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대륙의 낭인무사-48화 (48/200)
  • # 48

    Chapter 13. 약속에 목숨을 걸다 (1)

    “준비를 단단히 하셔야 할 겁니다.”

    정천우는 스스로에게 다짐하듯 팽진우를 향해 경고했다.

    솔직히 무지막지한 몬스터들이 바글거리는 곳에 다시 들어가자니 겁부터 났다. 그러나 여자인 제인도 가겠다고 한다. 그리고 자신은 그런 제인을 지키겠다고 했다.

    이미 돌이키기에는 늦은 상황이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준비는 모두 끝났습니다.”

    “절대로 무리하지 않는다고 약속해 주십시오.”

    “그럴 일은 없습니다. 대형 몬스터가 분포된 위치만 확인하면 미련 없이 돌아가겠습니다.”

    “믿겠습니다.”

    팽진우의 이글거리는 눈을 바라보며 정천우가 다짐을 받아 냈다.

    주군에 대한 절대적인 충성은 높이 살 만하지만 그것이 과잉 충성으로 변하면 곤란하다.

    정천우는 나머지 기사들과 제인을 둘러보았다.

    ‘저 인간은 좀 불안한데…….’

    정천우가 열 맞춰 서 있는 잭슨을 쳐다보며 가볍게 눈살을 찌푸렸다.

    지난번 식당에서의 일 때문에 앙심을 품은 게 아니다. 잭슨은 지나치게 긴장하고 있어 보는 사람이 불안할 정도다.

    생각 같아선 놔두고 가자고 하고 싶지만 정찰대의 책임자는 팽진우지 자신이 아니다.

    ‘다른 사람의 발목을 잡지 말아야 할 텐데.’

    잭슨을 못마땅하게 쳐다보던 정천우가 몬스터 산맥을 향해 눈을 돌렸다.

    차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지만 어차피 해야 할 일이라면 최선을 다해야 한다.

    몇 차례 심호흡으로 긴장을 가라앉힌 정천우가 걸음을 옮겼다. 그는 아예 제일 선두에 섰다. 팽진우의 어설픈 기감으로는 어림도 없다고 생각해 직접 나섰다.

    몇몇 몬스터들은 대놓고 움직여도 자신의 기감이 걸리지 않는 경우가 있다. 그런 곳으로 들어가려면 확실한 사람이 앞장서는 게 맞다.

    “크워억! 커허헝…….”

    “캬웅! 크르륵! 크륵…….”

    몬스터 산맥의 초입일 뿐인데도 사방에서 몬스터가 울부짖는 소리로 시끄러웠다.

    정천우의 곁에 선 팽진우를 비롯해 뒤를 따라오는 기사들의 얼굴이 변했다. 그저 주군의 명령을 수행해야 한다는 생각에 뛰어든 걸 후회하는 눈빛이었다.

    그러나 이미 되돌릴 수 없는 일이 되었기에 그들은 도망치고 싶은 나약한 마음과 싸워야만 했다.

    스스슥, 스슥…….

    정천우가 이끄는 정찰대는 주변을 살피면서 최대한 조심스럽게 이동하려 애썼다.

    12명이 움직이는데도 미세하게 풀이 쓰러지는 소리만 날 뿐이다. 평소의 훈련이 어떠한지를 알 수 있는 모습이었다. 의외인 것은 마법사인 제인의 움직임도 나쁘지 않다는 점이다.

    ‘이것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잠시 제인을 살펴보던 정천우가 급하게 고개를 돌리면서 손을 들었다.

    ‘아까 그놈의 기척과 비슷한 느낌이야.’

    정천우의 얼굴에 그늘이 스치고 지나갔다.

    거대한 몸뚱이에 소의 머리를 하고 있던 몬스터.

    팽진우의 말에 따르면 미노타우로스라고 부르는 몬스터의 기척이 이랬다. 거의 움직임이 느껴지지 않는 괴상한 놈이었다. 아무렇게나 휘적휘적 걸어가는데도 소음이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오죽하면 정천우조차 놈이 10미터 안에 들어왔을 때에서야 눈치챘었다. 덕분에 ‘헤따이 열매’라 부르는 음령과를 발견할 수 있었지만 당시에는 몸에 소름이 돋아날 만큼 놀랐다.

    그런 미노타우로스의 기척이 느껴진다.

    정확히 어떤 느낌이냐고 묻는다면 딱히 할 말은 없다. 단지 느낌이 그렇다.

    육중한 뱀이 부드러운 땅을 지나가는 느낌? 억지로 표현하자면 그렇다고 해 둘 순 있다.

    긴장하는 정천우와 달리, 팽진우를 비롯한 정찰대원들은 의아한 얼굴로 변해 갔다. 아무것도 나타나지 않으니 답답한 것이다.

    “푸르륵…….”

    그 순간, 거짓말처럼 반대편에서 가래 끓는 듯한 소리를 내며 미노타우로스가 나타났다.

