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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획에 없던 만남(2) (151/2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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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획에 없던 만남(2)

    “…강, 미안해요.”

    “네? 아, 아뇨. 그럴 리가요. 갑자기 왜 사과를 하고 그래요?”

    동민은 자신의 눈을 보면서 진지하게 사과하는 샐리를 보고 당황했다. 그는 자신이 사과를 받은 영문을 알 수 없어 어리둥절했다. 그러나 그녀는 그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저는 태어나서부터 이쪽에서 살아서, 가까이에 있으면서도 당신이 그런 줄은 전혀 모르고 있었어요. 미안해요.”

    “아뇨, 아뇨. 이건 제가 문제인 거니까요. 어린애도 아니고 집이 그립다니 이상하잖아요. 그리고 누군가 억지로 절 여기로 데려온 것도 아니고 제가 하고 싶은 일을 위해서 온 거니까요. 신경 쓰지 말아요.”

    동민은 당황해서 손을 내두르며 사과하는 그녀를 만류했다. 그러나 그녀는 그런 동민의 말에도 불구하고 또다시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래도 조금 더 생각했어야 했어요. 이곳이 저한테는 집이지만 당신한테는 지구 건너편이라는 걸 잊고 있었어요. 미안해요.”

    “아뇨, 제발 그렇게 말하지 마요. 당신이 그렇게 말하면 괜히 내가 이런 이야기를 한 것만 후회되니까요.”

    동민은 당황을 넘어 곤란한 감정까지 들고 있었다. 자신의 개인적인 감정을 이렇게 털어놓은 것도 창피했지만 대화를 무겁게 만든 그가 아닌, 오히려 그녀가 사과를 하고 있으니 미칠 노릇이었다.

    결국 몇 번이나 이어진 사과와 만류의 줄다리기에서 승리를 차지한 것은 동민이었다.

    “당신이 그렇게까지 말하면 미안하다는 이야기는 하지 않을게요.”

    그 말에 동민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예전 성남 페가수스 시절, 주안의 거슬리는 말들의 공세보다 순수한 사과가 더 곤란하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알아줬다면 다행이네요. 어쨌든 내 이야기는 크게 신경 쓰지 말아요. 아까도 말했지만 오늘만 잠깐 이런 걸 테고, 어차피 내일부터 다시 바쁘게 일하다 보면 느낄 여유도 없을 테니까요. 자, 이제 일어나죠. 또 어디로 가볼까요?”

    그는 겨우 이야기가 끝난 것에 안도하며 빠르게 이야기의 주제를 바꾸려 했다.

    “아뇨, 그건 안 돼요.”

    그러나 그런 동민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다시 이야기를 원점으로 돌렸다.

    “네?”

    “그렇게 계속 일에 지쳐서 넘기다간 언젠가 스트레스가 모였다가 터질 수도 있는걸요. 스트레스는 대충 뭉뚱그려 넘기는 게 아니라 풀어야죠.”

    “그거야 그렇긴 한데…….”

    동민이 그럴 일을 찾지 못했다는 말을 하기도 전에 그녀는 말을 이었다.

    “좀 전에 말하니까 조금 편해졌다고 했죠? 그렇다면 앞으로도 저한테 이런 이야기들을 해주세요. 뭐든 제가 들어줄 테니까요.”

    “아니, 그렇게 말씀하셔도…….”

    동민은 이제 머리를 감싸 쥐고 싶은 심정이었다.

    ‘분명 고마운 말이긴 한데… 그렇게 이야기하니까 창피함이 더 늘어나는 기분이네.’

    그러나 빛나는 눈으로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는 그녀의 표정 앞에서 그런 말을 할 수는 없었고, 결국 그는 쥐꼬리만 한 목소리로 알았다고 대답하는 수밖에 없었다.

    “…알았어요. 앞으로는 그렇게 할 테니, 일단은 이 이야기는 여기서 정리하면 안 될까요? 이 이야기는 여기서 끝내고 얼른 다른 곳으로 이동하죠.”

    그 말을 하는 동민의 표정은 감사와 창피함, 곤란함 등이 모두 섞인 완벽한 흙빛이었다.

    식당에서 나온 그들의 행보는 더 다채로워졌다. 템즈강 북쪽으로 건너 가 코벤트 가든을 걸으며 길거리 공연을 하는 사람들을 구경하기도 하고, 리젠트 파크에서 잠시 오후의 햇볕을 받으며 앉아 쉬기도 했다. 런던에 온지 2년 반이 넘도록 시간이 지났지만, 대부분 공부나 일에 치이던 동민에게는 익숙하지 않은 하루가 그렇게 지나가고 있었다.

