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빙계의 문
발아래에는 흰 안개가 흘렀고, 머리 위로는 흰 구름이 흘렀다. 협곡을 걷는 자들은 위아래로 하얀 어둠에 포위된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좌우로 높이 솟은 회색의 절벽들을 끼고 걸어가고 있다면 더욱 그랬다. 없던 폐소공포증이 생길 것 같았다.
제스가 몸서리를 치며 발목을 감싼 안개를 내려다봤다.
“흑마력이나 사기 같은 건 느껴지지 않긴 하지만, 이건 뭐 얼음물에 발을 담근 것 같군요. 너무 차가운데요.”
울카가 심드렁하게 말했다.
“난 맨발이야. 엄살 부리지마.”
“하하, 그렇게 말씀하시면 할 말이 없군요···.”
안개는 그냥 안개가 아니었다. 짙은 냉기가 스며들어 있었다. 아마 보통 사람이 발을 디뎠으면 바로 얼어붙어버렸을 것이다. 하일른과 제스, 울카는 각자가 따르는 신의 힘을 빌려 냉기를 몰아냈다. 러셀은 그냥 마력의 순환을 빠르게 하고 코트를 추슬렀다.
허나 냉기는 협곡 안으로 들어갈수록 짙어졌다. 겨울임을 감안해도 심했다. 정상적인 자연 현상은 분명 아니었다.
길은 울퉁불퉁하고 곳곳이 바위와 돌멩이로 가득 차 있었다. 말발굽은 확실히 걷기 힘든 길이었다. 그들은 넘어지지 않기 위해 신경을 기울이며 걸어야 했다. 안개 때문에 바닥도 잘 보이지 않으니 더욱 그랬다.
“우왁!”
기어코 제스가 발을 하늘로 뻗으며 나동그라졌다. 갑주가 바닥과 돌에 부딪히며 굉장한 소리를 냈다. 조용한 절벽 사이로 소리가 메아리치며 울렸다. 제스는 갑옷 틈 사이로 파고드는 안개의 차가움에 비명을 질렀다.
“차가워어!”
“호들갑 그만 부리고 손을 잡아라, 제스.”
하일른이 제스를 일으켜 세웠다. 제스는 투덜거리며 일어나더니 성력을 일으켜 흰 연기 같은 냉기를 몰아냈다. 제스는 자신이 넘어졌던 지점을 발로 더듬더니 문질렀다. 마찰력이 없는 것처럼 슥슥 미끄러졌다.
“얼음이 있군요. 여기 물이라도 흘렀나보죠?”
울카가 대답했다.
“이 위쪽으로 호수가 있었어. 달의 여신, 일루나가 머물렀다는 전설이 전해지는 호수였지.”
“과거형이군요?”
“말라붙어버렸으니까. 악마와의 전투로. 이 계곡도 그 전투로 인해 더 커졌다는 전설도 있어.”
두 성기사는 새삼스런 눈으로 절벽을 올려다봤다. 어떻게 보면 그들이 서 있는 협곡은 마치 거대한 칼날이 대지를 내리친 흔적 같기도 했다.
협곡 안쪽에서 바람이 불어와 그들의 뺨을 스쳤다. 스산하고 차가운 바람이었다. 울카가 말했다.
“아주 아름다운 호수였다고 해. 낮에도 아름답지만, 진가는 밤에 펼쳐졌다고 하지. 은색과 푸른색의 달빛이 호수에 내리면 그 아래에 쌓인 투명한 돌들이 반사해서 마치 호수 자체가 빛을 내뿜는 것 같았다고 했어.”
“어머니가 말해줬나?”
울카는 러셀을 쳐다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응.”
“아쉽군요. 남아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사라진 호수에 대한 아쉬움은 그렇게 짤막한 말로 끝났다.
시간은 이제 정오를 넘긴 것이 확실했다. 그들은 더 깊숙이 협곡 안으로 들어갔다. 길은 굽이굽이 졌고 때때로 획 꺾이기도 했다. 안개는 여전히 발목에만 이르는 낮은 높이에서 머물렀다.
절벽은 끝없이 높아졌고, 햇빛이 닿지 못하는 그늘진 그림자가 짙게 그들 머리 위를 드리웠다. 러셀은 이 협곡 어딘가에는 수백 년, 혹은 수천 년 이상 햇빛을 받지 못한 땅도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이제 하늘은 아주 기다란 줄, 혹은 끈처럼 보였다. 협곡 속에서 그들은 한없이 작아지는 자신을 추슬렀다. 자연은 너무 컸고, 거대했고, 무지막지했다.
