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루드비히 드라카스 드 휘페리온
그리고 흑기사는 덧붙였다.
“자네들의 대화를 듣고 있었지. 후손은 혹시 올해로 나이가 몇인가?”
유리아는 잠깐 러셀을 힐긋 쳐다보더니 다소곳한 자세가 되어 말했다.
“···17살입니다.”
러셀은 약간 놀란 눈으로 그녀를 내려다봤다. 어리잖아? 어쩐지 발랄하더라니.
흑기사도 그런 듯 했다. 그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생각보다 어린 후손이 왔구나. 후손이여, 아까 말했듯이, 그리고 저 남자가 지적했듯이 여긴 과거의 정면을 재현한 공간에 불과하다. 내 오랜 후회와 미망이 영원히 불타오르고 있는 곳이지. 자네의 마음이 이해가 안 가는 바는 아니나, 부질없다. 그러니 더 이상 슬퍼하지 말아. 저들을 향한 추모는 이미 오래 전에 행해졌고, 이 이상은 불필요하니까.”
“···알겠습니다.”
유리아는 그의 말을 들으며 완전히 마음을 다진 듯, 힘차게 대답했다.
러셀은 유리아의 어깨를 놓았다.
“당신이 루드비히?”
흑기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마안의 주인이여.”
“당신이 이 미로를 만들었나?”
“혼자 만든 건 아니지만, 뭐. 나도 힘 좀 보태긴 했지.”
“그렇군.”
러셀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성큼성큼 걸어가 주먹으로 흑기사의 면상을 후려쳤다.
쾅!
엄청난 소리와 함께 흑기사가 날아가 건물 잔해에 처박혔다. 양손으로 입을 가린 유리아가 꽥 비명을 질렀다.
“러세엘!”
“내 이름의 두 번째 음절은 그렇게 길지 않아.”
유리아는 기가 막힌 눈으로 러셀을 째려봤다.
“이게 무슨 짓이에요! 왜 루드비히 전하를···!”
“아까 이걸 만든 놈을 만나면 죽빵을 꽂아주겠다고 했을 텐데.”
죽빵이 그런 거였어?! 유리아는 다급히 흑기사가 날아간 곳으로 달려갔다. 그때 흑기사가 잔해를 치우며 멀쩡히 일어섰다. 갑옷도 그렇고 투구에도 흠집 하나 나지 않았다.
“하하. 이거 정신이 번쩍 드는구만. 이렇게 맞아본 게 도대체 얼마만인지. 살아생전에 이렇게 날 때려눕힌 사람은 없었는데.”
저릿한 손목을 돌리던 러셀이 으르렁거렸다.
“원한다면 죽어서도 잊지 못하게 해주지.”
루드비히는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미안하게 됐군. 하지만 나도 어쩔 수 없었다고 말한다면 이해해주겠나?”
“이유와 목적에 따라 달라지겠지.”
“좋아. 그럼 여기부터 나가야겠군.”
둘의 태평스런 대화에 유리아는 화를 낼 기회를 놓쳐버렸다. 조상님을 때린 것에 대해 황가모욕죄를 들먹여야 하나? 근데 그게 삼백 년 전부터 아직까지 살아있는 조상님에 대해서도 적용이 되는 걸까?
루드비히는 대검을 들어 바닥을 내리 찍었다. 묵색의 기다란 검신이 대지를 파고들자 그를 중심으로 어둠이 물결치며 퍼져나갔다. 회색의 망토가 바람 한 점 없음에도 미친 듯이 펄럭였다. 곧 대검은 대지에 빨려가 듯이 아래로 사라졌다.
유리아는 눈을 크게 뜨며 그 광경을 지켜봤다. 검은 파도는 삽시간에 그들이 서 있는 대지를 덮고, 길과 건물들을 감쌌다. 유리아는 늪처럼 어둠에 빠져드는 자신의 몸을 보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저, 전하?”
“걱정마라. 나가는 과정이다.”
유리아는 저도 모르게 러셀을 쳐다봤다. 러셀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자 어쩐지 더 안심이 되는 기분을 느꼈고, 혼란에 빠졌다.
마찬가지로 어둠에 빠져들고 있지만 여전히 ‘눈’을 뜨고 있는 러셀은, 마치 맹금류와 같은 시야에서 제국의 수도가 점점 어둠에 잠기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히폴리아스 전체를 잠기게 만든 어둠은 마지막으로 용의 다리를 타고 올랐다.
금빛 비늘의 용은 천천히 어둠이 몸을 덮는 것을 물끄러미 보기만 했다.
