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 카포 (Da capo) (53)화 (53/84)

53화.

“블레어!”

“기다리셨습니까?”

“응. 금방 온댔으니까.”

“아, 오는 길에 잠시 테오 형님을 만나서요. 말씀 좀 나누고 오느라 늦어졌습니다.”

카일이 고개를 낮춰 블레어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두 사람 사이에 허물이 없어질수록 카일이 퍼붓는 스킨십의 빈도가 늘어 갔다. 언제나 블레어를 잃고 자신이 미치는 것으로 마무리되는 꿈을 꾸다 보니 언제나 눈앞에서 그가 보이지 않으면 불안해졌다. 꿈을 꿀 때마다 고통스러웠다. 그 꿈이 현실이 돼서는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자꾸만, 자꾸만 들었다. 터무니없는 꿈인데도 언제고 그 꿈이 현실로 다가와 자신에게서 블레어를 빼앗아 갈 것만 같았다.

블레어는 카일이 약간의 애정 결핍이 있는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어쩌면 따끈따끈한 체온을 좋아하는 것일지도 몰랐다. 그래서 과거의 카일이 늘 연인을 두려고 했던 것일까.

물론 그 당시 그걸 보던 블레어의 가슴은 매번 뒤집어졌었지만, 지금 와서 돌아보니 이해되는 면이 없지 않아 있었다. 홀로 자란 것이나 다름없는 그였으니, 온기를 느끼고 싶었겠지.

카일의 성격은 예전과는 다른 방향으로 조금씩 변해 가고 있었다. 블레어도 종종 놀랄 때가 있었다. 최근의 카일은 과거의 그가 알던 사람과 영 달라 보였다. 물론 18세의 카일은 17년도 더 전의 일이니 블레어가 어제 일처럼 선명하게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 당연했다. 하지만 근본적인 성품이나 행동 자체가 황제였던 그와는 제법 다르게 느껴졌다.

블레어가 어린 짐승처럼 어깨에 얼굴을 묻고 비비적거리는 카일의 머리카락을 쓸어 주었다. 처음에는 카일의 태도가 몹시 부담스러웠다. 하지만 머리 하나가 크고 나이도 두 살이나 많은데도 카일은 신기할 정도로 보호해 줘야 하는 어리고 연약한 짐승처럼 느껴졌다. 과거의 습관이 몸에 완전히 배어 버린 탓일지도 몰랐다.

괜히 복잡한 생각을 하기 싫어진 블레어가 그저 카일의 고운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어느새 짧은 2주간의 방학이 모두 지나 버렸다. 한껏 기승을 부리던 여름의 기세도 한풀 꺾인 후였다. 슬슬 아침저녁으로 부는 바람이 싸늘해졌다. 아카데미로 복귀해야 할 시기가 다가왔다.

저녁을 먹고 방으로 돌아온 블레어가 카일에게 말을 걸었다. 내일 아침에 출발하려면 지금 짐을 꾸려 두는 게 나았다.

“슬슬 짐을 챙겨야겠네요. 카일 님도 내일 아침에 바로 출발할 수 있게 짐을 챙겨 두세요.”

거의 빈손으로 왔던 카일이지만 이래저래 선물을 잔뜩 받아 가져갈 짐이 한 꾸러미였다.

“응, 그럴게.”

“놓고 가시는 거 없게 미리 다 챙기시고요.”

“응.”

카일이 살짝 웃으면서 대답했다.

최근 카일은 여러모로 생각이 많은지 눈매가 더욱 깊어지고 뺨에 살이 내렸다. 성년이 지나며 젖살도 빠지고 있는 모양이었다. 잠을 자다 종종 깨곤 하는 게, 여전히 악몽을 계속 꾸고 있는 것 같았다. 블레어가 걱정했지만 카일은 자신의 문제일 뿐이라며 그의 걱정을 일축했다.

얼굴 골격이 잡혀 가고 우수에 찬 분위기가 어리며 카일의 얼굴은 점점 아름다워졌다. 본인이 키운 것도 아닌데, 블레어도 카일의 그 아름다운 얼굴을 볼 때마다 약간의 뿌듯함을 느꼈다. 블레어는 사실 상당히 냉정하고 단호한 사람이었지만, 카일에게만은 꽤나 물렀다. 그가 눈을 그렁그렁하게 뜨고 눈치를 살피면서 우물쭈물 부탁하면 도무지 들어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잠자리만 해도 그랬다. 성년에 가까운 귀족가의 두 사람이 침대를 함께 사용한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다. 결혼한 부부나 그렇게 행동할 수 있었다. 그러니 어쩌면 저택 안에서 이상한 쪽으로 소문이 났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카일이 시무룩한 표정을 만들면 들어주지 않고 배길 수가 없었다.

