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짐을 모두 챙긴 후, 잠옷으로 갈아입은 블레어가 먼저 침대에 눕자 카일도 꾸물꾸물 침대에 올라왔다.
“안녕히 주무십시오.”
“응, 블레어도 잘 자.”
카일이 블레어의 새끼손가락을 살짝 잡아 왔다. 블레어는 굳이 카일에게서 손을 빼내지는 않았다.
“예. 잘 자요.”
새끼손가락을 잡은 카일이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블레어의 얼굴을 훑어보았다. 블레어는 눈을 감고 있었다. 불을 끈 상태여서 얼굴이 세세하게 보이지는 않았지만, 단정한 이마며 쭉 뻗은 콧날, 모양 좋은 입술의 윤곽이 보였다. 물끄러미 블레어의 얼굴을 훑어보던 카일의 시선이 어느 한곳에 멈췄다. 도톰하고 선명한 색을 가진 입술이었다.
꼭 다물려 있던 블레어의 입술이 아주 살짝 벌어졌다. 갑자기 그 입술 위에 자신의 입을 겹치고 싶다는 충동이 들었다. 자신의 생각에 혼자 놀란 카일이 화다닥 블레어의 손을 놓고 눈을 꾹 감았다. 카일의 얼굴이 홧홧해졌다.
카일의 속내를 알 수 없는 블레어의 얼굴은 몹시도 평안했다. 모네터리 저택에서 보내는 마지막 밤이 저물어 갔다. 동상이몽이었지만, 그래도 이만하면 그럭저럭 평화로운 밤이었다.
* * *
다시 돌아온 아카데미에는 가을이 도착해 있었다. 나뭇잎들이 고운 색으로 물들어 가기 시작했고, 아침저녁에는 슬슬 창문을 단속해야 했다. 얇던 학생들의 교복도 차츰 두꺼운 것으로 바뀌어 갔다. 학생들은 각자 케이프나 로브, 코트를 한 겹 더 걸쳤다.
블레어는 케이프보다 코트를 선호하는 편이었다. 길고 날씬한 몸에 단정한 맛이 더해졌다. 아카데미의 겉옷은 검정색이어서 블레어의 짙은 색 머리카락과 무척 잘 어울렸다. 목덜미를 스치던 까만 머리카락이 어느새 자라 어깨까지 내려왔다. 애매한 길이의 머리카락을 끈으로 묶은 후 코트를 두른 블레어에게는 그 나이대 소년만 가질 수 있는 멋이 있었다. 소년과 청년의 경계에 있는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분위기가 감돌았다.
솜털이 보송보송하던 둥근 뺨에 살이 조금 내렸다. 아마 서서히 젖살이 빠지고 있는 모양이었다. 턱 선이 조금 굵어진 것 같기도 했다. 블레어는 슬슬 어른의 얼굴이 되어 가고 있었다. 요즘 블레어는 아침에 일어나면 거울을 바라보며 얼굴을 한 번씩 쓸어 보곤 했다. 물론 실제로 서른이 넘은 그가 보기엔 아직 한참 더 어린애였지만, 처음 눈을 떴을 때보다는 훨씬 성숙해진 느낌이었다. 아직 과거로 돌아온 지 1년이 지나지도 않았는데, 이제는 이쪽이 더 익숙했다.
블레어가 지나가곤 할 때면 여학생들이 눈을 반짝거리며 작게 속닥거리곤 했다. 잘생긴 데다 키도 훤칠하고 똑똑한 모네터리가의 삼남. 탐나지 않을 리가 없었다. 정작 블레어는 그에게 쏟아지는 미묘한 관심에 별달리 반응하질 않았다. 일부러 와서 부딪힌다든지, 물을 흘린다든지 하는 소소한 접근에 모두 반응하기에는 그의 경험이 워낙 많았다. 덕분에 신사적이고 점잖다며 블레어의 인기는 더욱 늘어 갔다.
블레어는 가을 태생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블레어는 유달리 가을을 좋아하는 편이었다. 크라시아 제국의 겨울은 호되다. 덕분에 봄가을도 선명하게 존재했다. 제국이 워낙 넓다 보니 물론 유달리 안온한 곳도 있고, 사철 얼어붙은 곳도 있지만 아카데미가 위치한 중심부는 겨울을 호되게 타는 편이었다.
