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그의 이름
***
그 시각, 미궁 바깥의 하늘은 어느새 붉은 색으로 물들고 있었다.
겨울의 해는 짧은 탓이다. 다만 노을의 빛이 하늘에 잔존하고 있었고, 그것만이 아직 닥쳐올 위협을 뒤로 미루고 있었다.
프레드릭 성주는 성벽에 서서 절망이 깃든 한숨을 내뱉었다.
“올해는 분명 마가 낀 거야···. 그렇지 않고서는 설명이 안돼.”
성주의 마법사, 요정 알베르트가 옆에서 말했다.
“살풀이 거하게 한다고 생각하십시오, 성주님. 내년에는 좋은 일이 올 모양이지요.”
프레드릭 성주가 홱 하고 고개를 돌려 알베르트를 노려봤다.
“내년? 내녀언? 당장 내일의 해도 볼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마당에! 내년은 무슨 내년이야!”
“대륙 반대편으로 공간이동 시켜드릴까요? 그럼 내일의 해는 보실 수 있을 겁니다. 아니, 어제의 해인가?”
“크아아악!”
“아, 아빠! 참아요! 알베르트 님도 아빠 속 그만 긁어요!”
제오나는 요정 마법사의 멱살을 쥐고 흔드는 성주를 간신히 떼어놓았다. 두 남자는 서로를 거하게 싸우고 난 뒤의 이웃집 친구를 보듯이 하다가 동시에 고개를 돌려버렸다.
제오나는 머리를 짚었다. 도대체, 남자라는 생물은 언제 철이 든단 말인가?
성벽에는 그들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엘레노아, 이블린, 렉시도 있었다. 또 황녀의 기사들도 자리했다. 지켜야 할 주군을 잃은 그들은 침울한 기색이었지만, 그렇다고 미증유의 위기 앞에서 궁상을 떨지도 않았다.
그때 레필리아 검술 길드의 길드 마스터, 카렌 레필리아가 성벽에 올랐다. 그녀는 무도복을 입고 있지 않았다. 사슬이 연결된 가죽갑옷으로 전신을 가리고 허리춤에 장검을 멘, 완전 무장한 차림이었다.
카렌은 성주 앞에서 멈춰 말했다.
“병력의 집결을 완료했습니다. 길드원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싸울 수 있는 자들은 모두 모았습니다.”
프레드릭 성주는 침울한 눈으로 카렌을 쳐다봤다.
“미안하네. 이리 불러서.”
카렌은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부르지 않으셨어도 제가 먼저 나섰을 겁니다.”
그들은 성벽 너머를 쳐다봤다. 도시 칼리스덴은 북동부에 위치한 도시고 북쪽부터 동쪽, 남쪽으로 이르기까지 넓은 숲을 가까이 두고 있는 위치에 있다.
일명 칼라스 숲이라고 불리는 저 숲에는 그야말로 다종다양한 동물들과 괴물들이 생태계를 이루며 살고 있다.
수는 짐작할 수도 없이 많고, 겨울이 가까워져 오면 식량을 구하기 위해 바깥으로 나오는 괴물들을 토벌하는 일이 연례행사처럼 찾아왔다.
하지만 이것은 단순히 토벌대를 꾸린다고 해결되는 일이 아니었다.
성벽 너머에는 또다시 괴물들이 있었다.
며칠 전 사악한 용족이 이끌고 온 것보다 배는 많은 숫자의 괴물들이 임야를 넘어 가득히 몰려오고 있었던 것이다.
황녀와 러셀이 포탈에 휘말려 어딘가로 사라지고 난 후, 기사들과 마법사들은 백방으로 그들을 탐지하려 노력했지만 헛수고였다.
소득을 얻지 못 한 채 성으로 모여 앞으로의 일을 의논하려 하던 찰나, 성벽으로부터 파랗게 질린 얼굴의 경계병이 달려왔다. 그리고 이런 상황이 된 것이었다.
프레드릭 성주가 어두운 목소리로 말했다.
“알베르트. 해가 지기까지 얼마나 남았나.”
“앞으로 두 어 시간 정도 남은 것 같습니다.”
태양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괴물들의 습성 상 아직 그늘 속에서 미적거리고 있지만, 알베르트의 말마따나 그 시간은 오래 걸리지 않을 것이다.
“빌어먹을. 아직 황녀 전하도 찾지 못했는데 이 난리라니. 이것도 그 광룡의 짓인가?”
