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21화 〉 에포나의 기묘한 모험(7)
* * *
“천마?”
“그렇소!”
천마, 본명 남궁철수는 눈앞의 아름다운 여성을 보며 마음을 다잡았다.
‘현혹 되어선 안 된다!’
지나칠 정도로 아름다운 외모였다. 여행을 다니면서 온갖 미인들을 보았지만, 단연코 눈앞의 여성보다 아름다운 사람은 존재하지 않을 거라고 철수는 확신했다. 아름답기로 유명한 엘프들조차 눈앞의 여인과 비교하면 초라하게 보이리라.
하지만 눈앞의 여성은 어쨌거나 악적이었다. 그가 단죄해야 할. 철수는 올곧은 눈으로 에포나를 노려보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에포나는 철수의 대답을 듣고선웃음을 터트렸다. ‘천마’의 의미를 모르는 그녀 처지에서는 철수가 내세운 가명이 우스웠기 때문이리라.
“히히, 먹을 거 같아! 재밌는 이름이네!”
에포나는 가끔 산에 놀러 갈 때마다 캐먹었던 마를 떠올렸다. 가끔 그녀의 주인님이 사 온 마를 적당히 익혀 꿀에 버무려 준 마 꿀절임은 에포나가 좋아하는 간식이었다.
“어떻게 그런 심한 말을! 내 처음 말을 들었을 때는 반신반의 하고 있었거늘, 진짜 악적이었구려!”
“야, 저거 맞냐?”
“몰라, 빨리 싸우긴 했으면 좋겠다.”
에포나와 천마를 둘러싼 군중이 흥미진진한 눈으로 둘을 바라보았다. 오락이 적은 세상에서 이런 구경거리는 아주 좋은 볼거리였으니까. 바쁜 일과가 끝나고 술집에서 피로를 풀 때가 되면 훌륭한 술안주가 될 수 있으리라.
결과가, 과정이 어떻든 간에 싸움이란 건 아주 자극적인 법이었으니까.
두 사람은 서로 거리를 두고 멈춰 섰다. 선수 필승이라고 하지만 그것은 서로가 서로를 잘 알 때나 의미가 있는 방법이다. 서로를 모르는 만큼, 섣부른 공격은 오히려 허무한 패배의 단초가 될 수도 있는 법.
나름대로 싸움에 이골난 천마와 야수의 심장을 가진 에포나는 함부로 움직이지 않았다.
둘 사이에 침묵 섞인 시선이 오갔다.
“뭐 하는 거야? 재미없게시리.”
“야, 넌 그것도 모르냐? 원래 고수들의 대결에서는 먼저 틈을 만드는 쪽이 지는 거야. 그러니까 서로 먼저 틈을 보이도록 유도하는 거지.”
“그러니까 서로 눈치 보느라 안 움직이고 있다는 거 아냐?”
‘엄청나군.’
이세계에 떨어지고 난 지 1년째. 자칭 천마는 남몰래 식은땀을 훔치며 에포나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불길한 기운에 긴장했다. 그가 이세계를 방랑하면서 본 전사들이 마력으로 몸을 강화하는 것을 본 적이 있지만, 에포나의 몸에서 느껴지는 기운은 정교함과 거리가 멀었다.
언제든 모든 걸 박살 내며 달릴 거친 야생마처럼 들끓는 기운.
무림에서 환생해 나름대로 젊은 나이에 일류고수의 자리에 오르고 수많은 상대와 싸워 본 철수는 자기 패배를 직감했다.
아무리 이 세계에서의 수련으로 절정 고수가 된 그라고 하나, 눈앞의 상대가 뿜어내는 기운은 그 이상을 넘어 어쩌면 말로만 듣던 경지에 이르른 것처럼 무시무시한 기운을 뿜어냈으니까.
‘이 기운이 느껴지지 않는단 말인가?’
철수, 아니 천마는 되려 아무것도 느끼지 못 하는 사람들을 보며 이마를 살짝 찌푸렸다. 몸에서 느껴지는 기운만 하더라도 절로 긴장이 되는데, 자신 말고는 그런 기운 따위는 느껴지지 않는다는 듯 구경하는 군중들이라니!
설마 기운을 자신에게만 집중시켜 위협하는 것인가!
죽음에 가깝고 기운에 민감하지 않으면 에포나가 가진 사기(死?)를 느끼지 못한다는 사실을 그는 눈치채지 못했다.
어쨌거나 그의 상황은 최악이었다.
천마는 죽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자기보다 윗줄의 실력을 가진 상대와 싸울 때는 목숨을 걸어야 하는 법이다. 하지만 상대가 악적이라면 다소 무모한 도전이라도 그는 해야만 했다.
그에게 거짓을 고한 사내는 ‘사람 여럿을 자신을 방해한다는 이유로 죽인’ 악적이라고 말했기 때문이었다.
