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 리터너-46화 (46/118)
  • [■] 몸으로 아는 게 빠르겠지! [■]

    ─────

    의문.

    시작은 의문이었다.

    NDF는 강해졌다.

    이지혁의 끊임없는 괴롭힘과 맞춤식 교육이 있기는 했지만, 그것만으로는 이만큼 강해질 수 없었을 것이다.

    NDF와 다른 능력자들의 차이를 진정으로 벌려놓은 것은 이지혁의 흑마력 주입이었다.

    흑마력.

    어둠의 마나.

    마계를 구성하는 근원이자, 인간의 마이너스 에너지를 원료 삼아 만들어지는 마나.

    처음 흑마력을 주입해 본 것은 과연 이들이 자신의 흑마력을 받아들여 강화될 수 있을까 궁금했기 때문이다.

    좀 더 빠르고 효율적으로 이들을 강하게 만들기 위해 여러 가지 방법을 강구하다가 나온 발상이었다.

    그리고 그 발상의 결과는 이지혁의 예상을 뛰어넘었다.

    이지혁의 흑마력이 능력자들의 에테르와 결합하여 상승작용을 일으킨 것이다.

    그저 단순히 흑마력으로 육체를 강화할 수 있는지를 알아볼 심산이었는데, 뜻밖의 요소를 찾아낸 것이다.

    예전의 힘을 잃어버린 이지혁에게 이것은 매우 흥미 있는 요소였다.

    잘 활용만 한다면 과거까지는 몰라도 어느 정도는 힘을 되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마력과 에테르의 융합을 시도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가 벨트레체와의 싸움에서 나타났다.

    이지혁이 벨트레체를 거의 쓰러뜨릴 뻔했던 마지막 일격이 에테르와 흑마력을 융합하여 만들어낸, 이지혁의 새로운 무기였다.

    그 파괴력은 예상하던 이상의 효과가 있었지만, 이지혁의 육체를 거의 망가뜨릴 지경까지 이르게 만들었다.

    그야말로 양날의 검.

    하지만 이지혁은 또 하나의 의문에 빠지게 되었다.

    외부에서 마력과 에테르를 융합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자신의 내부에서 마력과 에테르는 융합되지 않았다는 뜻이 아닐까?

    그럼…….

    이지혁이 다른 이들처럼 육체 내에서 마력과 에테르를 융합하게 된다면 그 결과는 어떠할 것인가.

    "낄낄낄."

    모른다.

    이지혁조차 알 수 없다.

    시도조차 해볼 수 없었다.

    다른 요원들은 이지혁이 그들을 통제할 수 있기에 적절한 양의 마나를 나눠 주입할 수 있었다. 그들이 감당할 수 있을 정도로만 말이다.

    하지만 이지혁은 다르다.

    이지혁의 내부에 머무르는 마나는 그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많았다.

    그리고 그의 육체 안에 담긴 에테르의 양도 처음 지구로 돌아왔을 때에 비하면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났다.

    만약 이지혁이 베라프에 다녀와 마법사가 되지 않았더라면 지금쯤은 이미 능력자로 각성했을 것이라 생각될 만큼의 에테르가 몸 안에 쌓여 있었다.

    그럼 이 두 가지 힘이 융합되었을 때는 어떤 일이 벌어질까?

    '죽겠지.'

    그 과정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결과는 빤했다.

    몸이 버틸 수가 없다.

    극소량의 흑마력을 융합시킨 NDF의 요원들도 극도의 고통을 느끼며 육체의 파괴를 경험했다.

    그런데 이지혁이 가진 모든 마나를 융합시킨다면 그 결과야 안 봐도 빤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그 모든 일들이 정신적으로 어떤 영향을 미칠지도 알 수 없었다.

    까딱하여 폭주라도 하게 된다면 지구를 이지혁의 손으로 파괴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실험조차 해볼 수 없었다.

    그저 이론적으로만 생각해 왔을 뿐.

    그러나 이제는 더 미룰 수 없었다.

    이제는 이지혁이 지구를 부수든, 아니면 델카란이 지구를 부수든, 둘 다 사라지든… 셋 중 하나의 선택지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알 게 뭐냐."

    이지혁이 가라앉은 눈으로 델카란을 바라보았다.

    그는 지금 더없이 냉정했다.

    죽음을 앞두고 일생일대의 도박을 하는 입장이건만, 그의 마음은 잔잔한 호수처럼 고요하기만 했다.

    고오오오.

    이지혁의 몸에서 뿜어져 나온 마나가 주위를 돌기 시작한다.

    육체 내부에서 융합하는 방법도 있겠지만, 아직 해본 적이 없다.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다른 NDF 요원들을 강화시키듯 몸에서 뽑아낸 마나를 외부에서 밀어 넣으며 에테르와 합치는 것이다.

    "후우우……."

    이지혁의 입에서 낮은 심호흡이 흘러나왔다.

    죽기밖에 더하겠냐!

    몸 주위를 돌던 마나가 이지혁의 육체 안으로 밀려 들어간다.

    "끅!"

    이지혁의 눈에 핏발이 섰다.

    마나가 전신을 질주하며 이지혁의 육체에 자리하고 있던 에테르와 뭉쳐지기 시작했다.

    귀에서 천둥이 터지고, 눈앞에서 불꽃이 작렬한다.

    하지만 의외로 그 고통은 그리 크지 않았다.

    역치가 있기 때문인가?

    방금 인간이 겪을 수 있는 고통의 극한을 겪었기 때문인지, 우려하던 고통은 나름 견딜 만했다.

    견딜 수 없는 것은…….

    "어이, 서아영."

    "네?"

    "흑마력 주입하면 막 화나고, 증오스럽고, 열 받아서 파괴 본능이 마구 끓어오르는 느낌이라고 하지 않았나?"

    "네."

    "음… 그래, 그렇다는 말이지?"

    "뭐가 잘못됐나요? 혹시 제어가 안 돼요?"

    "음, 그런 게 아니라……."

    이지혁이 어깨를 으쓱했다.

    "아무렇지도 않은데?"

    "…네?"

    서아영도, 다른 요원들도 이상하다는 눈으로 이지혁을 바라보았다.

    "흐으음……."

    뭐, 그리 놀랄 일이 아니잖아.

    나는 원래 흑마력에 쩔어 있었으니까.

    만성 흑마력 중독증 정도로 병명을 정하면 될 일이고… 무엇보다 중요한 건 하나지.

    흑마력을 주입했을 때 다른 이들이 겪는 정신적 변화가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은 둘 중 하나였다.

    하나는 이지혁의 뇌가 그런 정신적인 변화를 참아낼 수 있을 만큼 강건하다는 건데,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니…….

    '그냥 미친 거지.'

    항상 그런 파괴적 본능을 만성적으로 느끼고 살고 있거나, 다른 사람들과 다른 것을 느끼고 있다는 의미였다.

    "확실히 나 미쳤구나."

    그게 어느 쪽이든 정상적인 상태는 아니었다.

    아마도 제정신이 아닐 거라고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이리 확실해지니 기분이 씁쓸하고 더럽다.

    "쯧."

    이지혁이 어깨를 으쓱하고는 델카란을 바라보았다.

    "적절한 화풀이 대상이 있어서 다행이야. 아니, 어쩌면 나 지금 기분이 더러운 게 쟤들 말처럼 이유 없이 증오가 끓어올라서 그런 걸 수도 있잖아? 그지?"

    "무슨 개소리를 지껄이는 건지 모르겠군."

    델카란이 날카로운 눈으로 이지혁을 노려보았다.

    "기다릴 만큼 기다려 줬다."

    "기다려 준 게 아니라 움직일 수 없던 거지. 내가 무슨 짓을 할지 모르니까. 안 그래?"

    "…마음대로 생각하시지."

    "큭큭큭큭."

    이지혁이 입고리를 말아 올렸다.

    저 귀여운 마왕 놈을 어떻게 죽여야 잘 죽였다고 머나먼 마계까지 소문이 퍼질 것인가.

    아주 갈가리 찢어놓아야 어설픈 마왕 놈들이 머리를 들이밀지 않겠지?

    이지혁이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델카란에게 걸어갔다.

    '다가와?'

    델카란은 위화감을 느꼈다.

    이지혁은 마도사.

    마도사는 필연적으로 거리가 필요한 존재다. 아무리 완벽한 마도사라 하더라도 영창과 수인은 필요하고, 그 단계를 뛰어넘은 극한의 마도사라 하더라도 마력을 방출, 변환하여 날리기까지 시간이 소모된다.

    그 시간이 짧으면 짧을수록 위대한 마법사인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그 시간이 짧아도 상대하는 이 역시 수준이 높다면 얼마든지 그 틈을 파고들 수 있다.

    이지혁도 그것을 알기에 몬스터를 부리고 NDF를 육성하여 자기 주변에 두며 주문을 영창하는 텀을 메우는 것 아닌가.

