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대륙의 낭인무사-47화 (47/200)
  • # 47

    Chapter 12. 위험한 희망 (4)

    스스슥…….

    정천우의 몸이 빠르게 앞으로 나아갔다.

    소음을 최대로 줄이기 위해서 경공을 발휘하는 와중에도 단단한 곳만 찾아 발을 디뎠다.

    5분가량 전력으로 경공을 발휘한 정천우가 서서히 속도를 줄였다. 사방에서 기척이 들려와 세심한 주의가 필요해졌다. 대형 몬스터의 위험성에 대해서 들은 것이 있어 충돌하고 싶지 않았다.

    정천우는 뒤꿈치부터 바닥을 디뎌 소리가 나지 않도록 조심했다. 조심스러운 그의 움직임은 먹이를 노리는 맹수의 움직임을 연상시켰다.

    앞에서 계속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정천우는 더욱 신중해져서는 낮은 자세로 기었다. 행여나 들킬세라 높이 자란 풀을 손으로 조심스럽게 살짝 밀쳤다.

    ‘저건 뭐라는 놈이야…….’

    몬스터의 모습을 확인한 순간, 정천우의 입이 떡 벌어졌다.

    굵은 나무를 젓가락 다루듯이 가볍게 휘두르는 몬스터가 눈앞에 있었다. 시퍼런 몸뚱이에 적어도 2.5m는 돼 보이는 큰 키를 가졌고, 어깨가 떡 벌어져 있어서 힘이 무척이나 강해 보였다. 웬만한 집의 기둥으로 쓸 법한 나무를 뿌리째 뽑아서 휘두를 정도면 말 다 했다.

    생긴 것도 아주 고약하다.

    아래턱이 툭 튀어나와 있고, 그 위로 송곳니가 입 밖에 삐죽 솟아 있었다. 저런 괴물과 싸울 수 있을지나 의심스러웠다.

    무엇보다……

    ‘무슨 놈의 성질이 저렇게 지랄맞아?’

    정천우는 혀를 차며 몬스터의 행동에 고개를 내저었다.

    몬스터가 난동을 부리는 이유가 참으로 기가 막혔다. 놈의 손엔 벌집이 들려 있었다. 벌들이 주변을 앵앵거리자 그것들을 쫓겠다고 저토록 큰 나무를 사방으로 무지막지하게 휘두르는 것이다.

    “크락?”

    난동을 부리던 몬스터가 순간 움직임을 멈추고는 한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거기에는 정천우가 아는 몬스터가 있었다. 지난번 몬스터 침공에서 보았던 트롤이라는 몬스터다.

    그때는 무지막지한 괴물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나무를 뿌리째 뽑아 휘둘러 대는 몬스터와 비교하면 조금 왜소해 보였다.

    어디까지나 저놈과 비교하여 왜소해 보인다는 것뿐이다. 트롤의 키는 인간보다 한참이나 크다. 그 무지막지한 재생력까지 생각하면 끔찍한 몬스터 중의 하나다.

    “구워어억!”

    몬스터가 벌집을 뒤쪽에 던져 놓고 포효했다.

    그러자 트롤이 허둥대며 급하게 근처의 나무를 꺾었다. 상대가 거대한 나무를 들고 있어 맨손으로는 싸울 수 없다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나름 지능이 있다는 의미다. 그러니까 몬스터 침공 당시에도 자신의 몸을 방패로 쓰면서 다른 동료들을 보호했다. 물론 지능이 좀 더 높았다면 엄폐물로 몸을 가릴 생각을 했을 테지만.

    ‘끔찍한 놈들이잖아? 저런 놈들과 싸운다고?’

    정천우의 안색이 허옇게 질렸다.

    두 놈이 싸우는 게 무시무시하다. 나무 몽둥이가 상대의 몸에 닿을 때마다 살벌한 타격음과 함께 피가 튀고 살점이 떨어져 나간다.

    트롤의 경우엔 눈에 띄게 상처가 아물었다. 지난번 몬스터 침공 당시에도 저런 모습을 봤으니 새삼스러울 게 없었다.

    의외인 건 나무를 든 몬스터 역시 마찬가지라는 점이었다. 트롤보다야 훨씬 느리긴 하다. 그러나 상처가 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피가 멎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승부의 추는 얼마 지나지 않아 한쪽으로 기울었다.

    재생력은 트롤이 좋지만 전체적인 육체 능력은 나무를 든 몬스터가 우세했다. 트롤의 상처가 아물기도 전에 더 치명적인 상처를 계속 입혔다.

    피까지 재생되는 것은 아닌지, 피를 흘릴수록 힘겨워하던 트롤이 마침내 머리통에 일격을 맞고 쓰러졌다.

    승리의 포효를 지른 몬스터가 트롤의 깨진 두개골 안에 손을 넣어 뇌를 꺼내서는 으적으적 씹어 먹었다.

    싸움이 벌어지기 전에 던져두었던 벌집은 까맣게 잊은 듯한 모습이었다.

    ‘우웩! 비위 상해!’

    인상을 잔뜩 구긴 정천우가 뒤로 몸을 뺐다.

