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22화 〉 에포나의 기묘한 모험(8)
* * *
“너 잘 따라오네!”
“헉...헉...미치겠군. 도대체 어디까지 가려는 것이오!”
벌써 도시를 두 바퀴나 돈 참이었다. 에포나는 시종일관 여유로운 얼굴로 숨을 몰아쉬는 천마를 바라보았다.
생각보다 잘 따라오네!
에포나가 하만과 합류하기 전 들렀던 평야에서는 그곳의 우두머리인 유니콘과 경주를 벌여 호수를 달려서 건너 이겼던 후엔 자신과 겨룰 정도로 빠른 생물과 만나지 못했던지라, 느리긴 해도 어느 정도 자신을 따라잡는 천마를 호의적인 눈길로 바라보았다.
저승을 달리는 저승마였던 에포나는 평범한 생명체가 낼 수 있는 속도로는 경쟁조차 불가능한 속도를 자랑하는 말이었기에, 지상에서는 적수가 없었다. 그나마 그녀와 경쟁이 가능했던 것은 생명체가 아닌 인간이 만들어 낸 탈것.
그나마도 그녀가 성체가 되고 나서는 그마저도 그녀에게 뒤처질 뿐이었다. 탈것은 그저 인간이 한계를 정해 놓고 만들어놓은 물건이었지만, 에포나는 계속해서 성장해 나갔으니까. 에포나가 세자릿수의 나이를 지녔을 즈음엔 소리보다도 더 빠른 속도로 달릴 수 있게 되었다.
발이 닿는 곳은 어디든 달리고,
무엇이든 제친다.
에포나는 그녀의 발이 닿는 모든 땅에서 누구보다 빠르게 달렸다. 그녀가 살던 세계에서도, 그리고 새로운 세계에서도. 그녀의 뜀박질은 멈출 줄 몰랐다.
비록 그녀가 태울 주인이 저택에 칩거한 채 하염없이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그래도 그녀는 달렸다. 그녀의 주인이 저택에서 다시 나올 때를 기다리며.
에포나는 눈앞의 흥미로운 상대를 바라보았다. 아무리 뒷뜀박질로, 느긋하게 뛰었음에도 그녀를 따라올 수 있었다는 사실이 에포나의 호기심을 끌었다. 네발 달린 동물도 아닌 인간이 그녀의 속도를 조금이나마 따라온 것은 못해도 수천 년 만에 처음이었으니까.
자연스럽게 에포나는 천마에게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어찌 그런 힘을 가지고 그런 악행을 저질렀소?”
“악행?”
“허어...시치미떼도 소용없소. 내 직접 피해자의 눈물어린 증언을 듣고 왔거늘!”
“피해자? 누구?”
에포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자신이 뭔가를 저지른 기억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애초에 에포나는 이 세계와서 한 것이라곤 달리기와 달리기와 달리기와 도시 탐방 밖에 없었기 때문에 천마가 말하는 악행이 무엇인지 조차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대가 발로 걷어찬 남자가 죽었다는 건 알고 있소?”
“음...발로?”
그런 적이 있었나?
생각해 보니 시장 구경을 방해하던 놈을 가볍게 발로 차주긴 했다고 에포나는 떠올렸다.
하지만 에포나는 나름대로 힘 조절을 하고 상대를 발로 찼기에 차인 남자가 죽었을걸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애초에 그런 인간 하나 죽었다고 눈 하나 깜빡할 위인도 아니었고.
“시장구경을 방해한 놈을 발로 차주긴 했던 거 같아.”
죽었었나? 힘 조절은 한 것 같은데...
에포나는 머리를 굴려 기억을 되짚어 봤지만 발로 찬 이후의 일은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 애초에 굳이 저장공간을 활용할 정도로 가치 있는 기억은 아니었으니까. 애초에 그녀는 관심도 없었다.
“뻔뻔하군! 사람을 죽이고도 그렇게 태연하다니! 내 비록 그대에 비하면 하찮은 목숨이나, 협객을 지향하는 자로서 그대 같은 악적을 두고 볼 수는 없소!”
천마는 식은땀을 뻘뻘 흘리면서 열변을 토했다. 열변을 토하면서도 이게 맞나 싶었지만, 여기까지 온 이상 물러설 수도, 물러설 생각도 없었다. 최소한 협객을 자처했으면 목숨을 초개 같이 버릴 줄도 알아야 협객이 아닌가.
지나치게 무협에 심취한 나머지 천마를 자칭하는 인간이 되었지만, 그렇기에 자칭 천마, 남궁철수는 나름대로 확고한 신념으로 움직이는 인간이었다. 그가 살던 곳은 협도, 천마도 전혀 존재하지 않는, 지옥 같은 강자존의 무림이었으니까.
강자는 강자라는 이유로 모든 것을 얻고, 약자는 약자라는 이유로 모든 것을 빼앗긴다.
그가 살았던 무림의 유일한 규칙이었다. 전생에서 무협지를 좋아했던, 무협이라는 세계에 심취했던 그로서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세상.
