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듀라한이 되어버렸다-85화 (85/352)

〈 85화 〉 79.도를 아십니까(2)

* * *

“...유진 씨. 유진 씨?”

“네에...”

“이제 저희 교회의 예배시간이에요. 자, 제가 안내해 드릴게요.”

정신이 몽롱했다. 나는 익숙하면서도 낯선 목소리를 따라 긴 복도를 걸었다. 뭐지? 난 왜 이런 곳에 있는 거지? 굴러가지 않는 머리로 가장 최근의 기억을 떠올려본다. 길을 걷다가...그 뭐냐...길거리에서 전도하는 흡혈귀 년을 만났고...대화를 하다가...어...

최면에 당했구나. 예상보다 훨씬 강력한 최면이라, 꼼짝없이 당해버렸던 것 같았다. 능력도 쓸수록 강해지는 건데 도대체 얼마나 썼으면 나한테 최면을 걸 수 있는 걸까. 어수룩하다 못 해 안쓰럽기까지 하던 실력과 별개로 실적은 좀 있는 모양이었다.

하긴 그런 게 아니면 저런 애를 굳이 써먹을 이유가 없지...?

몸은 손가락 하나도 내 마음대로 까딱하지 못하지만, 정신은 또렷했다. 거, 눈동자에서나 볼법한 상황일세. 위험천만 하다못해 인생을 종칠 수도 있는 상황이었지만, 어쩐지 마음은 침착했다.

듀라한이 되고, 귀신도 잡아보고, 몸뚱이도 뺏겨보고, 저승사자랑 이야기도 해보고, 일진들도 참교육하고...요 근래 쌓인 인생 경험치가 허공에 날아간 건 아니라서. 호랑이굴에 들어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는데, 정신이 말짱하니 최면도 금방 풀리지 않을까. 일단은 그런 희망적인 관측도 할 수 있을 정도로 여유가 있었다.

뭣하면 최후의 수단도 있고.

일단 유일하게 통제권을 되찾은 두 눈으로 최대한의 정보를 수집해보자. 나는 눈동자를 열심히 굴려 이곳이 어딘지, 또 길은 어떻게 이어져 있는지 파악해 갔다. 좀 낡기는 했지만, 교회 특유의 분위기가 남아있는 복도. 복도는 겉으로 보기에는 깨끗해 보였다. 하긴 사이비 놈들이라도 청결에는 신경 쓰겠지...자기들이 일하는 곳이 더러우면 일하기 싫을 테니까.

흡혈귀 년이 말한 예배당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흡혈귀 년이 문을 열고 예배당으로 들어가자, 내 몸도 그 안으로 따라 들어갔다. 예배당은 전형적인 교회 예배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나무로 된 긴 의자에 사람들이 빈틈없이 앉아 있고, 문 맞은편에는 강단과 함께 40대 정도 되어 보이는 창백한 인상의 남성이 신부복을 입고 서 있었다. 분위기 쥑이네. 이렇게 보면 진짜 종교시설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였다.

군데군데 보이는 놈들이 흡혈귀인 것만 빼면.

혹시 장르가 어반 판타지로 바뀌었나? 흡혈귀가 변이자들 중에 수가 가장 많다고는 들었지만, 못해도 스무 명 가까이 되는 숫자가 한곳에 모여 있으리라곤 생각도 못했는데. 여기 혹시 흡혈귀 클랜인가? 좋은 흡혈귀는 죽은 흡혈귀...아 이건 아닌가.

시선을 조금 돌려 강단에 서 있는 사람에게 향했다. 흡혈귀가 교회 목사 차림으로 강단위에 서 있는 걸 보고 황당해 해야 할까? 아니면 이게 빼도 박도 못하는 불법 집회라는 사실에 분노해야 하나?

대한민국의 성숙한 깨시민으로서 불법 집회를 규탄하는 것이 옳은 행동이 아닐까? 사회적 거리두기를 전혀 고려하지 않은 자리 배치하며 당장이라도 허튼 짓을 하는 순간 해코지를 할 것 같은 흡혈귀들을 보며 나는 움직이지도 않는 얼굴 근육을 필사적으로 움직여 입술을 달싹거리는데 성공했다.

