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41화 〉 강시 아니라고(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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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 앞으로 다가온 여성을 내려다보았다. 키가 좀 작네? 머리 반개 정도는 차이 나는 것 같은데. 뭐 이때 영양문제 같은걸로 평균신장이 엄청 낮았다니까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인가.
여기선 나도 장신의 여인이라고. 한국처럼 막 키 작다고 놀림 받는 땅딸보가 아니라!
“익숙한 기운이 느껴져 만나러 왔건만, 나처럼 선계에 발을 담근 자는 아니로구나.”
“그야 난 이쪽 사람이 아니니까?”
난 신선이 아니니까 선계랑 연이 없지. 근데 역시 말하는 걸 보니 신선...인 건가? 이렇게 갑자기? 장백파를 사칭했던 건 또 어떻게 아는 거야?
...생각해 보니 여기 무림이었지. 무림인이라면 충분히 눈치챌만 했다. 무공에도 특징이 있어서 내공의 성질이 달라 그걸로 사람을 구분하는 경우야 은근히 흔하니까.
빙공이나 염공 같은 건 차갑고 뜨거워서 티가 난다든지, 마기같이 음산하고 소름 끼치는 기운이라던지, 정순해서 그런지 부드러운 느낌의 정파 내공이라던지.
...그리고 나랑 비슷한 느낌의 선기라든지. 근데 나는 근본이 근본이다 보니 사기(死?)섞인 선기라고 해야 되나, 그런 느낌이었다. 아무래도 기운에 예민한 사람한테는 좀 민감하게 느껴질 수 있긴 했다.
그래서인지 눈앞의 여자가 나를 매서운 눈초리로 노려보고 있는 게 아닌가 하고 추측했다.
“일단 진정하고 좀 떨어지는 게 어때?”
“기이한 아해로구나. 선기와 사기를 동시에 품은 자라니. 아주 신기한 일이구나. 그런자가 장백파의 후예를 자처하는 것도 신기한 일이고.”
“아...그, 제가 어쩌다 표류하게 돼서 어쩔 수 없이 빌린 거예요. 무슨 악의가 있어서 사칭한 게 아니라요.”
“내가 그 말을 믿어야 할 이유가 있느냐?”
이 여자가 장백파의 진짜 후예라도 되는 건가? 아니, 어쩌면 후예가 아니라 조상쯤 되는 사람일 수도 있었다. 정확히는 사람이 아니라 못해도 신선, 아니면 반 정도는 선인이겠지만.
근데 정말 어떻게 알았지?
“내가 어떻게 알고 찾아왔는가 궁금해하는 얼굴이로구나. 둔한 자로고, 그대에 대한 소문이 이 도시 안에 파다하게 퍼졌다는 사실을 모르느냐?”
“...왜 내 소문이 퍼져?”
그리고 왜 한심한 년을 보는 것처럼 꼬라보는 건데?
“...황금색 눈을 가진 아리따운 여인이 무림 맹에 들어섰다. 그 여인이 장백파의 후예라더라.”
거참 직설적인 소문이네. 얼굴을 가린 것도 아니니 소문이 퍼지는 게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긴 한데, 이걸 좋아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모르겠다. 사실 있는 듯 없는 듯 가만히 있다가 조용히 볼일 보고 사라지는 게 베스트인데 그게 말처럼 쉬워야지.
이미 엎질러진 물이니 답도 없고.
나는 눈앞의 여성에게 무사히 빠져나갈 수 있는 방법을 찾으려고 해도, 그럴듯한 방법이 생각나지 않았다.
그냥 위험한갑다 하면서 무시하고 숙소에서 뒹굴었어야 했는데. 그래도 저쪽이 나를 적극적으로 해칠 의사가 있는 건 아닌 것 같으니 적당히 협상을 해볼까.
“그래서 해치기라도 하려고?”
“뻔뻔하구나. 허나 장백파의 후인을 사칭했다면 그 정도 뻔뻔함은 되어야지. 하지만 감히 장백파의 후예를 사칭한 죄를 물어야 할터...”
말이 참 살벌했다. 내가 장백파의 후예라고 거짓말을 한 게 이런 식으로 돌아올 거라곤 생각도 못 했는데. 인생 참 주옥 같이 꼬였네,
“어, 제가 그러고 싶어서 그런 게 아니라 저는 장백파가 있는지도 몰랐다구요. 보시다시피 여기 사람이 아니라서...”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 자네는 장백파를 사칭했고, 이 몸은 장백파의 후예를 사칭하는 괘씸한 자를 벌주면 되는 것을.”