그는 그 세상 속에서 진정한 협을 찾아 헤맸지만, 남은 것은 친구에게 배신당하고 절벽에서 떠밀려진 뒤에 이 이름 모를 세상을 왔다는 사실 뿐이었다.
“그대는 본인보다 윗줄의 고수이니, 선제 공격한다해도 뭐라 하지 않겠지.”
천마, 남궁철수는 검을 꺼내 들었다. 이 세계에 와서 검을 꺼낸 적은 그리 많지 않았지만, 눈앞의 상대는 3할을 남기기는커녕 전력을 다해 덤벼도 살아남을 수 있을지 없을지 장담할 수 없는 상대였다.
나름대로 어린 나이에 절정 고수의 반열에 들어서면서 손꼽히는 기재였던 만큼, 그의 신법은 뛰어난 편이었고 속도에도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저 속도는 뭔가.
사람이 아니라 맹수라고 해도 믿을 법한 날렵한 움직임은 인간이 낼 수 있는 속도가 아니었다. 심지어 그를 바라본 채로 뒤로 뛰는 모습은 상대가 아주 위험한 상대임을, 그가 감당할 수 없을 만한 고수임을 그는 한 번에 알아보았다.
알아보지 못하면 그가 이곳에 오기 한참 전에 목숨을 잃었을 테니.
남궁철수는 내기를 끌어올려 검을 감쌌다. 푸르스름한 기가 그의 애검을 감싼다. 그가 무림에서 살았었다는 거의 유일한 증거였다. 에포나는 남궁철수의 검을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 검에 두른 건 뭐야? 신기하네!”
“...이상한 소리를 하지 마시오. 어떻게 그대가 검기를 모를 수 있소?”
이곳의 기사들도 사용하는 게 검기였다. 애초에 기사들이 사용하는 검기에 대한 이야기는 귀왕족들부터 농부에 이르기까지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했다.
자기 전 부모님이 알고 있던 기사의 무용담을 자장가 삼아 듣고 자란 아이들이 커서 어른이 되고, 어른이 된 아이가 다시 전해내려온 무용담을 들려주고...그렇게 전해 내려온 이야기가 한둘이 아니니, 적어도 이 세상에서 검기에 대한 이야기는 과장이 섞여 있을지언정 모르는 사람이 없는 이야기였다.
“음~하지만 모르는 건 모르는 거야!”
싸우는 상대라고 느껴지지 않는 에포나의 해맑은 대답에 당혹스러운 것은 철수 자신뿐이었다.
“그럼 가겠소.”
남궁철수의 발이 땅을 박찼다. 내공이 실린 발끝이 몸을 튕겨 냈다. 보통 사람이라면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졌다고 생각할 속도.
에포나는 바람을 가르며 날아오는 천마를 그저 바라보기만 했다.
굳이 발걸음을 뗄 필요조차 없었다. 소리 조차 따라오지 못 하는 에포나에게 있어 철수가 다가오는 속도는 신속함과는 거리가 멀었으니까.
천마는 에포나와의 거리가 지척에 다다르자 검을 휘둘렀다. 가차 없이 에포나의 가녀린 목을 향해 살수가 휘둘러졌다.
손속에 여유를 둘 필요는 없었다.
천마는 도전자였다. 전력으로 부딪혀야만 한다!
에포나는 전력을 다한 천마의 출수를 손으로 잡아내는 것으로 대응했다. 푸른 내공이 넘실거리며 에포나의 손을 파고들려 노력했지만, 에포나도 멋으로 수 천 년 동안 살아온 것이 아니었다.
“이거 신기하다! 기운을 이렇게 쓸 수도 있구나?”
“검기를 손으로 잡는다고?! 이런 말도 안 되는!”
천마는 아무리 힘을 줘도 꿈쩍도 하지 않는 검을 보며 경악했다. 어떤 고수라도 검기를 맨손으로 잡는 미친 짓은 하지 않는다.
자연의 기를 검에 담아내는 검기는 압도적인 절삭력을 자랑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이 세계에서 가장 튼튼한 가죽을 가졌다는 몬스터인 오우거 조차도 검기에 닿으면 닿은 부위가 두부 썰리듯이 잘려 나가는데, 그걸 맨손으로?
아무렇지 않게?
눈앞의 상대는 인간인가?
천마는 이 세계에서 들은 이야기를 떠올렸다.
가끔 드래곤이 인간 세상에 숨어서 유희를 즐긴다고. 허무맹랑한 이야기라고 생각했지만, 어쩌면 정말일지도 모른다고 천마는 생각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설명할 길이 없다.
검기를 맨손으로 잡아채는 소녀의 느긋한 시선을.
“너 신기한 걸 쓰는구나! 재밌어! 주인님이 보면 재밌어 할 것 같아!”
뭐라고?
천마는 그 말뜻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물어볼 시간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천마는 손목에서 느껴지는 따뜻한 감촉에 얼굴을 붉혔다.
그리고 그것이 천마가 의식을 잃기 전에 느낀 마지막 감촉이었다.
그날, 샤르지의 성벽에 원인을 알 수 없는 커다란 구멍이 생겨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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