“아마 그럴 가능성이 높습니다. 고대부터 용은 거인과 같이 모든 피조물들을 지배한 역사가 있는 종족입니다. 사람보다는 동물과 괴물들의 본능에 그 기억이 뿌리 깊게 남아있겠지요. 우리는 들을 수 없는 용의 울림에 모여든 것이 아닐까 추측됩니다.”
“그리고 난 자네의 추측을 깰 수 없다는 것이 저주스럽군···.”
성주와 요정 마법사의 옆, 엘레노아가 무표정으로 서 있었다. 그 오른쪽에는 순서대로 이블린과 렉시가 있었다. 렉시가 말했다.
“···루시, 괜찮겠지?”
이블린은 피식 웃었다. 이 상황에도 제대로 이름을 부르지 않는 흑요정의 고집이 귀여워서.
“괜찮을 거예요. 전 그 남자가 어디서 죽는다는 게 믿기지가 않는데요.”
“그래. 맞아.”
렉시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조용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는 살아있습니다.”
렉시는 이블린을 쳐다봤고, 이블린은 옆을 쳐다봤다. 엘레노아는 여전한 무표정이어서 말을 했다고는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분명 그녀의 목소리였고, 엘레노아는 그를 증명했다.
“살아있어요.”
“어, 어디에?”
“그건 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저의 주께서 이르시길, 그는 아직 살아있다고 하시는군요.”
렉시는 그저 좋아라했지만, 이블린은 믿을 수가 없었다. 일개 사제가 신의 말을 듣는단 말인가? 물론 일개 사제가 아니라 성녀 후보이긴 했지만, 그게 성녀라는 말은 아니다.
“언제 만날 수 있을지는요?”
“머지않아 볼 수 있을 겁니다.”
엘레노아는 예언을 하듯이 그 말만 내뱉고는 입을 다물었다.
많은 예언들이 그렇듯이, 질문을 해도 답을 얻을 수 없을 것을 알았기에 이블린도 그저 앞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녀가 중얼거렸다.
“죽은 후에나 볼 수 있는 것만 아니면 좋겠네요.”
서쪽을 등지고 있었기에 성벽에 선 자들은 역광이었다. 붉은 빛을 등으로 받으며, 사람들은 동쪽을 쳐다봤다.
동쪽은 이제 막 푸르스름한 하늘이 짙어지고, 별빛들이 하나 둘 씩 나타나고 있었다.
이제 저 달과 별빛만이 밤하늘을 수놓게 되면, 괴물들이 달려올 것이었다.
전투가 머지않았다. 밤에 펼쳐질 오랜 전투가.
***
러셀이 말했다.
“그 예언을 한 예언자는 누구요?”
“이야. 그거 참 좋은 질문이군.”
“···보통 질문에 그렇게 답하는 경우는 한 가지던데.”
“맞아. 나도 모른다네.”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루드비히는 미안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정말이야. 그, 혹은 그녀는 온몸을 가리는 로브로 뒤집어쓰고 나타났네. 내가 겨우겨우 이니스를 데리고 데-칼라스로 날아왔을 때였지.”
루드비히는 식은 차를 후루룩 마셔버리고는 말을 이었다.
“스스로를 예언자라고 한 그자는 이때까지 우리에게 일어난 일을 모두 맞췄지.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비밀까지 모두 알고 있었어. 그때 이니스는 정신과 육체 모두 정상이 아니었고, 나만이 그나마 멀쩡하게 그의 말을 들었다네.”
쪼르르륵. 주전자 안의 차는 여전히 뜨거웠다. 루드비히는 자신의 것과 러셀, 유리아의 빈 잔을 다시 채웠다.
“그가 말했지. 이니스의 레어에 들어가라고. 그 다음 자신이 도울 테니 지하 미궁과 안개의 미로를 만들라고 하더군.”
“무슨 이유로?”
“아까도 말했듯이, 자네와 유리아를 기다리기 위함이지. 겸사겸사 덜떨어진 침입자들을 물리치기도 하고.”
찻잔에서 피어오른 수증기가 허공으로 흩어졌다. 루드비히는 그 수증기가 스며드는 곳 어디쯤을 보고 있었다.
“그리고는 미로를 만들었지. 물론 그 혼자서 한 게 아니라 이니스, 나와 같이. 일을 마친 뒤에는 감쪽같이 사라져버리더군.”
“······.”
러셀은 팔짱을 꼈다. 정체불명의 예언자라. 성별도 알 수 없는.
