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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대륙의 낭인무사-46화 (46/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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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hapter 12. 위험한 희망 (3)

    정천우의 흙 묻은 손이 바르르 떨렸다.

    그의 손바닥 위에는 사람의 형상을 닮은 삼(蔘)이 고운 자태를 드러내고 있었다.

    인형삼(人形蔘).

    중원의 무인이라면 눈이 회까닥 돌아 버릴 영약이다.

    “틀림없어! 진짜 인형삼이야! 내가 드디어 운이 풀리는 모양이야! 하늘이 날 버리지 않았어!”

    정천우는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기뻐했다.

    기쁨에 겨워 바보처럼 히죽거리던 정천우가 이내 숨을 골랐다. 그리고는 이내 고개를 갸웃거렸다.

    “듣던 것보다는 너무 작은데?”

    그랬다.

    손바닥 위에 놓인 인형삼은 겨우 새끼손가락 두 마디정도의 크기였다. 엄밀하게 말하면 두 마디보다도 작다.

    하지만 영약인 것만은 분명했다.

    “그래도 이게 어디야?”

    정천우는 고개를 갸웃거렸다가 이내 다시 환하게 웃으면서 숨을 골랐다.

    좋은 걸 아끼면 엿 된다. 있을 때 팔아 버리거나 먹어 치우는 게 남는 장사다.

    중원에 가기 위해선 서대륙의 키아벨리아스라는 놈을 만나야 하고 그를 만나려면 강해져야 한다. 그리고 빨리 강해지는 방법으로는 영약만 한 게 없다.

    숨을 가라앉힌 정천우가 조심스럽게 인형삼에 묻은 흙을 털어 내고 기운을 흡수하려 했다.

    인형삼의 뿌리부터 이파리까지 입에 쑤셔 넣고 정성껏 씹었다. 삼 특유의 쓴맛이 느껴졌지만 내공이 늘어날 거라는 생각을 하니 오히려 달콤하게 느껴졌다.

    “큽!”

    영약을 씹어 삼키던 정천우의 입에서 괴로운 신음이 튀어나왔다.

    영약의 기운을 흡수할 때 입을 벌리는 건 금기(禁忌)다. 영약이 품은 기운을 최대로 흡수하기 위해서다. 그걸 알면서도 신음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독(毒)!”

    정천우의 안색이 나빠졌다. 영약이 독성을 품고 있었다.

    하지만 딱히 독성이라고 단정 지을 순 없었다. 독이라기엔 뭔가 이상했다. 독은 몸 전체로 퍼져서 사람을 죽이는 것인데 이건 그렇지 않았다.

    음습하고도 끈적이는 종류의 기운이 단전을 공격해 왔다. 다행이라면 그 양이 많지 않아 생각보다 쉽게 체외로 배출할 수 있었다는 정도다.

    영약이라는 생각에 아무런 대비를 하지 않고 있어서 당했을 뿐, 독이라는 사실을 알고선 대수로울 것 없이 처리할 수 있었다.

    “푸우우!”

    정천우가 길게 숨을 내뿜으며 눈을 떴다. 십이주천을 끝낸 그의 안색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이게 무슨 경우야? 영약이 아니었던 거야? 좋다 말았잖아. 음…… 아니야…… 분명히 늘긴 늘었어. 이건 뭐지?”

    정천우가 심란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몸 상태를 확인했다. 분명히 내공이 늘어난 느낌은 있었다. 하지만 악소추가 얘기했던 것이나 중원의 무인들이 말했던 것과는 달랐다.

    일 갑자의 내공을 한순간에 얻을 수 있는 엄청난 영약이 바로 인형삼이라고 들었다. 그런데 일 갑자는커녕 내공이 늘어난 건지 구분도 되지 않을 만큼 효과가 미미했다.

    자신의 내공이 워낙 보잘것없어서 효과가 있다는 걸 알았을 뿐이다. 만약 내공을 40년 이상 쌓은 상태였다면 느끼지도 못할 만큼 미약한 양이 늘었다. 기껏해야 며칠 수련해서 얻을 수 있는 정도의 양이었다.

    “젠장! 내 복이 그렇…… 어어어?”

    짜증을 내던 정천우의 눈이 다시금 휘둥그레졌다.

    다섯 장짜리 이파리를 가진 풀줄기가 지천으로 깔렸다. 왠지 사기당한 느낌을 받으면서도 정천우가 땅을 팠다.

    “뭐 이렇게 개떡 같은 경우가 다 있어?”

    정천우는 기가 막힌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손바닥 위에 놓인 인형삼(?)을 내려다보았다. 조금 전에 먹었던 인형삼과 똑같은 크기의 인형삼이었다.

    정천우는 손바닥 위에 놓인 인형삼을 놓고 고민에 빠졌다.

    먹자니 효과가 영 아니올시다 싶고, 망할 놈의 이상한 기운이 침투해 짜증만 난다. 그렇다고 포기하자니 미약하기는 해도 효과가 있기는 했다.

    “젠장! 일단 챙기고 보자!”

    고민은 나중에 하자는 생각으로 정천우가 사방에 깔린 인형삼을 채취했다.

