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8화 〉 IF:영원한 비밀은 없다(2)
* * *
해피타임이 끝나고 난 뒤, 나는 뜨거운 물에 젖은 채로 여운을 느끼며 생각에 잠겼다.
잠이 깰 정도로 몸이 달아오른 건 심상치 않은 일이었다. 단적으로 말해 듀라한에게 발정기 같은게 있을 리도 없고, 그렇다고 내가 평소에 성욕이 강한 것도 아니고. 이 몸이 되고나선 성욕이랄 게 별로 있지도 않아서 자위한 횟수가 손에 꼽는 수준인데...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짐작이 안가네.
가장 무서운 점은, 이상하리만큼 가랑이 사이에 손가락을 넣었는데도 거부감이 없었다는 거다. 마치 전에 해본 적이 있었던 것처럼. 처음에는 잘 들어가지 않는다고 인터넷에서 본 것 같았는데 말이야.
이 찝찝한 기분, 정말 오랜만이었다.
적어도 세상을 구한 후에는 이런 일이 없었던 것 같은데. 내 몸에 내가 모르는 비밀이 있는 걸까. 그런게 있다면 저 망할 여신 놈을 용암에 쳐박아 주마. 쓸데없는 기능은 뭐 이리 많은 거야 이 몸.
‘뭘 원하는지 몰라서 전부 집어넣었어요!’ 같은 거냐?
아무튼 이번 일은 단순히 ‘발정해서 자위했어요’ 정도로 끝날 일이 아니었다. 나도 모르는 일이 내 몸에 벌어지고 있다면, 그것만큼 공포스러운 것도 없었으니까.
이번에는 나 혼자여서 그나마 상황이 나았다지만, 만약에 애들이 있는 앞에서 발정한다면, 그리고 밖에서 이런 일이 생긴다면 무슨 일이 생길지 알 수 없었다. 그런 상황을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어떻게든 이 문제를 해결해야만 했다.
일단 생각을 해보자.
이게 내 몸의 문제인지, 아니면 외부의 개입이 있었는지.
순수하게 내 몸의 문제라면 칼에 가두어 놓은 고기성애자 여신을 공구리 쳐서 갯벌에 묻어버리면 그만이야. 아니면 그 떄부턴 진짜 심각해지는 거고.
아니면...짐작 가는 게 하나도 없는데.
누구한테 물어보기도 뭣하고.
진퇴양난이었다. 이렇게 귀찮은 일이 생겨버릴 줄이야.
그냥 그러려니 넘어가기도 좀 그런데... 뭔가 방법이 없을까.
일단 찝찝하지만 지켜볼 수밖에 없나. 불편하고 찝찝하지만 현실적으로 방법이 그것밖에 없어보였다. 여신에게 물어봐야 제대로 된 대답을 해줄지 알 수도 없고. 그 여신 성격상 굳이 그런 짓을 했을 것 같지는 않은데.
그래도 일단 가서 물어보기나 하자.
나는 곧장 미트칼리버가 있는 정원으로 향했다. 이제는 성검이라고 부르기도 뭣한 여신이 봉인된 검은 내가 다가오자 마치 반가운 듯이 진동했다.
[왔느냐? 오늘의 고기는...없느냐?]
“...아이고...”
내가 물을 상대를 잘못 찾은 거 아니지? 그냥 고기에 미쳐버린 여신 같은데. 전직 여신의 비참한 현실에 나는 참담한 심정을 감추지 못했다. 물론 내가 가두기는 했지만.
“묻고 싶은 게 있어서 왔는데.”
[이 몸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느냐?]
“응. 혹시...내 몸에 성적으로 뭔가 이상한 개조 같은 걸 한 건 아니지?”
[개조 말이더냐? 흠...생각이 잘 나지 않는 구나.]
이 망할 여신이. 나는 곧장 주방으로 달려가 스팸을 꺼내 구운 뒤 여신에게 가져다 바쳤다. 만족스럽다는 듯이 스팸을 먹어치운 여신은 그제서야 내게 답을 해주었다,
[내가 그대 몸에 여러 가지로 손을 대기는 했지만, 굳이 성적인 개조를 하지는 않았느니라. 굳이 그런 짓을 하지 않아도, 네 눈빛 한 번이면 남자가 줄을 설 터인데, 굳이 그런 짓을 할 필요가 있겠느냐?]
설득력이...있어! 하긴 굳이 그런 개조까지 할 이유는 없겠지. 누구 좋으라고 그런 개조를 하겠냐.
[차라리 미네르바에게 묻는 것이 낫지 않겠느냐?]
“미네르바?”
여기서 아테나가 왜 나와? 뜬금없네.
“미네르바면 아테나 잖아. 걔가 거기서 왜 나와?”
[흠, 그대가 들여놓고도 몰랐느냐? 그대의 집에 묵은 식객이 미네르바니라.]
“아나트?”
[맞느니라.]