    그런데 되레 간격을 좁힌다?

    "무슨 짓을 하려는 거지?"

    델카란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이지혁을 향해 마주 걸어갔다.

    저벅.

    둘의 거리가 점점 더 가까워져 갔다.

    저벅.

    동시에 세상이 조용한 침묵으로 물들어갔다.

    이지혁과 델카란이 마침내 손만 뻗으면 서로 닿을 만큼 가까워졌다.

    그리고 다시 한 걸음.

    델카란과 이지혁의 얼굴이 서로 맞닿을 만큼 가까워졌다.

    "미친 건가?"

    델카란이 이죽이자 이지혁이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웃었다.

    "너도 메에지 계열 아닌가?"

    "그러나 나는 마족이지. 나약해 빠진 육체를 가진 너희 인간이 아니라."

    "그럼 좋아해야 하는 것 아냐? 내가 이렇게 네가 유리하도록 도와줬으니까."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군."

    쉬익, 쉬익.

    델카란의 몸에 돋아난 뱀의 머리들이 위협적으로 혀를 날름거렸다.

    푸른빛 육체에 붉은 지렁이 수백 마리가 돌아다니는 듯 징그러운 광경이지만, 이지혁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음,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둘의 시선이 불꽃을 피울 것처럼 격렬하게 얽혀들었다.

    "나는 아무래도 강화계 능력자인 모양이더라고."

    "으음?"

    "좀 이상하다고 생각했어. 몸뚱아리가 좀 딱딱하더라? 지금까지는 이상하다고 생각 안 했지. 예전에는 몸이 재생하는 게 너무 당연한 거였으니까. 그러니 보통 인간의 몸으로 일격을 맞았을 때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 수가 있나. 그런데 돌이켜 생각해 보니까 말이야……."

    이지혁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내가 강화 능력자가 아니었으면 지금쯤 죽어도 몇 번은 더 죽었겠더라고. 그래서 알게 됐지. 나는 마나를 사용하는 마도사이자, 강화계 능력자라는 걸 말이야."

    능력자가 정확히 뭘 의미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델카란은 이지혁의 말을 대충이나마 알아들었다.

    그러니까 이지혁의 육체가 강화되었다?

    "겨우 그런 걸 믿는 건가?"

    "음, 이해를 못하는 모양인데……."

    서아영은 조금의 흑마력을 주입 받는 것만으로 이전의 다섯 배가 넘는 화력을 보유할 수 있었다. 박성찬은 약간의 흑마력만으로 마왕의 진심이 담긴 공격을 받고도 살아남을 수 있는 굳건한 방어력을 손에 넣었다.

    그럼 이지혁의 에테르가 마력으로 강화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그냥……."

    이지혁이 고개를 한 번 까딱하다니 몸을 뒤틀었다.

    "몸으로 아는 게 빠르겠지!"

    콰앙!

    그 순간, 이지혁의 라이트 스트레이트가 델카란의 오른쪽 얼굴에 작렬했다.

    폭음과 함께 델카란의 육체가 한 줄기 유성이 되어 바닥으로 처박혔다.

    콰콰콰콰콰!

    델카란의 육체는 멈추지 않고 계속 뒤로 날아가며 런던의 바닥에 긴 크레이터를 만들어냈다.

    "흐음?"

    이지혁이 되레 그 광경을 보고 몸을 움찔 떨었다.

    "와, 쩐다."

    이 정도일 줄은 몰랐는데…….

    아무리 델카란이 육체형 마왕이 아니라 하더라도 저렇게 베이브 루스 풀스윙을 처맞은 공처럼 날아가다니.

    "와!"

    뭔가 한이 풀리는 느낌이었다.

    마나를 손에 넣어 강해지기는 했지만, 과거 베라프를 떠돌던 시절에 얼마나 많은 육체 기술들을 배웠던가.

    기사가 되려 했지만 이류에서 끝났고…….

    무인이 되려 했지만 이류에서 멈췄다.

    레인저가 되려 했지만 채 이류도 되지 못했고, 무투가가 되려 해도 삼류를 벗어나지 못했다.

    마나가 없으니까.

    보통의 방법으로는 마나를 모을 수 없던 이지혁은 수많은 기술들을 익혔지만, 그 기술들을 강화시켜 줄 마나를 활용할 수 없었다.

    후에 흑마력을 손에 넣고 나서도 어떻게든 활용을 해보려 했지만, 일반적인 마나와 암흑 마나는 그 성질이 전혀 달랐기에 육체형 기술에는 어울리지 않았다.

    하지만 마침내!

    이 세계로 돌아와 에테르를 활용할 수 있게 된 이후에야 이지혁은 육체로 구사하는 기술들을 쓸 만한 발판을 찾아낸 것이다.

    '좀 짧은 게 아쉽지만 말이지.'

    어떤 의미에서는 긴 고난의 한풀이를 할 수 있는 시간이 온 것이다.

    "죽었어?"

    이지혁이 키득키득 웃으며 델카란이 처박힌 곳을 향해 다가갔다.

    콰아아아아아!

    그리고 그 순간, 델카란이 파묻힌 크레이터 안에서 수백 줄기의 뱀들이 이지혁을 향해 날아들었다.

    * * *

    "아, 뜨거라!"

    이지혁은 자신에게 날아드는 수십 마리 뱀의 형상을 보며 몸을 허공으로 띄워 올렸다.

    '가볍게 피…….'

    쿠웅!

    바닥에 거대한 크레이터가 생기면서 이지혁의 몸이 가공할 속도로 허공으로 솟아올랐다.

    가볍게란 말이다! 가볍게!

    내 몸뚱아리지만, 정도를 모르냐!

    생각은 '가볍게'였지만, 결코 가볍지 않은 하이 점프가 되어버렸다. 아직 이 강화된 육체에 대한 정밀한 컨트롤이 되지 않는다.

    그리고 델카란은 이지혁이 만든 빈틈을 놓치지 않았다.

    고오오오!

    스쳐 지나간 뱀들이 방향을 선회하더니, 허공의 이지혁을 향해 다시 날아들었다.

    "헐……."

    전투 시 육체를 통제할 수 없는 허공으로 몸을 띄우는 것은 금기 중 금기다. 수많은 기사들이 이지혁처럼 허공으로 몸을 띄웠다가 수도 없이 농락당하며 죽지 않았던가.

    바로 이지혁에게 말이다.

    그런데 그런 기사들을 보며 비웃던 이지혁이 지금 똑같은 짓을 하고 있는 것이다.

    '와, 이게 몸이 이렇게 되면 이러고 싶어지는구나.'

    대체 왜 그리 멍청한 짓을 하는가 싶었더니, 근력이 강화되면 옆으로 피하는 것보다 위로 피하는 것이 더 수월해진다. 그러다 보니 자신도 모르게 수직 점프를 하게 되는 것이었다.

    이지혁은 그동안 멍청하다고 비웃던 기사들에게 마음속으로 사과했다.

    형이 몰랐지.

    말을 하지그랬어. 그럼 비웃지는 않았을 텐데.

    당사자들이 들으면 쌍욕을 퍼부었을 말을 태연하게 생각하는 이지혁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잡생각할 때가 아니지.

    저걸 피해야 하는데, 음…….

    비슷한 경우에 기사들이 어떻게 피했더라?

    이지혁이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며 머리를 굴렸지만,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은 허공에서 그의 마법을 맞고 죽어가는 기사들뿐이었다.

    어라?

    이러면 곤란한데?

    나, 저거 정면으로 맞아야 하는 건가?

    뼈와 살이 분해될 것 같은데?

    이지혁은 순간적으로 일이 잘못되어 간다는 것을 느끼고는 최선을 다해 소리를 질렀다.

    "아페에에엘!"

    아래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아펠드리체가 한숨을 푹 쉬고는 수인을 맺었다.

    "언제쯤 믿음직해질까……."

    이지혁을 바라보는 그녀의 기분은 언제나 기묘했다. 그가 이루어낸 것에 대한 존중은 확실하게 있다. 그렇기에 그가 무언가를 해내는 사람이라는 이미지도 있다.

    그런데 왜 하는 꼴을 보고 있으면 믿음직스럽지가 않은가!

    그럼 차라리 결과라도 나쁘던가.

    저런 꼴로 또 결과는 내놓으니 도무지 어떻게 정의를 할 수가 없는 것이다.

    "휴……."

    아펠드리체는 드래곤답지 않게 한숨을 쉬고는 손을 뻗었다.

    우웅!

    간단한 수인으로 만들어낸 충격파가 이지혁을 향해 날아들었다.

    "아니!"

    이지혁이 자신에게 날아드는 충격파를 보며 실드를 쳤다.

    투웅!

    충격파에 맞은 이지혁이 배트로 후려친 야구공처럼 부웅, 날아가며 아래에서 솟구치는 뱀들을 피해 바닥에 착지했다.