아, 입도 좀 풀렸네. 아직 말할 수 있을 정도는 아니지만. 조금씩 최면이 풀려가고 있었다. 한 15분정도면 온전히 내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지 않을까. 희망회로가 탄내가 날 정도로 돌아가고 있었지만 나는 애써 침착하게 마음을 가다듬었다. 최면이 풀리고 있다는 걸 눈치 채면 다시 걸어버릴 테니 일단 최대한 풀리지 않은 척 해야 했다.

“강수영 신도, 새로운 가족을 데리고 오셨군요.”

차분한 목소리가 예배당에 울려 퍼졌다. 흡혈귀라 매력 스탯이라도 높은 건지, 목소리가 쓸데없이 좋았다. 하긴 그 정도는 해야 목사지. 나는 먼 곳을 보듯이 눈의 초점을 흐리며 목사의 시선을 피했다.

나는 아무것도 보지 못했노라. 블라인드 듀라한이니라.

“하하, 이번에 들어온 분은 어린 아가씨로군요.”

차분하고 엄숙한 목소리가 예배실을 울렸다. 모두의 시선이 목사에게서 나에게로 향한다. 수많은 눈동자가 나에게로 집중되자, 나는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저번에 기밀관리본부에서 자기소개를 한 이후로 처음이었다.

응애 나 아기 듀라한, 사람 많은 곳 무서워...

서너 명 정도였으면 모를까, 못해도 50명은 되는 사람들이 모여서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으면 나 같은 아싸는 긴장할 수밖에 없다. 죄다 눈이 풀려있는걸 보니 죄다 최면에 당했구나. 흡혈귀들 능력 정말 부럽다.

정말 쓰기 쉽고 티도 안나는 편의성 만빵인 종특이라니, 내 종특은 머리 탈부착인데! 머리카락 조종하는 거랑 피 토하는 건데! 하나같이 실생활에서 써먹기 힘든 것들 투성인데! 히든 종족이라매! 나밖에 없는 히든 종족이라면서 왜 이렇게 써먹기 어려운 것들만 준 건데!

뭘 봐 시발. 듀라한 처음 보냐. 물론 내가 듀라한이라는 것은 아무도 모르겠지만. 최면에 걸린 상태인데도 내 무의식이 열심히 일하는 건지 머리카락이 열심히 머리를 붙들어 매고 있더라. 다행으로 여겨야 하나?

“자, 새로 오신 분은 이리로 오십시오.”

이번에도 내 의지와 상관없이 내 다리는 열심히 강단을 향해 움직였다. 아 이거 좀 그런데. 슬슬 풀렸으면 좋겠다. 계속 이러고 있으면 장르가 바뀌어 버릴 것 같다고! 구체적으로는 눈동자에 나올법한 능욕물로!

나를 범할 생각이지? 동인지처럼!

이 대사를 진짜 외쳐야 할지도 모른다. 아 에반데. 나는 평생 순결한 듀라한으로 살고 싶은데. 하다못해 첫 상대는 쭉쭉 빵빵한 미녀가 좋다고...난 남자 싫다고...

나는 15일이나 쉬고 싶지 않아! 능욕당할 거라면 차라리 여자한테 당하는 게 낫지! 중년 아저씨한테 당하는 건 좆같기만 할 뿐이라고! 이런 식으로 내가 여자라는 걸 인정할까 보냐! 이 구역은 노맨스 구역이야! 암컷타락 같은 건 저어기 옆 동네로 가서 찾으라고!

“친애하는 교인 여러분, 저희에게 새로운 가족이 찾아왔습니다. 정말 아름다운 아가씨군요. 저희 교회에도 이제 봄이 오려나 봅니다.”

