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화 전투
한편, 유리아는 그들이 작은 점으로 보일 만큼 멀리 떨어져 있었다. 가까이 가고 싶어도 그럴 수 없었다.
두 사람의 마력은 그저 뿜어지는 것만으로 회오리를 만들고 지반을 갈라지게 만들었으니까.
그렇기에 유리아는 머리와 얼굴까지 완전히 보호한 갑옷을 발동시켰다. 겉으로 보면 앞이 보일까 싶을 모습이었지만, 요정과 난쟁이가 합동해서 만든 갑옷은 더없이 깨끗한 시야를 비췄다.
그녀는 그렇게 온몸을 보호하며 불어닥치는 바람에 저항하고 있었다. 동시에 마력을 최대로 끌어올려 두 사람의 말을 듣고자 했다.
하지만 역시 잘 들리지 않았고, 대화는 중간 중간이 끊긴 채 띄엄띄엄 들릴 뿐이었다. 그렇기에 러셀의 이름을 제대로 듣지 못했다.
루드비히가 고개를 끄덕였다.
“북부 변경백의 후손이었는가.”
파직! 파지지직!
둘의 마력이 허공에서 부딪히며 전깃불을 일으켰다. 한 없이 상승하는 루드비히의 마력과 끝없이 내려앉는 러셀의 마력은 이제 바람을 넘어 회오리를 만들고 있었다.
“러셀 발타자르 폰 자하드.”
루드비히가 말했다.
“부디 나를 죽여주게.”
말을 마친 루드비히가 오른손에 쥔 백색 도끼에 마력을 불어넣었다. 그러자 냉기로 이뤄진 불꽃이 타올랐다.
러셀도 대검에 마력을 담았다. 투명한 아지랑이가 일며 공간을 일그러지게 만들었다.
두 사람은 동시에 서로를 향해 달려들었다. 단지 발로 대지를 박찬 여파만으로 딛고 있던 바닥이 내려앉았다.
사이의 거리가 눈 깜빡할 사이에 좁아지고, 대검과 도끼의 날이 부딪혔다.
쿠웅-!
낮은 소리와 함께 대칭으로 이뤄진 두 개의 비스듬한 고리형 충격파가 퍼져나갔다. 땅이 힘을 이기지 못하고 쩌적 갈라졌다.
그 속에서 러셀과 루드비히는 최초의 충격을 각자 다른 방식으로 넘겨내고, 다시 무기를 휘둘렀다. 대검과 도끼는 초마다 무수히 서로의 칼날을 부딪히고, 핥고, 비끄러졌다.
그럴 때마다 처음 보다는 약하지만, 그럼에도 무시할 수 없는 충격파가 대지와 대기를 뒤흔들었다. 하늘의 구름은 두 사람을 중심으로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거대한 굉음과 함께 누군가 뒤로 튕겨졌다. 놀랍게도 그건 러셀이었다. 힘과 힘의 대결에서, 그는 처음으로 자신과 동수 이상의 힘을 가진 존재를 만난 것이다.
풀잎이 등에 스칠 듯 낮게 날아가던 러셀이 손으로 땅을 짚고 뒤로 돌았다. 발바닥이 바닥에 닿고 자세를 회복하자마자 그는 위를 쳐다봤다.
어느새 공중으로 뛰어오른 루드비히가 무시무시한 기세로 도끼를 내려치고 있었다. 피할 수 없었다.
러셀은 손으로 대검의 검면을 받친 채 벼락처럼 내리꽂히는 도끼를 막아냈다.
꽈앙-!
반구형으로 깊게 무너진 대지에서 루드비히는 도끼를 내려친 자세로, 러셀은 검면을 받친 자세로 한 쪽 무릎을 꿇고 있었다.
루드비히가 외쳤다.
“내 목을 쳐주겠다고 하지 않았나? 그 오만했던 기세는 어디로 간 건가!”
이 새끼가. 러셀이 살기 어린 미소를 띄웠다. 자안이 불타오르고 팔과 어깨, 광배 근육이 크게 부풀었다.
촤앙! 거세게 도끼를 걷어낸 러셀이 아래에서 위로 대검을 올려쳤다. 길쭉한 클레이모어의 칼날 끝이 바닥에 깊은 상흔을 새기며 휘둘러졌고, 루드비히는 마주 도끼를 내려찍었다.
쩌어엉!
귀청을 찢는 소리와 함께 루드비히가 허공으로 치솟아 올랐다. 아래에서 러셀이 바닥을 내려앉히며 뛰어올랐다.
“흡!”