    "좀 더 온건한 방법은 없는 거냐! 이 폭력 도마뱀아!"

    "…해줘도."

    아펠드리체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여하튼 저 사람과 함께 전투를 하게 되면 상황이 언제나 이상해진다.

    적으로 싸우든 동료로 싸우든 이지혁과 함께 싸우다 보면 긴장감이라는 것이 제대로 서기가 어렵다.

    '마왕이랑 싸우는 중이지?'

    이지혁 이전에 마왕이 베라프에 강림했을 때는 정말 세계 멸망적인 분위기가 났다.

    숨도 쉬기 힘든 압박감 속에 모두가 서로를 도와가며 생존하기 위해서 악을 쓰며 살았다.

    그런데 지금 똑같은 마왕이 강림했는데…….

    "야, 이 뱀새끼야! 사람이 좀 멋지게 떠올랐으면 감상도 해주고 해야지! 문화생활이 뭔지는 아냐!"

    아펠드리체의 얼굴이 눈에 보이게 굳어졌다.

    지금, 같은 상황인데…….

    왜 이리 분위기가 다른가.

    저 사람은 진지함이라는 단어가 뭔지를 알까?

    '나도 풀렸네.'

    지금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그녀도 그리 긴장을 하고 있지 않다는 뜻이리라.

    아펠드리체는 스스로 반성하며 고개를 저었다.

    '여하튼 못 말려.'

    아펠드리체의 눈에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델카란에게 걸어가는 이지혁이 보였다.

    "낄낄낄."

    이지혁이 목을 좌우로 흔들며, 말 그대로 양아치 같은 자세로 껄렁껄렁 델카란에게 다가갔다.

    "…쩐다."

    최정훈이 그런 이지혁을 보며 몸을 떨었다.

    뭘까?

    이 이상한 기분은?

    안 맞는 옷을 입고 있던 사람이 그 옷을 벗어던지고 제대로 자신에게 맞춘 옷을 입은 걸 보는 느낌이었다.

    "왜 이리……."

    서아영이 보조를 맞췄다.

    "쩔게 잘 어울리네요."

    "그렇죠."

    그래, 그거다.

    최정훈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정신없이 끄덕였다.

    사실 그동안 알게 모르게 위화감이 있었다.

    하는 짓은 생양아치인 인간이 멀리서 마법이나 뿅뿅 쏘아대고 있으니, 보는 사람이 기분이 이상한 게 당연하지.

    최정훈의 머리에 처음 이지혁의 싸우는 모습이 강렬하게 남아있던 것도 한몫했을 것이다.

    처음 고블린을 마운트로 패 죽이던 모습과 빌더 몽키를 격투기로 때려잡던 모습이 머릿속에 선한데, 자꾸 뒤에서 마법으로 깔짝대는 모습만 보다 보니 위화감이 극심했던 것이다.

    성격으로 보나, 하는 짓으로 보나 최전방으로 달려가서 히트 앤 런으로 사람 속을 뒤집어놓는 전투 방식을 고수할 것 같은 사람 아닌가.

    최정훈의 머리에 있던 이미지와 실제 이지혁이 지금 맞아떨어지고 있었다.

    저 양아치같이 건들대는 걸음걸이를 보라.

    "히히히힛."

    그리고 이지혁도 신이 난 것 같았다.

    "일어났어?"

    비틀대며 몸을 일으킨 델카란이 타오를 것처럼 일렁이는 눈으로 이지혁을 노려보았다.

    "어구, 무셔라."

    저놈의 입은 한시도 쉬지 않았다.

    델카란이 씹어뱉는 듯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네놈!"

    "어이구."

    이지혁이 낄낄대기 시작했다.

    "목소리 보소? 잡아먹을 기세네? 지금까지의 여유는 다 어디 가셨나?"

    "으으!"

    델카란은 당황하는 중이었다.

    이지혁에게 얻어맞은 일격에 대한 대미지가 완전히 회복되지 않고 있었다.

    그저 평범한 라이트스트레이트였을 뿐인데, 격중하는 순간 머리가 날아가 버리는 줄 알았다.

    '무슨 파괴력이지?'

    그 역시 마왕.

    지금의 위치에 오르기 전까지 수많은 전투를 겪었고, 마왕의 자리에 오르고서도 수많은 전투를 겪어왔다. 그중에는 육체를 극한까지 활용하는 마족들도 많았다. 그들의 육체가 뿜어내는 파괴력은 델카란에게도 위협적이었다.

    하지만 그런 그들의 공격도 지금 이지혁의 일격만큼 델카란을 당혹시키기는 못했다.

    이지혁이 육체를 이용한 공격을 했다는 것에 놀란 것이 아니라 예상도 할 수 없던 그 파괴력에 놀란 것이다.

    욱씬욱씬.

    채 복구되지 못한 볼이 쑤셔온다. 머리가 어질어질하다.

    "잘도!"

    델카란이 분노에 차 이지혁을 노려보았다. 이지혁은 능글맞게 웃으며 말했다.

    "당황스럽지?"

    "……."

    "그럴 거야. 나도 당황스러우니까."

    거짓말이 아니다.

    이지혁도 지금 조금 당황스러워하고 있는 중이었다. 간단한 발상이었는데 그 효과가 이 정도일 줄은 그도 몰랐으니까.

    어찌어찌 저 마왕 놈 하나는 상대할 수 있는 힘이 생기면 좋겠다고 생각한 정도였지…….

    '설마 이 정도일 줄이야.'

    뭔가 주체가 안 되는 기분이었다.

    육체 안에서 용암이 계속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끝도 없는 마나가 몸 안에 유입되었을 때 느끼는 그 쾌감과는 다른 느낌.

    충만감과는 다른 무언가가 지금 이지혁을 끓어오르게 만들고 있었다.

    "좋은 기분이야."

    이지혁이 혀를 내밀어 입술을 핥았다.

    성향상 이쪽이 좋은 것 같단 말이야.

    그럼 어디…….

    나와 얼마나 잘 맞는지 확인해 볼까?

    적당한 실험체가 눈앞에 있다.

    찾아려고 해도 구할 수 없는, 마왕이라는 아주 좋은 실험체가 말이다.

    "조심하라고."

    나도 힘 조절이 안 되니까.

    쿠웅!

    이지혁의 발이 가볍게 바닥을 굴렀다. 하지만 그 여파는 결코 가볍다고 할 수 없었다.

    바닥에 거대한 크레이터가 생기며 지진이라도 난 듯 세상이 흔들린다.

    "크!"

    하지만 델카란은 그 흔들림에 미처 대처할 수 없었다. 지진이 그에게 당도하기도 전에 이지혁의 육체가 델카란의 코앞에 나타난 것이다.

    꽉 움켜쥔 주먹이 호선을 그리며 델카란에게 날아든다.

    그 광경이 똑똑히 보였다.

    하지만 인식과 육체의 반응속도가 차이가 나는지, 그걸 눈으로 보면서도 피할 수가 없었다.

    '빌어먹…….'

    델카란의 안면에 이지혁의 스트레이트가 다시 작렬했다.

    소리는 나지 않았다.

    델카란의 몸이 포탄처럼 뒤로 쏘아지고 나서야 귀를 터뜨릴 것만 같은 거대한 폭음이 터져 나왔다.

    콰아아앙!

    그리고 이지혁의 등 뒤에서도 소닉붐이 터져 나왔다. 음속을 아득히 초월한 속도로 달려들다 보니 소닉붐이 터지고도 그 소리가 나중에 도착했다.

    쿠우우웅!

    심지어 얻어맞고 날아가는 델카란의 육체도 음속을 초월했는지 앞쪽에서 소닉붐이 터졌다.

    "크, 무슨 오케스트라도 아니고."

    단조롭긴 하지만, 이 정도면 중창단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텅! 텅! 텅! 텅!

    델카란의 몸이 마치 호수 위로 던진 물수제비처럼 바닥에서 몇 번이고 튀어 오르며 날아간다.

    이지혁은 그 광경을 보며 씨익 웃더니 다시 발을 굴렀다.

    쿠웅!

    순식간에 따라잡은 이지혁이 델카란의 육체를 바닥으로 내려쳤다.

    콰아아아앙!

    델카란이 바닥과 충돌하며 세상을 뒤흔들었다.

    "으아아! 저 미친!"

    "조심해요!"

    사방으로 파편이 운석처럼 튀어 올랐다.

    서아영이 최정훈을 끌어당겨 바닥으로 납작 엎드렸다.

    얼마나 충격이 크게 터져 나왔는지 튀어 오른 파편이 쏘아진 포탄처럼 그들의 머리 위를 스쳐 지나갔다.

    우우웅!

    스쳐 지나간 파편으로 공기가 빨려 들어가며 둘의 옷이 미친 듯이 펄럭였다.

    "이게 대체 뭐야!"

    "미친놈!"

    둘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갑자기 육체파로 돌변한 것만으로도 당황스러운 일인데, 이 위력은 대체 뭐란 말인가.

