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6화 〉 80.도를 아십니까(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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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최면이 풀리지 않은 것 같군요.”
내가 눈동자만 뒤룩뒤룩 굴리고 있는 것을 깨달았는지 은하가 속삭였다. 슬며시 불어오는 숨결 때문에 귀가 간지러웠다. 그래도 이제 안면근육이랑 머리카락은 어느 정도 움직일 수 있는 것 같은데. 나는 머리카락을 슬며시 옷 안으로 집어넣었다. 머리카락이 풍성해서 안쪽에 위치한 머리카락이 보이지 않아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애초에 누가 머리카락을 팔다리마냥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다고 생각할까. 머리카락은 몸의 라인을 따라 조금씩, 조금씩 몸에 달라붙었다. 겉으로는 티가 잘 나지 않는 서너 가닥 정도였지만, 이정도면 설사 몸이 말을 듣지 않더라도 억지로 움직일 수 있었다.
사실 고통을 줘서 최면을 강제로 풀어내는 방법도 있지만, 감시받고 있는 상황이라 그럴 수는 없었다. 일단 상황을 지켜보다 적절한 타이밍에 도망치면 되지 않을까. 세연이가 내가 잡혀가는 걸 그냥 두고 보기만 했을 리도 없고.
아마 지금쯤이면 집에 도착해서 에포나랑 한솔이한테 전부 다 말했을 거다. 한솔이는 둘째 치고 에포나는 눈이 뒤집혀서 건물에 꼬라박으러 오지 않을까.
아무리 내가 일반인 보다는 힘이 세다고 하지만, 수십 명의 흡혈귀를 뿌리칠 수 있을 정도는 아니었다. 게다가 은하가 이곳에 있는 것을 보면, 기밀관리본부에서도 이곳을 감시하고 있는 게 아닐까.
이렇게 변이자가 많이 모여 있는 단체라면 기밀관리본부에서 요원을 잠입시켜 상황을 파악하는 건 당연한 일일 테니까.
“...요점만 말하겠습니다.”
모두의 관심이 눈앞의 목사에 집중된 틈을 타서, 은하는 아주 자그마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저는 이곳에 잠입해 왔습니다. 곧 진압이 시작 될 테니 그때까지만 버텨주십시오. 1시간. 1시간이면 됩니다.”
1시간이나? 예배고 뭐고 다 끝나고도 남을 시간인데? 그전에 이것들이 흡혈 파티라도 벌이면 어쩌려고? 변이자 흡혈귀들이 사람을 물면 그 사람이 흡혈귀가 되는지에 대해선 모르겠지만, 나이든 사람한텐 그것도 충분히 위협적이다.
애내들이 사람들한테 무리가지 않을 만큼 피를 뽑진 않을 거 아니야. 애내들이 그렇게 양심은 있는 놈들이었으면 지금 저 최면에 걸린 사람들 안색이 파리하진 않았겠지. 나도 저 꼴이 날 수 있다는 건데 아무래도 마음이 편할 수는 없었다.
듀라한이 된 이후로 온갖 사건에 휘말렸으니까 이정도로 침착할 수 있는 거지, 일반인이었다면 지금쯤 꼼짝없이 피를 빨렸거나 패닉에 빠져있지 않았을까. 이걸 좋아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모르겠다. 그만큼 트러블에 많이 휘말렸다는 소리니까.
그러니까 탈주 좀 작작 했으면 좋겠다. 수틀리면 내가 탈주해 버려야 이 꼴을 안보고 살지. 이렇게 생각해도 결국 마음이 약해서 포기하겠지. 여자가 되었어도, 듀라한이 되었어도 결국 정에 약하단 사실은 바뀌지 않았다.
“...아마 예배중간에, 유진 씨를 부를 겁니다. 최대한 혼란을 일으켜주실 수 있겠습니까.”
그거 내가 너무 위험한 거 아닌가? 그렇게 물어보니 유진씨라면 괜찮을 거란다. 저기요?
제가 요원이 아니고 님이 요원인데요?
“...나중에 기밀관리본부에서 보상금을 드릴 겁니다.”
까짓 거 한번 해보죠!
나는 조용히 머리카락을 조종해 OK모양을 만들어 보여주었다. 마 이게 머리카락 아트다 이 말이야. 은하가 잠시 나를 어이없단 듯이 쳐다봤지만, 원래 이런 일 전에는 긴장을 좀 풀어줘야 하는 법이라고.
은하와 내가 몰래 대화를 나누는 사이, 예배는 거의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이래저래 목사의 취향인지, 꼴에 목사라고 예배는 드리는 건지 알 수 없지만 어느 쪽이던 예배 자체는 정말 교회에서 받을법한 예배였다. 내용도 생각보다는 정상적인 편이었다.
“...이어서, 성찬식을 거행하겠습니다.”