    정찰대원들의 얼굴에 경악이 스치고 지나갔다. 대형 몬스터들이 무섭다는 말만 들었을 뿐이다. 어째서 대형 몬스터들을 숲 속의 폭군이라 부르는지 이제야 실감하는 그들이었다.

    아무런 기척도 없이 움직이는 모습은 흡사 사신(死神)과도 같았다. 저런 식으로 이동하다가 먹이를 발견하면 숨겨진 잔혹성과 난폭성을 여과 없이 드러내며 사냥할 것이다.

    그들은 이제야 깨달았다.

    이제부턴 말은커녕 작은 동작 하나까지도 조심해야 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푸륵, 푸르륵…….”

    미노타우로스는 거대한 도끼를 든 채 갑자기 자세를 낮추며 기어갔다. 무슨 짓거리를 벌이는 것인지 예상조차 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미노타우로스는 잠시 그 자세로 멈추었다가 이내 천천히 풀숲으로 녹아들었다. 거대한 덩치와 어울리지 않는 민첩한 행동이었다. 대체 어떻게 움직이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풀의 움직임으로만 보면 무척이나 작은 동물처럼 느껴졌다.

    ‘징그러운 놈! 저런 놈이 많다면 곤란한데…….’

    정천우는 소름이 돋는 것을 겨우 참아 냈다.

    방금 본 놈은 아까 마주쳤던 놈이 아니다. 음령과를 찾을 당시에 보았던 놈은 애꾸였다. 그러나 지금 지나간 놈은 두 눈이 멀쩡했다.

    저처럼 무시무시한 놈이 한둘이 아니라는 증거다.

    기다리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고 판단한 정천우가 내공을 귀에 집중한 채 바닥에 귀를 붙였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천리지청술이었다.

    미노타우로스와 같이 지극히 적은 소음으로 움직이는 육중한 놈에게는 정석대로 하는 게 더 확실하다. 소음은 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육중한 무게에서 오는 진동은 속일 수 없다.

    ‘빨라! 어떻게 이런 식으로 움직일 수 있는 거지?’

    미노타우로스가 이동하면서 발생시킨 흐릿한 진동은 빠른 속도로 이어졌다. 정천우는 아무런 기척도 없이 이런 속도를 내는 미노타우로스에게 순수하게 감탄했다.

    다행히 미노타우로스는 멀어지고 있었다. 주변에 어슬렁거리는 몬스터의 육중한 진동이 느껴졌지만 그가 기척을 파악하고 있기에 상관없었다.

    정천우는 팽진우에게 손바닥을 들어 보였다. 그러고는 손가락으로 미노타우로스가 이동한 방향을 가리키고 다시 손바닥을 내보였다.

    혼자 다녀오겠다는 의미다.

    팽진우는 정천우의 뜻을 알아채고서는 고개를 끄덕여 동의해 주었다.

    스스스…….

    정천우의 움직임이 한 마리의 뱀처럼 미끄러지듯 움직였다. 미노타우로스처럼 기척이 전혀 느껴지지 않을 정도는 아니지만 거의 비슷하게 흉내 내고 있었다.

    거칠고 삭막한 낭인의 삶에서 얻은 움직임이다.

    기사들은 그의 움직임에 속으로 감탄하며 주변을 경계했다. 어디서 뭐가 튀어나올지 몰랐다. 정천우가 자리를 비웠기에 더욱 세심한 주의가 필요했다.

    정천우는 미노타우로스가 남긴 미세한 흔적을 따라갔다.

    놈의 움직임은 사냥감을 노리는 맹수의 그것과 닮아 있었다. 무언가 공격 대상을 포착했다는 의미다.

    “푸륵! 푸르륵! 므워억! 므웍!”

    두둑! 우적!

    “크와악! 커흥!”

    정천우가 놈의 흔적을 따라가는데, 앞에서 소란이 일어났다. 그는 무슨 일인가 싶어 더욱 빠르게 이동했다.

    풀숲의 끝에는 제법 널찍한 공터가 내려다보였다.

    그곳에서는 학살이 벌어지고 있었다.

    미노타우로스가 트롤을 마구잡이로 공격해 대는 중이었다. 엄청난 재생력을 가진 트롤이지만 지금은 아무런 힘도 쓰지 못하고 있었다. 미노타우로스의 도끼에 걸리는 족족 절단 나서는 숨통이 끊겼다.

    ‘양 떼 속을 휘젓는 호랑이와 같구나!’

    정천우는 질린 얼굴로 미노타우로스의 위용에 감탄하고 말았다.

    이건 마치 중원의 고수를 보는 것 같았다. 절정의 고수가 삼류 무사들 속에서 날뛰는 모습과 흡사했다.

    트롤이 생명을 도외시하고 달려들었지만 가까이 다가가기도 전에 허무하게 죽어 나갔다. 그 끔찍한 모습에 혀를 내두르던 정천우는 주변을 훑어보다가 인상이 굳어졌다.

