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나가는 시즌
한 경기, 한 경기씩 따지고 보면 긴 시즌도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후반에 접어들었다. 달력의 가장 첫 번째 장은 이미 지나간 지 오래고, 어느새 4월이라는 글자가 익숙해져 있었다.
그리고 시즌의 결과가 슬슬 가시권에 들어오는 지금, 베이포트 FC는 4위를 달리면서 승격에 대한 기대감을 점점 더 높이고 있었다. 얼마 남지 않은 경기들을 연패로 마무리하지만 않는다면, 승격을 걸고서 플레이오프를 치르고 매우 오랜만에 프리미어리그로의 복귀가 가능한 것이다.
“…여기서 가장 주목해야 할 점은 바로 이 32번, 마르코 케디라 입니다. 지난 1차전에서는 없었던, 겨울 이적시장에서 휘트비 알비온에 합류한 선수죠.”
동민은 거기서 말을 끊고, 동영상을 재생시켰다. 동영상 속에서는 작고 호리호리한 덩치를 지닌 선수가 다른 선수들과의 2 대 1 패스로 압박을 벗겨내며 공을 끌고 올라가는 모습이 담겨져 있었다.
“여러분들도 기억하시다시피, 지난 1차전에서 우리는 상대의 중앙 미드필더진이 약점이라는 것을 알고 강한 압박으로 중원에서부터 상대의 공격을 막았습니다.”
동민은 미소를 지으며 지난해 11월, 휘트비 알비온을 상대로 2 대 0의 승리를 거두었던 것을 거론했다. 그의 말에 몇몇 선수들의 머릿속에도 그때의 승리가 떠오르는 듯 옅은 미소가 옮겨갔다.
“하지만 이 마르코 케디라 덕에 이번에는 그 방식을 사용할 수 없을 거라 생각합니다. 게다가 다들 알다시피, 현재 우리 팀의 상황에서는 그렇게 하기도 힘들고요.”
동민이 다시 재생한 동영상에서는 마르코 케디라가 중앙 단독 돌파로 상대 수비를 흔드는 모습이 흘러나왔다. 두 명의 수비가 달라붙었지만 그의 발재간에 드리블을 막지 못하고 돌파를 허용하는 모습이었다.
“이처럼 이 선수는 혼자 힘으로 돌파를 할 수 있지만 패스나 슈팅에서의 임팩트는 생각보다 적습니다. 본인이 직접 패스나 슈팅으로 찬스를 만들어내기보다는, 자신의 움직임으로 수비를 유혹하는 쪽이죠. 그 때문에 주로 맡은 역할은 상대를 흔들면서 다른 선수들이 들어갈 공간을 만들어내는 일로…….”
아무래도 동민의 브리핑은 오늘도 예정된 시간을 넘을 것 같았다.
“감독님.”
“…….”
“감독님? 듣고 계세요?”
앨런 휴즈는 동민이 두 번이나 부르는 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그가 생각한 전술의 이야기를 듣다가 잠시 다른 생각에 빠진 모양이었다.
“아, 미안합니다. 잠깐 생각할 것이 있어서요. 어디까지 이야기했었죠?”
“마르코 케디라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굳이 마르코 케디라와 정면 승부를 통해서 그를 억제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고요. 대인 마크로 그를 막으려는 짓은 사실상 미친 짓이나 다름없고, 반대로 지역 방어에 집중을 하다 보면 순간적으로 파고드는 움직임에 약점을 노출할 수 있으니까요.”
동민은 그렇게 말하면서 골치가 아프다는 듯 눈을 찌푸렸지만 이내 곧바로 말을 이었다.
“다시 말해 움직임이 정해진 수비 블록으로 그 한 명을 막으려다 더 큰 기회를 내줄 수도 있다는 거죠. 그래서 제 말은 여기서 그를 막기보다 그에게 공을 보낼 수 있는 이 두 사람을 노리는 편이 더 좋을 거라는 겁니다. 공이 전해지는 것과 다른 쪽으로 이어지는 것을 동시에 막는다면…….”
동민은 열정적인 말투로 휴즈 감독에게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이렇게 한다면 충분히 해볼 만한 도박이라고 생각합니다.”
“이해했어요. 생각해 볼게요. 수고하셨습니다.”
전술 브리핑이 끝난 지도 벌써 2시간 반이 지난 시간이 되어서야 두 사람의 대화는 끝을 맺었다.