성찬식? 그건 가톨릭에서 하는 거 아니었나? 군대 시절에 먹을 거 잘 주는 가톨릭 성당을 다녔기 때문에 성찬식이 가톨릭에서 하는 행사인 것은 알고 있었다. 여기 개신교 교회 아니었어? 복장도 신부님들이 입는 미사복은 아니었는데.
진짜 목사가 아니고 목사 흉내라도 내는 건가. 내가 교회를 다닌 게 어릴 때뿐이니 내가 모를 뿐이지 성찬식을 하는 걸 수도 있다. 지금 이런 게 중요한건 아니었지만, 내가 지금 뭘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잠시 숨을 돌리기 위한 잡생각 정도는 상관없지 않을까.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십시오.”
그런 잡생각을 하는 와중에도 내 몸은 자연스럽게 흡혈귀 목사의 말을 따라 자리에서 기립했다.
기립하시오! 동무! 아 이게 아니지. 어쨌든 나는 똑바로 선 상태로 정면을 보고 있는 자세가 되었다. 사람들 사이에서 일반인 마냥 숨어있던 흡혈귀들이 조심스럽게 옆으로 빠져나오는 게 내 눈에 잡혔다.
이제 슬슬 피빠는 시간인가? 내가 잠시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며 주변 상황을 파악하는 동안, 나에게 누군가 다가왔다. 아까 나를 데려온 흡혈귀 년이었다. 뭐야. 애가 내 피를 빠는 건가?
“...님께서 말씀하시길...”
내 바로 옆에 선 흡혈귀 년의 끈적거리는 시선이 느껴졌지만 나는 최대한 내색하지 않은 채, 최면에 걸린 것처럼 연기하며 주변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이정도 거리에서 눈동자가 마주치기라도 하면 이도저도 못하니까 어쩔 수 없었다.
“배고파...”
당장이라도 내 목덜미를 물어뜯고 싶어 하는 기색이 짦은 중얼거림에서 느껴졌지만, 쓸데없을 정도로 절차를 중시하는지 목사는 계속해서 뭔지도 모를 말을 계속 나불대고 있었다. 어쨌든 흡혈귀 목사가 말을 끝내기 전에는 내 목덜미에 구멍이 뚫린 일은 없다고 봐도 될 것 같았다.
그런데 내 목덜미 뚫리기는 하나? 아랫부분이야 뚫리겠지만, 목의 절반 정도는 내 머리와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에 나머지 반은 톱으로 긁어도 톱 이빨이 나가버릴 정도의 강도인데. 내 이빨이 아니니 상관은 없지만, 그래도 이왕이면 안 물리고 끝나는 게 가장 좋았다.
“...형제자매님들, 이제 기다리던 시간이 찾아왔습니다. 이것 또한 주님이 내려준 시련이겠지만, 저희는 이겨낼 수 있을 것입니다.”
영혼 없는 아멘 소리가 예배당에 울려 퍼졌다. 이제 흡혈 시간인가. 흡혈귀들이 사람들에게 다가가는 모습이 내 시야에 잡혔다. 내 허리에 슬며시 손이 감기는 감촉이 느껴졌다. 소름끼치긴 했지만, 그나마 여자라서 다행이었다.
남자가 그랬으면 지금쯤 머리카락으로 얼굴을 후려쳐버렸을 테니까. 점점 가쁜 숨소리가 가까워진다. 나는 언제라도 흡혈귀를 떼어낼 수 있도록 머리카락에 힘을 주었다. 수틀리면 집어 던져서라도 쫒아내면 되지 않을까.
곳곳에서 신음소리가 들린다. 그리고 콧속으로 흘러들어오는 비린내는 분명, 피비린내였다.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예배당 안에서, 나는 경계심을 높였다. 조금씩, 조금씩 들키지 않게 눈동자를 굴려 상황을 계속 체크하며 머리를 굴렸다.
흡혈귀의 신체능력이 어느 정도였더라? 한솔이를 떠올린다. 내가 아는 흡혈귀가 한솔이 밖에 없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나보다 힘이 쎄진 않았던 것 같은데. 피를 빨면 힘이 강해진다고 했던가. 어떻게 해야 할까.
너무 생각에 골몰한 탓이었을까, 나는 목사와 눈을 마주치고 말았다.
아, 좆됐다.
“하하, 처음 오신 신도분이 긴장을 많이 하신 모양이로군요. 이리로 와 보시겠습니까.”
좆까! 좆까라고! 하지만 내 마음과는 다르게 몸은 명령에 따라 목사가 있는 곳까지 걸어왔다. 기왕 들킨 거 눈동자를 밑으로 깔아 최대한 눈을 마주치지 않게 하면서, 나는 주변 분위기를 살폈다.
“또 사고쳤군.”
“...최면 걸고 나서 제대로 확인하라고 그렇게 말했는데...”
흡혈귀들의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다. 나는 그 누구와도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노력하며, 잘 돌아가지도 않는 머리를 필사적으로 굴렸다.
“이유진 신도분, 고개를 들어주시죠.”