    한 방, 한 방 칠 때마다 폭탄이 터지는 것을 넘어서 탄도미사일이 꽂히는 것 같은 충격이 몰려왔다.

    "으으……."

    최정훈은 겨우 몸을 일으켜 전방을 바라보았다.

    이지혁이 델카란의 육체가 있다고 짐작되는 곳을 향해 양주먹을 내려치고 있었다.

    콰콰콰콰콰!

    쉴 새 없는 연타에 바닥이 진흙처럼 파이며 이지혁의 몸이 아래로, 아래로 내려간다.

    "꿈이라도 꾸는 건가?"

    그래도 이 세계에는 물리법칙이라는 게 있기 마련 아닌가!

    주먹으로 땅 파지 말라고!

    "으하하하하핫!"

    최정훈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이지혁은 그저 바닥을 때리고 또 때릴 뿐이었다.

    "아주 신났네요."

    "…본성이 드러났네."

    서아영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저 인간이 쪼잔하고, 싸가지 없고, 사람 괴롭히는 데 천부적이기는 하지만 그동안 딱히 폭력적이지는 않아서 그래도 봐줄 만한 구석이 있었는데…….

    지금 하는 꼴을 보니 폭력의 화신이 따로 없었다.

    "마왕을 때려잡고 있네요, 말 그대로."

    최정훈이 황당한 눈으로 이지혁을 바라보았다.

    그래도 마왕 아닌가.

    저번에 벨트레체를 상대할 때는 모든 것을 퍼붓고도 죽을 뻔했다. 그런데 지금은 상황이 너무 다르다.

    이 변화가 대체 어디서 온 걸까?

    우우우웅!

    그 순간, 이지혁의 발밑에 있는 바닥에서 강렬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 * *

    "우와아!"

    거대한 빛이 이지혁을 말 그대로 날려 버렸다.

    이지혁은 허공으로 솟아올라 허우적대다가 겨우겨우 밸런스를 잡고 바닥을 돌아보았다.

    "크으으으……."

    델카란이 엉망이 된 몰골로 하늘의 이지혁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인간 따위가!"

    지금까지 침착하던 모습과 다르게 델카란은 분노로 몸을 떨고 있었다.

    전신에서 돋아난 뱀의 머리들이 날카롭게 이빨을 드러내고, 입을 쫘악 벌린 채 포효했다.

    "인간! 인간! 인간 따위가!"

    이지혁이 혀를 찼다.

    쟤는 무슨 인간 혐오증이라도 있나, 그놈의 인간 타령은.

    "후!"

    그리고 멍청한 짓을 하는군.

    사람을 날리면 안 되지.

    다른 육체형에게는 거리를 벌리는 게 의미가 있을지 모르겠지만, 이지혁에게는 도와주는 꼴밖에 안 된다는 걸 왜 모르는 걸까?

    이지혁이 낄낄 웃으며 수인을 맺었다.

    그의 육체에서 검은 마나가 줄기줄기 뿜어져 나왔다.

    "으아아아!"

    고통스러운 신음과 함께 뭉클뭉클 뿜어져 나온 마나가 이지혁의 앞쪽으로 몰려들었다.

    "뒈져라!"

    이지혁의 고함과 함께 뭉쳐진 마나들이 맹렬하게 소용돌이치며 델카란에게로 날아들었다.

    콰아아아아!

    얼마나 맹렬히 도는지 주변의 공간 자체가 일그러지는 느낌이었다.

    "크윽!"

    델카란이 그 광경을 보더니 허겁지겁 몸을 돌려 그 자리에서 달아나기 시작했다.

    콰드드드득!

    이지혁의 마나탄이 바닥을 드릴처럼 뚫고 들어간다.

    턱!

    바닥에 내려선 이지혁이 휘파람을 불었다.

    이거, 뭔가 편한데?

    가까이 붙으면 때리면 되고, 멀리 떨어지면 쏘면 된다.

    그동안 어떻게든 상대들과 거리를 벌리기 위해 온갖 짓을 다 해온 이지혁이다 보니 눈물이라도 날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근거리와 원거리 공격이 동시에 된다는 게 이리 편한 일이었을 줄이야.

    "천 년을 넘도록 개고생만 했네."

    에테르가 일정 이상만 넘은 상태에서 베라프로 넘어갔다면, 지구로 돌아오는 것이 오백 년은 빨라졌을 것을!

    이지혁은 돌이킬 수 없는 과거를 후회했다.

    그건 그렇고…….

    "피했어?"

    낄낄대는 웃음이 절로 터져 나온다.

    마왕이라는 것들은 자존심이 강하다.

    같은 마왕이라고는 하나 이지혁과 그들이 격의 차이가 있다는 생각을 버리지는 못할 것이다.

    과거 멸망의 좌였을 때에야 다르겠지.

    예전 그의 마력을 맨몸으로 받았다가는 육체가 분자 단위로 해체되는 모습을 눈으로 보는 경험을 하게 되었을 테니까.

    그때야 도망 못 가서 안달이었지만…….

    지금은 또 다르다.

    벨트레체부터 시작해서 델카란까지.

    그들은 단 한 번도 이지혁의 공격을 피하지 않았다. 하찮은 인간이 되어버린 이지혁의 공격을 피해 도망가는 것이 자존심의 상처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고, 이유야 여러 가지겠지.

    하지만 지금 델카란이 처음으로 이지혁의 공격을 피해 도망친 것이다.

    "하찮은 인간 따위를 피해 도망친 기분이 어때?"

    이지혁이 이죽였다.

    "…이놈이!"

    델카란은 분노로 이성을 잃을 지경이었다.

    대체 어떻게 된 것인가.

    이지혁은 두려운 존재다. 그건 알고 있다. 하지만 이지혁이 두려운 존재였던 이유는 무한의 마나를 활용하는 마도사였기 때문이다.

    마나가 한정되어 버린 순간, 이지혁은 마왕은커녕 마족만도 못한 존재로 격하되었을 터!

    결코 델카란에게 위협이 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어떻게 된 거지?"

    조금 전, 이지혁이 뭔가 이상한 의식을 하고 나더니 육체에 도는 기운이 달라졌다. 그나마 거대했던 흑마력과 그 안에 미묘하게 감지되던 작은 기운이 합쳐져 변질된 것이다.

    "대체 무슨 짓을 한 거냐?"

    에테르에 대한 이해가 없는 델카란으로서는 결코 알 수 없는 변화였다.

    "설명해 주면 알아?"

    "두 기운을 합친 건가?"

    "그렇지."

    델카란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두 가지 기운을 합친다는 건 리스크가 있을 텐데! 그러고도 그 육체가 붕괴되지 않게 버틸 수 있다고?"

    "…날카롭네?"

    이지혁이 머리를 벅벅, 긁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NDF들이 극소량의 흑마력을 에테르에 섞은 대가로 끔찍한 고통에 시달리고, 육체의 붕괴와 정신적 붕괴에 시달리지 않는가. 지금이야 별문제가 없지만, 이대로 시간을 끌면 이지혁의 몸도 아주 박살이 날 것이다.

    그 결과야 뭐…….

    '그래도 죽기야 하겠어?'

    대책 없이 지르긴 했지만, 후폭풍은 어마어마하겠지.

    아마 죽을지도 모르고.

    "죽어도 좋다는 거냐?"

    이지혁이 낄낄대며 웃었다.

    여하튼 마왕이라는 것들은 종잡을 수가 없다니까.

    "아니……."

    이해할 수도 없고.

    "대체 니가 왜 그걸 걱정해 주는데, 이 미친 뱀 새끼야. 니 걱정이나 해."

    "……."

    "내가 죽어도 너 죽이고 죽는 거니까 니가 걱정해 줄 일 아니거든? 여하튼 마왕 새끼들은 오지랖이 넓어요. 에르……."

    아, 아니다.

    그 여자 이름이 왜 나오나.

    "크흐흠."

    이지혁이 정색하고는 다시 앞으로 걷기 시작했다.

    "솔직히 나도 좀 쫄리거든?"

    시간이 더 지나면 어떤 현상이 벌어질지 모른다. 그러니 일단은 저 마음에 들지 않는 뱀을 잡아 찢어놓고 나서 생각이라는 걸 해야겠지.

    그러니까!

    이지혁의 몸이 다시금 포탄처럼 쏘아졌다.

    흑마력의 영향을 받은 이지혁의 눈동자가 더없이 검어지며 활성화된 모세혈관이 터지며 새하얗던 부분이 붉게 변하기 시작했다.

    콰아아아!

    그것은 공간의 이동이라기보다는 압축처럼 느껴졌다.

    공간을 접어버리듯이 바로 앞에 나타난 이지혁이 델카란을 후려쳤다.

    "이!"

    델카란이 이지혁의 주먹을 피하며 몸을 빙글 돌렸다.

    "어쭈?"

