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화.
과거에도 그랬다. 스피렌다 영지에 사는 어머니가 인질이어서 어쩔 수 없었다고. 노모에게 자신이 없으면 살아가실 수 없을 거라며 목숨만 구명해 달라고 펑펑 울던 얼굴이 기억 속에서 흐릿하게 지나갔다.
의원은 그저 의뢰를 받고 병자가 있다고 해서 진통제를 처방해 준 것뿐이라고 우겨대면 빠져나갈 구멍이 있었다. 하지만 황녀의 음식에 직접적으로 독을 탄 시녀는 이야기가 달랐다. 어쩌면 일가족이 몰살당할 수도 있었다.
블레어는 몹시 감상적이라거나 정이 많은 사람은 아니었다. 그러기엔 그가 전장에서 보내온 세월과 겪어 온 풍파가 너무나 길었다. 내가 상대의 목숨을 빼앗지 않으면 내 목숨을 내놔야 하는 곳에서 반평생을 살아온 그에게 값싼 동정심은 사치였다.
하지만 굳이 멀리 돌아 과거로 돌아오기까지 한 와중에, 그의 손에 이유가 없는 피를 더 묻히고 싶지는 않았다. 더 이상 전쟁 따위에 참여하고 싶지도, 전쟁을 벌이고 싶지도 않았다. 과거에 죽였던 사람을 살려 내지는 못할망정, 과거에 살려 주었던 사람의 목숨을 지금 와서 빼앗고 싶을 리가 없었다.
“알겠어. 그건 내가 따로 언질을 넣도록 할게. 네 부탁이라면 황녀님도 생각을 달리하실 거야.”
“예. 감사합니다, 누님.”
“유레호 쪽 건은 일단 군대에 연이 닿을 만한 사람을 찾아본 후에 다시 논의하도록 하자.”
“네. 알겠습니다.”
“황실 일은 당장 다음 주나 다다음 주부터 진행되기 시작할 거야. 지금 스피렌다 황비가 만삭이기 때문에 해산 후로 미루겠다고 뻐길 수도 있어서 좀 늘어질 수도 있겠지만. 일단 이쪽은 올해 안에 다 마무리하는 걸 목표로 하고 있어. 아, 아드리아나 황녀님도 많이 건강해지셨으니 걱정 안 해도 돼.”
“알겠습니다. 형님도 누님도 황녀님도 고생이 많으시네요.”
“고생은 무슨. 나는 그냥 오빠나 조금 도와주는 거지. 오빠는 뭐…….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고.”
클라라가 한쪽 눈을 찡긋거렸다. 과연 오랫동안 짝사랑을 이어 온 테오도르가 결실을 맺을 수 있을까. 클라라도 한발 뒤로 물러서서 흥미진진하게 모든 과정을 지켜보고 있었다. 블레어도 마주 보며 씩 웃었다. 흠이라곤 전혀 없을 것같이 어른스럽고 완벽한 테오도르의 약점을 쥐고 있다는 건 언제나 신나는 일이었다. 클라라와 블레어가 사고를 치려고 작당 모의를 하는 악동들처럼 씩 웃었다.
“그럼, 연락 기다리도록 하겠습니다. 어차피 제 귀에도 들려오겠지만요.”
“그래. 나도 이제 슬슬 돌아가 봐야겠다. 다음에 보자, 블레어.”
이미 식당의 음식은 깔끔하게 계산이 되어 있었다. 클라라가 호위 여럿이 지키는 마차에 올라타는 것을 확인한 블레어가 그녀를 배웅했다. 마차가 더는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깊은 어둠 속으로 사라진 후에 검은 로브를 쓴 블레어가 아카데미로 돌아갔다.
기숙사의 방으로 돌아온 블레어가 문을 열자 문틈에 꽂혀 있던 봉투가 톡 떨어졌다. 블레어가 허리를 굽혀 봉투를 집어 들었다. 방에 들어간 블레어가 봉투를 펼쳤다. 깔끔하게 접힌 편지가 나왔다. 편지를 펼치자 익숙한 글씨체가 보였다. 카일의 것이었다.
블레어의 방을 벗어난 이후로 자기혐오에 빠져 있던 카일이, 종이 수십 장을 버리고 겨우 완성해 낸 편지였다. 카일은 이제 블레어에게 자신이 무슨 감정을 느끼고 있는지조차 알 수가 없었다. 블레어를 볼 때마다 심장은 쿵쿵 뛰었고, 그에게 닿고 싶었다. 블레어의 시선을 자신에게만 붙들어 두고 싶었다.