    주변 땅을 파내는 것마저 귀찮아서 그냥 줄기를 잡고 뽑아냈다. 잔뿌리가 다치거나 말거나 상관하지 않았다.

    워낙 많았으니까.

    “잠깐! 내가 왜 이러고 있지? 나중에 다시 오면 되잖아?”

    정천우는 자신의 멍청함을 탓하면서 이미 뽑아 둔 인형삼(?)을 마법 배낭에 대충 쑤셔 넣고 정찰대원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어딜 갔다가 오는 거죠?”

    제인이 정천우를 발견하고는 샐쭉한 표정을 지었다.

    “진우 경께 말씀드리고 다녀왔습니다.”

    “천우 경 때문에 알람 마법을 설치할 수가 없잖아요.”

    ‘알람 마법?’

    정천우는 그녀가 하는 말을 알아들 수 없었다.

    마법 자체가 생소하기도 했고, 그가 본 마법이라고는 불을 쏘거나 번개를 쏘는 게 고작이었다.

    “됐어요. ДЭЙБ…… 알람!”

    툴툴거리면서 정천우를 째려보던 제인은 순식간에 주문을 외웠다.

    정천우는 주변의 마나가 그녀의 몸으로 모이는 걸 느꼈다. 주변의 기운이 그녀에게 빨려 들었다가 손을 통해 한꺼번에 쏟아져 나갔다.

    “이제 밖으로 나가시면 안 돼요. 아셨죠?”

    제인은 새침한 표정을 짓고는 정천우에게 당부했다.

    뭐가 뭔지 알 순 없지만 나가지 않으면 그뿐이라고 생각한 정천우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제인 마법사님, 잠시만요.”

    막 몸을 돌리는 제인을 그가 불러 세웠다. 그러고는 마법 배낭에서 인형삼(?)을 하나 꺼냈다.

    “이게 뭔지 알고 계세요?”

    “그런 걸 왜 캐 오셨어요? 당장 버리세요.”

    제인이 눈살을 찌푸리며 못 볼 걸 봤다는 표정을 지었다. 질색하는 표정이 아니라 꺼림칙해하는 얼굴이었다. 그렇다는 것은 인형삼(?)의 정체를 알고 있다는 의미다.

    인형삼에 대해 확실하게 알고 싶었던 정천우는 그녀에게 한 걸음 더 다가갔다.

    “궁금해서 그런 겁니다. 이게 뭔지 알려 주세요.”

    “왜 궁금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건 일종의 독초라고 할 수 있어요. 물론 먹으면 곧바로 죽는다거나 하는 건 아니죠. 다만 그걸 먹으면 배탈이 심하게 나요. 이런 종류의 것들을 우리는 ‘헤따이’라고 불러요.”

    “헤따이? 무슨 이름이 그렇죠?”

    “그게…… 헤따이라는 걸 먹으면 화장실을 가게 되니까…… 그게…… 좀…….”

    제인은 지저분한 얘기를 하려니 마음이 내키지 않아 말을 늘였다.

    가뜩이나 정천우의 앞에 서면 감정 조절이 어려워졌다. 호감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자신의 감정을 스스로도 정의할 수 없었다. 그런 사람 앞에서 지저분한 얘기는 하고 싶지 않았다.

    “아! 대충 무슨 얘기인지 알겠습니다. 그런데 ‘헤따이’에 종류가 있어요?”

    정천우는 호기심을 드러냈다.

    이런 종류의 영약(?)이 더 있다면 나쁘지 않았으니까 말이다.

    “이건 배 속이 화끈해지면서 배탈이 나게 하는 ‘헤따이’고, 그 외에도 차가운 성질을 가진 게 따로 있어요.”

    “차가운 성질? 그것도 이렇게 뿌리인 건가요?”

    “아뇨, 그건 열매처럼 생겼어요. 그건 ‘헤따이 열매’, 지금 손에 들고 계신 건 ‘헤따이 뿌리’라고 불러요.”

    “헤따이 열매는 어디 가면 볼 수 있죠?”

    “몬스터 산맥 안에 들어서면 흔하게 볼 수 있어요. 몬스터들도 그건 안 건드려요. 먹었다 하면…… 그러니까요.”

    제인은 어색한 표정으로 자신의 배를 쓰다듬었다. 하고 싶어 하는 말이 무엇인지 금방 알 수 있었다.

    “그렇군요. 감사합니다.”

    정천우는 헤따이 열매가 흔하다는 얘기에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대충 얘기를 들어 보니 음기(陰氣)를 품은 영약(?)일 게 분명했다. 인형삼과 잘 배합하면 쓸 만한 물건이 나올 것도 같았다.

    아무런 의미도 없던 이번 정찰 임무에 의미가 부여되는 순간이었다.

    “이번에도…… 궁금한 건 그게 전부인가요?”

    “네.”

    “흥! 그래요. 잘 주무세요.”

    제인은 혹시나 하고 물었지만 정천우가 같은 대답을 하자 조금 풀어지려던 기분이 다시 급격히 상하고 말았다. 한차례 정천우를 째려본 제인은 바람 소리가 나도록 몸을 돌렸다.