아니 검 만지작거리면서 움직이면 벨것 같이 굴지 좀 말고 그냥 좋게 좋게 넘어가면 안 되나?
“우리 나름 같은 처지인데 이러지 맙시다. 그쪽도 내가 인간은 아니라는 것쯤은 눈치챘을 거 아냐?”
“그렇다 한들 죄가 사라지느냐?”
“그렇긴 한데...그래도 나쁜 의도로 쓴건 아니야. 나도 살아남으려면 적당한 문파이름을 댈 수밖에 없었고, 그게 장백파였을 뿐이라고.”
그러니까 그 검좀 치워 봐, 그 슬쩍 멀어져서 기수식 같은걸 취하지 말라고. 무섭잖아. 당장에라도 내 모가지를 자를 것같이 구니까 소름 끼치는데 나 살아나갈 수 있나?
이왕이면 대화로 해결하고 싶은데. 나한테 이렇다 할 저항수단도 없고. 그나마 흙뿌리기 정도인데 무림인들이 그걸 당해 줄지 모르겠네. 무림인들이 싸움에 이골이 난 족속이라 흙 마구 뿌리기 공격에 쉽게 당해 줄 것 같진 않단 말이야.
왜 무협지에 자주 나오잖아. 극독을 머금은 흙이라던가 그런 거. 그래서 경계할 것 같단 말이지.
“후...난 싸울 생각 없는데 우리 나름 신끼리 허심탄회하게 대화나 나누지 않을래?”
“그럴 생각 없다.”
단호하네. 도저히 대화가 통할 것 같아 보이지 않는 여성을 보며 나는 한숨을 쉬었다. 여긴 적의 영역이고 내가 손에 쥔거라곤 작은 흙덩이 하나뿐. 분위기나 말하는 꼬락서니를 보면 등선이라도 한 장백파의 무인 같은데 승산이 있을는지 모르겠네.
보통 등선할 정도면 무협 세계관에서 세계관 최강자쯤 되는 위치잖아?
신으로서의 격이 나보다 낮을 순 있어도 무공 짬밥 때문에 내가 이기기 힘들 거 같은데. 심지어 무기도 없고.
결국 싸우지 않는 게 최선이라는 소리였다. 아니면 한 번의 방심을 유도해서 이기거나.
...검강에 머리가 쪼개지진 않겠지?
신들 전력으로 후려도 멀쩡한 머리니까 검강 정도에 다치지는 않을 거다. 머리카락 포함해서. 나는 수틀리면 언제든지 머리카락으로 온몸으로 감쌀 준비를 한 채로, 내게 검을 겨눈 장백파의 신선에게 멀을 걸었다.
“그러지 말고, 우리 협상하면 안 될까?”
“협상?”
그래도 이야기를 들을 생각은 있는지, 내 쪽으로 향했던 검 끝이 내려갔다. 어차피 나 정도는 쉽게 처리할 수 있으니, 이야기 정도는 들어 주겠다는 표정이었다.
“보시다시피 난 싸울 생각도 없고, 어쩔 수 없이 이름을 빌린 것뿐이야. 그리고 장백파의 이름을 더럽힐 생각도 없어.”
“호오.”
그 가소롭다는 표정 보니까 뭔가 좀 킹받는데. 하지만 쫄리는 건 내 쪽이었으므로, 나는 굳이 내색하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그리고 내가 들어 보니까, 장백파는 세상에 나오지 않은지 오래되었다며? 혹시 장백파가 어떻게 되었는지 알고 있어?”
“호란 때 멸문지화를 당했다.”
병자호란? 지금이 20세기 직전쯤 될 테니까 거의 270년쯤 전에 망한 거네. 엄청 오래전에 망했구만. 그럼 그 전에 등선했거나 그때쯤 살았던 사람일 테니 나이가 엄청 많...네? 외모는 나보다 어려 보이는데.
나보다 어려 보일 정도면 세간에서 중학생 정도로 보이는 거 아닌가? 세상을 넓고 얼굴 사기 치는 여신은 많나보다. 하긴 어떤 여신이 할머니 모습으로 있고 싶겠어. 적어도 내가 만나 본 여신들은 다 젊은 모습이었다고.
