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듀라한이 되어버렸다-53화 (53/352)

〈 53화 〉 51.'울어라, 지옥참마도!'(1)

* * *

“어...그러니까, 요즘 전염병으로 사람들이 너무 많이 죽어서 순번이 뒤로 밀렸다고?”

“응...저승에 죽은 사람이 너무 많이들어와서...1년 정도 는 걸린대...”

미묘하게 현실적인 이유일세. 나는 내 앞에서 햄버거를 오물오물 거리며 씹어 먹는 세연이를 올려다 보며 한숨을 쉬었다. 돌아온 건 좋은 데 분위기가 너무 딴판인 걸. 하긴 그냥 영혼만 남은 귀신이랑 원혼은 같을 수가 없나?

“죽어도 그 고생이면...세상살이 야박하네.”

저승도 사람 사는 곳인가 보다. 사람(이었던 것)이겠지만. 저승이니까 알아서 들어 가기만 하면 처리되는 줄 알았는데, 번호표까지 뽑고 있는 걸 보면 그렇게 죽은 사람이 많아진 건가. 씁쓸하네.

근데 나는 어떻게 되는 거지? 까놓고 말 하면 나는 변이자 중에서도 귀신을 보고 만질 수 있는 특이케이스에 속하고, 전설에 따르면 저승사자 속성을 가지고 있다고 하니 내가 죽으면 난 그냥 귀신인가, 아니면 뭐 저승사자라도 되나?

“그런데 몸은 어디 있어...?”

“휴대용 풀장에 박아놨어. 30도가 넘는 더운 날엔 어차피 땀범벅이 돼버려서 말이야, 요즘은 머리카락만으로 웬만 한건 다 할 수 있거든.”

머리카락을 하도 쓰다 보니 갈수록 섬세한 조종이 가능해지고 있었다. 손가락이 세 개에서 5개로 변한 느낌이랄까. 타자를 치는 것도 전에는 머리카락으로 독수리 타법을 치는 느낌이었다면, 이제는 손가락 10개로 능숙하게 타자를 칠 정도로 섬세하게 움직일 수 있게 되었으니까. 눈높이가 너무 낮다는 단점만 빼면 몸으로 움직이는 것보다 편해서 가끔 몸이 있다는 것도 잊어버릴 지경이었다.

그래도 몸 관리는 해야지. 너무 오랬동안 몸을 욕조 안에 넣어둔 것 같은 데 슬슬 꺼낼까? 12시간 넘게 찬물에 있으니 감기에 걸리지 않을까 걱정이 들기는 했지만, 이 몸이 된 이후로 나는 감기에 걸려본 적이 없었다.

집안내력인 편두통도 없어졌고. 듀라한으로 변이하는 과정에서 회춘한 덕인지, 아니면 머리가 여러 가지로 탈 인간화 된 탓인지는 모르겠다. 어쨌든 건강하면 좋은 거지. 현대인은 무수한 질병을 달고 사는 사람이 대부분 이니까. 운동으로도, 건강한 식단으로도 해결못 하는 병은 많다. 우리나라 병원이 싸다지만 그래도 지출은 적으면 적을 수록 좋은 거야. 시간도 아끼고.

“근데 갔다 오는데 일주일이나 걸려? 저승이란 거 먼 곳에 있나 보네?”

“어...그게...”

세연이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얼굴을 슬쩍 붉히며 입을 열었다. 지박령일 때는 머리카락으로 얼굴을 가리다 시피해서 몰랐는데, 은근히 귀염상이네. 내성적인 성격 탓인가, 소심한 목소리가 그런 인상을 받게 했다.

“사실 첫날에 바로 반려 당했는데, 돌아오긴 좀 그래서...”

“뭐 어디 떠돌다 오기라도 한 거야?”

“천장에 숨어 있었어...”

왜 거기에 숨어? 집요정이야? 그럼 아까 말 걸기 전까지 천장에서 나를 보고 있었단 뜻이야? 내가 방송하면서 별의별 짓을 다 한 것도?

아 이건 어차피 맨날 봤으니까 상관없나.