    “어땠어요?”

    해가 져가는 시각, 샐리는 숙소로 돌아가려는 동민을 뒤돌아보며 물었다. 동민은 그녀의 질문에 어떻게 대답을 할지 잠시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즐거웠어요. 언제 한국이 그리웠냐는 듯이 확 달라진 건 아니지만 그래도 훨씬 기분이 나아졌거든요. 고마워요.”

    동민은 솔직하게 말했다. 언제나 경기장과 숙소를 오가는 것이 대부분이었던 그에게 그녀와 함께 웃고 떠들면서 보낸 오늘 하루는, 자신이 있는 곳이 어디인지 다시금 깨닫게 해주었다. 예정에는 없었지만 그런 하루를 만들어준 그녀에게 동민은 솔직하게 감사를 표했다.

    “그게 끝인가요?”

    “예?”

    동민은 이번에야말로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뭔가 다른 말이라도 해야 했던가, 라며 그는 머리를 회전시켰지만 딱히 떠오르는 것은 없었다.

    “그… 제가 뭔가 잘못 이야기했나요?”

    동민은 자신이 실수했나 싶어 조심스럽게 물어보았다. 샐리는 무표정하게 그의 표정을 바라보다가 결국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아하하하, 농담이에요. 즐거웠다니 다행이에요. 솔직히 싫어하는데 제가 억지로 끌고 다닌 게 아닌지 걱정했거든요. 당신의 기분 전환에 도움이 됐으면 목적 달성한 거니까요.”

    그녀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그렇게 말했다. 그녀가 자신을 배려해서 최대한 즐겁게 해주려 노력한 것을 깨닫자, 동민은 한층 더 감사한 마음이 커졌다.

    “아, 그리고 아까 했던 말들도 잊지 말아요. 언제든 이야기 들어줄 테니까 그런 일이 있거나 하면 나한테 이야기해 달라고요. 오늘처럼 산책 정도는 함께 해줄 수 있으니까.”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얼굴은 노을빛에 물들어 있었다. 동민은 그녀의 얼굴을 마주 보며 웃으며 답했다.

    “네, 고마워요.”

    샐리와 헤어져 숙소에 돌아온 동민이 가장 먼저 한 일은 친대 위에 대충 던져둔 잡지를 다시 펼치는 일이었다.

    ‘아까는 대충 훑어보다가 갑자기 한국이 그리워져서 제대로 읽지도 않고 나갔지만 그래도 기껏 보내줬는데 다 읽어봐야지.’

    그는 천천히 잡지를 읽기 시작했지만, 아까와는 다르게 가족들이나 친구들이 심하게 그립지 않았다. 그들이 그리운 것은 어쩔 수 없었지만 자신이 이곳에 있는 이유와, 그리고 지금 자신의 근처에 있어주는 사람들을 깨달은 탓이었다.

    ‘그래도 이따가 자기 전에 전화나 하나 하고 자야겠어. 덤으로 전화 못 하는 사람들한테는 메일이라도 보내놔야겠네.’

    동민은 잡지를 넘기며 그렇게 생각했다. 까맣게 잊고 있던 잡지의 도착으로 인해 시작된 하루가 그렇게 저물어가고 있었다.

    다음 날, 동민은 평소처럼 다음 경기에 대한 분석을 위해 자료실을 찾아 필요한 자료들을 찾아 뒤적이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어제 집에 들어가서 별일 없었나요?”

    자료들을 뒤적거리던 그는 옆에서 들리는 샐리의 질문에 고개를 돌렸다.

    “그럼요. 왜요? 그 이후에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요?”

    동민은 무슨 말인가 싶어 그녀를 보고 물었다. 분명 중간까지 같이 돌아왔는데 그 이후에 무슨 일이라도 있었던 것인지 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뇨, 멘데스 코치 이야기로는 어제 브라운 수석 코치가 또 신나게 펍으로 달려갔다고 하기에 또 거기 끌려간 게 아닐까 했어요. 그가 가장 자주 부르는 사람이 당신이잖아요.”

    “어제 저한테 연락 온 건 없었는데요. 뭐, 가끔은 혼자 마시기라도 하려던 거 아닐까요? 아니면 다른 사람이랑 마시거나.”

    동민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했다. 어젯밤에는 돌아와 잘 때까지 단 한 번도 브라운 키드 수석 코치의 연락을 받지 않았던 것이다.

