셀의 발에 으스러졌다.
피 한 방울 튀기지 않고, 시체 또한 괴성이나 비명을 내지르지 않는다. 정련된 병사들처럼 합을 맞추지도 못했다. 다만 묵묵하게 자신의 몸을, 혹은 무기를 내던져올 뿐이었다.
그에 맞서는 러셀도 조용하다. 일체의 기합이나 웃음, 조롱이나 도발도 없이 마주 무기와 몸을 부딪쳤다.
“건방진!”
그때 멀리서 시체들의 덧없는 죽음들을 지켜보던 둘라한 하나가 달려왔다. 해골마의 코에서 푸른 불꽃 같은 기운이 넘실대고, 그건 둘라한도 마찬가지였다. 옆구리에 끼인 머리의 눈코입에서 푸르스름한 불꽃이 분출했다.
달려드는 모든 시체들을 분쇄해 널찍해진 원형의 공간 안에서, 러셀은 달려오는 둘라한을 보고 자세를 잡았다. 크라이가 있었다면 볼 만한 마상전투를 할 수 있었을 텐데. 그 짧은 상념이 자신을 향해 휘둘러오는 커다란 칼에 대한 감상의 전부였다.
콰앙!
놀랍게도 러셀은 제자리에서 공격을 버텨냈다. 해골마가 달려온 속도와 중갑의 머리 없는 기사가 가진 무게, 힘을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는 이뤄냈다. 그리고 러셀의 공격이 이어졌다.
낮게 베어오는 외날의 도끼에 해골마의 다리가 와자작 부러져나갔다. 해골마는 일개 뼈 무더기가 되어 주저앉았고, 그 위에 타고 있던 머리 없는 기사는 볼썽사나운 모습으로 나가떨어졌다.
데구르르.
러셀은 자신의 발치로 굴러온 것을 내려다봤다. 시마렌이라는 이름을 가졌을 숲지기의 머리였다. 지금은 그 혼과 육을 잃고 사악한 마법에 의해 죽음의 기수가 되어버린 괴물.
러셀은 그 머리를 들어 올렸다.
“죽어라!”
기다렸다는 듯이 조용히 있던 머리가 입에서 푸른 불꽃을 쏟아냈다. 그러나 푸른 불꽃은 러셀의 얼굴 바로 앞 몇 센치를 놔두고 전진하지 못했다.
푸른 불꽃이 흩어진 곳에는 형형한 자색의 눈이 빛나고 있었다. 러셀이 말했다.
“딱 차기 좋은 크기야.”
둘라한은 그게 무슨 뜻인지, 안면으로 날아오는 러셀의 발등을 보며 깨달았다. 밤하늘로 검은 머리통이 높이 차 올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