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40화 〉 강시 아니라고(14)
* * *
“이번 비무의 승자는! 악산검가의 강산이오!”
“대단한 비무였군.”
눈이 즐거운 비무였다. 적어도 내 일천한 무공지식으로는 딱 그 정도의 감상밖에 느끼질 못했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내가 무공을 아나 검법을 아나. 나는 어디까지나 전생의 검술을 적당히 휘둘러대고 있을 뿐이고, 내 검술은 전장에서 익한 실전 검술에 가까웠다.
그냥 베고, 찌르는 것밖에 없는.
전생이 짬밥 덕분에 어떤 검이든 비슷비슷하게 쓸 수 있긴 하지만 무공에 비하면 밀리는 감이 있었다. 애초에 검이 주 무기가 아니었으니 어쩔 수 없는 점도 있지만...
...씁, 나도 검술 좀 배우고 싶네.
당장 나를 무림인으로 알고 있으니 검술을 가르쳐달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렇다고 비급을 얻자니 얻기 쉽지 않다. 정말 삼재 검법이 아니고서야 내가 얻을 방법이 없었다. 일단은 돌아갈 방법부터 찾는 게 맞겠지만...
찾을 수 있을까?
“소저?”
“아, 무슨 일인가요?”
“혹시 몸이 좋지 않소?”
“아니요. 비무를 보고 있자니 고향생각이 나서요...”
나는 적당히 둘러댔다. 대놓고 ‘무공이 배우고 싶은데 구하기가 쉽지 않네요.’라고 말할 수는 없었으니까. 무림인이라고 구라를 쳤는데 어떻게 말해? 말했다간 내가 거짓말했다는 게 들킬 테고, 들키면 간자가 아닌가 의심을 받을게 뻔한데 말이야.
이런 민감한 시국에 그런 실수를 할 순 없지.
기껏 무림 맹까지 들어왔는데 덜미를 잡히면 그것만큼 골치 아픈 것도 없다. 한국이라면 모를까 적어도 이곳에서는 나는 떠돌이나 마찬가지인 상황이었으니까. 게다가 아무리 세가 약해졌다고 한들 여긴 정파의 심장부였다.
재수 없으면 그대로 훅 가는 거지. 암만 내가 여신이라도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막 도망칠 수 있는 건 아니다.
하다못해 지옥참마도라도 있었으면 상황이 다를 텐데.
“나도 타지에 있을 때면 고향 생각이 난다오. 몸 성히 돌아갈 수 있을련지...”
“그런 소리 하지 마세요. 말이 씨가 되는 법이예요.”
“흠...그렇군. 미안하오 소저.”
집을 떠나면 향수병이 생길 수밖에 없지. 물론 집에 안 좋은 추억을 가진 사람도 있겠지만, 어지간한 사람들은 다 그렇지 않을까. 제 몸 편히 뉘일 곳은 집 밖에 없으니까.
...그리고 화장실도.
요강 싫어! 싫다고! 그냥 평범하게 수세식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고 싶단 말이야!
그리고 중국옷 되게 불편해! 발이야 시비들처럼 전족 비스무리한 걸 안 써서 다행이지 옷 품질이 현대 수준은 아니라서 까끌까끌한 느낌이기도하고, 신축성이 그닥이라서 품이 좀 커서 신경이 쓰인단 말이야.
...무림인들은 정신없이 움직여대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인 것 같기는 한데.
어쨌든 나는 집에 돌아가고 싶었다. 애들 걱정도 되지만, 이 100년도 더 전의 생활양식이 도저히 익숙해질래야 익숙해질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요강 대신 수세식 화장실이, 아궁이대신 깔끔한 현대식 주방이, 우물 대신 수도시설이 있는 현대가 너무나도 그립다. 이런 식으로 향수병을 느끼게 될 줄은 몰랐는데. 암만 무림이라지만 이런 인프라는 못 참는다.
아무튼, 비무는 슬슬 막바지였다. 해가 중천에 떴을 때 시작했던 비무가 이제는 석양이 얼핏 보이기 시작한 시간까지 이어졌으니, 대여섯 시간 정도는 하지 않았을까.
비무의 우승자는 두 번째쯤 나왔던 소림의 승려였다.
주먹질 좀 쩔더라. 웅녀가 배우면 맨손으로 미사일을 날리는 수준이 되지 않을까? 당장 지금도 전력으로 팔을 휘두르면 곰 정도는 한 방에 즉사시킬 수 있는 게 웅녀였다. 나름 이름난 요괴들도 맞으면 제 명에 못 사는 건 기본이었고.
근데 개는 힘이 왜 그렇게 쎈거야? X크도 아니고 슈퍼혈청 맞은 것도 아닌데 변이자라해도 너무 세잖아. 웅녀의 후예는 대대로 괴력을 가지고 있는 일족 같은 거야?