목사는 내 턱을 잡고 직접 머리를 들어올렸다. 의자에 고개를 푹 숙이고 앉은 사람들이 보였다. 피를 빨리고 쓰러진 건가. 점점 진해지는 피 냄새에 머리가 어지러웠다. 어딘가 친숙했던 내 피와는 다르게, 다른 사람들의 피 냄새는 어쩐지 낯설었다. 수많은 피비린내가 뒤섞여 공간을 잔뜩 차지한 모습은 공포영화속 성당에서나 맡을 수 있을 것 같은 악취를 풍겼다.
“이유진 신도는 혹시 카인과 아벨을 아십니까?”
그걸 나한테 왜 물어 이 사이비 새끼야. 알고야 있지만 내가 대답해줄 리가 없었다. 남의 농간에 놀아나는 걸 좋아하는 성격도 아니고.
“평범한 기독교인이었던 저는 어느 날 카인의 후예가 되었습니다. 신의 뜻은 알다가도 모르겠더군요. 그렇게 저는 새로운 존재로 다시 태어났고, 보통의 인간이라면 가지지 못할 힘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너무나도 놀랍고 무서웠지만, 시간이 지나니 이게 ‘특권’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목사의 손이 내 목덜미를 훎었다. 차가운 손가락의 감촉에 기분이 더러웠지만, 일단은 꾹 참고 목사가 헛소리를 찌껄이는 걸 더 들어보기로 했다. 어쨌든 시간이 끌리는 건 고마운 일이니까.
“하지만 역시 카인의 후예는 후예인 것이었습니다. 피를 빨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몸이 되었으니까요. 그래서 이런 후미진 곳에 교회를 세우고 저와 같은 후예들을 끌어 모았습니다. 저희가 일용할 양식을 얻기 위해서는 협력이 필요했으니까요. 그리고 저희의 특권으로 사람들을 데려와 양식으로 삼았습니다.”
“...”
일단 제정신은 아닌 것은 잘 알겠다. 원래 종교인이었던 사람이 변이자가 되고나서 완전히 훼까닥 돌아버린 것 같은데. 쓸데없이 말이 많다. 하긴 뜬금없이 흡혈귀가 되고 눈을 마주치는 것만으로 최면을 걸게 되면 대단한 존재가 된 것 같겠지.
“그렇게, 조금씩 신도를 늘려가며 평화롭게 지내는 나날이었습니다만, 이유진양은 아주 이질적이시군요. 저희처럼 말입니다.”
내가 변이자인걸 알아챈 건가?
사실 변이자의 존재를 알고 있다면 내가 변이자라는 사실을 아는 건 당연한 일이긴 했다. 변이자만의 특징 같은 건 없지만 너무 눈에 띄게 생겼잖아. 백발 금안인 시점에서 충분히 변이자라는 의심을 해 볼 수 있다.
물론 염색과 컬러렌즈를 꼈거나 정말 우연히도 천연으로 그런 색이 나올 수야 있겠지만, 이렇게 선명한 하얀색 머리카락과 영롱한 눈깔은 도구로 가능한 영역이 아니다. 그리고 혼자서 눈을 굴리던 게 걸린 시점에서 최면에 어느 정도 저항하고 있다는 것도 눈치 챘을 테고.
“이유진 양은 저희와 같은 카인의 후예시군요.”
“...”
“이유진양에게 묻고 싶군요. 신을 믿으십니까?”
대화의 방향을 종잡을 수가 없다. 이거 완전히 미친놈이구만. 엄마가 미친놈하곤 상종도 하지 말랬는데. 그리고 대답 못하게 최면 걸어놓고 물어보는 건 무슨 심보냐? 난 떠들 테니 넌 닥치고 들어라 이거야?
“아, 아직 완전히 풀려나신건 아닌 모양이로군요.”
목사가 손가락을 튕겼다. 나는 내 몸이 완전히 자유를 찾았다는 것을 느꼈다. 나는 그 자리에서 잠시 숨을 고르곤, 입을 열었다.
“신? 무슨 신?”
“세상에 신은 하나뿐이지 않습니까.”
“나는 다른 신을 믿거든요?”
“...불경한 생각을 가지고 계시는 군요. 그럼 어떤 신을 믿는지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모두의 시선이 집중된다. 마치 새장 속의 새를 보는 듯 한 시선에, 나는 잠시 침묵하다 입을 열었다. 그들의 눈에 담긴 호기심을 애써 무시하며, 고르고 고른 말을 입 밖에 꺼내기 시작했다.
“...내가 믿는 신은...”
뜸을 들인다. 시간을 최대한 끌기위한 궁여지책이었지만 그들은 이걸 하나의 여흥으로 여기는지, 아니면 자기들 구역이라 어차피 도망치지도 못할거라 생각했는지, 여유로운 표정으로 나를 쳐다볼 뿐이었다.
에라이. 엿이나 먹어라.
“...X쿠아님이시다! X쿠시즈 만세!”
나는 아예 처음 들어보는지, 당혹스러워 하는목사의 얼굴을 머리카락 뭉치로 후려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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