    어쨌거나 사람 형태의 몬스터가 뜯어 먹히는 모습은 과히 보기 좋은 게 아니었다. 마치 자신의 몸이 뜯어 먹히는 기분에 모골이 송연해졌다.

    경공을 발휘해 몇 번 움직이기도 전에 정천우는 재빨리 몸을 숨겼다. 그러고는 식겁한 얼굴로 움직임을 멈추고 숨었다.

    ‘제기랄! 아주 쫙 갈렸구나!’

    올 때와는 달리 더 괴상한 몬스터들이 어슬렁거리고 있어 이동이 쉽지 않았다. 처음 보는 몬스터의 위압적인 몸뚱이와 흉측한 형상의 얼굴은 그의 전의(戰意)를 꺾어 놓기에 충분했다.

    우람한 덩치의 몬스터였는데 덩치가 조금 전 트롤을 쳐 죽인 몬스터보다 더 좋았다. 그런 주제에 한 손에는 무식하게 큰 도끼를 들었다. 한쪽 눈은 어디다가 팔아먹었는지 커다란 흉터만 남아 있었다.

    그래서 더 괴기스럽게 보였다.

    정천우는 인간의 몸에 소의 머리를 붙여 놓은 듯한 괴물이 지나가기를 숨죽여 기다렸다.

    ‘이건…….’

    가만히 숨을 죽이고 소 머리 몬스터가 이동하는 방향을 따라 눈을 돌리다가 뜻밖의 것을 발견했다.

    음령과(陰靈果).

    음한(陰寒) 계열의 무공을 익힌 사람에겐 최고의 영약이라고 하는 과일이었다.

    ‘저 괴물이 아니었다면 그냥 지나칠 뻔했어.’

    정천우는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노란색의 열매를 땄다.

    중원의 음령과와는 크기부터가 다르다.

    소문으로 들었던 음령과는 복숭아 정도의 크기라고 들었다. 그런데 그가 딴 음령과는 호두알보다도 작았다. 음령과의 특징인 고리 모양 꼭지가 아니었다면 발견하지 못했을 게 확실했다.

    감히 먹어 볼 생각 따윈 하지 않았다. 매 순간순간이 위험한 상황이었기에 운기조식에 할애할 시간적인 여유가 없었다.

    대충 눈에 보이는 만큼만 마법 배낭에 집어넣고 다시 경공을 발휘했다.

    몬스터 산맥을 내려올 즈음에는 정천우의 몸이 땀투성이로 변해 있었다. 육체적인 한계 때문이 아니라 과도하게 심력을 낭비하는 바람에 그리된 것이다.

    “천우 경! 어서 오십시오. 그래, 몬스터 산맥의 상황은 어떻습니까?”

    팽진우는 정천우가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안달 난 얼굴로 물었다.

    몬스터 산맥 아래까지 밀려난 중소형 몬스터들이 이 부근부터는 보이질 않는다. 그렇다는 것은 몬스터 산맥에 자리 잡은 놈들이 보통을 넘는다는 의미다.

    “괴상하게 생긴 놈들이었습니다. 덩치가 진우 경보다 훨씬 컸습니다. 작은 놈은 여덟 척…… 그러니까 대략 2.3m 정도의 키에 몸무게가 못해도 200kg은 넘어 보였습니다.”

    “이런…… 어떻게 생겼는지 설명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팽진우가 심각한 얼굴로 정천우를 쳐다보았다.

    일단 키와 몸무게를 들은 것만으로도 그의 표정이 심상치 않게 변했다. 대형 몬스터가 아니고서야 몸무게가 200kg이나 나갈 수 없기 때문이다.

    “제가 본 것은 세 종류였습니다. 한 놈은 몸이 크고, 송곳니가 대여섯 개나 입 밖으로 튀어나왔고…….”

    정천우의 추가 설명을 듣는 팽진우와 기사들의 표정이 어둡게 변해 갔다.

    정천우의 설명이 끝날 무렵에는 팽진우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지다 못해 건드리면 돌가루가 묻어날 지경이었다.

    “트롤과 오우거에 미노타우로스까지? 이것 참, 믿을 수가 없는 일입니다.”

    “돌아가시는 편이 나을 듯합니다. 지금의 인원으로 그놈들을 상대하려다가는 전멸을 면하기 어려울 듯합니다.”

    “저도 그러고 싶지만 그럴 수 없습니다. 이것은 주군께서 제게 내리신 지엄한 명령입니다.”

    “제가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그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정천우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지금은 고집을 피울 때가 아니다. 자신이 본 것은 고작 초입일 뿐이다.

    거기에서 본 것들만 해도 무시무시한 놈들이었다. 안으로 더 들어가면 뭐가 튀어나올지 예측할 수 없을 일이다.

    “주군께서 절 믿고 맡기신 임무입니다. 천우 경께서 하신 말씀을 믿지 못하는 게 아닙니다. 그러나 전해 들은 것만 가지고 주군께 보고한다는 것은 주군에 대한 기만입니다.”

    “그렇다고 저곳에 들어간다는 것은 자살행위일 뿐입니다.”