수업이 끝난 블레어가 방으로 돌아왔다. 오늘의 수업이 모두 끝나 여유 시간이 생겨 잠시 잠을 잘 생각이었다. 자신의 방 앞에 도착한 블레어가 문을 열지 못하고 멈칫거렸다.
엄청난 크기의 꽃다발과 비단으로 감싼 상자가 있었다. 언제부터 놓여 있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눈에 띄지 않을 턱이 없었다. 블레어가 서둘러 꽃다발과 물건을 집어 들었다. 꽃다발에 꽂혀 있던 카드가 톡 떨어졌다.
서둘러 문을 열고 방 안으로 들어간 블레어가 카드를 펼쳤다.
[우리 막내, 생일 축하해!
벌써 열일곱이 되었네.
누구보다 행복한 하루를 보내렴.
-클라라가]
살짝 웃은 블레어가 천천히 비단으로 감싼 상자를 풀었다. 사실 짚이는 구석이 있었다. 산더미 같은 꽃을 보니 기억이 새록새록 났다. 과거에도 받았던 것과 같은 선물이었다. 자신의 생일인 줄 모르고 있다 발견한 선물이다 보니 깜짝 놀랐을 뿐이다. 블레어가 잔잔히 웃으며 상자 속에서 길게 드러난 검신을 바라보았다.
과거에 항상 블레어가 목숨같이 지니고 다니던 검이었다. 굉장히 유서 깊은 기사 가문에서 대대로 내려오던 명검이라고 하던데, 클라라가 어떻게 구했는지는 지금도 알 수 없었다. 가끔 지나가듯 물어봐도 눈을 찡긋거릴 뿐이었다. 명검의 반열에 충분히 들 수 있을 만큼 훌륭한 검이었다.
검을 쥐자 기분이 유쾌해졌다. 분명히 지금으로서는 처음 만나는 것인데도, 꼭 수십 년을 함께했던 친구 같은 익숙함이 손을 타고 전달됐다. 블레어가 검을 가볍게 휘둘렀다. 손에 찰싹 달라붙는 그립의 맛이 차졌다. 검술 수업에서 사용하는 싸구려 수련 검과는 차원이 달랐다.
만족스럽게 검을 내려놓은 블레어가 카드를 다시 집어 들었다. 클라라는 장난치는 것을 좋아했다. 아니나 다를까, 카드의 고급 속지를 스륵 떼어 내자 뒷장에 작은 글씨로 뭔가가 적혀 있었다. 두꺼운 속지를 전면에서 펼쳤을 때는 보이지 않는 글씨였다.
[오늘 밤 8시. 아카데미 쪽으로 사람을 보낼게.]
글을 확인한 블레어가 카드를 갈무리했다. 중요한 정보가 적혀 있는 카드는 아니니 굳이 없앨 필요는 없었다. 블레어가 카드를 정리하고 있을 때, 문 밖에서 방정맞은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물론 블레어의 방에는 누구나 찾아올 수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경쾌하고 리드미컬한 노크 소리의 주인은 한 명뿐이었다.
‘거의 지문 수준이라니까.’
손님의 정체를 짐작한 블레어가 천천히 문을 열어 주었다. 물론 문을 열기 전부터 짐작하던 사람이 문 앞에 서 있었다.
“짜잔, 블레어! 나 놀러 왔어!”
아론이었다. 그의 뒤에서 전혀 숨겨지지 않는 체격을 가진 카일이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아론은 주인의 허락도 받지 않고 뻔뻔하게 제 방처럼 덥석덥석 안으로 들어왔다. 카일이 방학 동안 블레어의 집에서 잔뜩 신세를 졌다는 것을 전해 들은 아론은 엄청나게 섭섭해했다. 그런 후 카일과 블레어가 무척 돈독한 관계라도 됐다고 생각하는지 시도 때도 없이 카일과 함께 블레어를 찾아왔다.
방에 들어와 침대 위에 놓인 엄청난 꽃다발을 발견한 아론이 호들갑을 떨었다.
“세상에, 블레어. 이게 뭐야? 프러포즈라도 받은 거야?”
프러포즈라는 말에 카일이 살짝 어깨를 움찔거리며 반응했지만 아론은 전혀 신경 쓰지 않고 꽃을 안아 들었다. 꽃 더미가 부스럭거렸다.