“목소리로도 식별이 힘들었소?”
“그래. 키는 중간이었고, 피부도 드러나지 않았어. 다만 말투는 부드러웠네.”
러셀은 더 생각할까 하다가 관뒀다. 이미 삼백 년 전의 이야기다. 그 예언자는 이미 죽고도 한참은 지난 이야기.
“모른다면 됐소. 그럼, 중요한 건 다 말한 것 같군.”
루드비히가 시선을 러셀에게 향했다. 러셀은 조용히 그의 시선을 받았다.
“···좋아. 일어나세.”
세 사람은 남은 차를 모두 마신 뒤 정리하고 일어나 밖으로 나왔다.
“정원에서 싸우긴 좀 그러니, 뒤로 가지. 마당이 있으니.”
하지만 집의 뒷마당도 싸우기에는 무척 좁았다. 러셀의 걸음으로 열 번이면 끝나는 크기밖에 되지 않았다.
“그리 한심한 표정으로 안 봐도 돼! 잘 보기나 하라고.”
일갈한 루드비히가 발로 바닥을 내려찍었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발이 내려찍음과 동시에 손바닥만 했던 마당은 엄청난 속도로 넓어져갔다. 그뿐만 아니라 루드비히의 발바닥이 닿은 곳부터 눕혀져 있던 도미노가 튕겨져 오르듯이 뒤집어지며 재질이 바뀌었다.
순식간에 뒷마당은 발목에 간신히 닿는 풀로 가득한 초원이 되었다. 눈에 걸리는 장애물 하나 없는, 그렇기에 지평선마저 보이는 광대무변한 초원.
연보랏빛과 황금빛이 공존하던 하늘은 어느새 시리도록 푸르고 흰 뭉게구름이 고정되어 있는 하늘이 되었다. 여전히 태양은 보이지 않는, 그래서 가장 빛나는 퍼즐 한 조각이 빠진 것 같은 그림 같은 하늘이었다.
루드비히는 얼빠진 얼굴의 유리아와 시큰둥한 표정의 러셀을 돌아보며 씨익 웃었다.
“신기하지? 이곳은 꿈속의 세계를 현실에 구현한 거라고 보면 되네. 그리고 이 꿈을 꾸는 사람은 나고. 내가 이 꿈속 세계의 주인인 만큼 원하는 대로 재배열할 수 있지.”
“···대단해요.”
유리아가 중얼거렸다. 허나 이미 ‘눈’으로 이 공간의 진실을 꿰뚫어 본 러셀에게는 별 감흥이 없었다. 아니, 전생에 본 어떤 영화가 떠오르긴 했다. 하지만 러셀은 추억을 떨쳤다. 그런 것에 잠길 시간은 없었다.
“어떻게 해야 하오?”
“이 공간은 쉽게 깨지지 않아. 그리고 여기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이니스가 있는 곳에도 들어가지 못할 테지.”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뿐이야. 이 공간의 중심축이자 주인인 날 죽이는 것. 그리고 난 죽일 각오로 자네와 맞설 걸세.”
러셀은 고개를 기울였다.
“왜? 어차피 죽어야 한다면 그냥 목을 내밀면 되지 않겠소? 깔끔하게 쳐드린다고 약속하지. 고통도 못 느낄 거요.”
“러셀!”
유리아가 빽 소리를 질렀고, 루드비히는 껄껄 웃었다.
“그거 참 배려 넘치는 제안이네만, 불가능하네. 만약의 일이지만 내가 자살해서 이니스의 구속이 풀리는 것을 막기 위함이지. 마법적인 구조가 이중, 삼중으로 짜여있다네. 난 자살을 시도하는 어떤 행동도 할 수 없어. 자네는 나와 싸워야 해. 그것도 전력으로.”
러셀은 혀를 찼다. 뭐 하나 쉽게 풀리는 게 없군.
“그럼 이제 싸우는 것이오? 이렇게 바로?”
“화장실이라도 급한가? 빨리 갔다 오게. 오래 기다려주진 못해.”
“···됐소. 유리아나 좀 챙겨주시오.”
루드비히는 러셀의 눈짓에 고개를 돌렸다. 눈가가 빨개진 유리아가 입술을 깨물며 서 있었다.
“···그래.”
루드비히가 한 쪽 무릎을 꿇고 양 팔을 벌리자, 유리아가 달려와 그의 가슴에 안겼다. 커다란 품에 그녀가 파묻혔다. 루드비히도 유리아를 꼭 껴안았다.
