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39화 〉 강시 아니라고(13)
* * *
“지금부터! 친선비무를 시작하겠소!”
와아!
어우, 귀야.
나는 귀청을 울리는 함성에 귀를 틀어막았다. 천 명이 넘는 군중이 한데 모여 소리를 지르니 그야말로 소음공해가 따로 없었다. 나는 나름 괜찮은 자리에 앉아 비무대에 선 두 무인을 응시했다.
“첫 번째 비무는! 화산의 매화 검수 백운! 그리고 종남의 검객 유성! 두 검수들간의 대결이오!”
나는 환성 속에 섞인 관중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원래 이런 건 관중들이 설명충 빙의해서 해주는 대화를 들어 보는 게 정석이지.
“자넨 누가 이길 것 같나?”
“당연히 매화 검수가 아니겠나? 아무리 화산파가 예전에 비하면 힘이 약해졌다지만, 그렇다고 반쯤 봉문하다시피한 종남에 비할 바는 아니라네.”
“예끼 이 사람아. 말 조심하게. 군웅들이 모인 곳에서 함부로 말하면 훅 가는 건 순식간이야.”
“자기가 물어봐놓고는...”
와! 매화 검수! 나 그거 알아! 매화 검수는 거기에서도 매화향이 나...진 않겠지? 아무튼 매화향이 나는 검술로 유명하니 무협지 좀 봤다 하면 다 아는 정보였다.
무협지를 보면서 화산을 모를 수가 없잖아. 주연이든 조연이든 무조건 등장하는 게 화산파인데. 유명한 신공은 자하신공. 장문인들한테만 전승된다는 신공이라는 이름이 부족하지 않은 심법에 이십사수매화 검법은 화산파의 유명한 검법으로 이름이 높지.
종남은 내가 아는 게 별로 없다. 그나마 천하삼십육검이란 게 있었다는 것 정도만 아는데, 뭐 주인공으로 나오는 무협지가 좀 있어야 알지. 종남은 청성 공동파 곤륜이랑 엮여서 조연 담당으로만 거의 나오는 포지션에 가까웠다.
...사실 도가 계열이 무당이랑 화산 말고는 딱히 부각이 되는 경우가 적지.
무당은 남존무당, 도가의 최고문파로 워낙 이름이 드높은 곳이기도하고, 정파 쪽 주인공을 삼을 때 자주 고려되는 곳이기도 하니까. 화산도 최근에 화산파 쪽 애가 주인공인 소설이 많아서 팍 뜨는 느낌이고.
솔직히 매화이십사수검법이 워낙 낭만이 넘치잖아. 검에서 매화를 피워내는 검술이라니, 피 튀기는 무림답지 않게 낭만이 넘치는 검술을 싫어할 사람이 어디 있겠어? 도가는 매화에서 도를 찾는다지만, 나 같은 일반인은 낭만을 느낄 뿐이야.
비무장에 피어오른 매화처럼 말이야.
저게 매화이십사수검법이구나.
나는 비무장을 수놓는 매화를 보며 생각했다. 검술에는 전생의 지식을 빼면 아는 게 그리 많지는 않아 내 안목이 뛰어나다고 하기에는 모자라지만, 그래도 저 수십 갈래로 뻗어 나가는 검을 보고 있자면 이래서 무공을 배우는 구나, 하는 생각이 드네.
빠르고, 강맹하고, 화려하다.
검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라도 눈앞의 광경을 보면 감탄하며 바라볼 수밖에 없을 거다.
역시, 무공을 배워 보고 싶다. 삼류 무공이라도 괜찮다. 내가 원하는 건 은 거기인의 무공이니 뭐니 하는 거창한 물건이 아니었으니까. 그저 호기심을 충족할 정도의 무공이면 된다.
혹시 무림 맹에서 괜찮은 무공서적이 있나 물어보기라도 해볼까.
“졌소.”
“훌륭한 검술이었소.”
“당신도.”
“첫 비무의 승자는 화산파의 백운! 백운이요!”
와아아아!!
관중들이 일제히 내보내는 환호에 나도 조용히 박수로 동참했다. 시끄럽게 굴기는 좀 그렇고, 적당히 호응은 해 줘야지. 안 그래도 눈에 띄는 외모라 시선이 집중되는데, 시끄럽게 굴면 더 눈에 띌거 아니야.
사람들 모인데서 가만히 있는 게 상책이다. 군대에서도 그런 말 자주 하잖아. 가만히 있으면 중간은 간다. 진짜 명언이라니까.
“대단한 검술이예요...”
“하하, 화산의 검술은 무림에서도 알아주는 일절이오. 하지만 제왕검형도 거기에 지지 않는 검술이지.”