“어르신이라고 부르면 돼나요?”
“갑자기 존댓말이라니, 뭔가 기분이 나쁘구나.”
“아니, 동방예의지국 출신 답게 연장자에게 예를 갖추는 것뿐인데요. 장유유서는 지켜야죠.”
“허어. 말이면 다인 줄 아느냐?”
어처구니없다는 듯 말하고 있지만, 표정 보니까 연장자 취급해서 은근 좋아하는 거 같은데. 생각보다 쉬운 상대일지도 모르겠네.
“같은 신끼리 그러지 말죠. 제가 당신 사문에 누가 될 일하지도 않았고, 그럴 생각도 없는데 굳이 이렇게 쳐 내려고 하시면 양쪽 다 곤란해져요.”
“내가 곤란해질 일이 있단 말이냐?”
“생각해 봐요. 이미 제가 장백파의 후예라고 알려진 시점에서 제가 갑자기 사라진다? 이 시국에 제가 사라지면 무림 맹 사람이 어떻게 생각할까요? 저를 실종자라고 생각할까요, 아니면 첩자라고 생각할까요?”
당장 당가의 장로도 나를 의심하는 것 같았고...신원이 제대로 확인되지 않은 나를 경계하는 사람은 꽤 많을 거다. 지금 가장 중요한 건 내부의 결속과 체제 정비이지만, 첩자 색출도 중요하니까.
“네가 사라지면 장백파의 이름에 손상이 갈 수도 있다는 소리렸다?”
“그렇죠.”
“궤변이로구나. 설사 자네가 첩자 취급을 받더라도 장백파의 후인 행세를 한 첩자 취급을 받을 것 아니더냐?”
“모두가 그렇게 생각할까요?”
일부는 그렇게 생각하겠지만, 일부는 아니겠지. 애초에 장백파는 중국의 문파가 아니라 조선의 문파다. 누명이 씌워져도 이 악물고 옹호해 줄 사람이 없다. 누군가 ‘장백파가 의화단에 붙어 첩자 노릇했다!’라고 소문을 내면 실드쳐줄 인간이 없다는 소리다.
잘못된 소문이 정정될 기회조차 없다.
...이러니까 내가 졸렬킹이 된 느낌인데.
“이미 사라진 문파로다. 이제 와서 그런 헛소문이 돌아도...”
조금 목소리가 떨리는 걸 보니 수백 년 전에 사라졌어도 사문이라고 애정이 남아 있는 모양이었다. 어떤 식으로든 사문의 명예가 불명예를 안게 되는 걸 달가워 하진 않겠지.
왜, 무림인들이 명예에 죽고 사는 족속들이잖아. 그러니까 한 번 찔러본 건데 생각보다 반응이 있네.
“그러니까 차라리 이렇게 해 보는 게 어때요? 당신은 저한테 장백파의 무공을 가르치는 거죠.”
“...이야기가 왜 그렇게 되느냐?”
“제가 장백파의 제자가 되면 사칭이 아니게 되니까 신선님이 저를 제자로 받아서 무공을 가르치면 되지 않을까요?”
어차피 이 장소 시간이랑 공간이 적당히 분리된 곳이라 시간의 흐름도 다른 것 같은데...혹시 몰라서 머리카락을 바깥에 남겨두기도 했다.
“당돌한 제안이구나.”
그래도 표정을 보니 꽤 흥미롭다는 표정이시네.
“무공이 애들 장난인 줄 아느냐? 무공은 하루 이틀 배워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평생을 걸쳐서 연마하는 것이니라.”
“딱 보니까 여기 시간의 흐름이 다른 것 같은데, 여기서 수련하고 나가면 충분하지 않나요?”
“용케 눈치챘구나.”
“척 보면 척이죠. 이런 짓 하는 신이 한둘이 아니라서요.”
헤카테도 자기 연구실에 비슷한 짓을 해 놓기도 했고.
“그래서, 어때요? 제 제안?”
“...죽고 싶을 정도로 수련을 시켜 주마.”
“구배지례부터 하면 되나요?”
“...스승이 될 자에게 구배지례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더냐.”
그건 그래.
나는 내 스승이 될 할머...아니 신선에게 절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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