뭔가 다른 방향으로 음습해진 거 같았다. 처녀귀신이 듀라한에게 집착함? 집착물로 장르가 바뀌기라도 한걸까. 처녀귀신한테 스토킹...웬 남정네가 스토킹하는 것보단 낫지. 애는 최소한 이쁘기라도 하잖아...날 해코지 하기는커녕 자기가 해코지당하지 않으면 다행인 애고.

“기껏 성불했는데 돌아가기도 그렇고...말 걸 용기가 없어서...”

그래서 햄버거에 반응했다 이 말입니까.

햄버거란 대체 뭘까...햄버거 하나에 부끄러움도 잊고 달려 들 정도라니, 햄버거는 귀신들이 환장하는 식품이기라도 한 거야? 이제 제사상에 햄버거나 올려드리라고 부모님한테 이야기하면 되는 건가?

“그, 햄버거 하나 더 먹어도 돼?”

“기다려봐. 내 몸이 알아서 가져올 거야.”

머리가 직접 가기는 귀찮으니, 나는 지금껏 풀장에 잠겨 있었던 몸을 움직여 일으켰다. 이짓을 하도 하다 보니 집안 정도라면 보지 않고도 어느 정도 조종할 수 있었다. 수건을 거내 온몸을 닦고, 가운을 걸쳤다. 줄은 좀 묶기 어려워서 묶지 않은 상태라 배랑 가슴이 일부 노출된 상태지만 둘 다 여자니까 괜찮지 않을까?

“아무리 그래도 저러고 돌아다니는 건 좀...”

아니 얼굴 붉히지 마, 고개 돌려놓고 힐끔힐끔 거리지 마! 분위기 이상해지잖아! 아직 내가 여자가 더 좋긴 해도 그런 무드는 좀 아니 거든? 나는 황급히 가운을 제대로 여미고, 냉장고에서 x벅 햄버거를 꺼내 전자레인지에 넣고 돌리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어색해진 분위기에 세연이는 내 몸뚱어리가 갖다준 햄버거를 깨작거리며 내 눈치를 봤다. 햄스터 같은 년...저게 하찮미라는 거지? 과거 때문인가 아니면 그냥 분위기 자체가 살짝 불쌍해 보이는 느낌이라 그런가, 세연이는 귀신 특유의 무서운 느낌이 거의 없었다. 매운 냄새 빠진 양파 같다고 할까.

반나절만에 머리를 목 위에 올려놓은 나는 서랍에서 속옷을 거내 입었다. 역시 속옷은 입고 있어야지...이제는 여성용 속옷을 입는 것도 익숙해져서 아무런 느낌도 들지 않는다. 벌써 변한 지 3개월이다. 내 몸 보고 부끄러워 하는 것도 웃긴 일이다. 남자던 여자던 둘 다 내 몸이건 매한 가지고. 몇 번 보다 보면 결국 적응하게 되는 법.

...그래도 가슴이 크지 않아서 다행히야. 한국 여성 평균보다는 더 있지 않을까 싶기는 하지만, 크면 불편히다는 이야기도 많다. TV프로에서도 가슴 큰 여성이 생활에 불편함을 호소하는 이야기가 가끔씩 나오니까. 나아는 그런 불편한 지방 덩어리 따위 필요하지 않다. 볼륨감 있는 정도면 됐지.

“그럼 여기 살 거지?”

“그래도 돼? 나 저번에 사고친 것도 있고...”

저번에 사고 친 게 마음에 걸리는 모양이었다. 나는 별로 신경 안쓰는데. 일이 나쁘게 끝났다면 모를까 좋게좋게 끝났고. 조금 화나긴 했지만 그 망할년들 하던 꼬라지 보면 나라도 그렇게 했을 것 같기도 하고.

“당연하지.”

처음부터 혼자사는 건 괜찮아도, 둘이 살다 혼자 사니까 외로움을 느낄 수밖에 없다. 요즘은 혼자 사는 개인주의의 시대라지만 정말로 혼자 살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겠어. 혼자 살 수밖에 없으니까 그렇게 말 하는 거지.