    이지혁의 뒤돌려 차기가 델카란을 향해 날아든다.

    "이 하찮은 놈이!"

    델카란의 육체에 돋아났던 뱀의 머리들이 일제히 쭉 뻗어지며 이지혁의 물어뜯으려 했다.

    "헐……."

    수백 마리의 뱀이 동시에 이지혁에게 날아들었다.

    그 광경을 본 이지혁이 지체 없이 몸을 바닥으로 굴렸다.

    한참 바닥을 굴러 거의 백여 미터나 이동해 버린 이지혁이 흙먼지를 털며 몸을 일으켰다.

    "와, 그거 편리하네."

    저런 식으로 나오면 근접 공격이 힘들어지는데…….

    "뭔 굴러서 백 미터를 가?"

    최정훈이 힘없이 뇌까렸다.

    지금 그의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은 인간의 상식을 초월한 전투다.

    그동안 나름 능력자들의 전투를 봐왔다고 생각하는 최정훈의 상식으로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전투가 이어지고 있었다.

    저 멀리 있던 놈이 번쩍하고는 공간을 이동해 버리지를 않나, 한 대 얻어맞더니 쏘아진 포탄처럼 1킬로를 날아가지를 않나, 굴러서 백 미터를 이동하지를 않나.

    영화로 만들어도 현실성 없다고 까일 전투였다.

    그런데 그게 실제란 말이지.

    "팝콘 있어요?"

    "…다음부턴 준비하죠."

    서아영의 뻘 소리에 화를 낼 기운도 없었다. 지금 그가 해야 할 건 그저 옆에서 잔소리나 늘어놓는 것뿐이다.

    "이지혁 씨도 촉수 있잖아요!"

    최정훈의 외침이 들려온다.

    "아……."

    이지혁은 아차 했다. 육체가 강화되다 보니 너무 신나서 원래 가지고 있던 무기도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다.

    "근접전은 처음이라……."

    그러고 보니 그러네?

    너만 뱀이 있는 건 아니잖아?

    나도 촉수가 있는데.

    "평소에는 변태같이 촉수 잘만 쓰더니만!"

    서아영의 외침에 이지혁이 눈을 부라리며 돌아보았다.

    변태라니!

    내가 촉수로 뭐 어쨌다고 변태 소리가 나오는 건가!

    내가 그걸로 뭘 했다고!

    촉수 쓰면 다 변탠가!

    은근히 신경 쓰고 있던 부분을 지적당한 이지혁이 발끈했다.

    "진짜 변태같이 써줘?"

    "죄송."

    서아영이 찌그러지자 이지혁은 다시 고개를 델카란에게로 돌렸다.

    "이봐."

    "……."

    "너무 오래 싸웠어."

    원래 전투란 건 속전속결이지, 이리 시간을 끌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이제 마무리해야지?"

    "크으! 네놈! 나를 무시하는 것이냐?"

    "뭘 새삼스럽게."

    언제 너 따위가 내 존중을 받은 적이나 있었나?

    "나 이지혁이야, 이 새끼야."

    어디 급도 안 되는 듣보잡 마왕 놈이 감히 자신의 앞에서 저리 목을 빳빳하게 세운단 말인가.

    잊었다면 알려줘야지.

    자신이 누군지.

    우드드득.

    이지혁의 육체에서 검은 촉수들이 줄기줄기 뿜어져 나왔다.

    "으, 징그러."

    저년이 진짜!

    이지혁은 서아영에게 자꾸 쏠리는 관심을 억지로 억누르며 델카란을 노려보았다.

    지금은 장난을 칠 때가 아니다.

    지금 당장은 이지혁이 주도권을 잡았지만, 시간이 조금 더 지나면 그의 육체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끝낼 수 있을 때 끝내지 못하면 언제나 반격을 받는 것이 이치 아닌가.

    그러니 끝내자고!

    이지혁의 육체가 검은 마나를 흘려내기 시작했다.

    뭉클뭉클 쏟아져 나온 마나가 몸을 타고 올라가 이지혁의 등 뒤에 거대한 불꽃의 날개를 만들어냈다.

    "간다."

    조심하는 게 좋아.

    나도 진짜 뭔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까 말이야!

    콰아아아아아!

    이지혁이 이를 질끈 깨문 그 순간, 그의 육체가 앞으로 쏘아져 나갔다.

    불꽃의 날개가 쫙 펴지고, 동시에 촉수들이 휘날린다.

    델카란은 자신에게 날아드는 이지혁의 모습을 보며 몸을 떨었다.

    '악마.'

    그의 생각이 맞았다.

    이지혁은 인간이다. 하지만 그는 그 어떤 마족보다 마족스러웠으며 악마 같았다.

    날아오는 이지혁을 보며 델카란은 두려움이라는 생소한 감정을 생생하게 느껴야 했다.

    "크아아아아!"

    마왕으로서의 자부심과 마족으로서의 자존심이 그를 광포하게 만들었다.

    "이지혀어어어억!"

    델카란의 전신에 돋아난 뱀의 머리들이 입을 벌리고 붉은 마나를 줄기줄기 뿜어낸다.

    그와 동시에 델카란은 한 줄기의 붉은 유성이 되어 자신에게 날아드는 이지혁을 향해 쏘아지기 시작했다.

    우우우우우웅!

    두 강대한 존재가 서로 마주 날아가며 주변을 뒤집어엎기 시작했다.

    "으아아아아!"

    최정훈은 서아영을 꽉 껴안았다.

    둘이 서로 다가가는 충격파만으로 바닥이 뒤집어지고 흙과 바위가 허공으로 솟아올랐다.

    마치 중력이 사라진 것처럼.

    거대한 쉐이커 안에서 제멋대로 섞여지고 있는 것만 같았다.

    "꽉 잡아요!"

    서아영이 최정훈을 꽉 끌어안으며 그들에게 날아드는 파편들을 쳐냈다.

    "대체!"

    최정훈의 시아에 두 사람이 충돌하는 광경이 보인다.

    공간은 순식간에 압축한 두 마왕이 서로를 향해 마력을 뿜어내며 충돌한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최정훈은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터져 버린 고막은 소리를 듣지 못했다.

    되레 다행이었다.

    그 소리를 들었다면 그 충격만으로 실신해 버렸을 테니까.

    검은 마나와 붉은 마나가 충돌하며 휘말려 올라간다.

    용권풍.

    마나와 마나가 뭉쳐 거대한 소용돌이를 만들어내고 있다.

    붉고 검은 용권풍은 마치 세상에 강림한 거대한 악룡처럼 불길하기 짝이 없게 하늘 위로 승천해 올라갔다.

    "아아아아……."

    인세의 것이 아닌 듯한 그 광경에 최정훈은 넋을 놓았다.

    이것이 마왕의 싸움.

    세상을 건 전투.

    '누가 이겼지?

    최정훈의 눈이 크게 떠졌다.

    어느 쪽이든 무사하지 못하겠지.

    직감적으로 그 사실은 알 수 있었다.

    혹여나 이지혁이 패배라도 하는 날에는 지구의 운명은 그걸로 끝이었다.

    저런 짓을 태연하게 저질러 대는 존재들을 무슨 수로 막으란 말인가.

    직접적인 공격도 아니고, 충돌의 여파만으로 런던 시가 통째로 으스러지고 있는데.

    이건 인간이 할 수 있는 짓이 아니다!

    "누구!"

    흐려지는 용권풍 아래로 드러난 그림자에 최정훈의 시선이 꽂혔다.

    * * *

    "이지혁 씨!"

    최정훈이 반가움과 기쁨이 적절히 섞인 목소리로 이지혁을 외쳤다. 용권풍 아래에 드러난 사람의 형태는 이지혁이었던 것이다.

    그 기쁨에 떨면서도 최정훈의 눈을 다른 곳을 훑었다.

    '마왕은?'

    델카란은 어디에 있는가.

    곧이어 최정훈의 시야에 델카란의 모습이 잡혔다.

    이지혁 앞에 쓰러져 있는 사람의 형태가 눈에 띈 것이다.

    '쓰러뜨렸나?'

    최정훈은 눈에 더 힘을 주었다.

    이지혁이 머리를 우둑우둑 꺾었다.

    "그래도 마왕은 마왕이군."

    이지혁의 발언에 델카란은 어이없다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게 지금 단 일격으로 마왕의 육체를 회복 불가로 망가뜨려 버린 자가 할 말인가.

    "마왕 중에서도 급도 안 되는 놈이라고 생각했는데, 까딱하면 내가 죽었겠어. 칭찬해 주지."

    델카란은 허탈한 얼굴이었다.

    자신을 죽음으로 몰고 간 놈이지만, 이상하게도 이 순간까지 미운 마음이 들지 않았다.

    인간을 미워한다는 게 마족으로서 이상하기도 하지만, 승부에서 패배했다고 상대에게 증오를 품는다는 것은 델카란의 미학에 맞지 않은 일이었다.