    “흠, 의외네요. 그 사람 항상 마시려 들 때마다 당신을 부르던 거 아니었나요?”

    “샐리, 절 키드 수석 코치랑 같은 급으로 말하지 말아줘요. 나는 그처럼 알코올 중독 예비군이 아니니까요.”

    그는 자신이 브라운 키드 수석 코치와 같은 취급을 받았다는 것에 몸서리를 쳤다. 아무리 한국에 있을 때 경태나 다른 사람들과 술을 즐겨 마셨던 그지만, 제대로 마시기 시작하면 위스키를 입속에 신나게 털어 넣는 브라운 키드 수석 코치는 도무지 넘을 수 없는 벽과 같았다.

    브라운 키드 수석 코치를 좋아하긴 하지만, 술에 관련해서는 그런 그와 같은 취급을 받는 것은 진심으로 사양하고 싶었다.

    “미안해요. 어쨌든 당신이 불리지 않았으면 혼자 마셨겠죠, 뭐. 아, 미안해요 혹시 팔이 닿으면 저기 저 자료 좀 꺼내줄래요? 팔이 잘 안 닿아서. 당신도 안 닿으면 가서 의자 좀 가져오려고요.”

    “잠시만요.”

    동민은 자신의 머리보다 한참 위에 있는 자료를 꺼내려 뛰고 있던 샐리 대신, 책장에 매달려 자료를 꺼냈다.

    ‘의자가 머니까 귀찮구먼.’

    그는 그렇게 투덜거리며 목표로 한 자료를 손에 쥐었다. 남은 것은 이제 매달렸던 책장에서 가볍게 뛰어내리는 것뿐이라며 손을 놓으려는 순간, 자료실 문이 활짝 열렸다.

    “강, 혹시 여기 있어요? 잠시 감독님이 찾는데!”

    아까 그의 흉을 본 것을 알기라도 한 듯, 갑자기 들이닥친 브라운 키드의 목소리에 놀라 발을 헛디뎠다. 그리고 그 결과는.

    “…두 사람 다 팀 내 스캔들은 좀 생각해 보는 게 어때요?”

    “…지금 상황 그대로 보고서 농담하지 말아요.”

    동민이 뒤로 넘어지면서 샐리의 옆쪽 책장에 강하게 뒤통수를 들이받고는 그녀의 옆으로 넘어진 것이다. 동민은 뒤통수를 부여잡고 괴로워하는 상황을 전부 보면서도 장난을 치려는 브라운 키드 수석 코치에게 으르렁댔다.

    “내 눈앞에 보이는 건 샐리 옆에 당신이 멋들어지게 걸터앉아 있는 것뿐인데.”

    그는 장난을 칠 기회를 잡았다는 듯 웃으며 그를 놀리고 있었다.

    “진짜로 머리 아픈데 장난 좀 치지 마세요. 감독님이 찾으신다고요?”

    “네, 다음 경기 관련해서 하실 말씀이 있다는 것 같던데요.”

    동민이 얼얼한 뒤통수를 매만지면서도 본론으로 들어가자, 그는 언제 자신이 장난을 쳤냐는 듯 진지하게 대답하고 있었다. 장난스러운 사적인 모습과 냉정하고 확실한 일 처리 때의 모습이 확실한 점이 그의 가장 큰 장점이었다.

    “알았어요, 금방 갈게요. 샐리, 이따가 다시 돌아올 테니까 이 자료들 좀 다시 정리하지 말고 가지고 있어줘요. 곧바로 돌아올 테니까요.”

    “아, 네. 알았어요.”

    동민은 그 말만 남기고 급하게 자료실을 떠났다. 아직도 뒤통수가 얼얼한지 오른손 머리를 감싸며 그는 빠른 걸음으로 앨런 휴즈 감독의 방으로 향했다.

    “그럼 나도 가보죠. 실례했어요.”

    “조금 전과 같은 사고를 막으려면 다음번에는 들어오시기 전에 노크를 해보시는 걸 추천할게요. 또 그렇게 휙 들어오시다가는 다음번에는 누군가 놀라서 심장마비가 올지도 모르니까요.”

    동민의 뒤를 따라 자료실을 나서는 브라운 키드를 보며 샐리는 입을 삐죽였다.

    “오, 걱정 말아요. 앞으로는 강이 여기 있는 걸 알게 되면 절대 이런 식으로 들어오지 않을 테니까요. 안심해도 됩니다. 미스 볼든.”

    그는 샐리를 놀리려는 듯 윙크를 날리며 자료실 밖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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