그 모습에서 아까와 같은 분노, 광기는 보이지 않았다. 용은 이 어둠의 근원지, 흑기사를 슬픈 눈빛으로 보더니 그대로 어둠에 삼켜졌다.
러셀은 그 장면을 마지막으로 자신의 시야 또한 캄캄하게 물드는 것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그리고 눈을 떴다.
“내 집에 온 걸 환영하네.”
유리아는 넋이 나간 기색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안개의 미로를 헤매면서 수많은 지형들을 넘어섰지만, 그 중에서도 이런 공간은 처음이었다. 아니 지하 미궁 바깥에서도 이런 장소는 없을 것이었다.
하늘은 황금빛과 연보랏빛이 섞인, 하루의 한 때에서나 볼 수 있는 환상적인 색깔로 채워져 있었다. 태양과 달, 별은 없었고 구름만이 빛났다.
바로 앞에는 연두색의 풀밭으로 덮인 작은 정원과 나무 몇 그루, 그리고 아담한 집 한 채가 놓여져 있었다. 공간은 그리 넓지 않았고, 정원과 집이 꽉 채우고 있었다.
뒤를 돌아보자 아까 그들이 들어섰던 안개의 벽이 서 있었다. 아니, 안개 자체가 이 집과 정원 주변을 넓게 빙 둘러 싸고 있었다.
“거기 멀뚱멀뚱 서 있지만 말고, 들어와. 차 좋아하나?”
검은 갑주와 투구는 온데간데없는, 흰 머리카락과 수염의 중년 남자가 그들을 향해 손짓했다. 반짝이는 금안이 눈웃음을 짓고 있었다.
키와 덩치가 거의 러셀과 필적하는 그는 흰 천의 상의와 바지를 입은 맨발의 차림이었다. 상의를 아무렇게나 내놓은 모습과 맨발에서는 자유로움이, 어깨 아래까지 흘러내리는 백발을 뒤로 모아 질끈 묶은 모습에서는 단정함이 엿보였다.
유리아는 어쩐지 멍한 기분이 되어 정원을 가로질렀다. 러셀은 천천히 그 뒤를 따랐다.
작은 텃밭들이 보인다. 촉촉한 흙과 싱그러움을 간직한 풀잎들. 그 끝에서 익어가는 채소와 과일들.
텃밭들을 가로지른 후, 앞장서 있던 남자는 나무문을 열었다. 오랫동안 기름칠을 하지 않은지 이음새에서 끼이익 거리는 소리가 났다.
“이해해주게나. 긴 시간 동안 손님을 들인 적이 없었으니.”
“네, 네···. 그러셨겠지요.”
유리아가 멍청하게 대답하며 안에 들어섰다.
집 안은 바깥에서 보았던 것보다 컸다. 러셀은 여간 가정집과 별다를 것 없는 가구들을 보면서 사람의 냄새를 맡았다. 최소한 두 사람 이상의.
거실과 부엌의 중간에 놓인 식탁에는 풀잎과 지푸라기로 채워진 인형 두 개가 놓여 있었다.
하나는 검은 색으로 칠해진 기사 인형이었고, 다른 하나는 노란 색의 용이었다. 하지만 날개가 없어서 도마뱀처럼 보였다.
식탁에는 의자 두 개만 있었다. 남자는 그걸 보더니 옆의 서랍장에서 뭔가를 뒤적였다.
“어디보자···. 여기 있군.”
꺼낸 것은 작은 의자 모형이었다. 소꿉놀이나 인형놀이에 쓰면 좋을 듯한. 하지만 남자가 모형을 휘릭 던지자 커다란 의자가 되었다.
“앉게.”
유리아는 말도 못하는 기분이 되어 그 의자에 앉았다. 러셀도 앉는 것을 확인하자 남자는 부엌에서 주전자와 찻잔 세 개를 가져와 앞에 하나씩 놓았다. 곧 구수한 향기를 뿜어내는 맑은 빛깔의 차가 놓였다.
“맛있게 들게나.”
“···감사합니다.”
유리아만이 답하며 차를 홀짝였다. 러셀은 찻잔을 들지 않고 팔짱을 꼈다. 그 동작에 우람한 근육들이 꿈틀거리며 물결쳤다. 유리아는 찻물을 꼴깍 삼키며 헤 입을 벌렸고 중년 남자는 한 쪽 눈썹을 치켜떴다.
“몸 좋은 거 자랑하나? 여기서 얼굴 붉힐 사람은 내 후손 밖에 없는데.”