짧은 기합성과 함께 공중에서 몸을 뒤튼 루드비히가 도끼를 내질렀다. 러셀도 마찬가지였다.
다시 굉음이 울리고 두 사람은 서로의 반대편으로 날아가 땅에 떨어졌다.
각자 땅을 갈아엎으며 떨어진 러셀과 루드비히는 곧장 몸을 일으켜 서로에게 돌진했다. 삽시간에 멀었던 거리가 0이 되었다.
위에서 내리쳐진 대검을 도끼 자루가 막았다. 루드비히가 도끼자루를 당기자 대검은 도끼날에 걸렸고, 그대로 옆으로 밀려났다.
자칫하면 바로 대검을 놓칠 위기였지만 러셀은 힘에 저항하지 않고 클레이모어를 자신 쪽으로 당겼다. 그리고는 긴 다리로 낮게 바닥을 쓸었다.
루드비히는 뒤로 뛰어 거리를 벌렸다가 러셀도 예상하지 못한 공격을 날렸다. 양손으로 도끼 자루를 잡더니 힘껏 던져버린 것이다.
눈을 가늘게 뜬 러셀은 검을 쥐지 않은 왼손을 내밀었다.
뻐엉!
마력이 일며 공간을 일그러트리는 충격파가 터졌다. 바질리스크와 싸웠을 때보다 더 안정된 자세를 갖추고 마력을 불어넣으니 폭탄이 터진 것처럼 강력한 충격파를 내뿜었다.
무서운 속도로 회전하며 날아오던 도끼는 그 충격파에 맞고 공중으로 높이 솟아올랐다.
그리고 언제 뛰어오른 것인지 루드비히가 빙글빙글 돌던 도끼를 낚아채더니 떨어지는 것보다 배는 빠른 속도로 내리꽂혀 왔다. 러셀은 간발의 차를 두며 뒤로 물러났다.
퍼어엉!
운석이라도 떨어진 것처럼 구덩이가 패이고 막대한 토사가 뛰쳐나왔다. 러셀은 루드비히의 시야가 가려진 틈을 타 그 속으로 파고들었다. 그의 대검이 토사를 꿰뚫으며 매서운 기세로 찔러갔다.
도끼날의 옆면으로 클레이모어의 찌르기를 막자 수직으로 된 고리형 충격파가 퍼졌다. 그에 맞춰 토사가 원을 그리며 둥글게 밀려났다.
루드비히는 뒤로 훌훌 날아가다가 바닥에 내려섰다. 그는 도끼가 부들부들 떨리는 것을 힘으로 억누르며 말했다.
“힘이야 대단하지만, 기술은 그냥저냥이군. 미래의 싸움 기술도 별 것 없구만?”
“그 입 계속 그런 식으로 놀리면 깔끔하게 목을 쳐준다는 말을 후회하게 될 것 같은데.”
“그런 건 바라지도 않았네.”
“그럼 심장을 꿰뚫어주지.”
루드비히는 피식 웃더니 러셀에게 돌진했다.
러셀은 마주 돌진하지 않고 제자리에 서 있었다. 양발을 옆을 넓게 잡고 선 그는 석상처럼 고요하게 대검을 중단세에 올렸다.
루드비히는 달리면서 마력을 백색의 도끼에 불어넣었다. 그러자 도끼날의 곡선에 빼곡이 적힌 검은 룬 문자가 빛나기 시작했다.
그는 아직 러셀과 닿지 않았음에도 앞서서 도끼를 휭으로 그었다. 거대한 반월형의 서리 칼날이 날아들었다.
공격을 날린 순간이 절묘했다. 러셀이 피하면 바로 뒤에서 다음 공격을 내지를 것이고, 피한 자세에서는 제대로 막기 힘들 것이었다.
허공을 희게 물들이며 공기를 가르는 백색의 냉기에 러셀은 마력을 두른 대검을 휘둘렀다. 그리고 동시에 피했어야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푸확- 하는 소리가 울리고 서리 칼날에 응축되어 있던 냉기가 대검에 닿기 직전 터져버렸다.
전방에서 덮쳐오는 냉기는 무섭도록 빠르게 대검을 타고 러셀의 몸을 얼려버렸다. 마력으로 보호해도 소용없었다. 도끼의 서리는 그 마력마저 얼려버린 것이다.
그는 온몸에서 하연 서리와 수증기를 피우며 대검을 휘두른 자세 그대로 굳어 있었다.
전신을 덮은 서리를 떨치기 위해 마력을 일으켰지만, 일으키는 족족 얼어버려 무슨 수를 쓸 수도 없었다.