아무튼, 나는 비무가 끝나자 자리에서 일어나 숙소로 향했다. 숙소로 향하는 길은 혼자였다. 남궁수호는 창궁무애단과 만나 할 일이 있어 헤어졌다. 어차피 여자랑 남자 숙소는 거리가 좀 있어서 결국 혼자 가야 하긴 하지만 좀 그러네.
별로 배가 고프지는 않으니 그냥 숙소에 들어가서 잠이나 잘까. 이 시간에 딴 데 갈 수도 없고. 여긴 한국이랑 다르게 치안이 막장 그 자체란 말이야. 관군은 유명무실해 진지 오래고 무림인들이 치안을 잡아서 정말 아슬아슬한 상황이랄까.
아시다시피 무림인들은 폭력을 쓰는 것에 거리낌이 없어서, 정파든 사파든 아무래도 무림인들이 치안을 담당하는지역은 조금 뭐라고 해야 하나, 위험한 느낌? 내가 무림 맹에 오는 길에 본광경도 그랬었고.
사람들도 무림인을 은근히 무서워 하는 눈치였다.
하긴, 잘못하면 자기 목숨이 파리처럼 날아갈 수가 있는데 어떻게 무서워 하지 않겠어. 심지어 의화단이란 놈들이 민간인들도 수틀리면 약탈하고 죽여대는데 평범한 민간인들에겐 지옥 그 자체인 세상이다.
차라리 지옥이 낫지. 여긴 언제 무슨 일에 휩쓸려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세상인 것이다. 인권 개념이 잡히고 법치국가인 현대 한국과는 목숨의 가치가 극과 극이라고 하면 대충 이해가 되려나.
...내가 누굴 이해시키려는 건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나는 들어가서 잠이나 잘 생각이었다. 어차피 지금 내가 할 게 없기도 했고, 비무를 계속 보려니 눈이 좀 뻐근했으니까.
그렇게 들어가려던 때였다.
나는 불현듯 휘몰아치는 직감에 걸음을 멈췄다.
뭐지?
이건...익숙한 기운이었다.
어째서?
이건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기운이 아니었다.
나는 직감이 가리키는 대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직감은 마치 나침반이라도 되는 것처럼 나를 직감의 근원으로 인도하고 있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내가 걸을수록 인적이 드물어 지고 있었다. 그리고 기이하리 만큼 해가 빠르게 지고 있었다. 아니, 이건 시간이 지난 게 아니다.
이계였다. 명실상부한.
이게 무협지에서 나오던 진법일까? 아니면, 정말로 초자연적인 무언가가 이 너머에 있는 걸까? 들어가는 게 맞을까?
이계를 만든 사람, 아니 인외일지도 모르는 자가 나에게 호의적일지, 아니면 적대적일지는 알 수가 없다. 여기서는 절대 들어가지 않는 게 맞지만, 어쩌면 단서일 수도 있었다. 이런 이계를 만들 수 있는 존재라면 내가 찾고자 하는 물건의 힌트 정도는 얻을 수도 있으니까.
결심은 순간이었고 행동은 즉시였다. 나는 곧바로 이계로 발을 내디뎠다.
이계로 들어서니, 내 감각을 건드리던 기운이 한층 선명해졌다. 이걸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무협지 식으로 말하면 선기? 신들이나 신선에게서나 볼 법한 기운이었다. 적어도 평범한 인간은 아니니까 뭔가 좀 알고 있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혹시 모르니 나는 적당히 흙덩이를 주워 둥글게 뭉쳤다.
대 신성 카운터용 흙덩이다.
제우스도 맞으면 발기부전이 오지. 이거 먹이면 신들도 그랜절하면서 뭐든 뱉지 않을까? 물론 입에 집어넣었을 때 이야기지만.
역시 지옥참마도가 필요해. 여기서 준 철검으로는 아무래도 불안하단 말이야.
앞으로 쭉 걷다 보면 뭐라도 나오겠지 싶어 계속 걸어간 끝에, 나는 멀리에 연무장 비슷한 곳이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리고 그 앞에 누군가가 검을 들고 서 있는 것도 볼 수 있었다. 나를 등지고 선 누군가는 나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밤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노을 진 하늘이 아니라 밤하늘이라니. 여긴 시간도 다른가?
“...용감하구나.”
“...뭐?”
갑자기 무슨 소리야.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하늘거리는 옷을 입은 여성을 쳐다보았다.
이윽고, 여성이 뒤돌아 나를 바라보았다.
“...누구세요?”
“흠, 슬프구나. 장백파의 후인을 자처하는 자가 이 몸을 알아보지 못할 줄이야. 하기야, 장백파를 사칭하는 사칭범이니 당연한 일이지.”
...뭔가 좆 된 거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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