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 카포 (Da capo) (55)화 (55/84)

55화.

“그러면 주말에 다시 오도록 할게. 아카데미 밖으로 나가서 맛있는 거나 먹자. 그나저나 너 언제까지 나가 봐야 하는데?”

아론의 쾌활한 목소리가 두 사람의 상념을 잘랐다.

“저녁 시간에 맞춰서 나가 보려고.”

블레어가 흘긋 시간을 확인했다. 오후 다섯 시. 아직은 시간이 좀 남아 있었다.

“뭐야, 뭐야. 연애하냐, 너? 오오오, 재주 좋아, 블레어 슈호 모네터리. 누구냐? 누군데? 연상? 연하? 예뻐? 어떻게 생겼는데?”

아론의 표정이 능글능글하게 허물어졌다. 아카데미에서는 공부에 정진하라며 되도록이면 이성 간의 교제를 금하고 있었지만, 교칙 따위는 청춘들의 불타는 열정을 막을 수 없었다. 대놓고 떠들고 다니지는 않았지만, 아카데미의 여성 학우들의 졸업 비율이 턱없이 낮은 데에는 임신도 한몫했다. 물론 그럴 때는 가문에서 대외적으로 결혼을 하게 되었다며 마무리되었다.

블레어는 확실히 여러모로 눈에 띄는 편이었다. 카일이 화사하고 화려한 외모로 눈에 띄는 것과는 살짝 그 궤가 달랐다. 다 똑같은 천둥벌거숭이들 사이에서 침착하고 왠지 모르게 어른스러운 데다 인물까지 빼어난 블레어는 여학우들의 눈에 들기에 충분했다. 아론도 여학생들 사이에서 알음알음 블레어의 이야기가 떠돈다는 것쯤은 알았다.

“그런 거 아니야.”

블레어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툭, 내뱉었다. 정말로 그런 게 아니기도 했고, 애초에 지금 와서 블레어의 눈에 찰 만한 또래의 이성이 있을 턱이 없었다. 아론의 말이 튀어나올 때마다 카일이 움찔거렸지만, 두 사람 다 그 작은 동작을 눈치채지는 못했다.

“호오오. 진짜 수상한데?!”

“아, 정말 뭐라는 거야. 들어가서 쉬기나 해. 주말에 보자.”

하도 어수선하게 까불대서 머리가 아파진 블레어가 반강제적으로 아론을 내쫓았다. 덩달아 쫓겨난 카일이 문 앞에서 눈을 멀뚱멀뚱 굴렸다.

“와, 진짜 뭐냐. 누가 연애한다고 잡아먹는대?”

아론이 옆에서 구시렁댔지만, 어쩐지 카일의 귀에는 그게 농담으로만 들리지는 않았다. 카일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일곱 시 반, 로브를 걸쳐 쓴 블레어가 방 밖으로 나왔다. 기숙사를 벗어난 블레어가 얼굴이 노출되지 않도록 머리카락 위로 깊게 로브를 눌러썼다. 외출증을 끊어 밖으로 나와 조금 걷고 있자, 블레어의 어깨를 누군가 짚어 왔다. 클라라가 보낸 안내인이다.

블레어와 남자가 눈을 마주치고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블레어가 남자를 곧장 따라갔다. 남자가 블레어를 안내한 곳은 아카데미 근방에서 가장 고가의 음식을 취급하는 고급 식당이었다. 난다 긴다 하는 집안의 학생들이 수없이 많은 이 아카데미에서도 거기라면 괜찮게 먹을 만하지, 하고 종종 화두에 오르는 곳이기도 했다.

클라라의 취향에 맞추려면 여기밖에 없었나. 블레어가 갸웃거리며 남자를 따라갔다. 바깥과 분리되어 있는 방 앞에 도착한 블레어가 문을 끽 열고 들어갔다. 아직 클라라는 도착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일단 클라라의 취향에 맞는 음식 몇 가지를 주문한 블레어가 손깍지를 끼고 턱을 괬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음식이 나왔다. 따로 특별하게 신경을 쓰면서 관리하는 방인 모양이었다. 클라라가 오기 전에 먼저 손을 댈 생각은 없었던 블레어가 음식을 그저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문이 벌컥 열렸다.