이래저래 많이 티격태격하긴 했어도 나는 세연이를 친구로 여기고 있었다. 실제로 지금의 나한테 친구라고 불릴 만 한 사람이 세연이랑 한솔이 밖에 없었다. 고향 친구들은 도시로 상경하면서 거의 연락이 끊겼고, 직장생활하다 생긴 친구는 대부분 넒고 얕은 관계였으니까, 어쩌다 안부 한 번 묻는 정도였고. 회사가 망한 이후로는 연락도 거의 없고, 있어도 무시했다.

몸이 이렇게 됐는데 과거의 교우관계를 그대로 유지할 수 있을 리가 없다. 내가 그렇다고 TS된 것까지 알릴법한 친구가 있는 것도 아니고. 나는 원래부터 친구는 적게 사귀되 깊게 사귀라는 신조를 가슴 속에 품고 살아온 전직 아싸 유교맨이다. 이젠 아싸 유교걸이지만.

“고, 고마워.”

“그래그래. 근데 그 말투 적응 안 되네...”

“전에는 지박령이라 이성이 별로 없어서...”

나한테 시도 때도 없이 깐족대던 세연이는 어디 갔을까. 이건 그냥 내성적인 귀요미 아가씨잖아. 혹시 태그에 누가 러브코미디 집어넣었어? 당장 손 떼! 이상한 태그 붙여버리면 찾아가서 너도 머리를 분리시켜버린다? GL도 넣지 마! BL드리프트도 주옥같지만 GL드리프트도 충분히 주옥같아!

아니 그렇다고 세연이가 그렇다는 이야기는 아니고. 나는 엄연히 이성애자...?

생각해 보니까 정신이 아직 수컷이라도 몸이 암컷이니 암컷을 좋아하면 동성애자로 쳐야 하는 건가...? 아직 남자보다는 여자 쪽이 좋은 데. 나는 박히는 것보단 박고 싶어...

“...혹시 청소 대충했어? 빨래는?”

깐깐한 시어머니처럼 바닥을 손가락을 훎으면서 말 하지 말아줄래? 씨월드는 드라마에서나 할 만하지 현실에서 그러면 바로 고부갈등이야! 방이 좀 너저분해지긴 했지만 이 정도면 자취하는 사람 치고는 상위 0.1%라고! 쓰레기도 제대로 모아서 버리고, 이틀에 한 번은 청소기 돌려서 구석구석 청소하고, 이 정도면 깨끗한 거 아니야?

하지만 세연이 눈에는 수준 미달인 모양이었다.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바닥을 훎어보던 세연이는 당장이라도 잔소리를 쏟아낼것 같은 얼굴로 나를 쳐다 보았다. 나는 애써 시선을 피하며 입을 열었다.

“...그저께 하고 안 돌렸던 것 같은 데.”

거의 옷을 안 입고 있으니 자연스럽게 빨랫거리도 줄었다. 듀라한 스트리머라 알몸으로 방송해도 사람들은 아무도 모른다 이거야.

“...내가 내일 아침에 해놓을 게. 나 없으면 안 되겠네...”

아니 그런 대사 내뱉지마. 진짜 무서워.

내가 세연이의 발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끼며 몸을 떨기 시작한 순간이었다. 돌연 노크 소리가 들렀다.

이 시간에 사람이...? 이제 곧 자정인 데?

세연이는 노크 소리에 화들짝 놀라 방구석으로 숨어들어갔다. 왜 이렇게 쫄아있니.

나는 급하게 가운을 벗어 던지고 티셔츠와 돌핀 팬츠를 입은 채로 달려 가 문을 살짝 열었다. 요즘 시대가 어느땐데 활짝 열겠어.

“흠흠, 저승에서 용무가 있어서 찾아왔는데 말임다...”

저 이상한 말투는 뭐야.

나는 문틈으로 보이는, 한국에서 저승사자라고 하면 생각나는 복장을 입은 창백하다 못해 새하얀 얼굴의 남성을 쳐다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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