문득 러셀이 멈췄다. 협곡에 도착했기에 울카는 더 이상 길잡이를 맡지 않았다. 러셀이 가장 전위, 중간에 하일른, 그리고 울카와 제스가 후위를 맡았다. 그래서 러셀이 멈추자 자연히 뒤의 세 사람도 멈췄다.
“러셀님? 왜 그러십니까?”
“바람이 불지 않아.”
바람이라니? 어리둥절했던 하일른은 곧 이 깊은 협곡에 바람이 불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놀랐다. 본래대로라면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바람이 절벽의 경사면을 타고 그들에게 불어야 했다.
돌풍 같은 바람까진 아니더라도 산들 바람 정도는 불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 공기의 흐름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렇군요. 바람이 멈췄습니다.”
그때, 러셀은 저 앞에서 뭔가가 날아오는 것을 발견했다. 협곡에 들어섰을 때부터 계속 눈에 마력을 담고 있었기에 러셀은 그것이 무엇인지 곧바로 알아챘다. 그건 커다란 흰 늑대였다.
“울카!”
울카를 부르며 러셀이 뛰어올라 날아오는 마나가르마를 안았다. 꿈속에서 보았던 것과 달리 크기가 작았기에 가능했다. 실려 있던 힘이 강해 러셀은 마나가르마를 안고도 수 미터를 뒤로 날아가다가 겨우 바닥에 발을 댈 수 있었다.
“엄마!”
울카가 경악성을 내지르며 달려왔다. 러셀은 바닥에 내려놓으려다가 안개가 가득 차 있는 것을 보고 울카에게 말했다.
“이 안개 좀 치워봐. 놓을 자리가 없다.”
“아, 알았어.”
“돕겠습니다.”
곧 울카와 성기사들의 성력이 안개를 몰아냈다. 러셀은 커다란 늑대를 조심스럽게 바닥에 눕혔다. 마나가르마의 상태는 좋지 않았다. 탐스렀던 흰 털 곳곳이 붉은 피에 젖어 있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안 좋은 것은, 몸통에 난 큼직한 구멍이었다. 그곳에서 피가 철철 흐르고 있었다.
“엄마!
울카가 차가운 바닥에 무릎을 꿇으며 마나가르마를 흔들었다. 그녀의 볼을 타고 무수한 눈물이 길을 그리며 아래로 떨어졌다. 흰 늑대가 눈을 떴다. 푸른 눈동자가 울카를 보고 둥글게 휘어져 눈웃음을 그렸다.
그때, 마나가르마의 몸이 점차 빛으로 화하기 시작했다. 빛 속에서 마나가르마는 한 아름다운 은발 여인의 형상으로 변했다. 여인으로 변한 마나가르마가 푸른 눈동자로 울카의 호박빛 눈을 바라봤다.
“내 딸. 데오우르카.”
“어, 엄마, 잠시만. 내가, 내가 낫게 해줄게요.”
펑펑 울던 울카가 마나가르마의 배에 손을 얹어 달의 성력을 일으켰다. 은빛과 푸른빛이 그녀의 손에서 흘러나왔다.
하지만 상처는 치유되지 않았다. 러셀은 구멍 난 상처에서 새어나오는 검은 기운을 내려다봤다. 그것이 상처의 치유를 막고 마나가르마의 몸을 잠식하고 있었다.
“그만 두렴. 헛되이 힘을 낭비하지 말거라.”
“엄마······.”
마나가르마는 울카를 말리고는 고개를 돌려 두 성기사를 보았다.
“태양의 아이들이구나.”
하일른과 제스가 한 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달의 사도를 뵙습니다.”
“여기까지 와주어 고맙다. 험난한 길이었을 텐데.”
“빛을 따름에 있어 망설이지 않았습니다.”
“쉽지 않은 마음가짐이지. 올곧은 빛이 언제나 가슴 속에서 빛나기를 빈다.”
마나가르마는 이제 러셀을 보았다.
“내 딸의 엉덩이를 무자비하게 때렸더구나.”
“누가 훈육을 제대로 하지 않았더군.”
그녀가 맑게 웃었다.
“알고 있다. 그렇기에 나도 박수를 쳤다. 내 아이가 그렇게 서글피 우는 모습은 처음 보았다만, 일견 후련하기도 했지. 나도 어렸을 때는 그러했으니까.”
“당신도?”