협객을 자칭하는 자가 악당을 그냥 두고 지나칠 수는 없는 법. 협객 따윈 책 속의 허구 취급받았던 무림에서 협객을 꿈꿔왔던 그로서는 눈앞의 악당을 절대 놓칠 수는 없었다.
자신이 죽더라도, 협을 추구한다.
그것이 협객이니까!
“왜 안 움직여? 안 움직이면 난 갈 거야! 점심먹으러 가야돼!”
“잠깐 기다리시오!”
자신은 안중에도 없다는 상대의 태도!
에포나는 상대가 아무것도 하지 않자 싫증이 나버렸다!
원체 변덕스러운 성격의 에포나를 앞에 두고 대치만 했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애초에 에포나는 가만히 있는 걸 싫어하는 것이다. 말은 달리기 위해서 태어났으니.
천마는 처음 겪는 상황에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에포나를 붙잡으려 했다. 하지만 에포나의 움직임이 한 발 더 빨랐다. 에포나는 땅을 박차고 뛰어올랐다. 동작은 가벼운 뜀박질이었지만, 그 행동의 결과는 전혀 가볍지 않았다.
모래 폭풍이 분다. 무지막지한 각력에 의해 바람이 밀려나 충격파를 만들었다. 군중들은 갑작스레 불어온 모래 바람에 다들 얼굴을 가리며 뒤로 물러났다. 개 중에는 바람을 못 이기고 넘어진 사람들도 있었다.
천마는 내공으로 눈을 보호하며 허공으로 튀어 올라 마치 화살처럼 에포나가 뛰어가는 방향으로 튕기듯이 날아갔다. 절정 고수가 되어야 펼칠 수 있다는 궁신탄영(????)이었다.
“기다리시오!”
“왜 따라오는 거야?”
에포나는 허공에서 몸을 돌린 채로 따라오는 천마를 신기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따라오네?
아무리 대충 지붕을 뛰어다니며 가고 있다지만, 허공에서 몸을 튕겨 그녀에게로 날아오는 남성의 행동은 에포나의 관심을 끌었다. 그녀만큼은 아니지만, 꽤 빠른 덕이었다.
미치겠군.
천마는 자신이 잘못 선택을 한 것이 아닌가 잠시 고민했지만, 이내 훌훌 털어냈다. 일촉즉발의 상황에 잡념이 깃들면 죽음으로 이어진다. 무림에서 언제나 스승이 제자에게 강조하는 조언 중 하나였다.
한순간의 방심이 목숨을 앗아가는 것은 무림에서 비일비재하게 일어나는 일이었으므로.
“멈추시오!”
“너 꽤 빠르구나!”
뒷 뜀박질로 지붕을 넘나들고 있는 탓에 느려진 것을 감안 해도, 천마는 에포나를 놓치지 않고 잘 따라오고 있었다. 에포나에겐 간만에 재밌는 상대를 만난 것 같다고, 주인님께 이야기할 거리가 늘지도 모른다며 흥미로운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헤으응...”
도망치고, 뒤쫓는다.
한 낯의 추격전이 도시의 지붕 위에서 벌어졌다.
소녀는 도망치고, 소년은 뛰쫓는다.
겉으로만 보면 달콤쌉사름한 전개처럼 보였지만, 제 흥미 가는 대로 움직이는 소녀와 무림에서 쓴맛만 보고 ‘이런 건 무협이 아니야!’를 외치며 협행을 하는 소년의 살벌한 추격전이었다.
잔뜩 신이 난 에포나와 그런 에포나를 잡으려는 천마는 지붕을 넘나들며 도시를 질주하기 시작했다.
“형님. 좆됀거 같지 말입니다.”
“나도 알아.”
그들을 감시하던 까마귀 단원들이 둘이 사라진 허공을 올려다보며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임무 실패의 벌보다도, 갑자기 사라진 두 사람에 대한 황당한 심정이 더 강했기 때문이리라. 저 소녀는 둘째치고, 저 새끼도 저런 재주를 숨기고 있었나. 단원은 정보를 가져온 단원에게 분노의 방향을 돌렸다.
아무리 그들이 뒷골목에서 칼밥으로 먹고 살아온 무뢰배들이지만 잘못 건드리면 죽을지도 모르는 상대는 귀신같이 눈치채는 것이다.
적당히 틈을 봐서 둘을 덮칠 생각이었던 단원들은 서로를 바라보곤 한숨을 쉬었다.
“야. 이렇게 되면 작전은 어떡하냐?”
“몰라 시발...갑자기 날아가서 술래잡기를 하는 걸 뭔 수로 잡아.”
아무리 숙련된 암살자라고 해도 사람인지 말인지 모를 무식한 속도로 달려가는 상대를 잡을 만한 능력은 없었다. 정예기사 쯤 된다면 가능할지도 모르지만, 그들은 정예기사가 아니었다.
“뭘 어쩌긴 어째, 깨져야지. 감봉만 안 당했으면 좋겠다...”
뒷골목에서 한탄 섞인 푸념이 조용히 울려 퍼졌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