제왕검형이라...남궁 세가의 가주만이 익힐 수 있는 검술이었지? 무림을 대표하는 검술중 하나이니 분명 개 쩔겠지? 그거도 한 번 보고 싶네.
아마 볼 기회가 생기긴 하겠지?
“제왕검형이면...남궁 세가의 소가주만이 배울 수 있다는 그 무공말인가요?”
“그렇소. 무림 최고의 검법이지.”
남궁수호의 말에서 남궁 세가에 대한 끝이 없는 자부심이 느껴졌다. 이상한 일은 아니다. 자기 집안에 대한 자부심이 없는쪽이 오히려 이상하지. 여기서도 그렇게 불리는지는 모르겠지만, 남궁 세가하면 중원제일 검가로 손꼽히는 곳이니까.
무협지에서도 온갖 중역을 도맡거나 하는 곳이 바로 남궁 세가였다. 흑막으로 나올 때도 있긴 했지만. 하여튼 비중 있는 조연부터 흑막까지, 온갖 포지션을 담당하는 곳이 바로 남궁 세가다.
“나중에 견식할 일이 있다면 좋겠네요.”
“금방 볼 수 있을 것이오. 이 비무제에 나도 참가하니.”
“기대할게요. 공자님.”
나는 속이 느글거리는 것을 참으며 미소를 지었다. 처음부터 그냥 왈가닥 컨셉을 잡을걸 그랬나. 근데 그것도 좀 그렇잖아. 그냥 딱 이 정도 컨셉에 무난했다. 적당히 수줍음 타는, 얌전한 소저?
...웅녀가 그런 역할 은근히 잘할 것 같은데.
웅녀가 여기 왔으면 무공 하나만 잘 배우면 고수가 됐을 것 같은데. 힘만 따지면 톤 단위로 물건을 들어 올리는 애인데 적당히 권법 같은 거 하나라도 배우면 그야말로 날개 달린 곰탱이가 되지 않을까?
정말 아무도 무서워서 못 건드리는 괴물이 될 것 같은데.
안 그래도 콘크리트 따윈 두부 부시듯이 부셔버리는 애가 권법이랑 내공까지 쓴다?
진짜 결전 병기 만들일 있어?
제우스도 무공 배운 웅녀한테 죽빵 한 대 맞으면 강냉이 다 털릴 것 같은데...
씁. 돌아가더라도 웅녀한테는 절대 무공 알려주면 안 되겠다. 개도 은근히 무협지 같은 거 보던데 알려주면 가르쳐달라고 할지도 몰라.
“다음 비무는! 소림의 나한 권 공무 스님과 팽가의 도객, 팽원일이오!”
와아아아!
두 번째 비무는 권법대 도법이야? 일반적으로 무기와 맨손이 부딪치면 맨손이 지는 게 당연하지만...소림이니 다르겠지.
애초에 무림인들은 내공을 두르고 싸우니 단순히 쇠붙이를 들고 있다고 해서 마냥 유리한 것도 아니고. 특히 소림은 천하공부출소림이라고, 정파의 정신적 지주이자 무림의 태산북두로서 아주 유명한 곳이다.
적어도 무협지에서 소림을 무시하는 사람은 없었다. 정파의 뿌리가 대부분 소림에서 나왔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지. 백보신권, 금강불괘, 여래 신장, 셀 수도 없이 많은 무공이 소림에서 나왔으니까.
당장 소림의 고승은 천하제일인은 아니어도 그에 따르는 인간이 하나둘씩 튀어나오니 말할 것도 없다.
그럼 소림승의 상대인 팽가는 어떨까.
팽가는 오호단문도와 혼원벽력신공으로 유명한 세가였다. 일단 작품에 따라 다르다 쳐도 도법이 중심인건 언제나 똑같고, 호탕한 성격의 무인들이 많다...는 설정이 많더라.
근데 비무대 앞에 서 있는 남자는 그렇게 호탕해 보이는 성격은 아닌데.
무협지에서의 기억을 적당히 떠올리며, 나는 비무대를 바라보았다. 솔직히 비무 본다고 얻어가는 게 있을진 모르겠지만, 그래도 세상에서 제일 재밌는 게 싸움 구경이라고, 재밌긴 하잖아.
나랑 다르게 폭풍전야 그 자체인 분위기에 즐겁게 보지 못 하는 사람들도 꽤 많은 것 같지만.
무림의 중심이나 다름없는 정파가 이렇게 몰락했으면 사파는 어떨까. 똑같이 위기를 겪고 있을까? 아니면...
“그럼! 지금부터 비무를 시작하겠소!”
내가 생각에 잠긴 사이, 두 번째 비무가 시작되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