“누구나 미숙하던 시절은 존재하지. 그 위대했던 용과 거인들도 처음부터 지혜롭고 강력하진 않았을 것이다. 시간과 경험이 도와주었을 테지···. 러셀.”
“듣고 있어.”
-내 딸을 부탁한다. 너라면 믿고 맡길 수 있을 것 같아.
마지막 말은 목소리가 아니라 마력에 실려왔다. 러셀은 그 간절한 눈을 보며 차마 고개를 저을 수 없었다.
-잠시 동안이라면.
-그것이면 되었다.
마나가르마는 마지막으로 울카를 바라봤다.
“저 앞에 악마가 있다. 내가 최대한 억눌러 놓았으나, 악마 숭배자의 힘이 간특해 금방 풀려날 것이다. 최대한 빨리 처치하도록 해라.”
“엄마!”
울카의 눈에서 다시 눈물이 넘쳐흘렀다.
“괜찮다. 오래전부터 이렇게 될 거였다. 때가 이르긴 했지만, 지금도 나쁘진 않구나.”
울카가 여인의 품에 고개를 묻었다. 울카는 어머니의 심장 소리가 가냘퍼지는 것을 들을 수 있었다. 마나가르마는 손을 들어 울카의 등을 두드렸다.
“내 마음은 너에게 있다. 처음 널 품에 안았을 때부터 그랬지. 넌 착하고, 좋은 사람이다. 네 마음속에는 언제나 내가 살아갈 거고, 넌 내 말을 들을 수 있을 거다.”
“제가요?”
“그래.
“저, 전 아직 어머니가 없으면 안돼요. 어머니 없이 어떻게 혼자 걸어요?”
“네 안의 선을 쫓거라. 네 속에서 널 바라보는 눈을 마주보고,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렴. 그러면 다시 길을 찾을 수 있을 거야. 넌 내 딸이니까.”
그리고 마나가르마는 밝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달처럼 환한 미소였다.
***
울카는 길 한 쪽에 돌로 기묘한 문양과 문자를 적었다. 그리고 그 위에 마나가르마의 몸을 눕혔다. 은은한 빛이 문양에서 빛나며 반구형의 막을 형성했다. 이 보호막이 그녀의 몸을 지킬 것이었다.
울카는 손으로 쓱쓱 눈물자국이 찍힌 볼을 닦아냈다. 드러난 그녀의 눈은 더없이 흉흉한 빛을 내뿜었다.
“가자.”
러셀과 성기사는 말없이 출발했다.
그들은 곧 협곡의 끝에서 거대한 굴 입구를 발견했다. 굴 입구는 협곡의 벽 중간쯤에 나 있었고, 그 중턱에 검은 로브를 입은 남자가 있었다.
남자의 꼴은 처참했다. 은빛의 창과 사슬들이 그를 꿰뚫고 결박한 채 벽과 바닥에 고정되어 있었다. 복부와 허벅지, 팔에 창이 박혀 있었고 팔과 몸통은 사슬에 칭칭 감겨져 있었다. 울카가 눈을 크게 떴다.
“어머니의 힘이야.”
마나가르마의 힘이 악마 숭배자를 감금하고 있었다.
그때, 남자가 후드가 덮인 머리를 들었다.
“지긋지긋한 성기사. 결국 여기까지 왔군.”
쇠를 긁는 듯한 탁한 음성. 하일른은 이를 갈며 말했다.
“너, 헤로케닌! 람파스 마을을 기억하느냐!”
후드의 남자는 그들을 내려다보며 고개를 약간 옆으로 기울였다. 그러다가 생각났다는 듯이 말했다.
“그 작은 마을 말이군. 드물게도 친절한 사람들이 많았지···. 그 마을에는. 아직도 선한 표정들이 눈에 보이는군. 이름도 기억나. 말리, 할티론, 체스터···. 모두들 내 속에 잘 있다네. 행복에 겨워 비명을 지르고 있지.”
하일른이 부들부들 떨었다. 제스는 처음으로 격분에 찬 그를 보고 놀랐다.
헤로케닌은 후드자락을 쓴 그대로 그들을 주욱 둘러봤다. 그런 그가 울카를 발견하고 말했다.
“작은 늑대야. 네 어머니의 죽음을 보았느냐. 그 늑대는 필사의 각오로 날 이리 묶었다. 훌륭했지만, 곧 스러질 것이다.”