요즘 블레어는 약한 자기혐오에 빠져 있었다. 자신이 황제였더라면 분명히 나라를 말아먹었을 것이다. 카일의 얼굴만 보면 단단한 이성이 모두 흐려졌다. 과거로 처음 돌아왔을 때, 카일에게 더는 정 주지 말자고 다짐했던 모든 게 허사가 된 지 오래였다. 물론 지금은 과거의 친분과는 확실히 다른 양상으로 진행되고는 있었지만, 어쨌거나 지금도 카일과 깊게 엮여 있는 것은 똑같았다.

블레어는 과거에 카일이 성군이 될 자질이 없다고 속으로 비난했던 것을 후회했다. 카일은 아무리 총애하는 애인이 있어도 도를 넘는 일은 없었다. 블레어 자신이 황제였다면 이렇게 예쁜 경국지색의 애인이 있었으면 다 퍼 주다가 미친 폭군이 되어 충언하는 신하도 내치고 나라를 망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카일은 대단한 자제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다.

역시 이번에는 모네터리가의 삼남으로 남기로 결정하길 잘했다. 말아먹어 봤자 이 막대한 집안의 재산 중 일부만 말아먹겠지. 블레어가 자기혐오에 빠져 이마를 짚고 고개를 저었다. 카일이 걱정스럽게 블레어의 심각한 표정을 바라보았다. 꿈을 꾸고 나니 블레어의 일거수일투족이 눈에 선명히 박혔다. 그가 조금만 힘들어하면 가슴이 덜컥 땅으로 떨어졌다. 언제나 블레어가 죽으며 끝나는 그 꿈이 꼭 예지몽처럼 느껴졌다. 지나치게 불길한 꿈이었다.

별것 아니다, 아니다 자기최면을 걸고 있었지만 카일은 블레어를 볼 때마다 꿈속의 자신이 느끼던 깊은 감정들을 느꼈다. 그리고 그 감정의 끝은, 절대로 겪고 싶지 않은 상실감과 고통이었다.

“왜? 머리 아파? 약 가져다줄까?”

“아뇨, 그런 문제는 아니라서요.”

카일이 걱정스럽게 물었지만 블레어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걱정하실 건 아닙니다. 잠깐 생각나는 게 있어서 그랬어요.”

“으응.”

카일이 납득하지 못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지만, 굳이 되묻지는 않았다. 블레어가 화제를 돌렸다.

“모네터리가에서 지내시며 불편하신 것은 없으셨습니까?”

“응, 전혀! 주방장의 솜씨도 좋고. 사용인들도 모두 친절하고 다 좋았어. 떠나기 아쉬울 정도로.”

“다행이네요. 따로 포상을 내려야겠습니다.”

블레어가 차분하게 웃었다. 이러나저러나 자신의 집에 찾아온 손님이니 잘 쉬었다 간다는 소리가 마음에 들지 않을 리가 없었다.

“오늘은 일찍 주무세요. 아카데미에 너무 늦게 도착하면 다음 날 수업 들으실 때 피곤하실 겁니다.”

“응, 그럴게. 블레어는?”

“저도 일찍 자야죠. 이제 형님이 집에 돌아오셨을 테니 마지막으로 형님과 누님께 인사만 좀 드리고 오려고요. 먼저 쉬고 계십시오.”

또 그 꿈을 꾸겠지만, 할 일이 있다는 블레어를 방해할 수는 없었다. 카일을 방에 떼어 놓고 나온 블레어가 테오도르에게 찾아갔다. 테오도르에게 서류를 넘겨준 이후, 그는 한 번도 제시간에 귀가한 적이 없었다. 무척 바쁜 모양이었다. 오늘도 그는 열한 시가 넘어서야 집에 도착했다. 테오도르의 방문 앞에 선 블레어가 그를 불렀다.

“형님.”

“오냐.”

테오도르가 문을 열어 주었다. 확실히 할 일이 많기는 많은 모양이었다. 건장하던 테오도르의 체구가 조금 가늘어진 티가 났다.

“전 내일 아카데미로 출발합니다. 하실 말씀이 있으면 곧장 서신을 보내십시오. 바로 답신을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알겠다.”

“일은 순조롭게 잘 진행되고 있나요?”

“뭐, 그렇지. 아드리아나 황녀님의 궁에서 일하는 주근깨 시녀를 곧 황실 재판에 회부할 참이다. 의원도 물론 같이.”