    그보다 그는 이지혁의 태도에 더 집중했다.

    끝이 없는 오만함과 패자를 거리낌 조롱하는 악랄함.

    그것이 너무도 자연스럽다.

    '과거에도 그랬지.'

    멸망의 좌가 저런 성격이 아니었다면 마계를 그리 풍비박산 내놓지는 못했을 것이다. 능력이 사라졌기에 겨우 찾아온 평화가 깨어질 조짐을 보이고 있었다.

    "벨트레체 때는 실력을 숨긴 건가?"

    나직한 델카란의 물음에 이지혁이 조금은 겸연쩍은 얼굴로 머리를 긁었다.

    "아니, 뭐……."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그런 거 있잖아. 권총으로 엄청 싸우고 있는데, 무심코 뒤를 돌아봤는데 M60이 있었다든가."

    그런 경우가 어디 있는가!

    "…권총? M60?"

    "으으음, 너한테 할 말은 아니었군. 그냥 대충 파이어 볼이나 날리고 있었는데, 무심코 주머니에 손을 넣어보니 메테오 스크롤이 있었다고 치지."

    "도무지 납득이 안 가는 설명이군."

    "납득하게 하기 힘드니까 그냥 대충 알아들어. 가는 길에 편히 가라고 그나마라도 설명해 주는 거니까."

    귀찮게.

    이지혁이 불퉁거리자 델카란은 낮게 웃었다.

    "아무래도 좋다. 아흔아홉 번째 마왕… 아니, 인간 이지혁이여."

    이지혁은 가라앉은 눈으로 델카란을 바라보았다.

    아무리 마족의 끈질긴 생명력을 감안한다고 하더라도 어깨부터 사타구니까지 거대한 구멍이 뚫린 상태에서 재생한다는 것은 어렵다.

    유체가 아닌 본체가 넘어왔으니, 이제 델카란에게 남은 것은 확고부동한 죽음뿐인 것이다.

    "그분이 너의 죽음을 원하는 이상, 마계는 결코 너를 좌시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시작에 불과하다. 알고 있겠지?"

    "가만 보면 느끼는 거지만……."

    이지혁이 히죽 웃었다.

    "마왕이란 놈들은 은근히 잔정이 많단 말이야. 지가 죽는 상황인데 자꾸 남을 걱정해 주네. 고맙게도 말이야."

    말은 고맙다고 하지만 그 안에 담긴 비꼼을 모를 델카란이 아니었다.

    "먼저 가서 기다리지."

    델카란의 육체가 점점 생기를 잃어가기 시작했다.

    발끝부터 천천히 바스라지는 델카란을 보며 이지혁이 한숨을 내쉬었다.

    "뭐하자고 여기까지 와서 뒈지냐. 거기서 그냥 누리고 살면 될 일을."

    "마족이란 그런 거지."

    "한심한 놈."

    이지혁은 뭔가 비애를 느꼈다.

    자신에게도 불사의 권능이 없었다면 베라프에서 저리 죽어갔겠지.

    보아주는 이 하나 없이 죽어갔을 것이다.

    그의 가족들은 돌아오지 않는 이지혁이 이미 죽었다고 생각하고 살았겠지.

    "쳇."

    이지혁이 손을 앞으로 뻗었다.

    우웅.

    그의 손에서 검은 마력이 뿜어져 나와 델카란의 몸으로 스며들기 시작했다.

    "의미 없는 짓."

    델카란이 고개를 저었다.

    "나의 육체는 이미 한계를 넘었다. 마력으로 복구되지 않아. 치워라, 이지혁. 나를 동정하지 마라. 나는 최선을 다해 싸웠으며 패했다. 그로 인해 죽어가는 것은 명예로운 일이다."

    "네네, 알고 있습니다."

    이지혁이 입을 삐죽였다.

    "어차피 죽는 건 알아. 그런데 그 더러운 몸뚱아리를 이 동네에 남기고 죽을 생각은 아니겠지? 마력은 충분할 만큼 쑤셔 박아 줬으니, 너희 동네로 꺼져."

    "……."

    델카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꺼지라고?

    마계로 꺼져 버리라고 이 마력을 낭비한다는 말인가?

    앞으로도 얼마나 많은 마왕과 마족들이 이 세계를 침공할지 모르는데?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군."

    그래도 어느 정도 파악했다고 여긴, 이지혁이라는 인간에 대해 또다시 의문이 가득해지는 기분이었다.

    이건 이지혁이기 때문인가, 인간이기 때문인가.

    델카란은 그제야 깨달을 수 있었다.

    그는 아흔아홉 번째 마왕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지만, '인간 이지혁'에 대한 것은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그렇다면 지금 그의 눈앞에 있는 존재는 아흔아홉 번째 마왕인가, 아니면 인간 이지혁인가.

    '어느 쪽이든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둘은 둘이되 하나인 존재.

    어느 쪽이라 해도 달라지는 것은 없다.

    지금 그가 해야 할 것은 이지혁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는 것이 아니었다.

    지금 그가 해야 할 것은 이지혁이 아니라 자신의 마지막을 마왕답게 장식하는 것이다.

    "이지혁이여."

    "왜?"

    이지혁은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그대는 인간의 몸으로 마계 전체와 싸우려 하고 있다. 그 승부를 감당할 자신이 있겠는가?"

    "오버하기는."

    이지혁이 코웃음을 쳤다.

    "여기가 어디라고 마계 놈들이 모두 몰려오겠냐. 만에 하나 그럼 도망가야지. 그게 아니니까 싸우는 거야. 아직은 할 만하거든."

    "큭큭큭."

    델카란은 유쾌하게 웃었다.

    그래, 이게 아흔아홉 번째 마왕이지.

    "즐겁군. 그대가 이길지, 마계가 이길지 지켜보는 맛도 쏠쏠하겠어."

    "마왕 주제에 사후 세계를 믿다니. 오컬트는 세계를 가리지 않는 건가?"

    "신도 있고, 악마도 있는데 사후 세계라고 없을 이유가 없지. 아무래도 좋다. 사후 세계가 있다면 고향 따위는 언제든 가볼 수 있겠지. 그러니까……."

    델카란이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나는 좀 더 재미있는 쪽을 택하겠다."

    "흠?"

    그 순간, 이지혁의 몸으로 순수한 흑마력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뭐하는 거야?"

    "돌려주는 거다. 이자까지 포함해서 말이지."

    이지혁의 몸 안으로 마나가 차오른다.

    머리카락이 쭈뼛쭈뼛 뻗고, 육체에 닭살이 돋아난다. 정순한 마나가 차오르는 쾌감이 이지혁의 정신을 지배하기 시작한다.

    "끄으으……."

    신음을 흘리는 이지혁을 보며 델카란은 눈을 가라앉혔다.

    이지혁은 이제 기나긴 싸움을 치러야 할 것이다.

    하지만 마나를 충전할 수 없는 이지혁에게는 너무 불리한 싸움.

    그러니 델카란이 균형을 조금은 맞춰주어야 한다.

    "뭐하는 짓이야?"

    "글쎄."

    델카란은 비릿하게 웃었다.

    지금 그가 하고 있는 것이 정확히 뭘 의미하는지 그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단순히 재미를 위해 하는 건지, 아니면 다른 의미가 있는지.

    생명력이 빠져나가 흐릿해진 이성으로 자신의 행동을 규명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어쩌면 이성이 흐릿해진 덕분에 충동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짓을 저지르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아무려면 어떤가.

    "나의 모든 것을 주지. 그럼 그대는 더욱 강해질 것이다."

    "하찮은 것 좀 준다고 해서 더 강해질 것 같아?"

    "후후, 그래도 그대의 육체가 무너지는 것을 막을 수는 있겠지."

    "……."

    이지혁은 이를 악물었다.

    "두 개의 기운을 섞어 사용한다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그대도 알고 있겠지. 부작용은 그대의 정신을 부수고 육체를 파과할 것이다. 아흔아홉 번째 마왕과 동귀어진했다는 것은 영광스러운 일이겠지만, 재미있는 일은 아니지."

    "마족 따위가!"

    "큭큭큭."

    델카란은 흐려져 가는 시야를 느끼며 전율했다. 이제 정말 마지막인 모양이다.

    "지옥이 있다면 거기서 지켜보지. 그대가 얼마나 더 버텨내는지 말이야. 즐거웠다, 이지혁."

    그 말이 끝이었다.

    가슴팍까지 부서진 델카란의 몸이 이윽고 한 줌의 재로 화해 바람에 흩날렸다.

    이지혁은 그 광경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다가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망할 마왕 놈들."

    이계의 신도, 성직자도 모조리 그를 잡아 죽이는 데만 혈안이 되어 있었다.

    그런 와중에 그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을 준 것은 마족과 마왕, 그리고 마수였다.

    어쩌면 그는 정말 멸망의 좌일지도 모른다.