    “기사는 주군의 명령에 살고 명예와 긍지를 소중히 하는 존재입니다. 마음에 거리낌이 남아 있다면 그것은 저 자신이 더 용납할 수 없습니다. 천우 경께서는 굳이 저희와 함께 행동할 필요가 없습니다. 지금 알아 온 것만으로도 충분히 명을 지켰다고 할 수 있습니다.”

    “꼭 그래야만 하겠습니까?”

    정천우는 눈살을 찌푸렸다.

    이건 타협의 여지가 없었다. 무조건 그래야 한다고만 하니 답답한 노릇이었다.

    게다가 팽진우가 직접 눈으로 확인해야만 하는 이유치고는 너무나 빈약했다. 왜 굳이 직접 확인하려고 하는지 그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맹목적인 충성을 요구하는 게 기사도라는 걸 정천우는 모르고 있었다. 그러니 팽진우의 주장이 더 멍청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저는 그럼 빠지…….”

    정천우는 넌덜머리 난다는 듯이 고개를 흔들다가 제인과 눈이 마주쳤다.

    “혹시 제인 마법사님도 같이 가실 겁니까?”

    “……네. 영주님의 명령이니까요.”

    “하아, 할 수 없군요. 알겠습니다. 같이 가십시다.”

    “갑자기 왜 마음이 바뀐 건가요?”

    제인은 어째서 그의 마음이 바뀌었는지 궁금했다.

    자신과 눈이 마주친 순간, 갈등하는 듯하더니 함께하겠다고 말을 바꾸었다. 자신 때문에 그가 함께 가기로 마음먹었다고 생각하니 저도 모르게 달콤한 상상을 하게 되었다.

    “제가 아무리 막돼먹은 놈이라고 해도 여자를 버리는 짓은 하지 않습니다. 못 지키는 건…….”

    ‘두 번 할 짓이 못 되니까.’

    정천우는 뒷말을 삼키며 속으로만 생각했다.

    그녀는 중원에 두고 온 진미령이 아니다. 성격도, 생긴 것도 전혀 다르다.

    하지만 한 가지는 똑같다.

    바로 자신의 곁에 있다는 것!

    주변 사람을 지키기엔 자신의 능력이 부족하다는 걸 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여자를 놔두고 혼자 도망치고 싶지 않았다.

    중원에 있을 당시만 해도 자신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했던 정천우였지만 어느샌가 변하고 있었다. 그것은 중원에 대한 향수가 불러일으킨 진미령에 대한 그리움인지도 몰랐다.

    “천우 경…….”

    제인은 감동하고 말았다.

    뒷말을 듣지는 못했지만 그의 착잡한 눈빛이 무얼 말하려고 했는지 알 것 같았다. 찌푸려진 눈에 비친 눈빛에서 고뇌와 갈등…… 그리고 애틋함을 읽었다.

    저런 눈빛을 아무에게나 보낼 수는 없다. 특별한 의미를 지닌 사람에게나 보낼 수 있는 눈빛이었다.

    때로는 수백 마디의 말보다 동작 하나가, 혹은 스치듯 나누는 눈빛이 더 많은 말을 할 때가 있다.

    자신이 그에게 있어서 ‘아무나’가 아닌 ‘특별한 무언가’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의 서운함이 사르르 녹아내리면서 정천우를 바라보는 제인의 표정이 부드럽게 풀어졌다.

    “말하세요.”

    흐리멍덩한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제인에게 정천우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칫! 됐어요.”

    제인은 꿈꾸는 듯한 표정을 지우고 김샌다는 듯 톡 쏘아붙였다.

    정천우의 무덤덤한 반응에 기분이 상한 그녀는 왈칵 짜증이 났다. 몬스터 때문에 큰 소리를 낼 수 없어서 더 화가 났다. 그렇지 않았다면 단순히 투덜거리는 정도로 끝나지 않았을 일이었다.

    ‘확실히 저 남자는 무드가 없어. 뭐…… 그게 매력이기도 하지만…… 나 지금 뭐라는 거니?’

    혼자만의 상상 속에서 자신의 속마음을 깨달은 제인은 얼굴을 붉혔다. 자신의 마음이 정천우에게 가 있다는 걸 깨달아 버린 것이다.

    “어디 아프세요? 열이 있는 모양인데…….”

    “아…… 몰라요.”

    제인은 자신의 실태를 깨닫고 황급히 몸을 돌렸다.

    정천우를 앞에 두고서 혼자만의 상상에 빠졌다는 것을 이제야 겨우 인지한 것이다. 창피한 마음에 그녀는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정말 제멋대로라니까!”

    정천우는 가볍게 투덜거렸다.

    이름을 불러 놓고 화를 내다가, 부끄러운 기색을 보이고는 냉랭하게 가 버린다. 대체 무슨 귀신 놀음인지 그로서는 이해 불가능한 영역의 행동 패턴이다.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건가?’

    정천우는 멀어져 가는 제인의 뒷모습을 보며 자각하지 못하는 사이 혀를 차고 말았다.

    젊은 나이에 참으로 불쌍하게 됐다고 생각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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