그리고 얼음 동상이 되어버린 그에게 루드비히의 도끼가 대기를 가르며 베어왔다. 상반신과 하반신이 양단될 위기에 얼어붙은 러셀의 눈이 번쩍였다.
파가가가각- 하는 소음과 함께 팔을 감싼 얼음 조각이 터져나갔다. 마력 대신 뻑뻑해진 관절과 근육을 억지로 움직여 대검을 들자마자 그 위에 도끼가 작렬했다.
콰앙!
산산이 부서지는 얼음 조각들과 함께 러셀은 정신없이 대지 위를 굴렀다. 여파에 풀잎이 찢겨 하늘로 오르고 무른 흙이 토사를 비산했다.
“쿨럭!”
입에서 한 웅큼의 피가 토해졌다. 러셀은 바닥을 짚은 자세로 붉은 피가 스며든 대지를 바라봤다.
오랜만에 보는군. 기억했던 것보다 더 붉은데.
대검의 손잡이를 역수로 잡은 러셀이 그를 지팡이 삼아 몸을 일으켰다.
아직 전신 곳곳에 남은 지독한 서리조각들이 우득거리며 방해했다. 그러나 무지막지한 근력으로 이겨냈다.
숨을 몰아쉬며 대검을 보자 아까보다 엉망이 되어버린 칼날과 검신이 보였다. 거의 톱날 수준이었다.
아무리 마력으로 보호해도 무기의 차이가 너무 컸다. 저 백색의 도끼는 처음 부딪쳤을 때 이후로도 흠집 하나 나지 않았다.
템빨 차이 오지네. 시발.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자 요동치는 구름들이 보였다.
그들의 마력에 휘말리며 구름은 이런 저런 표정들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하늘이 웃거나 우는 것 같았다.
“실망스러운데. 벌써 포기인가?”
하늘에서 시선을 내리자 저만치 멀리 서 있는 루드비히가 보였다. 멀리 있었지만 그의 목소리는 지척에서 들린 듯 가까웠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 공간의 주인은 루드비히니까. 또한 그런 만큼 그는 얼마든지 상황을 유리하게 만들 수 있을 것이었다.
러셀의 주위만 공기를 무겁게 만든다거나, 발아래를 갑자기 늪으로 만든다던가, 아니면 하늘로 내동댕이친다거나. 무수히 많은 방법들이 있을 것인데, 루드비히는 오직 본연의 육체와 마력만으로 그와 맞섰다.
템빨 차이, 공간의 주인, 그런 건 상관없었다. 언제는 이보다 더 좋은 상황이 있었던가? 러셀은 피식 웃었다.
돌발 상황이란 건 예기치 못한 때 일어나기에 돌발 상황이라 부르는 것. 최상의 전투 환경이란 건 없다. 언제나 최악이거나 그보다 약간 나을 뿐.
그는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가 내쉰 다음 자신의 가슴과 다리를 퍽퍽 쳤다. 그러자 아직까지 곳곳에 남아있던 얼음이 흰 가루를 흩날리며 떨어져 나갔다.
냉기가 스며드는 몸을 이리저리 움직인 그는 체내의 꼬인 마력흐름을 풀어내 전신으로 돌렸다. 열기가 일면서 얼었던 옷이 젖었다가 바로 말라갔다. 수증기가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피를 토한 만큼 적지 않은 내상을 입은 상태였지만, 그는 물러서지 않았다. 한 발자국만 잘못 내딛으면 곧장 죽음의 수렁으로 잡아당길 손들이 흐느적거렸으나 오히려 그렇기에 러셀은 삶을 느꼈다.
발걸음을 옮겼다. 지금 그를 죽이려는 적을 향해. 마치 산보를 가는 듯 가벼웠지만, 차츰 속도가 빨라지기 시작했다.
쿠구구구구···.
루드비히는 점차 가까워지는 그를 보며 웃음을 지웠다. 러셀의 배경으로 다시 심연이 내려앉고 있었다.
“그렇게 나와야지.”
걸음은 이제 대지를 부수고 있었다. 루드비히도 땅을 박찼다. 다시 섬광. 그리고 충격.
***
“···세상에.”
유리아는 장검을 빼 들고 있었다. 충격파를 막아내기 위해서다.
전투는 그녀의 마력에 강화된 시력에도 닿지 않을 만큼 먼 곳에 있었으나, 감히 방심할 수 없었다.
검격 한 번에 대지의 속살이 파헤쳐지고, 도끼질 한 번에 대기가 찢어지는 소리를 내며 울었다. 단지 마력과 마력이 부딪힌 것에 충격파가 여기저기서 투명한 꽃잎처럼 피었다가 지기를 반복했다.