헤로케닌은 그대로 팔을 들어 사슬 하나를 끊었다. 나머지들이 팽팽해졌지만, 그의 말대로 끊어지기 까지 얼마 남지 않은 듯 보였다.
까득, 하고 울카의 이빨이 갈리는 소리가 났다. 하지만 그녀는 저주의 말을 내뱉지도, 널 죽이겠노라 울부짖지도 않았다. 그저 주황빛 눈에서 살기를 일으키며 주먹을 쥐었다. 헤로케닌이 낮게 웃음소리를 흘렸다.
“개처럼 바로 짖지 않은 것은 칭찬해주겠다. 네 미래는 여기서 갈라진다. 네 어미처럼 처참하게 죽던가, 악마의 씨를 배던가.”
“난 안 보이냐.”
울카가 못 참고 달려들기 직전, 러셀이 그녀의 어깨를 붙잡으며 말했다. 헤로케닌이 러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래. 예상치 못한 변-”
그리고 러셀은 벼락같이 움직여 마지막 서리를 던졌다. 도끼는 러셀의 막대한 힘과 마력을 받아 빙글빙글 돌며 헤로케닌의 허리를 갈라버렸다.
쾅!
협곡 벽에 마지막 서리가 박히며 굉음을 토했다. 벽이 쩍 갈라지며 돌조각을 우수수 떨어트렸다. 절반으로 나뉜 헤로케닌은 실에 묶인 인형처럼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성기사 두 명과 울카가 입을 떡 벌리고 도끼와 러셀을 번갈아봤다. 제스가 겨우 입을 열었다.
“···어, 방금은 대화하는 장면 아니었나요?”
러셀은 도끼를 다시 손으로 소환하며 말했다.
“난 빠른 진행이 좋소.”
흐하하하하-.
별안간 웃음소리가 들렸다. 그건 위아래로 나뉘어버린 헤로케닌에게서 나는 소리였다. 상반신과 하반신이 천천히 달라붙었다. 후드가 벗겨져 헤로케닌의 머리가 드러났다.
머리카락은 하나도 없는 대머리였고, 온갗 흉터와 상처가 가득했다. 입가를 귀밑까지 찢으며 웃은 헤로케닌이 섬뜩한 미소를 지엇다.
“좋아! 빠른 진행이라! 원하는 대로 해주지!”
그 상식을 벗어난 짓거리에 하일른이 씹어뱉듯이 말했다.
“이미 완전히 악마에 잡아먹혔군. 저건 이미 인간도 아닙니다.”
“그런 것 같군.”
러셀은 요즘따라 죽어도 죽지 않는 놈들을 너무 많이 상대하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오른손에 나힐니르를 쥐었다. 월광의 룬이 빛을 내고 있었다.
성기사들과 울카도 각자 전투를 준비하며 자세를 잡았다. 울카는 손발을 늑대의 것으로 변화시키고 길쭉한 손톱, 발톱을 뽑았다. 은은한 달빛의 그곳에 머물렀다.
그들이 막 달려들기 직전, 헤로케닌이 이상한 몸짓을 보였다. 배가 꿀렁이더니, 그대로 구역질을 하려는 듯이 몇 번 몸을 뒤틀었다. 그리고 식도를 타고 뭔가가 오르더니 그대로 입에 머금어졌다. 악마 숭배자가 입술을 벌렸다.
하늘색의 빛을 내뿜는, 기하학적인 문양이 음각된 돌이 이빨에 물려 있었다.
러셀과 울카, 제스가 저 놈이 뭐하나, 하는 얼굴로 봤을 때 유일하게 하일른이 그 돌을 알아보고 경악성을 내질렀다.
“저 돌! 막아야 한다!”
“하, 하일른님?”
제스가 의문성을 토하기도 전에 하일른이 뛰쳐나갔다. 전신에 성력을 휘감고, 왼손에 사각 방패를 오른손에 찬란한 검을 든 성기사가 바닥을 박차고 뛰어올랐다. 하지만 그가 검에 담긴 성력을 쏘아내기도 전, 헤로케닌이 돌을 이빨로 부숴버리는 것이 더 빨랐다.
그가 속삭였다.
“늦었다.”
파삭.
단단해 보이던 생김새와 다르게 돌은 유리 부서지는 소리를 내며 손쉽게 깨져나갔다. 헤로케닌은 남은 잔해를 앞에 퉤, 뱉었다.
그리고 엄청난 소음이 모두를 덮쳤다.