“감독님, 많이 피곤하신 거 아닌가요? 안색도 어딘가 영 좋지 않은데요.”
동민은 방을 나가려다 몸을 돌려 그를 보면서 말했다. 이번 시즌의 시작 때만 해도 튼튼했던 그의 모습은 어느새 많이 말라 있었다.
“아뇨, 괜찮아요. 그냥 요 며칠 사이에 이상하게 잠이 좀 부족한 것뿐입니다. 걱정하지 말아요.”
그런 동민의 걱정에 그는 가벼운 어투로 대꾸했다.
“혹시 모르니까 병원이라도 가보시는 게 낫지 않아요? 요 근래 들어서 갑자기 많이 피곤해 보이는데요. 아니면 해먼드 팀 닥터에게 이야기라도 해보는 게 어때요?”
동민의 목소리에는 그에 대한 걱정과 염려로 가득 차 있었다. 언젠가부터 앨런 휴즈 감독의 안색이 영 좋지 않았던 탓이다.
언제나 불을 켜놓은 듯 당당했던 눈 밑에는 거무스름한 다크 서클이 생겼고, 전술 브리핑을 하는 동민의 앞에서 갑자기 멍하니 아무 말도 없이 있기도 했다.
동민은 시즌이 끝나가면서 그동안의 피로가 몰아치는 탓일 거라 생각했지만 그렇게만 생각하기엔 그의 상태가 진심으로 걱정되었다.
“걱정 말아요. 시간 날 때 해먼드에게 가보거나 할 테니. 거기에 그렇게 서 있지 말고 어서 돌아가 보세요.”
동민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다가 결국 문 밖으로 사라졌다.
‘확실히 요 며칠 동안 몸 상태가 갑자기 확 안 좋아진 느낌이란 말이지. 감기라도 걸리는 건가. 만약 그렇다면 다음 경기에 영향을 끼치지 못하도록 약이라도 받고 오늘은 푹 쉬어야 하나. 아니, 그러기엔 남은 일정의 중요성이 너무 크다. 얼마 남지 않은 이상 시즌에 집중할 수밖에 없어.’
그는 그렇게 생각하며 떠날 채비를 했다. 그러나 방을 나서려는 거울 속 비친 그의 모습은 평소보다 흐릿해 보였다. 그것을 보면서 결국 앨런 휴즈는 조금 전의 생각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정말로 몸이 안 좋긴 안 좋은가 본데. 해먼드에게 상담은 하지 않더라도 오늘은 빠르게 휴식하고 내일 팀 훈련을 준비하는 수밖에.”
그는 그렇게 생각하며 먼저 나간 동민의 뒤를 따라 자신의 방을 나섰다.
“요즘 따라 확실히 몸이 피곤해 보이시던데요. 무리하고 있는 건 아닐까 신경 쓰여서요. 수석 코치님이 보기엔 그렇지 않았나요?”
동민은 신나게 맥주를 들이켜는 브라운 키드 수석 코치를 보면서 못 볼 것을 봤다는 듯 맥주를 목구멍에 털어 넣었다. 그러나 정작 그런 눈빛을 받는 그는 아무 일 아니라는 듯 그릇에 담긴 감자튀김을 해치우고 있었다.
“걱정 말아요. 같이 일한 지 몇 년이나 지났지만 그 사람만큼 건강한 사람도 드물걸요. 피곤해 보인다고 해봐야 별일 없을 겁니다.”
브라운 키드가 아는 한, 앨런 휴즈는 아프다는 것을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건강한 사람이었다. 선수들을 포함한 다른 사람들을 잘 파악하듯 스스로도 잘 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렇기에 그는 동민의 말이 그저 컨디션이 조금 안 좋은 것을 유난 떠는 것 정도로만 생각했다.
“그래도 수석코치님도 봤잖아요. 브리핑 때에도 뭔가 집중하지 못하는 그런 모습이었다니까요. 진짜 어디 안 좋은 거 아닌가 싶을 정도로…….”
그러나 동민은 왠지 느낌이 좋지 않았다. 자신이 앨런 휴즈를 본 것은 브라운 키드만큼 길지 않았지만, 그의 태도가 평소와는 달랐기 때문이다.
“걱정하는 건 알겠지만 그렇게 너무 오버할 필요 없습니다. 그 사람 오히려 그러면 짜증 낼 걸요. 본인도 별일 아니라고 했잖아요. 오늘은 기분 좋게 맥주나 마시자고요. 그리고 또 다음 경기를 준비해야죠.”