얼마 전에는 모양 좋은 입술에 입을 맞추고 싶어져 깜짝 놀라기도 했었다. 그렇다면 자신이 블레어를 좋아하고 있는 게 맞을까? 꿈속의 자신이 품고 있는 진득하고 절절한 감정이 전이돼 느끼고 있는 착각이 아닐까? 그가 블레어를 좋아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그 감정이 꿈속의 자신에게서 나온 것이면 안 됐다.
블레어를 생각하는 마음은 온전히 자신의 몫이어야만 했다.
꿈속의 감정에 휘말려 얼렁뚱땅 그를 좋아한다고 결론을 내리고 싶지 않았다. 그 역시 블레어에게 호감을 느끼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었다. 자신이 블레어를 좋아하게 된다면, 그것은 오롯이 자신만의 감정으로 남겨 놓고 싶었다. 그 깊은 애정을 받고도 블레어를 떠나보낸 꿈속 멍청이는 자신의 알 바가 아니었다.
카드를 든 블레어가 자신도 자각하지 못하는 미소를 지었다. 방 안에 들어와 로브를 벗고 편한 옷으로 갈아입은 후 침대 위에 편지를 쥐고 엎드렸다. 생일을 몰라서 미안하다며, 다음에는 꼭 잊지 않고 챙겨 주겠다면서 구구절절 용서를 바라는 내용이었다.
별것도 아닌 걸 갖고 이렇게 절절매면 오히려 받는 사람 쪽이 더 당황스러운 법이다. 아까 아론처럼 대충 넘기면 되는 일인데. 생일에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못했던 블레어에게는 오히려 이쪽이 더 신선했다. 하여튼 어린 카일은 하는 짓이 나름대로 귀여웠다. 블레어가 잔잔한 미소를 띠고 편지를 잘 보관한 후 불을 껐다.
* * *
황실에 피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덕분에 제국 전역이 뒤숭숭했다. 아카데미도 예외는 아니었다. 오히려 아카데미의 학생들은 귀족 출신이 많아 사교계나 황궁에 도는 소문에 누구보다 민감하게 반응했다. 검술 수업 후 블레어와 함께 점심을 먹던 아론이 황궁 일을 화두에 올렸다.
1년이 지나도록 검술에 익숙해지질 않다 보니 검술 수업이 끝나면 녹초가 되는 게 뻔히 보였는데도 도무지 저 입만은 멈추지를 않았다. 아론은 강물에 빠트려도 입만 동동 뜰 것 같았다.
“하여튼 스피렌다 황비도 보통 미친년이 아니라니까? 어떻게 황녀를 독살할 생각을 하지?”
아론의 험담에 카일이 몸을 움찔거렸다. 카일 역시 그러한 위협에서 한 번도 자유로운 적 없는 인사였다. 원래가 황실의 사람들은 어릴 적부터 독을 복용하며 내성을 키우곤 했다. 어쨌든, 카일을 신경 쓸 정도로 세심하지 못한 아론은 계속 말을 이어 갔다.
“아드리아나 황녀님이 영리하게 알아채셔서 망정이지, 황손을 죽이려고 하다니. 정말 머리가 어떻게 됐나 봐. 아무리 자기 자식을 황제로 만들고 싶어도 욕심이 너무 큰 거 아니야? 황녀님을 제외하고서라도 아들이 둘이나 있는데! 조슈아 황자님도 있고 당장 여기 카일도 있고. 그러고 보면 설마 셋 다 죽이려던 거 아닌가?”
“하하.”
아론의 호들갑에 카일이 멋쩍게 웃었다.
“그렇게 띨띨하게 웃을 때가 아니라고. 너도 중독된 거 아닌지 확인해 봐라. 그 미친년 정도면 아카데미에 있는 너도 죽이려고 했을지도 몰라.”
스피렌다 황비가 세력이 없는 2황자를 그렇게 견제할 리는 없었지만, 아론은 방방 뛰어 댔다. 제대로 검진을 받아 보겠다고 카일이 약속을 하고 나서야 세 사람은 식사를 이어 갈 수 있었다. 비단 세 사람의 테이블에서만 그런 이야기가 오가는 것은 아니었다. 모두들 황실에서 일어난 대형 스캔들에 입방아를 찧어 댔다.
발단은 아드리아나가 피투성이가 된 시녀와 의원을 황제와 스피렌다 황비 앞에 가져다 던지면서부터였다. 애초에 아드리아나와 황제는 그렇게 사이가 돈독한 부녀간이 아니었다. 이게 무슨 버릇없는 짓이냐며 황제가 노여움을 터트렸지만 준비를 철저하게 한 아드리아나에게 무서울 것은 없었다.