    ‘정찰은 미친 짓이야!’

    핏기가 빠져나간 얼굴은 그는 바보처럼 입이 쩍 벌어졌다.

    미노타우로스가 난동을 부리는 트롤의 서식지 주변으로 몬스터들이 몰려들었다.

    그중 한 놈이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며 입에서 침을 질질 흘리고 있었다. 아까 정찰하다가 나무를 들고 트롤과 싸우던 몬스터였다.

    팽진우의 말에 따르면 그것은 오우거라는 놈이었다. 더 끔찍한 것은 머리가 둘 달린 오우거까지 있다는 점이다.

    그런 와중에도 미노타우로스는 거침없이 트롤을 학살해 나가고 있었다. 주변에서 지켜보는 놈들 따윈 안중에도 없다는 태도였다.

    정천우는 몸을 돌려 왔던 길로 되돌아갔다.

    위험성을 알리고 무조건 빠져나가야 한다. 영주의 명령이고 지랄이고, 이건 미친 짓이다. 정찰 따윌 할 때가 아니다.

    팽진우에게 돌아가 무조건 귀환하는 것만이 살길이다.

    몬스터 산맥 전체가 대형 몬스터 천지가 되었으니 정찰은 의미가 없다. 이런 상황에서는 군대를 조직해 싸우는 것만이 최선이다.

    정천우가 빠른 속도로 되돌아갔을 때는 더욱 기가 막힌 상황이 벌어진 다음이었다.

    ‘뭐 이런 개 같은 경우가 다 있어?’

    정천우의 움직임이 그대로 멈춰졌다.

    정찰대가 몸을 숨긴 장소는 언덕 밑의 풀숲이었다. 몸을 숨기기에 최적의 장소였다.

    그러나 하필이면 언덕 위에서 미노타우로스와 머리가 둘 달린 오우거가 대치하고 있었다. 아마도 트롤을 학살하는 소리를 듣고 다가오던 중에 마주친 모양이었다.

    서로가 만만치 않은 상대라고 느꼈는지 노려보기만 할 뿐, 숨소리조차 내지 않고 있었다.

    그래서였을까?

    정찰대원들은 자신들의 머리 위에서 두 마리의 대형 몬스터가 대치하고 있다는 사실도 모르는 것 같았다. 심지어는 주변에 귀를 기울이는 기사들도 있었다.

    ‘재수 없으면 다 죽어!’

    정천우는 어떻게 해야 이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 고민해 보았다.

    불안한 눈으로 사방을 둘러보는 제인의 모습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정천우는 그녀의 모습을 발견하고서야 방법을 찾을 수 있었다.

    단전의 내공을 끌어올리며 제인에게 정신을 집중했다. 전음을 경험한 사람은 그녀뿐이다.

    [제인 마법사님!]

    정천우는 그녀가 놀라지 않도록 최대한 부드러운 음성으로 전음을 보냈다.

    멀리서 흠칫하는 제인의 모습이 보였다. 그녀는 전음을 듣고 사방을 둘러보며 정천우를 찾았다. 그러나 대형 몬스터 때문에 정천우가 모습을 드러낼 수 없으니 하나 마나 한 행동이었다.

    [절 찾지 마세요. 지금 모습을 드러낼 수 없어요. 제 말 잘 들리시면 고개 좀 끄덕여 주세요.]

    그는 혹시라도 제인에게 보내는 전음이 제대로 들리지 않을까 걱정스러웠다. 거리가 너무 멀어서 자신의 부족한 내공이 못내 마음에 걸린 탓이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제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제인 마법사님, 위에 대형 몬스터 두 마리가 대치하고 있어요. 서로 견제하는 중인지 소리조차 내지 않는 중입니다.]

    제인의 고개가 위로 들리는 모습이 보였다. 하지만 그녀나 다른 기사들이 숨은 위치에서는 몬스터를 볼 수 없었다.

    [그 위치에선 보이지 않으니까 굳이 찾으려고 하지 마세요. 진우 경과 다른 기사들에게 메시지 마법으로 위험을 알려 주세요. 꼼짝도 하지 말고 있으라고요. 아셨죠?]

    정천우는 전음을 보내면서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만약 그녀가 없었더라면 위험을 알릴 방법이 없었을 것이다. 전음을 처음 겪는 사람들은 생소함에 놀라 기척을 흘렸을 테니까 말이다.

    ‘후우…… 이제 저놈들이 조용히 물러가는 걸 기다리기만 하면 되겠어.’

    정천우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몸을 더욱 낮추었다. 대치하는 두 몬스터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서다.

    “에취!”

    안도하며 몸을 낮추던 정천우의 귀에 인간의 재채기 소리가 들려왔다.

    그의 얼굴이 흉하게 일그러졌다.

    “썅! 저 병신 같은 새끼! 예감이 더럽더라니! 내가 사고 칠 줄 알았어!”

    정천우가 몸을 일으키며 쌍욕을 내뱉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