“와, 어마어마하네. 진짜 뭐야?”
그제야 옆에 놓여 있는 검에 시선이 가 닿은 아론이 표정을 우스꽝스럽게 구겼다. 정확한 날짜까지는 기억하지 못해도 블레어의 생일이 이맘때인 것은 알고 있었다.
“헝, 오늘 생일이었어, 블레어?”
아론이 바람 빠지는 것같이 우스꽝스러운 소리를 냈다. 블레어가 고개를 끄덕이며 천천히 선물을 정리했다. 검을 챙겨 넣은 후 잘 안 쓰는 컵에 물을 담아 와 꽃다발을 꽂아 놓으니 방이 한결 화사해 보였다.
“응, 나도 잊어버리고 있었는데 누님이 챙겨 주셨네.”
“허허, 그렇구나~ 세상에. 이럴 수가, 어쩌지? 새카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네!”
아론이 너털웃음을 짓다 짐짓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됐어, 나도 기억 못 하고 있었는데. 생일 따위가 뭐라고. 별달리 필요한 것도 없고.”
블레어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손을 휘휘 저었다.
“좋아, 그러면 내가 식사라도 짜하게 대접하지. 오늘은 다들 나가서 저녁을 먹고 오자. 얼마 전에 아카데미 근처에 식당이 새로 생긴 모양인데, 거긴 어때?”
아론이 한참 높은 블레어의 어깨에 팔을 걸었다. 까치발을 하고서 겨우 키를 맞춘 아론이 블레어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음, 어쩌지. 오늘은 정말로 안 되겠는걸.”
“엑, 왜?”
아론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물었다.
“선약이 있어서. 주말에 시간을 내도록 할게. 그때 나가자.”
“우우. 당장 누구와 선약을 했는지 불어라!”
“비밀인데?”
아론의 투정에 블레어가 씩 웃었다. 당연히 친누님을 만나는 것이니 알려 주지 못할 것은 없었다. 하지만 이런 일은 아는 사람이 적으면 적을수록 좋은 일이었다. 몸을 사리는 편이 좋았다.
“힝, 알겠어. 그럼 주말에 나가서 배 터지게 먹고 오자.”
블레어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때, 다른 목소리가 두 사람의 대화 사이에 끼어들었다.
“블레어, 생일 축하해.”
카일이 계면쩍음을 감추지 못하며 인사했다. 뭐라도 준비했으면 모를까, 선물을 잔뜩 받은 당사자 앞에서 생일을 알게 된 게 당황스러운 모양이었다. 사실 카일은 심장이 쿵 떨어지도록 놀란 상태였다. 블레어의 생일조차 알지 못했다니!
꿈속의 자신과 감정이 동화되어 그럴까, 카일은 블레어가 알고 지낸지 아주 오래된 사람처럼 친근하고 더없이 가까운 사람처럼 느껴졌다. 블레어는 꿈속 자신이 그 누구보다 가깝고 큰 애정을 품은 사람이었다.
현실의 자신도 블레어의 모든 것을 아는 것 같았지만 그것은 착각이었다. 꿈을 꿀수록 느껴지는 패배감에 입술을 짓씹었다. 블레어와 깊은 교분을 나누고 그에게서 애정을 받고 있는 꿈속의 자신에게조차 약한 질투가 느껴졌다.
꿈속의 블레어가 보여 주는 애정과 충심은 지나치게 선명했다. 꿈속의 자신의 몸을 빌려 바라보는 그조차도 느낄 수 있는 또렷한 감정이었다.
하지만 현실의 그와 블레어는 그저 단순한 친구 사이일 뿐이었다. 친구라는 단어에 또 괜히 심장이 아릿해졌다. 카일이 푸르고 큰 눈을 깜빡거렸다. 푸른 눈에 순식간에 물기가 어렸다 거둬졌다.
“예, 감사합니다.”
블레어는 별것 아니라는 듯 편안하게 카일의 인사를 받았다. 정말 본인조차 기억하지 못하던 생일이었다. 어른이 되고 나면 생일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게 된다. 그저 평범한 나날 중 하나일 뿐이었다.
어차피 뭔가 필요한 물건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서운할 이유는 전혀 없었다. 하지만 이제 갓 성년이 된 두 사람은 생각이 다른지, 블레어의 생일을 깨닫지 못했다는 것에 미안해하는 것 같았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