...진짜 목사였나? 말하는 투가 정말 목사 같이 사람 제대로 졸리게 하는 나긋나긋한 목소리였다. 최면 이전에 계속 듣고 있으면 졸릴 것 같았다. 아니 왜 목사들은 왜 죄다 목소리가 나긋나긋한 거야? 진짜 잠들 것 같아...

“자, 새로 오신 분은 강단 위로 올라와서 자기소개를 해주십시오.”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는 동안에도 내 몸은 착실하게 명령에 따라 움직였다. 영혼이 빠진 듯이 삐꺽거리는 움직임 이었지만 말이 부탁이지 실제로는 명령이었다. 내 의사와는 별개로, 주둥이는 이미 열려 소리를 낼 준비가 되어있었다.

“...제...이름은...이유진...입니다...나이는...28살...”

“이거 엄청난 동안을 가진 아가씨로군요. 저는 학생일거라고 생각했는데 말입니다...”

목사의 목소리에서 희미한 기쁨이 느껴졌다. 이 목사 진짜...생긴 거랑 완전히 따로 노네. 생긴건 미중년 신사가 따로 없는데, 눈빛만 보면 왠 미성년자 좋아하는 원교아저씨 같은 느낌이었다. 경찰아저씨! 여기에요!

내 목덜미에 시선이 꽂히는 게 아주 집요하기 짝이 없다. 누가 흡혈귀 아니랄까봐 목덜미에 집착하네. 근데 내 목에 이빨을 박을 수는 있나? 이빨 부러지는 거 아니야? 한솔이도 내 목덜미 장난삼아 한번 물어봤다가 송곳니 끝 부분 부러져서 난리 났었는데.

하. 하. 하. 하. 하.

어색한 웃음소리가 들린다. 최면에 걸린 사람들이 낸 웃음소리였다. 모두가 같은 톤으로 같은 웃음소리를 내니 마치 호러영화에서 나올 법한 소름끼치는 광경이었다. 아 나 이런 거 싫은데.

다행히도 아직 나를 건드릴 생각은 없는지, 나는 목사의 말을 따라 가장 뒷쪽의 구석진 곳에 앉게 되었다. 내 옆에는 사람이 한명 더 앉아 있었다. 근데 뭔가 익숙한데? 고개를 돌릴 수 없었던 나는 자세하게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정말 어디선가 본 것 같은 얼굴이었다.

강제로 정면을 보게 되어 앞을 보니, 나 말고도 다른 희생양들이 자기소개를 하고 있었다. 나 말고 변이자는 없는 것 같은데. 이거 사실 내가 듀라한인 것을 숨길 필요가 없지 않을까. 그냥 수틀리면 머리를 분리해서라도 탈출한 다음 도움이라도 요청하면...아니 그냥 부르면 되나?

“...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앞에서 목사가 뭐라고 말하건 무시하고 이 골 때리는 상황을 타개할 해결책을 고민했다. 분위기 보니까 흡혈귀들이 피 뽑아 먹을라고 교회를 점거하고 사람들을 납치하는 건가 본데...어차피 최면 걸어 놓았으니 다시 제자리로 돌려놓으면 기억도 못하겠지.

최면에 어느 정도 내성이 있어서 정신만은 깨어있는 나 같은 특이케이스를 제외하면 아마 그런 식으로 진행되지 않을까. 근데 그러면 내가 뭔가 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 정말 한번만 하고 보내준다면 말이야.

하지만 그럴 가능성은 낮겠지? 왜냐하면, 한 눈에 보기에도 저 수많은 사람들을 한 번에 풀어줄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으니까. 계속해서 새로운 먹잇감을 찾기에는 부담스러울 테고. 그럼 뽕을 뽑아야지.

“...유진씨, 여기서 뭐하시는 겁니까?”

아니, 진짜 아는 사람이었어? 목소리를 들으니 확신할 수 있었다. 눈동자를 굴려 목소리의 주인공을 쳐다보았다. 내 옆에 있는 사람은 기밀관리본부의 요원인 은하였다. 그녀는 몰라보게 꾸민 채 나한테나 겨우 들릴 법한 목소리로 물었다.

...누나가 왜 거기서 나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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