“······.”
“서, 설마 날 노리고? 안돼! 난 아내가 있다구!”
“푸흡! 프하하하하!”
웃음을 참지 못한 유리아가 고개를 숙이며 끅끅거렸다. 러셀은 애써 엄숙한 표정을 지우지 않고 말했다.
“···옷 좀 주시겠습니까?”
“진작 그렇게 말할 것이지.”
남자는 방에 들어갔다 나오더니 검은 셔츠 한 벌을 건넸다.
“자. 자네랑 내 체격이 얼추 비슷하니 찢어질 걱정은 안 해도 될 거야. 일부러 색깔도 반대로 준 건데. 괜찮지?”
러셀은 대꾸 없이 옷을 받아들고 입었다. 분위기를 주도하는 데는 실패했다. 담담히 패배를 받아들여야 할 뿐. 그래서 러셀은 찻잔을 들어 차를 마셨다.
러셀은 눈을 조금 크게 떴다. 입술을 넘고 혀와 입천장을 데우며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찻물은, 몸속에 온기를 퍼트리면서 몸에 쌓여있던 피로를 풀어서 흩어버렸다. 게다가 마력의 순환도 돕는 효능도 있는 듯했다.
유리아는 아까부터 그 효능을 알고 있었는지 주어진 차를 다 마신 후였다.
루드비히가 그런 러셀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는 유리아의 찻잔에 새로 차를 따라주며 말했다.
“나쁘지 않지? 아내와 내가 직접 재배한 찻잎이라네. 여기서밖에 못 키우는 찻잎이야. 키우는데 시간도 오래 걸리고 손도 많이 가지만, 뭐. 여긴 넘치는 게 시간이니까.”
잠시 침묵. 세 사람은 각자 앞의 차만 마시며 말을 아꼈다.
남자 둘은 조용히 서로를 탐색하는 시선을 보냈다. 그건 집주인과 손님의 시선이라기보다는 숫제 결투에 앞서기 전에 보내는 시선에 가까웠다.
차이가 있다면 루드비히의 눈빛은 어린 아이를 보듯 부드러웠다면, 러셀은 태워버릴 듯이 이글거리고 있다는 것 정도일까.
그리고 러셀은 아직 ‘눈’을 감지 않았기에 실제로 타오르고 있기도 했다.
결국 먼저 말을 꺼낸 것은 언제나 그랬듯이, 발랄한 십대의 소녀였다.
“루드비히 드라카스 드 휘페리온···. 전하가 맞으시지요?”
루드비히는 러셀에게서 고개를 돌려 유리아에게 빙긋 웃어보였다. 나이가 들고 주름이 새겨진 얼굴임에도, 젊었을 적 얼마나 대단한 미남이었을지 짐작하게 만드는 미소였다.
“그래. 드라카스 드 휘페리온이라. 얼마 만에 듣는 이름인지 모르겠군. 자네는?”
유리아는 몸을 바로 했다.
“유리아 히폴리아스 드 휘페리온입니다. 까마득한 후손이 조상님을 뵙습니다.”
“관둬. 조상이라니. 젠장, 까마득한 단어구만.”
“네, 네?”
유리아는 조상님의 입에서 나온 젠장이란 말에 허둥지둥했다. 위대한 황족의 말이라기보단 뒷골목의 부랑배나 쓸 법한 욕설이었다. 하지만 루드비히는 아랑곳 않고 혀를 차더니 말했다.
“그냥 루드비히라고 불러. 아니면 할아버지라던가.”
“어, 어찌 제가 그럴 수 있겠습니까, 전하.”
“불러봐라. 루드비히.”
“으······.”
“아까 저 남자는 잘만 말하던데 왜 넌 못하냐? 할 수 있다! 루. 드. 비. 히!”
처음의 근엄하고 엄정했던 말투는 어디가고, 닳고 닳은 시정잡배에서나 나올 말투를 쓰는 그였다.
하지만 그것도 루드비히가 말하니 썩 어울렸다. 황족이라기보다는 어디 수도원의 수도사가 더 어울리는 외모와 옷차림이라 그런 걸까.
반면 유리아는 고개를 푹 숙여버리고 말았다. 루드비히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에휴, 됐다. ···그래. 밖에서는 몇 년이 흘렀지? 얼추 한 세기 이상은 흐른 것 같은데.”