황실이 발칵 뒤집혔다. 황제가 총애하는 황비. 그것도 만삭의 임신부인 황비가 하나뿐인 제국의 황녀를 독살하려고 하다니. 간단한 음해로 치부하기에는 아드리아나가 준비한 자료가 디테일했다. 빠져나갈 구멍 없이 완벽하게 짜인 그물이었다.
아드리아나 황녀가 곧 죽을 날만 받아 놓고 기다리는 산송장인 줄 알았는데 그 산송장이 무덤에서 자신의 발로 걸어 나와 등에 칼을 꽂았다. 스피렌다 황비가 빠져나갈 길은 어디에도 없었다.
다량의 카르펜을 구입해 갔던 의원이 거액을 받고 스피렌다가에 약을 처방했다고 스스로 실토했고, 시녀는 협박을 받아서 어쩔 수 없었다며 울고불고 난리를 쳤다. 재판장에서 오열하던 시녀가 실신해서 끌려 나가자 모든 비난의 화살은 스피렌다 남작가로 돌아갔다. 남작가의 장부가 사본도 아닌, 진본의 형태로 아드리아나 황녀의 손에 들려 있었다.
스피렌다 황비는 만삭의 임신부라며 빠져나가려고 했지만, 그런 여론전도 비호해 주는 사람들이 있을 때나 가능한 일이었다. 그녀의 뒷배들은 모두 뇌물수수죄에 엮여 다른 재판장에 끌려가 있었다. 그쪽도 잔뜩 뒤집혀 난리도 아니었다. 별달리 높은 관직에 올라 있는 사람도 아닌, 고작 남작이 이렇게 높은 관직과 작위를 사고팔았다는 것에 놀란 귀족 세계도 한동안 뒤숭숭했다.
다 이긴 게임이라고 생각하며 느슨하게 풀어져 있던 스피렌다 황비가 잔뜩 독이 올라 준비를 철저히 한 아드리아나를 당해 낼 수는 없었다. 테오도르가 스피렌다 남작가의 손발이 되었던 사람들을 쳐 내기 시작했다. 어차피 부당한 방법으로 작위와 직책을 취득했던 사람들을 봐줄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이번에 끝을 보겠다며 잔뜩 벼른 아드리아나가 작정하고 덤벼들자 상대방은 속수무책으로 나가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스피렌다 황비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만삭에 가까워져 잔뜩 부른 배를 핑계 삼으며 나중으로 미루자고 빼는 것뿐이었다.
스피렌다 남작은 뇌물 수수의 혐의와 마음대로 직책을 사고팔며 국정을 농단했다는 죄목으로 재판장에 올랐다. 황제는 사랑하는 비의 아버지를 보호해 주고 싶어 했지만, 그러기엔 그들은 너무 먼 길을 지나왔다. 황제는 어쩔 수 없이 스피렌다가에서 남작 위를 빼앗고 평민으로 강등시켰다. 남작에게는 국경에서 성벽을 쌓는 노역을 하라는 형벌을 내렸다.
스피렌다 황비는 재판에 회부될 때마다 만삭이어서 어렵다는 핑계를 대며 과정을 차일피일 미뤄 왔다. 뻐긴 보람이 있었는지, 그녀는 오래지 않아 산실에 들어갔다. 건강한 황자를 낳은 그녀에게 다시 구원의 기회가 내려오는 것도 같았다. 하지만 결과는 갓 태어난 아기와의 생이별이었다.
아이를 빼앗긴 후 제대로 회복되지도 않은 몸으로 재판장에 오른 스피렌다 황비에게 긍정적인 결과가 나올 턱이 없었다. 스피렌다 황비를 눈빛만으로도 토막 낼 것 같은 아드리아나가 재판장에 들어와 있었다. 황족 시해죄는 누구든 발각되면 사형으로 엄하게 다스리지만 황자를 낳았기 때문에 폐비 후 황실 밖으로 내쫓아 평민으로 평생을 살도록 하는 게 마지막 재판의 결론이었다.
워낙 죄목이 명백했기 때문에 반론의 여지는 없었다. 거의 세 달을 질질 끌어온 재판은 한겨울이 되고 나서야 끝이 났다.
뒤숭숭하던 제국은 해가 바뀌고 나서야 서서히 가라앉았다. 테오도르나 클라라도 정신이라곤 없는지 블레어에게 따로 사람을 보내 말을 일러주는 것이 전부였다. 블레어는 황실의 동향에 주의를 깊게 기울이고는 있었지만 더는 적극적으로 개입하질 않았다. 테오도르는 생각보다 무척 잘 하고 있었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