“블레어!”

블레어가 환하게 웃으며 클라라를 맞았다. 언제나 활달하고 활기차고 에너지가 넘치는 클라라는 주변에 그 에너지를 흩뿌리고 다니는 사람이었다. 블레어도 클라라를 무척 좋아했다. 성격이 여러모로 독특하긴 했지만 당차고 씩씩하고, 자신의 몫을 유능하게 잘 해내는 사람이 싫을 리가 없었다.

블레어는 살아오면서 무척 다양한 인간 군상을 리더의 위치에서 부려 본 사람이었고, 그런 그가 가장 싫어하는 것은 무능이었다. 독특한 성격은 전혀 걸림돌이 되지 못한다.

“누님, 멀리까지 오시느라 수고하셨어요.”

블레어가 클라라의 양 뺨에 키스를 남겼다.

“부르셨으면 제가 갔을 텐데. 바쁘신데 왜 여기까지 오셨어요.”

“콧바람도 쐴 겸, 우리 막내도 볼 겸. 겸사겸사 왔지.”

“선물 잘 받았어요. 정말 멋진 검이더라고요. 잘 쓰겠습니다. 최고의 선물이에요.”

“역시 그렇지? 그거 구하느라고 발품 좀 팔았단다.”

클라라가 의기양양하게 콧대를 세웠다.

“음식 식기 전에 어서 앉자. 나도 요기한 게 없어서 출출하네. 먹도록 하자.”

클라라는 밥을 먹을 때 말시키는 것을 질색했다. 얹힌다는 게 그 이유였다. 맛있는 음식만 즐기기에도 시간이 모자란데, 재미없는 일 얘기를 하는 게 말이 돼? 하면서 절규하는 표정을 짓곤 했다. 블레어도 일단 얌전하게 식기를 들었다.

본론은 클라라의 배가 부르고 후식으로 차가 나온 후에 시작됐다.

“응, 여기까지 찾아온 데는 몇 가지 말을 해 주고 싶어서야. 할 말이 적지 않다 보니 편지로 보내는 것보다는 얼굴을 보고 얘기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

블레어가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표정을 바르게 했다.

“황궁은 곧 피바람이 불기 시작할 거야. 테오 오빠가 뇌물을 흘린 사람들도 전부 잡아냈나 봐. 황녀 시해 혐의와 뇌물을 받고 직책과 관직을 팔아 치웠다는 걸 알게 되면, 아무리 스피렌다 황비를 향한 왕의 총애가 대단해도 어찌할 수 없을 거야. 거의 국정을 농락한 수준이니까. 오빠도 지금 스피렌다 황비가 만삭이라 여러모로 신경 쓰이는 모양이지만 뭐 해야 하는 일이니 어쩔 수 없지.”

“그렇군요.”

“황궁 일은 올해 안에 재판이 끝날 거고, 네가 말했던 유레호의 시장에 대해서도 좀 알아봤어.”

“어떤가요?”

“말 그대로더라. 보기 드문 머리색을 가졌거나 외양을 가진 사람들을 사고판대. 물론 평범하게 노예로 팔려 나가는 경우도 있지만, 아름다운 외양이나 특색 있는 외모를 가진 경우에는 성노예로 팔리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더라. 게다가 아직 성년이 안 된 어린애들도 사고판다고 하더라고. 끔찍해.”

클라라가 표정을 찌푸렸다. 그 얘기를 들은 블레어가 편치 않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모르면 몰랐지, 알게 되었는데 인간이 된 이상 도의적으로도 해결해야 하는 일이겠지. 누군가에게 도움이 된다면 당연히 더 좋고. 지금 테오도르 오빠가 유레호 건은 어떻게 해야 할지 골머리를 썩는 모양이더라고. 황궁 일이랑 겹쳐서 더.”

“제가 살짝 생각해 둔 바가 있습니다.”

“뭐지?”

“잘 훈련된 기사를 위장시켜서 시장 안으로 들여보내는 거죠.”