“기왕이면 더 시끄럽게 진행되면 좋을 텐데요.”

“황실의 치부이니 그렇게 크게 만들지는 않을 게다. 주변 귀족들까지 모두 엮어 들어가려니 시간이 걸리긴 하는구나. 그래도 증거가 명확하니 함부로 빠져나가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아마 스피렌다 황비도 쫓겨나게 될 확률이 높아.”

“그렇겠죠. 진행이 되면 어차피 아카데미로도 소식을 들려올 테니 그렇게 알고 있을게요.”

블레어가 웃으며 일어섰다. 이제 저쪽 일은 블레어의 손을 떠났으니 더 신경 쓸 필요는 없었다. 테오도르가 알아서 잘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아, 형님께만 살짝 알려 드릴게요. 이 일이 마무리되면 인신매매나 납치 쪽에 연관된 일을 해결하는 쪽으로 진행해 볼까 해요. 아직 구체화된 내용은 없으니 황녀님께 따로 말씀드리지는 말고, 형님만 알고 계세요.”

테오도르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인신매매?”

“예. 황도 주변에 있는 작은 도시에서 관련 시장이 성행하고 있는 모양입니다. 최근 들은 바가 있어서요. 스피렌다 남작가의 일만 신경 쓰시기도 벅찰 테니 이쪽은 저와 클라라 누님이 좀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아마 분명히 이쪽도 뒤를 봐주는 사람들이 있을 거예요. 최소한 관료들 중 처장급 이상이거나, 귀족이라면 백작급 이상일 거예요. 돈깨나 있을 거고요. 상당히 큰 규모인데 나라의 눈을 가리려면 그 정도는 돼야죠. 들쑤셔 봤자 좋을 일 없어 보이니, 이것은 이쪽에서 조용조용 알아볼게요.”

“그러려무나. 부탁한다.”

“예. 그럼 이만 가 보겠습니다.”

블레어가 문을 닫고 나갔다. 이미 클라라에게 비밀 코드에 대해 알려 주며 이쪽 건에 대해서 알아봐 달라고 말을 해 둔 터이니 걱정이 덜했다. 돈이란 물건은 희한하게도 생명을 가진 것처럼 움직이곤 했다. 물자의 흐름을 줄줄 꿰고 있는 상단을 운영하는 클라라는 분명 아는 게 있을 것이었다. 나라나 국법의 눈은 가려도 흘러가는 돈의 눈을 가리기는 쉽지 않다.

안 그래도 요즘 제국에 납치 사건이 종종 일어나 민심이 뒤숭숭했다. 물론 블레어도 인신매매나 노예시장이 유레호에만 있다고 믿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황도에서 가까운 지리적 위치이기 때문에 귀족들이 오가기 쉬운 곳이라고 생각하면 개중 큰 규모일 것은 확실했다. 인신매매가 자행되는 시장을 해체하면 여러모로 사람들의 지지를 얻을 수 있을 것이었다.

방으로 돌아온 블레어가 돌아갈 짐을 챙겼다. 아카데미에서 집으로 떠나 올 때는 교복도 놓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왔는데 돌아가는 길에는 챙겨갈 짐이 가득이었다. 카일도 블레어가 자리를 비운 사이 짐을 모두 꾸려 놓았는지, 티 테이블 위에 짐 꾸러미가 올라가 있었다.

“아직 안 주무셨습니까? 먼저 쉬고 계시지.”

“응, 기다렸지.”

카일이 천천히 다가와 블레어가 짐을 챙기는 모습을 옆에서 구경했다. 최근 카일은 혼자서 잠을 잔 적이 없었다. 혼자 잠들었다가 또 그 꿈을 꿀까 걱정되었다. 꿈은 늘 비탄과 오열, 그리고 반쯤 미쳐 있는 자신으로 끝이 났다. 블레어 없이 혼자 잠들었다가 울면서 깨어날 자신이 없었다. 요즈음은 깨어날 때 블레어가 곁에 있어 조금 안심이 됐다.

정말로, 이 현실에조차 블레어가 없다면. 카일은 점점 꿈속의 그와 마음이 완전히 동화되어 가고 있었다. 블레어를 볼 때마다 절박해졌으며 애타는 마음이 들었고, 그를 자신의 옆에만 묶어 두고 싶었다. 보이지 않으면 불길해졌다. 꿈속의 자신처럼 멍청하게 블레어를 잃고 싶지 않았다. 아니, 잃을 수 없었다. 잃어서는 안 됐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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