그 물음에 유리아는 숨이 턱 막힌 얼굴로 루드비히를 바라봤다. 그녀는 시선만 돌려 러셀을 쳐다봤지만 그는 무심한 표정으로 대화를 지켜볼 뿐이었다. 결국 유리아는 말했다.
“···삼백 년입니다.”
루드비히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허. 삼백 년이라···. 오랜 세월이 지났으리라곤 짐작했지만. 그래도 꽤 많이 지났군. 그런데 자네는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건가?”
유리아는 뒤의 말을 잠깐 못 알아들었다가, 그게 러셀에게 향한 말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러셀이 말했다.
“뭐가 말이오.”
“뭐긴 뭐겠나. 자네 그 눈깔이지. 무서워 죽겠는데 그만 끄지 그러나?”
러셀은 피식 웃었다. 몇 시간 전에 누군가에게 들었던 것과 똑같은 말이었기 때문이었다. 슬쩍 시선을 주자 유리아는 고개를 숙이고 찻잔만 노려보고 있었다.
“내 눈깔은 당신이 언급했던 것처럼 마안이지. 살면서 여럿 불편한 상황을 만들기도 하고 사고도 치긴 했지만, 그래도 유용한 눈이야. 지금의 나에게는 이 요상한 공간보다도, 현재 당신의 모습이 더 신경 쓰이는군.”
루드비히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자청빛의 마안이라니. 이제까지 많은 마안들이 있었지만 그런 빛깔을 가진 눈은 없었지. 동화에서나 악마, 혹은 마왕의 눈으로 묘사될 뿐. 그래, 내게서 뭐가 보이시나?”
“···굳이 말하고 싶지는 않군.”
러셀은 ‘눈’을 껐다. 그러자 일렁거리던 시야가 사라지고 육안으로서의 루드비히와 유리아가 비췄다. 그들이 앉은 식탁과 의자, 자리한 집의 내부 모습도.
루드비히는 얼굴의 절반을 가리고 있던 도깨비불이 사라진 자리에서 드러난 러셀을 보고 감탄의 표정을 지었다.
“너 여자 많지?”
유리아는 다시 웃음을 참기 위해 손으로 입을 틀어막아야 했다. 러셀은 그 말에 굳이 대꾸하지 않았다.
“이제 이유와 목적을 말해주시오. 아까 그 안개의 미로는 뭐였는지.”
웃음을 참고 있던 유리아가 퍼뜩 고개를 들었다.
그래. 왜 루드비히는 아까까지 그들이 겪었던 이상한 세계의 지형들을 만들었을까. 꽃밭과 사막, 설산, 전쟁터, 바다, 그밖의 기상천외한 지형들을.
루드비히는 뭐 그런 싱거운 걸 물었냐는 듯이 대답했다.
“뭐기는? 당연히 합격자들을 가리기 위한 면접이지. 자네들은 훌륭히 시험을 통과한 자들이고. 축하하네. 이제는 불안 끝 행복 시작이야. 좋지? 기쁘지?”
“······.”
“······.”
러셀은 대꾸하지 않았고, 이번에는 유리아도 동조했다. 루드비히는 어깨를 으쓱였다.
“농담 좀 한 거 가지고 야박하게 굴기는. 하지만 방금 말한 것에 답은 다 들어있네. 저 미로는 거름망이야. 쭉정이들을 걸러내는.”
“이유는 들었군. 목적은?”
잠시 침묵한 루드비히는 작은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유리아는 그 미소에서 따뜻함보다는 한기를 느꼈다.
그것은 충실한 삶에게 보내는 따스한 미소가 아니었다. 그보다는 처형자가 기다리는 단두대의 칼날에 대한 조소에 가까웠다.
“그야 나와 내 아내의 죽음에 대한 안배지.”
“···아내라면.”
“이니스. 아, 내 아내의 이름을 줄인 것이네. 이스메니오스는 너무 길잖아? 여자 이름 같지도 않고. 어쨌든.”
루드비히는 찻잔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그녀와 나는 예언에 따라 저 안개를 만들고 그녀의 레어에서 기다렸다네. 저 안개를 뚫고 들어와 우리에게 안식을 가져다줄 자를. 여기 내 후손, 유리아의 말에 따르면 삼백 년 전 이곳 데-칼라스의 성주에게 이곳으로 올 수 있는 포탈의 열쇠를 남겨두었지. 예언자는 정확히 언제인지는 몰라도, 오랜 시간 후 미로를 뚫고 들어올 자를 예견했네. 이왕이면 내 후손이길 바랐지만···.”
루드비히는 잠시 유리아를 쳐다보았다. 안타까움이 담긴 시선에 유리아가 당황했다.