왜 루드비히가 멀리 물러나라고 한 이유를 알 것 같다. 그녀는 차마 끼어들 수도 없는, 고래 싸움과 새우에도 들지 못하는 규모의 전투였다.
그때 다시 섬광이 번쩍이는 것을 본 유리아가 한 손으론 손잡이를 쥐고, 한 손으론 검의 뒷 칼날을 받친 다음 전방을 막았다.
파아아앗!
앞으로 넘어질 듯 몸을 내밀었는데도 태풍 같은 기세의 바람이 불어 닥치자 상체가 뒤로 밀려났다. 강철 부츠를 신은 발이 초원의 무른 흙을 파고들며 고랑을 만들었다.
“큭!”
그녀는 전신에 힘을 주며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마력과 검이 충격파와 바람을 갈랐다. 겨우 바람의 파도를 갈라 옆으로 흘려보낸 유리아는 숨을 헐떡이며 먼 지평선을 바라봤다.
고작 저 멀리에서 터진 거대했던 충격파 중 하나가 시간차를 두고 그녀에게 온 것뿐이다. 지근거리에서는 이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힘을 가지고 있겠지.
러셀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루드비히는 어떻게 저리 강한 것일까? 용의 남편이 되려면 저 정도의 무력은 쌓아야 한다는 것일가?
“···어?”
숨을 몰아쉬던 유리아가 의문성을 흘렸다. 어째서인지 전투를 치르고 있는 둘의 모습이 점차 가까워지고 있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건 착각이 아니라 사실이었다.
와르르르릉!
싸움의 여파가 가까워지자 엄청난 소음이 그녀와 주변을 덮치기 시작했다.
“어어어?”
이제 러셀과 루드비히는 유리아의 육안에도 보일 만큼 선명해져 있었다. 다시 두 사람이, 대검과 도끼가, 마력과 마력이 부딪혔다. 그리고 같은 순간 루드비히의 시선이 그녀에게 닿았다.
유리아는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검을 들어올렸다.
···.
정적.
그녀는 닥쳐오지 않는 충격에 살며시 감았던 눈을 떴다.
“어?”
두 사람은 사라져 있었다. 바람은 멈췄고, 풀잎도 나부끼지 않았다.
“···러셀? 루드비히 님?”
그녀가 어리둥절해서 가만히 서 있던 그때, 둔중한 울림과 함께 유리아의 앞 허공이 일그러졌다.
그리고 거기서 튀어나온 것에 유리아는 눈을 크게 떴다.
***
숲에서 엄청난 굉음과 함께 흙먼지가 자욱하게 피어올랐다. 그리고 어느 순간, 번뜩이는 섬광과 함께 한 곳에서 강력한 힘의 폭발이 터졌다.
땅 속 깊숙이 뿌리를 박아내린 것이 무색하게 나무들이 비산하며 날아갔다. 반구형으로 깊게 내려앉은 구덩이의 중심에서 러셀과 루드비히가 먼지를 떨치며 몸을 일으켰다.
러셀은 방금 전까지의 초원이 숲으로 바뀐 것을 알았다. 하지만 그는 오롯한 시선으로 루드비히만을 노려봤다.
루드비히는 도끼를 들어올리며 말했다.
“묻지도 않나? 아까까지는 초원이었는데 왜 갑자기 숲에 떨어진 건지.”
“당신이 직접 이 공간, 꿈의 주인이라 하지 않았나. 그럼 장소를 바꾸는 것도 가능하겠지.”
“정확히 말하자면 조금 더 깊이 들어온 것이지.”
러셀은 생각했다. 더 깊게 들어 왔다라. 림보에라도 들어오셨나.
“여기의 시간과 바깥은···.”
“바깥의 시간이 더 느려졌겠지. 여기와는 다르게. 여긴 꿈속의 꿈이로군?”
루드비히는 벙 찐 표정을 지었다.
“어떻게?”
“꿈속에서는 체감 시간이 더 길게 느껴지니까. 몇 시간은 지난 것 같았던 꿈도 일어나보면 고작 몇 분. 몇 초가 지나있는 것과 같지.”
루드비히는 너털웃음을 흘리더니 말했다.
“원 참. 그것도 그 눈이 알려주던가?”
러셀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놀런이 영화로 보여줬지.”
“놀런? 그건 누군가?”
“있어, 그런 사람.”
물론 이세계에는 없고 지구에 있는 사람이었지만, 루드비히는 감히 그런 사실은 짐작도 못한 채 고개를 주억거렸다.