    정천우는 자신에게 콧방귀를 날리고서 멀어져 가는 그녀의 등에 대고 중얼거렸다.

    “확실히 여자들은 알 수가 없다니까?”

    지금만 해도 그렇다. 처음에는 냉랭했다가 부끄러워했다가 활짝 웃더니 결국 화를 낸다.

    ‘여자는 조신한 맛이 있어야지!’

    정천우가 진미령을 떠올리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

    정찰대는 제인의 알람 마법에 더해 불침번을 세워 무사히 밤을 보낼 수 있었다.

    불을 피울 수 없어 몸이 굳어진 느낌이 들었지만 여름을 향해 가는 날씨 덕분에 추위에 떠는 일은 없었다.

    “자, 이제부터는 더욱 긴장해야 한다. 오크와 고블린들을 몰아낸 놈들이라면 만만치 않을 것이다. 모두 단단히 각오하도록! 알겠나!”

    팽진우가 휘하 기사들을 둘러보며 나직하지만 힘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기사들은 대답 대신에 고개를 끄덕이며 그와 눈을 마주쳤다. 명령을 충실히 따르겠다는 무언(無言)의 대답이었다.

    대충 짐 정리를 끝낸 정찰대원들은 서둘러 아침을 먹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인은 알람 마법을 해제하고 맨 뒤에 섰다.

    길을 나서기 전, 제인은 야영했던 장소에 심벌(Symbol) 마법을 심었다. 몬스터 산맥에 올라서면 지금처럼 칼로 나무를 쳐 내면서 이동할 수 없기에 위치를 표시해 둔 것이다.

    ‘헤따이 열매라고 했지?’

    정천우가 눈을 빛냈다.

    어느새 임무는 뒷전으로 밀려났다. 하기야 애초부터 정찰 임무 따윈 그의 머릿속에 들어 있지도 않았다.

    귀찮은 일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의외의 수확이 생길 것 같아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자신의 무공 수준을 빠르게 높일 기회다.

    사사삭!

    정천우가 딴생각에 히죽거리는 사이, 팽진우가 전진 명령을 내렸다.

    정천우는 망상에서 깨어나 팽진우와 어깨를 나란히 했다. 어젯밤에 아예 앞장서겠다고 말했더니 정말로 자기 옆에 배치한 것이다.

    정천우는 귀에 내공을 보내 몬스터의 기척을 잡아내는 데 집중했다.

    ‘처음 들어 보는 소리!’

    정천우는 전방에서 희미하게 들려오는 낯선 으르렁거림에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

    옆에서 뛰다시피 걸어가던 팽진우가 손을 들어 뒤따라오는 기사들에게 주의를 주었다.

    “무슨 일입니까?”

    거의 개미가 기어가는 듯한 목소리로 팽진우가 물었다. 주변에 몬스터가 보이지 않았기에 그나마 말로 하는 것이다.

    “처음 들어 보는 울음소리입니다.”

    “어떤 울음소리인지 알 수 있습니까?”

    “음…… 오크나 고블린은 아닙니다. 하지만 덩치가 커다란…… 차라리 제가 살펴보고 와서 얘기하도록 하겠습니다. 기다려 주십시오.”

    정천우에게는 몬스터의 울음소리를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확실한 건 지금까지 들은 적 없는 소리라는 것뿐이었다.

    소리를 표현하기가 곤란하니 눈으로 보고 와서 어떻게 생겼는지 설명하는 게 낫다고 판단했다.

    “차라리 다른 기사를 보내는 게 낫지 않을까 생각합니다만…….”

    “아닙니다. 한두 마리가 아니라서 위험합니다. 제가 직접 살펴보고 오는 편이 낫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조심해 주십시오.”

    팽진우는 떨떠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생각하기에 몬스터의 기척을 가장 잘 찾아내는 정천우가 혹시라도 발각된다면 정찰대 전체가 곤란해진다. 그래서 부하 중의 하나를 보낼까 했다.

    그러나 곰곰이 따져 보니 그게 더 위험할 것 같았다. 발각당하면 몇 마리나 될지 모르는 대형 몬스터가 난동을 부릴 테니까 말이다.

    차라리 감각이 좋은 정천우가 혼자 가서 보고 오는 게 덜 위험할 것 같았다.

    “다녀오겠습니다.”

    정천우는 시시각각 변하는 팽진우의 얼굴을 보고는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대충 예상할 수 있었다. 생각보다 지금 상황을 잘 이해하고 있는 것 같아 팽진우에 대한 그의 평가가 조금 상향 조정되었다.

    단전의 내공을 전신으로 퍼뜨려 몸을 가볍게 하고는 다리에 힘을 주었다. 용천혈(湧泉穴 : 발바닥에 위치하는 혈도)로 내공을 뿜어내며 땅을 박찼다.

    “허! 저런 움직임이 가능하다니…….”

    팽진우는 정천우가 궁신탄영(弓身彈影 : 몸을 활처럼 휘었다가 탄력을 이용해 튀어 나가는 경신술)의 수법으로 날아가는 모습을 보곤 감탄성을 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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