“내 자랑스러운 후손. 여기까지 오느라 고생 많았다.”
“···루드비히님.”
오랜 시간을 뛰어넘어 만나게 된 후손은 조상의 품에서 숨죽이며 울었다. 루드비히는 그저 유리아의 등을 토닥였다.
어떤 황가의 계보에도 기록되지 못한 제국의 황자를, 어떤 전설도 노래하지 않는 방랑자를, 그리고 세상 누구도 모르게 세상을 지키고 있던 수호자를, 유리아는 힘주어 껴안았다.
루드비히가 속삭였다.
“아까 내 회상 속에서 네가 했던 말, 모두 기억하고 있다.”
“······.”
“우리에게 닥치는 현실은 때로 가혹하지. 언젠가 정말 이겨낼 수 없다고, 주저앉아서 포기해버리고 싶은 순간도 올 거다.”
“······.”
“허나 그럼에도 우리가 현재에서 해야 할 일은 하나다. 주어진 시간에, 주어진 일을 하는 것. 오직 그것만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지. 잊지 말아라.”
“···네.”
“닥친 두려움과 고난 앞에서 눈을 돌리지 않고 똑바로 바라보거라. 그렇다면 넌 위대한 황제가 될 수 있을 거다. 내 누이처럼.”
“···네.”
“그래. 아, 그렇지. 이걸 받아라.”
루드비히는 손바닥을 펴서 내밀었다. 손바닥 위에는 크기가 다른 한 쌍의 반지가 있었다.
백금과 순은으로 이뤄지고 용의 몸체가 세공된 아름다운 반지였다. 꼬리부터 머리까지 하나의 원을 그리고, 용의 입은 커다랗고 검은 보석을 물고 있었다.
“···이건?”
“나와 아내의 반지란다. 이제는 누구의 손가락에도 끼지 못하게 되었으니, 새로운 주인을 찾아가야겠지. 네가 잘 가지고 있거라. 그리고 시간, 장소, 사람이 갖춰졌다고 판단되었을 때 꺼내거라. 내 생각에 가장 찾기 어려운 것은 이미 찾은 것 같다만.”
루드비히는 짓궂은 웃음을 지었고, 유리아는 얼굴을 붉게 물들였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반지를 받아들었다. 루드비히는 여전히 웃음을 지은 채 말했다.
“이제 뒤로, 멀리 물러가거라. 가까이 있으면 다칠지도 모른다.”
루드비히가 포옹을 풀자 유리아는 뒷걸음질로 물러났다. 천천히 멀어지는 그녀의 뺨 위로 눈물이 흘렀지만, 양손을 꼭 쥔 그녀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러셀은 고개를 돌리고 있다가 유리아가 멀리 물러나자 다시 루드비히를 쳐다봤다.
“시작하겠소?”
“···그래. 기다려줘서 고맙네.”
러셀과 루드비히는 쉰 걸음 정도의 거리를 두고 마주봤다. 길다고도, 혹은 짧다고도 할 수 있는 거리였지만 그들에게는 지척과도 같은 거리였다.
태양이 없는 천구는 그 자체만으로 빛나고 있었다. 바람이 불지 않아 구름 또한 움직이지 않고 그 자리에 고정되어 있었다.
삼백 년 동안 한결 같은 표정을 가진 하늘이 아래의 두 사람을 비췄다.
스르릉.
러셀의 클레이모어가 뽑혀져 나왔다. 지하미궁에서 격전을 치룬 대검은 필리 아줌마가 고쳐준 것이 무색하게 여기저기 이가 나가 있었다.
러셀이 워낙 험하게 다룬 것도 있지만, 미궁의 괴물들 또한 만만치 않았기에 그랬다. 바질리스크를 만나 싸울 줄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을 것 아닌가.
루드비히는 러셀의 검을 보며 눈을 반짝였다.
“세계수의 문양이 찍힌 검이군. 요정이 벼려준 칼은 흔치 않은데.”
“그럭저럭 잘 쓰고 있소.”
“그래. 주인을 잘 만난 것 같군.”
그리 말한 루드비히도 자신의 무기를 꺼냈다. 그가 오른손을 옆의 허공으로 뻗자 검은 구멍이 나타나더니 한 자루의 손잡이가 삐죽 튀어나왔다.
대검을 예상했던 러셀은 눈을 껌벅였다.