까가가가가가가-
수백 개의 철판을 동시에 긁으면 이런 소리가 날까. 민감한 청력을 가진 울카가 펄쩍 뛰어오르며 두 귀를 완전히 감싼 채 웅크리고, 하일른과 제스도 성력을 일으키면서 귀를 막았다. 러셀도 표정을 일그러트리며 돌이 깨진 곳을 응시했다.
소음은 멈추지 않았다. 계속 커져갔다. 돌에서 수십 갈래의 연기와 마력이 피어올랐고, 그것은 허공에서 뭉쳤다.
제스가 악을 질렀다.
“하일른님! 저게 뭡니까?!”
헤로케닌이 돌을 부수는 것을 막지 못한 하일른이 다급히 뒷 걸음질로 그들에게 다가왔다. 그가 소리쳤다.
“차원석이다!”
“차원석이요?!”
“다른 차원의 문을 여는 매개체! 룬석!”
그들이 고함을 지르고 있을 때, 러셀의 눈은 다른 것을 보고 있었다.
세상의 한쪽이 오목하게 파고 들어간다. 중력이 그곳을 중심으로 이끌렸다. 근처의 암석들이 ‘떨어졌고’, 구멍 속으로 사라졌다.
러셀은 ‘눈’이 스스로 떠졌다는 것을 알았다. 의지가 일지도 않았는데 알아서 떠진 건 어렸을 때 이후 처음이었다.
이윽고 소음이 멈췄다. 하지만 그건 상황이 호전되었다는 신호가 아니었다.
룬석에서 흘러나온 마력은 세상의 한 점을 왜곡하고 비틀어 하나의 지옥문을 만들어냈다. 테두리에서 하늘색 불꽃이 타오르고, 중심으로 갈수록 암흑이 들어찬 문이었다.
헤로케닌이 광소를 터트렸다.
“이 세상에는 이제 거인도, 용도 없다! 수호자들은 모두 스러지고 사토 속에 묻힌 지 오래, 세상의 균열은 예정되었다. 이제 힘의 논리로만 대화하는 시대가 오리라!”
저 새끼는 아까부터 뭔 알아먹지 못할 소리만 하고 있어? 당장이라도 도끼를 던져 이번에는 세로로 갈라주고 싶었으나, 그럴 수 없었다.
차원문에서 냉기를 내뿜는 마물들이 뛰쳐나오기 시작했다.
곰과 늑대가 반반 섞인 듯한 괴이한 모습의 마물이 입에서 서리를 뿜어댔다. 깃털 날개가 달린 눈알이 허공을 유영했고, 두 발로 선 망자들이 얼음 검과 방패를 들며 걸어 나왔다.
하일른이 외쳤다.
“빙계, 뤼플헤임의 문입니다! 안개를 보고 떠올렸어야 했는데!”
“자신을 탓하는 건 나중에 하고.”
러셀은 아쉽게 마지막 서리를 코트에 집어넣었다. 도끼가 자신도 적들을 찢어버리고 싶다는 듯 웅웅 떨렸다. 하지만 시체들을 상대로 이미 별 효용이 없음을 알았다. 저 얼음지옥의 악마들을 상대로도 썩 좋을 것 같진 않았다.
마물들은 새로운 세상의 따뜻한 공기가 처음인 듯 코를 킁킁거렸다. 몸을 움직이는 건 손쉬웠다. 협곡 바닥에 가득 찬 냉기의 안개 덕분이었다.
마물들은 자기들끼리 알아먹을 수 있는 괴이한 언어를 주고받더니, 기쁨의 괴성을 질러댔다. 그 기쁨에는 산 것들을 용납할 수 없는, 먹어 치우자는, 갈가리 찢어버리겠다는 욕망만이 가득했다.
마물들은 곧장 돌진해왔다. 러셀과 성기사, 울카가 서 있는 협곡의 길을 향해서였다.
수십, 수백의 마물들이 장정 열도 나란히 설 수 있는 길을 빼곡이 채우며 달려왔다.
두두두두두- 하고 대지가 울리는 소리를 냈다. 소리는 양옆의 절벽에 부딪히며 끝없이 메아리를 만들었다. 하일른이 그 모든 소리를 뒤엎을 정도로 커다랗게 외쳤다.
“저 마물들을 협곡 밖으로 내보낼 순 없다!”
하일른과 제스가 동시에 한 손을 들어 기도문을 외웠다. 찬란한 성력이 전신에서 불꽃처럼 타올랐다.
“빛이 이곳에 임하리라!”
하얀 하늘에서 거대한 빛줄기가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