“음.”

“그 정도의 규모인 데도 누님이 따로 알아보시기 전까지 누님의 귀에 전혀 들어오지 않았다는 것은 꽤나 철두철미하게 감추고 있다는 얘기나 다름없어요. 거래되는 자금의 규모가 어마어마할 거예요. 아마 뒤를 봐주는 사람도 있을 거고, 꽤나 힘 있는 사람일 겁니다. 자기들 나름대로의 철통같은 보안이 있겠죠. 유레호 전역을 들쑤셔 봤자 알아내지 못할 확률이 커요.”

“그렇지.” 

“제 생각은 지하, 혹은 완전히 밀폐된 건물의 어딘가일 거라고 생각해요. 밖에서는 눈에 띄지 않는. 경로를 차단하고 도주한다면 발견할 수 없는 곳.”

클라라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블레어의 말에는 일리가 있었다.

“그러니 서두르지 않고 잘 훈련된 기사를 들여보내 정확한 시장의 위치를 파악한 후, 군대나 수비대를 끌고 가서 일망타진하는 쪽이 좋을 겁니다. 물론 그 군대나 수비대는 유레호 시와는 관계없는 쪽으로요. 저는 솔직히 유레호 시장도 한패일 거라고 보거든요. 눈 밑이 어둡다는 말도 있지만, 대부분 사람은 자기 앞마당에서 일어나는 일에 관심이 많죠.”

“그쪽은 내가 따로 신경 쓰도록 할게.”

“저희 집안에서 가지고 있는 사병의 규모로도 부족할 겁니다. 시이첸 공작가의 사병이 합류하면 해 볼 만할 수도 있겠네요. 하지만 이런 일에는 용병이나 사병보다는 군대의 힘을 빌리는 게 나아요. 개인의 사감이 아니고 나랏일을 집행하고 있다는 느낌을 줘야 하거든요.”

“그렇지.”

“사병의 규모만으로 커버가 돼도 군대를 좀 참여시키는 게 그림이 좋을 겁니다. 그렇지만 군부 쪽에 마땅히 믿을 만한 사람이 없다는 게 여러모로 마음에 걸리네요.”

과거였다면 이런 건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아도 됐을 텐데. 블레어는 군부의 최종 통솔권자였으니 어느 정도 규모는 재량껏 움직일 수 있었다. 과거의 권력이 조금 아쉬워졌다.

“그건 이쪽에서 신경 쓸 테니 너는 걱정하지 마. 그쪽으로 줄을 댈 만한 사람이야 찾아보면 그만이고. 나쁜 짓 하겠다는 것도 아니니까.”

“그 사람이 인신매매 시장의 뒤를 봐주는 사람일 수도 있죠. 조심하셔야 해요.”

블레어가 맹점을 지적했다. 그가 군권을 잡았던 때보다 한참 전이기 때문에 블레어도 현재 군부의 면면을 전부 알고 있지는 못했다. 이것은 전적으로 테오도르나 아드리아나가 해결해 주어야 하는 일이었다.

“알겠어, 조심히 알아볼게.”

“예. 알겠습니다. 황궁의 일이 끝난 후에 따로 연락 한 통 주세요. 아니면 제가 직접 모네터리 영지로 가도 되고요.”

“음.”

“아, 그리고 누님. 혹시 가능할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만약 가능하다면 그 시녀 아이의 목숨만은 구명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시녀? 아, 아드리아나 황녀님이 데리고 계시던 그 아이?”

블레어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예.”

“쉽지 않을 텐데. 귀족이면 작위를 빼앗기는 데에서 그칠지 몰라도 평민 아이라면 목숨을 건지긴 힘들 거야. 황족 시해죄잖니.”

클라라가 미간을 찌푸렸다.

“저는 사실 시녀 아이는 협박받아 범행에 참여했을 확률이 높다고 생각합니다. 몸이 약한 가족이라도 있었겠죠. 입막음 조로 받은 돈이 어마어마하지 않다면 한 번쯤 사형은 재고해 주십사 부탁해 주십시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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