“아쉽게도. 예언자가 말한 대로 ‘눈’을 가진 자가 우리의 휴식인 것이지.”
“나 말이오?”
“그렇다네.”
루드비히의 눈은 맑았다. 그 속에는 한 점의 거짓도 들어있지 않았다.
“그때는 무슨 소리인지 이해되지 않았지.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 볼 수 없는 것 또한 볼 수 있는 눈을 가진 자라니. 우리는 반신반의하면서도 저 복잡한 길을 설계했고, 설치했지.”
루드비히는 러셀과 유리아가 아니라 반대쪽의 벽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가 지금 보고 있는 것이 벽이 아니라는 건 둘 다 알 수 있었다.
“그 오랜 시간 동안 얼마나 많은 생명들이 갇혀서 죽었을까? ··· 상관없지. 난 알지 못하고, 알고 싶지도 않네.”
러셀은 그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삼백 년 동안 아내와 스스로를 죽이지 못해 대신 죽여줄 사람을 기다려온 자의 눈을. 북부의 만년설보다 단단하고 차가운 눈을.
러셀이 물었다.
“당신의 아내는 어디 있소?”
“그녀의 공간에. 그 어떤 아내도 남편의 죽음을 눈앞에서 봐야 할 이유는 없으니까.”
“그녀가 납득했소?”
“그럼. 그녀는 용이니까. 인간의 시선으로 그녀를 판단하지 말게.”
후우. 러셀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그럼 언제 시작하겠소?”
루드비히는 단언했다.
“될수록 빨리. 지금 당장이라도 좋네.”
“왜.”
“그렇지 않으면 이 세계는 다시 한 번 미쳐 날뛰는 용을 감내해야 할 테니까. 그녀가 제정신을 차릴 수 있는 시간은 이제 얼마 남지 않았네. 어떤 빌어먹을 놈이 쏘아 보낸 사악한 마력만 없었어도 이 지경까지 치닫지는 않았을 텐데. 하지만 결국 그 때문에 자네가 여기 올 수 있었던 것이기도 하니. 예언이란 얄궂어. 그렇지 않나?”
러셀은 루드비히가 언급한 그 빌어먹을 놈이 카루곤이라는 것을 알았다. 용의 흔적을 찾아 칼리스덴에 온 용족. 괴물들을 끌어 모아 진군시킨 미치광이 마법사.
전장에서 그가 쏘아낸 원념과 백이 합쳐진 사악한 마력이 이 지하 미궁까지 스며들었고, 그것이 이스메니오스를 깨우는 데 더 가속화시킨 것이다. 정확히는 미쳐버린 광룡을.
둘의 대화를 따라가지 못하던 유리아가 다급히 끼어들었다.
“잠깐, 잠깐만요. 지금 두 분이서 무슨 얘기를 나누시는 거죠? 저한테도 설명 좀 해주실래요?”
루드비히는 서글픈 미소를 지으며 어린 후손을 바라봤다.
“예언의 실현이란다. 유리아.”
“네?”
“나와 내 아내는 너무 오래 죽음을 미뤄왔어. 아내야 용인 걸 감안하더라도, 나는 확실히 죽어야 하지.”
“왜, 왜요! 이렇게 살아 계시잖아요! 왜 돌아가시려고 하는 거예요!”
“돌아가야 하니까.”
“그, 그러지 마세요. 다시 제국에 가고 싶지 않으세요? 모두들 놀라실 거예요. 제 아버지도, 형제자매들도 놀라 자빠질 거예요. 세상, 세상이 삼백 년 동안 얼마나 바뀌었는지, 얼마나 신기한 것들이 생겨났는지, 그리고, 그리고···.”
“유리아.”
“···네.”
“내가 인간처럼 보이겠지.”
유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루드비히는 고개를 저었다.
“난 인간이 아니다. 삼백 년을 넘게 산 사람을 어떻게 인간이라 부르겠느냐? 그냥 괴물인 것이지.”
“······.”
“내가 지금껏 살아있는 이유는 내 영혼을 대가로 아내를 구속하고 있기 때문이다. 내 생명이 아내와 연결되어 있기에 제대로 살지도, 죽지도 못한 지금의 상태로 고정되었지. 아내는 구속된 육체 안에서 광기에 물든 정신을 끌어안고 버티고 있어. 난 더 이상 아내를 괴롭히고 싶지 않다.”
“······.”
“이런 모습을 보여서 미안하구나.”
유리아는 눈물을 흘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