    "마왕이란 새끼들은 하나같이 폼을 너무 잡아서 문제야."

    이러면 멋이라도 있을 줄 아나?

    "이런 게 멋있는 건 잘생긴 놈들에게만 해당되는 경우란 말이다. 그따위로 생겨서는 무슨 짓을 해도 멋있지 않아, 이 징그러운 새끼야."

    이지혁은 바닥에 침을 뱉고 돌아섰다.

    하지만 돌아서는 그의 어깨는 미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이지혁 씨!"

    최정훈이 달려온다.

    어디서 들이받았는지 이마에서는 피가 철철 흘러내리고, 몸은 흙먼지로 뿌옇게 변해 있었다.

    그런데…….

    '왜 저게 멋있어 보이지?'

    거 봐라, 델카란.

    저렇게 생긴 인간들은 뭘 해도 멋있는 거다. 너랑 나는 글렀어.

    "다시 태어날 때는 미남으로 태어나라."

    치익.

    이지혁이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물고는 불을 붙였다. 그러고는 한 번 빨아들인 담배를 델카란이 마지막을 맞이한 곳을 향해 던졌다.

    "마계에는 담배가 없더라."

    그러니 한 대 피워보라고.

    나는 흡연을 권장하는 쓰레기니까.

    이지혁이 해줄 수 있는 최대한의 애도였다.

    "쓰러뜨린 겁니까?"

    "…아, 짜증."

    이지혁이 최정훈을 보며 인상을 확 썼다.

    최정훈은 영문을 몰라 고개를 갸웃했다.

    "아니, 왜?"

    "그런 게 있어요. 갑자기 짜증이 확 나네."

    이상한 일이었다.

    그와 최정훈은 같은 사람이고, 델카란은 징그러운 마족인데, 왜 마족 입장에서 더 공감이 가는 걸까?

    잘생긴 놈들이 마족보다 더 적 같다.

    "아, 따거."

    피가 눈에 들어간 최정훈이 눈을 비빈다.

    피가 얼굴 전체로 번지고 먼지와 섞이며 더럽기 짝이 없는 몰골이 되었다.

    보통은 저런 몰골이 되면 꼴도 보기 싫어야 정상이다.

    정상인데…….

    "그런데 왜 잘생겼냐고!"

    "네?"

    당황하는 최정훈을 보며 이지혁은 분노를 토해냈다.

    마왕을 잡았는데 이런 걸로 짜증이 날 줄이야.

    "왜 그리 씁쓸해하죠?"

    어느새 다가온 아펠드리체가 물어온다.

    "뭐?"

    "굉장히 화가 난 것 같아요. 그래서 이상한 이유로 짜증을 내고 있는 거죠? 그 마왕이 죽은 게 안타깝나요?"

    "뱀 새끼 하나 뒈진 건데 안타깝기는 개뿔이."

    이지혁이 고개를 휘휘 저었다.

    하지만 아펠드리체는 묘한 눈으로 이지혁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어쨌든 다행이네요. 정말 위험한 상황이었는데, 생각보다 수월하게 넘겼어요."

    "수월하게라?"

    이지혁이 피식 웃었다.

    저 머리에 마법밖에 없는 도마뱀이 말은 참 쉽게 한다.

    수월하게라고?

    "잘도 수월하다……."

    이지혁의 몸이 천천히 모로 쓰러졌다.

    "이지혁 씨!"

    최정훈이 다급하게 달려들어 이지혁의 몸을 움켜잡았다.

    "한숨 잘 테니까… 뒷정리하라고."

    이지혁은 그대로 의식을 잃어버렸다.

    * * *

    "악마!"

    그들이 나를 부르는 호칭에는 딱히 관심도 없다.

    수많은 호칭이 있었지.

    악마, 귀신, 마귀, 멸망을 부르는 자, 베른하이의 폭군…….

    또 뭐가 있었더라?

    긍정적인 호칭은 단 한 번도 받아본 적 없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그러니 이제 와서 저런 호칭에 새삼 상처 받을 이유 따윈 없다.

    이지혁의 마수 군단이 마을을 유린한다.

    "이 마귀야! 우리가 네게 무슨 죄를 지었느냐!"

    이지혁은 심드렁한 얼굴로 고함을 지르는 노인을 바라보았다.

    죄를 지었냐고?

    글쎄, 당신이 딱히 내게 무슨 죄를 지었는지는 나도 모르겠는데?

    아마도 없겠지.

    그런데 말이야…….

    나도 딱히 이 세계에 죄를 지은 적이 없단 말이지.

    그런데도 너희는 나를 죽이지 못해 안달이었고, 핍박하지 못해 악을 써 댔지.

    그건 재미있는 일이었어.

    악의.

    단순히 싫어한다는 것이 아니야. 상대를 멸절시키고야 말겠다는 진득한 악의가 항상 쏟아져 내리는 걸 감내하다 보면 머릿속 한 부분이 이상하게 뒤틀리게 되거든.

    나야 뭐, 언제나 강제로 바로잡혔지만.

    이 세계로 오기 전에는 사람이 환경적인 요소로 미쳤으니 정상참작을 해줘야 한다는 법원 판결을 볼 때마다 뭔 개소린가 했지.

    그런데 내가 겪어보니 그게 맞는 말이더라 이거야.

    나도 항상 제자리로 돌아가지 못해 안달인 이 뇌가 아니었다면 지금쯤 제정신이 아니었겠지.

    아니, 나는 원래 제정신이 아니었던가?

    아무려면 어때.

    저 멀리서 흙먼지가 마구 일어났다.

    아르케 왕국의 자랑인 성기사단이 새하얀 백마를 타고 그에게 질주해 오고 있었다.

    "흠……."

    저런 광경을 수도 없이 볼 때마다 느끼는데…….

    저 기사단을 유지하는 데 가장 힘든 것은 성기사를 키워내는 것이 아니라 저 많은 수의 백마를 항상 유지하는 것 아닐까?

    백마가 흔한 것도 아니고, 잘도 끌어 모으는군.

    이지혁은 비릿하게 웃고는 손짓했다.

    검은 로브 아래 드러난 노란빛의 손끝이 성기사단을 가리켰다.

    "먹어라."

    카아아아아아아아!

    괴성.

    인간의 심혼을 찢어버릴 듯한 마수의 괴성이 온 세상으로 울려 퍼졌다.

    그리고 돌진하는 마수의 군단.

    지평선 끝까지를 가득 채워 올린 마수의 군단이 성기사단을 향해 게걸스럽게 달려든다.

    "히익!"

    "으으으……."

    신앙에 몸을 바쳐 죽음마저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성기사단들이 겁에 질린 신음을 내며 속도를 늦춘다.

    신앙이란 제멋대로군.

    그대들의 목숨은 그대들의 것이 아니라고 항상 외치고 다니지 않았던가.

    "두려워 마라!"

    "달려들어라!"

    "신께서 우리와 함께하신다!"

    틀린 말은 아니지.

    신성력이 있는 이 세계에서 신성력을 사용할 줄 안다는 것은 신이 직접 가호를 내리고 있다는 것과 일맥상통하는 말이니까. 그러니 틀린 말은 아니다.

    다만, 한 가지 그들이 잘못 알고 있는 것이 있다.

    "신이 너희를 보호한다고 해서 달라질 것은 없어."

    그는 마귀.

    그는 악마.

    이 세계의 끝에서 기어올라 신마저 짓밟을 힘을 손에 넣은 자.

    신에게 대적하기 위해 인간을 버리고 악마와 손을 잡은 자였다.

    그러니 그는 악마.

    멸망의 좌.

    그들이 붙인 이름을 현실로 만들어낸 자였다.

    카아아아아아!

    짐승들과 마수들이 뒤엉키며 돌진한다. 그것은 하나의 검고 붉은 바다와도 같았다.

    끝없이 펼쳐져 있는 압도적인 마수들의 물량 앞에 성기사단은 이성을 잃어버렸다.

    이 정도일 줄이야.

    소문으로는 들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저걸 어떻게 막으라는 건가.

    "멸망의 좌……."

    결코 과장된 말이 아니었다.

    그는 말 그대로 멸망을 가져오는 자였던 것이다.

    "악마 놈!"

    "저주 받아라! 저주 받아라! 신께서 네놈을 용서치 않을 것이다!"

    악마에게 저주를 받으라니.

    그 미묘하고 이상한 어감에 이지혁은 실소를 흘리고야 말았다.

    적절하지 않은가.

    쓸려 나가는 인간들의 비명과 마수들의 괴성이 오케스트라처럼 웅장하게 들려온다.

    '지겨워.'

    이지혁은 파괴되어 부서지는 마을을 보며 심드렁한 표정으로 자리에 앉았다.

    마수들이 자신의 몸을 바쳐 만들어낸 의자에 앉은 이지혁이 손짓으로 앞을 가리켰다.

    "가자. 시간을 너무 끌었군."