좀 당황스러운데. 걔가 여신이라고? 그 성실하고 착한 애가? 나는 매일 주방일을 도와주고, 청소를 도와주고, 공부도 열심히 하는 착한 아이의 표본이나 다름없는 아나트를 떠올렸다. 애가 좀 똘똘하기는 한데 그 지혜의 여신이라고 하면 뭔가 좀....
“뭐, 아무튼 답변 감사.”
[고기는 더 없느냐?]
...그 비싼 스팸을 한통 다 쳐먹고도 저러네. 나는 미트칼리버의 말을 무시하고 다시 집안으로 들어갔다. 지금 시간은 8시 반. 아나트는 매일 아침 조깅을 하러 나가니 슬슬 돌아올 시간이었다.
“다녀왔습니다.”
“어서와. 물어볼 게 있는데 말이야...”
“물어볼게 있나요?”
“너 혹시...아테나라는 이름 알아?”
내 말에 아나트는 눈에 띄게 동요하는 반응을 보였다. 정말로 저 애가 여신이라고? 그것도 지혜의 여신?
“그, 그 이름을 어떻게...”
아무도 모를 거라고 생각한 걸지도 모르겠네. 하긴 그걸 아는 게 더 이상하지. 누가 이 세상에 신들이 남아있다고 생각하고, 또 인간들 사이에서 살고 있다고 생각하겠어.
“뭐, 어쩌다보니...”
“그, 주, 죽일 건가요?”
“안 죽여!”
내가 널 왜 죽여?! 무서운 소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하네. 나는 땀을 뻘뻘 흘리며 눈치를 보는 아나트를 보며 한숨을 쉬었다. 이런 애가 아테나라니, 여러 가지 의미로 충격적이야...
“가, 감사합니다. 그, 그럼 저는 쫒겨나는 건가요?”
“아니 왜 그쪽으로 사고가 흐르는데. 네가 전직 여신이든 아니든 그건 내가 알바가 아니고, 그냥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서 그래.”
“제가 아는 거라면 뭐든 대답할 수 있어요!”
그렇게 필사적으로 반응하면 내가 나쁜년 같잖아.
“그, 혹시 여신도 발정하거나 해?”
뭐, 왜 뭐. 그런 눈으로 쳐다 보지마! 내가 이상한 걸 묻기는 했지만! 그런 눈으로 날 바라볼 필요는 없잖아! 나는 도대체 뭘 묻는 거냐는 눈으로 쳐다보는 아나트의 시선을 견디지 못하고 시선을 돌렸다.
“...여신의 몸은 기본적으로 인간과 달라요. 인간처럼 노화하지도 않고, 신체적인 욕구가 강하지도 않죠. 여신이 욕구를 느끼는 건 기본적으로 외부 자극이나 관장하는 역할, 성격에만 영향을 받아요.”
아. 그러니까 육체적으로 발정을 할리는 없다 이건가. 나는 아나트의 설명을 들으며 더더욱 의문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일어났을 때부터 흥분한 상태였으니 결국 외부 자극일 가능성이 높단 소린데...누가 그런 짓을?
“...무슨 일 있으신가요?”
“아냐. 그 뭐랄까...그냥 궁금해서.”
“아, 그렇군요. 그럼 저는 이만...”
“어어, 잘 씻고.”
나는 아나트를 보내고, 아침밥을 만들며 생각에 잠겼다. 내가 야스에 미친 여신도 아니고, 관장하는 역할도 따지고 보면 죽음이나 전쟁 정도니 답은 외부 자극이란 소리일테고. 그럼 뭔가에 의해서 외부 자극이 일어났단 소리인데...
한 밤중에 내 몸을 실컷 만지작 거린 녀석이 있단 소린가?
어, 소름끼치네.
이거 나도 모르는 사이에 실컷 몸을 만져지고 있었단 소리인데.
그렇게 생각하니 기분이 정말 더러워졌다. 누군지 몰라도 일단 걸리면 듀라한으로 만들어주마...라고 생각해도, 이 집 식구 중에 하나일 가능성이 높겠네.
리온? 에포나? 애내들은 처음부터 용의 선상에서 제외고.
한솔이랑 유라도 그런 짓을 할 것 같지는 않고.
아나트는 애초부터 논외였고.
그럼 하나 밖에 없는데?
“햄...버...거...”
“기다려봐. 아침 준비하고 챙겨 줄 테니까.”
“고마워...”
“근데 좀 피곤해 보인다?”
“아니...그냥 좀 새벽에 일 좀 하느라.”
수상한데...나는 거실로 날아가는 세연이를 보며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못했다. 곧이곧대로 말한다고 정직하게 실토할 것 같지도 않고.
함정을 파야 하려나.
조금 피곤하긴 하겠지만, 적어도 계속 몸을 만져지는 것보단 낫겠지.
나는 오늘 밤부터 함정을 파두기로 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