루드비히가 검은 구멍에서 꺼낸 것은 외날의 큼직한 도끼였다. 자루와 도끼날 모두 하얀 금속성으로 빛나는 백색의 도끼.
커다란 도끼날의 테두리에 검은 글씨의 룬 어가 곡선을 그리며 빼곡히 적혀 있었고, 반대편에는 무게추의 역할인지 작은 망치 모양의 하얀 쇳덩어리가 있었다. 마찬가지로 룬 어가 쓰여져 있었다.
도끼는 무슨 재질로 만들어진 것인지 몸체에서 허연 연기 같은 것을 뿜어내고 있었다. 러셀은 곧 그것이 연기나 수증기가 아니라 냉기라는 것을 깨달았다.
백발 백염에 하얀 옷, 거기다 서리를 내뿜는 흰 도끼까지 든 루드비히의 모습은 마치 저승사자의 색깔을 반전한 것 같았다. 비록 낫이 아니라 도끼이긴 했지만.
“···아까 당신이 입고 있던 검은 갑주는? 대검은 어디로 간 것이오?”
“자네가 갑옷을 입지 않았는데 내가 입어서 무엇 하겠나? 그리고 나힐니르는 아내의 심장 어림에 박혀 있어서 가져올 수 없네. 그러니 이 도끼로 자네를 상대해야지.”
“나힐니르?”
“자네가 말한 검 이름. 설명 하자면 길어. 나중에 아내한테 듣게. 물론 들을 수 있다면 말이지만.”
가벼운 도발을 날린 루드비히의 눈은 아까와 달리 이글거리고 있었다. 러셀은 도저히 저것이 죽음을 바라는 자의 눈이라고 생각할 수 없었다.
눈에 선명히 비친 것은 감정들이었다. 러셀 또한 언제나 갖고 있는 것. 투쟁심.
“방금 전에도 말했다시피, 난 쉽게 죽어줄 생각이 없어. 나를 옭아매고 있는 마법도 그렇지만 내 마음 또한 그러고 싶지 않기 때문이지. 자네는 삼백 년 만에 들어온 첫 도전자네. 삼백 년 후의 싸움 기술을 견식할 수 있다는 것은 내게 아주 오랜만에 찾아온 기쁨이지.”
루드비히는 왼발을 앞으로 가볍게 내딛고 오른발을 뒤로 가져갔다. 오른 다리에 무게 중심을 둔 무릎은 약간 굽혀졌고, 그에 따라 상체도 숙여졌다. 왼손은 가볍게 들어 앞의 허공을 짚었고, 오른손에 들린 거대한 외날 도끼는 중단에 머물렀다.
마치 용이 바로 달려들 것 같은 광포한 준비 태세였다.
러셀은 루드비히를 보며 자신도 자세를 잡았다.
그와 마찬가지로 왼발은 앞으로, 오른발은 뒤로 한 후 보폭은 조금 넓게. 단단한 하체가 굳건히 상체를 받쳤다. 양손은 여인네의 손목을 쥐는 것처럼 부드럽게 대검의 길다란 칼자루를 잡아 위로 끌어올렸다. 여느 장정은 들어 올리지도 못할 대검은 마치 나뭇가지마냥 가볍게 떠올라 그 끝을 루드비히에게 향했다.
루드비히는 마치 거대한 거검이 자신을 겨누는 듯한 착각을 느꼈다.
그 짜릿한 감각 속에서, 삼백 년의 세월 동안 흐르지 않는 하늘을 바라보며, 정해진 시간에 일어나 정해진 시간에 잠드는 어제는 오늘과 같고 오늘은 내일과 같았던, 점점 미쳐가는 아내를 옆에서 돌볼 수밖에 없었던, 한 오래된 전사가 깨어났다.
콰아아아아-!
마력이 일었다. 있는지도 몰랐던 마력은 그새 자신을 잊고 있었냐는 듯 거세게 몸속을 달렸다. 마치 광막한 초원을 달리는 한 마리의 야생마처럼 빠르게, 드높은 산맥 사이를 활강하는 한 마리의 독수리처럼 자유롭게.
마력은 몸속만을 달릴 수 없다는 듯 거세게 루드비히의 피부를 투과하며 뛰쳐나왔다. 백금 빛의 오오라가 공간을 잠식하며 뿜어졌다.
러셀은 그 공간을 떨쳐 울리는 기세 앞에서 자신도 마력을 끌어올렸다.
쿠구구구구구···.