“마법사인가? 대단한 사람이군. 나도 이 공간이 구현되고 그 주인이 되기 전까지는 몰랐는데. 만나보고 싶지만, 안되겠지?”
러셀은 피식 웃으며 대검을 들어올렸다. 그 끝을 루드비히에게 겨누며 그가 말했다.
“이따가 신이라는 작자를 만나게 되면 말해봐. 혹시 모르지. 정말 만나게 될 수도.”
루드비히도 씨익 미소를 지었다.
그는 마찬가지로 도끼를 들었다가, 별안간 러셀을 향해 지팡이처럼 내밀었다. 그러자 도끼자루의 첨단부에 달린 뾰족한 끝에서 냉기가 마치 광선처럼 쏘아져 그에게 날아왔다.
러셀은 속으로 시발거리며 몸을 피했다.
저 냉기는 직접 맞부딪치면 안 되었다. 아까의 서리 칼날에 영 재미없는 경험을 한(누구나 피를 토하는 건 그렇겠지만) 러셀은 도끼가 뿜어내는 냉기를 분쇄하기보다는 피하는 것에 주력했다.
도대체 뭘로 만들어진지는 모르겠지만 저 백색 도끼의 냉기는 마력마저 얼어붙게 만드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그런 만큼 상시 내내 뿜어댈 수는 없는 것 같았지만, 그런 수단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위협적이었다. 언제 어느 때 냉기가 덮칠지 모르니 온 신경을 곤두세워야 하는 것이다.
시발. 러셀은 다시 욕했다. 왜? 저 냉기를 피하기 위해 계속 땅 위를 굴러다니고 있어서.
루드비히는 손목만 비틀어서 궤도를 바꾸는 반면 그는 이리 뛰고 저리 뛰면서 광선의 공격을 피해야 하니까.
그럼? 그의 마력마저 얼게 하는 미증유의 공격에 다른 무슨 수단이 있겠는가?
“······.”
러셀은 구르는 것을 멈췄다. 5초 정도만 더 시간을 끌었으면 광선이 끝났을 테지만, 더 이상 피하지 않았다. 그러자 지속되고 있는 냉기의 광선은 거리낄 것 없이 그에게 직격했다.
콰아아아아···!
루드비히는 도끼를 내릴 수 없었다. 마력을 거둬들여 냉기의 분사를 멈출 수도 없었다. 그를 칭칭 감은, 이 꿈속의 주인으로 만든 용과 스스로의 마법은 그런 행동을 불가로 만들었다.
머지않아 백색 도끼의 공격이 사그라들었다. 냉기의 광선이 움직이지 않고 쏘아진 지점은 새하얗게 얼어붙은 공간이 되었다.
벌건 속살을 드러낸 땅의 흙과 굴러 내려온 잡초들, 부러진 나무들이 얼음으로 뒤덮여 있었다.
루드비히는 얼음동상이 되었을 러셀에게 다가갔다. 백색 도끼의 칼날이 시퍼렇게 달아올랐다.
그때, 푸확! 소리와 함께 거센 보랏빛의 마력이 얼음 공간에서 작열했다. 루드비히는 저도 모르게 멈춰선 채 그 화염을 바라보았다.
그 속에서, 유성의 꼬리 같은 잔영을 길게 흘리는 검은 무언가가 그를 덮쳤다. 인지할 수 없는 빠르기에 루드비히가 할 수 있었던 건 도끼의 긴 자루를 내세운 것뿐이었다.
굉음과 함께 루드비히가 무수한 나무들을 등으로 부수며 숲 저편으로 나가떨어졌다.
“컥, 쿨럭!”
자신이 부서트린 나무들의 잔해 속에서 루드비히가 피를 토했다. 그리고 자신이 피를 토했다는 것에 놀람을 금치 못했다.
그가 번쩍 고개를 들자 저편에 한 남자가 서 있었다. 검은 셔츠와 가죽 바지를 입은 거구의 전사.
‘그게 뭐였지?’
루드비히를 덮쳤던 어두운 색깔의 무언가는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러셀은 너덜거리는 소매를 상완부터 죽 찢어버렸다. 쇠심줄같이 질기고 단단해 보이는 근육으로 덮인 팔이 드러났다.
아까까지 냉기에 맞으면 그대로 얼어붙었던 것과 달리, 지금의 그는 한 없이 자유로웠다. 몸 어디에도 서리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러셀은 아까보다 더 엉망이 되어버린 대검을 어깨에 걸쳤다. 검날은 우둘투둘했고 검신은 삼분의 일분지가 날아가 있었다. 러셀은 그럼에도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다시 해보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