결국 자신보다 그를 잘 알고 있을 브라운 키드의 말에 동민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승격을 위해서는 확실하게 승점을 쌓아가야 하고, 그러려면 절대 놓치지 말아야 하는 경기가 이번 경기입니다. 각자 실수 없이, 미리 이야기했던 대로 움직여 준다면 자연스럽게 승리는 따라올 겁니다. 모두들 시즌 막바지까지 잘해주길 바랍니다.”
휴즈 감독은 그렇게 말하면서 휘트비 알비온전을 앞두고 라커 룸 대화를 끝냈다. 선수들은 그의 말에 힘차게 대답하고 자리를 나섰지만, 동민의 표정은 밝지 않았다.
‘어째 오늘도 말하는 게 감독님 상태가 그리 좋아 보이지 않는데…….’
평소와는 달리 눈빛이 피곤해 보이고, 선수들에게 하는 말에도 힘이 부족하다. 그 점은 휴즈 감독을 바라보는 동민을 걱정스럽게 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내 그는 고개를 흔들어 생각을 멈추었다.
‘걱정이 되더라도 오늘 경기가 전부 끝난 뒤에 이야기하자. 괜히 또 지금 이야기했다가 경기에 혹시 방해라도 된다면 오히려 역으로 좋지 않으니까.’
며칠 전부터 계속된 앨런 휴즈의 컨디션 난조는 분명 신경이 쓰였지만, 지금은 경기에 집중해야 할 상황이었다.
그는 스스로에게 그렇게 말하면서 억지로 정신을 경기로 돌렸다.
“당신이 말한 대로 휴즈 감독이 뭔가 다르긴 달라 보이네요. 정말로 컨디션이 좀 안 좋을지도 모르겠어요.”
벤치로 향하는 그에게 브라운 키드의 소곤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며칠 전까지는 휴즈 감독의 건강이 걱정된다는 동민의 말에 그럴 리가 없다고 고개를 젓던 그였기에 동민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고개를 돌렸다.
“선수들에게 말할 때 말하려는 내용이나 상황에 따라서 단어 선택과 활용을 전혀 다르게 하던 사람인데, 오늘은 그런 모습이 보이질 않아요. 평소와 같다면 방금처럼 그렇게 부드럽게 이야기하질 않을 텐데 말이에요.”
브라운 키드는 고개를 저으며 작게 말했다. 앨런 휴즈를 오래 보아왔던 사람인만큼, 적어도 오늘의 그가 평소와 같은 모습이 아니라는 것은 너무나도 명확히 깨닫고 있는 것이다.
조금이라도 더 유리하게 플레이오프를 치르려면 이번 경기를 비롯해 모든 경기가 중요한 만큼 선수들을 강하게 묶어둘 만한 이야기가 필요했지만, 오늘 휴즈 감독의 말은 그렇다고 하기엔 힘이 부족했다.
자신이 아는 것을 휴즈 감독이 놓칠 리가 없는 이상, 브라운 키드가 보았을 때 오늘의 앨런 휴즈는 어딘가 평소와는 달랐다.
“…그런 것도 알아챌 수 있어요?”
동민의 놀라움 섞인 말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루 이틀 본 사이가 아니니까 그렇죠. 어쨌든 경기가 끝나면 한번 물어보기라도 해야겠어요. 얼마 남지 않은 남은 경기에 영향이 가는 것도 문제고, 저런 휴즈 감독의 모습은 처음 봤으니까요.”
눈을 가늘게 뜨면서 뒤에 서 있는 휴즈 감독을 바라본 브라운 키드는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하며 빠른 걸음으로 그를 지나쳐 걸어갔다.
‘그런 세세한 점까지 알 수 있다니, 오래 안다는 건 참 대단하구먼.’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동민은 작게 혼잣말을 했다. 그러나 반대로 브라운 키드에게는 동민이 그리 오래 본 사이도 아님에도 자신보다 먼저 휴즈 감독의 이상을 눈치챘다는 점이 대단할 뿐이었다.
‘얼마 전까지 선수들의 사소한 이상도 나랑 비슷하게 캐치하는 경우도 있었고……. 전에는 저렇지 않았던 것 같은데 이런 점도 성장인가. 볼수록 신기한 사람이란 말이지.’
그는 휴즈 감독의 컨디션이 나아지는 대로 동민의 이런 성장에 대해서 이야기를 할 생각을 하며 벤치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