거센 불길 같은 루드비히와 다르게 그의 마력은 차가운 북해의 파도가 치는 듯 했다. 대해의 마력은 러셀의 의지에 따라 푸른 비늘을 뒤채며, 점차 폭풍을 만난 것처럼 끓어올랐다.
루드비히의 것이 태양처럼 눈부시게 타올라 대기를 상승시켰다면, 러셀은 막대한 압력이 되어 대기를 짓눌렀다.
무거운 마력이 공기를 가라앉혔다. 깊은 심해 속의 공간처럼 소리는 잡아먹혀 사라지고, 그 자리에 무엇보다 시끄러운 침묵이 자리를 넓혀갔다.
루드비히는 러셀을 보며 눈을 의심했다. 그의 뒤편에서 암흑이, 공허가 퍼져나가는 환시가 보인 것이다.
한 점의 빛도 허용하지 않는 막대하고도 깊은 어둠. 그 속에서 러셀의 자청빛 눈이 타오르고 있었다.
“하하! 하하하하!”
루드비히는 웃었다.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그렇군! 예언자여! 바로 이자가!’
그는 그 순간 모든 것을 이해했다. 그러나 이해한 바를 세상에 내놓진 않았다.
루드비히는 대지를 불사르는 뜨거운 열기를 뿜어냈고, 러셀은 모든 대기를 압도하는 기세를 퍼트렸다.
두 사람은 모든 것이 정체된 세계에서 바람을 만들어내었다. 바람은 오랜 시간 동안 펼쳐져 있기만 한 채 먼지만 쌓이던 책의 페이지를 팔락거리게 만들었다. 수백 년간 수북이 쌓인 먼지가 흩날렸다. 누구도 보지 못한 미지의 장이 넘어가고 있었다.
구름이 흘렀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그러나 멈추지 않고.
바람이 루드비히를 휘감았다. 백색의 옷과 머리카락, 수염이 세차게 흔들렸다. 그러나 루드비히는 석상처럼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 자리에 선 것은 무거운 시간의 모래 속에 매몰되어 가던 나약한 인간이 아니었다.
초원을 떠돈 방랑자도 아니었고, 미쳐버린 용의 남편도 아니었다.
그곳에, 세상을 오시하는 제왕이 있었다.
루드비히는 타오르는 금안으로 러셀을 바라보며 격정을 억누르지 못한 목소리로 드높이 외쳤다.
“나는 루드비히 드라카스 드 휘페리온! 황위 대신 황야를 선택한 떠돌이요, 전쟁의 아버지와 대지의 어머니를 둔 용의 반려다! 전사여! 그대의 이름을 말하라!”
목소리는 공간이 되었다. 땅이, 풀잎이, 바람이, 하늘이 루드비히의 목소리가 되었다. 마치 온 세상이 쩌렁쩌렁 고함치는 듯했다.
미친 듯한 바람이 그들을 가둔 채 불었다. 그렇기에 중심은 오히려 고요했다.
고요 속에서 러셀은 루드비히가 이제까지 한 번도 그의 이름을 묻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 내 이름. 내 이름이라.
이름이란 무엇인가. 나의 것이지만 나의 것이 아니고, 누군가 나를 부를 때 진정 세상에 내뱉어지는 것이 아니었던가.
누구도 자신의 이름을 부르면서 말하지 않는다. 그러니 이름의 주인은 사실 내가 아니라 부르는 자의 것이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전생의 그는 이름을 불리지 못했다. 이름이 불리지 않는 자는 무엇이 되는가.
아무것도. 그저 숨을 쉬고, 밥을 먹는 무정물.
그게 살아있다고 할 수 있는가. 월마다 날아오는 요금 통지서, 생일에 맞춰 축하 문구를 뿌리는 SNS 메신저가 살아있음을 증명 할 수 있는가.
사람 틈에 섞여들지 못한 그는 인간이 되지 못했다.
그렇게 그는 죽었다. 전생의 이름 또한 잊어버렸다.
그리고 시간은 새로운 이름을 그에게 주었다.
새로운 몸과 새로운 가족과 새로운 인연을 주었다.
조금 껄끄러운 인연들도 있지만···. 러셀은 작게 웃었다.
새로 얻은 몸은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재능을 가졌고, 그에게 투쟁심을 주었다. 살아있다는 감정을 주었다.
나는, 지금 살아있다.
상념은 길었으나 짧았다. 러셀은 그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루드비히를 보며 담담히 말했다.
“러셀 발타자르 폰 자하드. 그게 내 이름이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