    마수와 강철 거인의 군단이 전진한다.

    그들은 눈앞에 보이는 모든 것을 파괴하고 또 파괴하며, 전진하고 또 전진했다.

    베라프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부수며 멸망의 좌가 데라 라트렐로 향하고 있었다.

    그가 지나간 곳에 남은 것은 폐허뿐.

    한 방울의 피조차 남기지 않고 모조리 탐닉하는 마수들의 군단이 데라 라트렐로 향하고 있었다.

    이지혁은 눈을 떴다.

    '꿈?'

    꿈이라면 재미없는 꿈이다.

    상상력도, 재미있는 시퀸스도 없는, 현실의 재반복뿐인 꿈 따위는 사양이었다.

    기분도 더럽고 말이야.

    "일어났어요?"

    그리고 베라프에 대한 꿈을 꿨는데 눈을 떴더니 아펠드리체가 보이는 것 역시 기분 좋은 일은 아니었다.

    "얼마나 잤지?"

    "이틀?"

    "오래도 잤군."

    아펠드리체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아래로 흘러내려 이지혁의 얼굴을 간질였다.

    "기분이 좋지 않아 보이네요. 묘하게 저에 대한 적개심도 느껴지구요. 베라프 꿈이라도 꾼 건가요?"

    "사람 마음을 짐작하는 건 괜찮지만, 그렇게 대놓고 말하는 건 현명하지 못한 짓이지."

    "괜찮아요. 당신은 그런 사소한 것에 신경 쓰는 남자가 아니니까요."

    아닌데?

    나 신경 쓰는데?

    나 엄청 소심한데?

    이지혁은 끙, 하는 소리와 함께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아펠드리체가 이지혁의 이마를 지그시 내리눌렀다.

    "좀 더 쉬어야 해요."

    "좀이 쑤시는데."

    "그래도 더 쉬어야 해요. 당신 몸이 지금 정상이라고 생각하시는 건 아니죠?"

    "흐음……."

    이지혁은 반박하지 못했다.

    "엄청난 짓을 저질렀더군요."

    "방법이 없었으니까."

    "마지막에 델카란이 도와주지 않았더라면 정말 손도 써보지 못했을 거예요. 이 세계를 지키고 당신이 죽는다면 무슨 의미가 있죠?"

    "그전에 내가 죽을 것 같아서 한 거야."

    "모순이네요."

    "뭐든 이성적으로 따지고 들지 말라고, 비만 도마뱀."

    이지혁의 항변에 아펠드리체는 쿡, 하고 웃었다.

    "웃어?"

    이지혁이 놀람과 불만이 동시에 담긴 얼굴로 아펠드리체를 바라보았다.

    아펠드리체가 이렇게 웃음을 보인 적이 있었던가?

    그동안 미묘한 미소는 많이 보았다.

    환한 미소도 많이 보았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웃는 것은 처음 보는 것 같았다.

    "드래곤 주제에 이제 완전히 인간인 척하는군."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아펠드리체는 자신이 많이 바뀌었다는 것을 인정했다. 드래곤이라는 존재가 이성과 마법, 그리고 불변성으로 대표되는 종족이라는 것을 감안한다면 나쁜 변화일지도 모른다.

    애초에 변화한다는 것 자체가 드래곤의 정체성을 뒤흔드는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런 변화가 나쁘게 느껴지지 않는 것이 아펠드리체의 솔직한 심경이었다.

    '집착할 필요 없지.'

    드래곤이기에 이래야 한다, 아펠드리체이기에 이래야 한다는 것은 그녀가 만들어낸 고정관념일 뿐이다.

    그녀는 이지혁을 보며 그것을 느꼈다.

    그가 마왕인지, 사람인지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그가 바로 이지혁이라는 것이다.

    종족과 시선을 초월하여 스스로의 정체성을 명확히 한 자.

    아펠드리체 역시 그처럼 되고 싶었다.

    "뭘 자꾸 키득대는 거야?"

    아펠드리체의 얼굴이 다시 굳었다.

    "다음에도 당신은 똑같은 짓을 하겠죠."

    "잔소리는 적당히 하지?"

    "말릴 생각은 없어요. 그게 당신이니까. 내가 아무리 말린다고 하더라도 당신은 변하지 않겠죠."

    "……."

    이지현은 말없이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하나는 기억해요. 당신이 지키려는 것은 당신이 있어야 의미가 있는 거예요. 자신이 없는 세상은 세상이 아니죠. 주객이 전도되어서는 안 돼요."

    "네네, 그 잔소리 잘 듣겠습니다."

    꾸욱.

    이지혁의 이마를 누르던 아펠드리체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두개골이 부서질 것 같은데요."

    "아, 미안해요. 인간의 육체가 가진 나약함을 잠시 잊었네요."

    다 감안하고 최대치까지 누른 거 같은데?

    이지혁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번에는 아펠드리체도 그를 만류하지 않았다.

    "두 개의 기운을 섞는 건 너무 위험해요."

    "알아."

    "그런데도 계속 그 방법을 쓸 생각인가요?"

    "흐음……."

    다른 방법이 있다면야 다른 방법을 썼겠지. 다른 방법이 없으니까 계속 그 방법을 쓰는 것 아냐.

    "방법을 찾아야지."

    말이야 쉽다.

    결국 방법이라는 건 하나밖에 없었다.

    안정적으로, 그리고 지속적으로 공급되어 줄 마나를 찾아내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방법이 있을 리가 있나.

    흑마력이라는 것은 결국 마계에서 생겨나는 것이다.

    흑마력을 얻기 위해서는 마계와의 링크가 필요하다.

    하지만 마계와 링크를 연다는 것은 마계와의 게이트를 연다는 것과 동일한 의미였다.

    그 링크를 통해 마왕이 집단으로 쳐들어와도 막을 도리가 없는 것이다.

    마나를 얻기 위해 세계를 파멸로 이끄는 짓이 되어버린다.

    "일단은 뭐……."

    이지혁은 생각을 접었다.

    고민한다고 해서 해결될 일이 아니었다.

    그것보다 지금은 더 급한 일이 있었다.

    "델카란은 죽었나?"

    "눈으로 보셨잖아요?"

    "그래, 죽었지. 분명 죽었는데 말이야."

    이지혁이 골똘히 뭔가를 생각했다. 한참을 고민하는 듯하던 이지혁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럼 이 불안함은 대체 뭐지?"

    "무슨 말이죠?"

    "얼마 전부터 가슴이 답답하고 자꾸 불안함이 몰려와. 이게 내가 본능적으로 이 세계에 강림한 마왕의 흔적을 느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닌가 봐. 델카란을 쓰러뜨렸으면 불안함이 가셔야 하는데, 그게 안 되고 있어."

    "음……."

    아펠드리체가 미묘한 얼굴로 이지혁을 바라보았다.

    다른 사람이 이런 말을 했다면 웃어넘겼을 것이다. 이유 없이 찾아온 불안함이라는 것에 비중을 둘 만큼 아펠드리체는 한가하지도 않고, 인간의 육감이라는 것을 신뢰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이지혁의 일이라면 다르다.

    그의 육감이 비상하다는 것은 아펠드리체도 몇 번이고 경험한 일이었다.

    게다가 그가 이상함을 느낄 만큼의 불안함이라면 그 실체가 있을 것이다. 이전에도 그랬듯이.

    "아직 문제가 끝나지 않았군요."

    "그렇겠지. 그런데 또 이상한 게, 불안하기는 한데 위기감은 안 든단 말이야."

    육감 센서가 이상하게 작동하고 있었다.

    "지금은 고민해 봤자 별 소용이 없겠네요. 일단은 닥친 일부터 처리해야죠."

    "닥친 일?"

    뭐가 닥쳤다는 말인가.

    마왕을 물리쳤는데 새로 닥친 일이 있다고?

    "당신이 잠든 사이에 많은 일이 일어났어요."

    "이틀 사이에?"

    "확실히 인간이란 이해할 수 없는 존재들이더군요. 제가 말을 하는 것보다는 직접 보는 게 나을 것 같아요."

    "뭔 소린지 모르겠군."

    이지혁은 옷을 챙겨 입으며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저 모호한 말투를 고수하는 아펠드리체와 대화를 계속하느니 차라리 그가 직접 알아보는 것이 차라리 속 편하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오자 거실에 심각한 얼굴로 어머니와 동생이 소파에 앉아 TV를 보고 있었다.

    "아, 지혁아. 몸은 괜찮니?"

    "괜찮아요."

    "…너는 왜 나갈 때마다 다쳐서 오니? 엄마 속상하게."

    "이번에는 그냥 좀 피곤했어요. 그런데 저거 뭐예요?"

    이지혁이 TV 화면을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어?"

    이지혁의 동공이 크게 확장된다.

    TV 화면에서는 전차가 불을 뿜는 모습이 느릿하게 재생되고 있었다.

    "뭐야?"

    전차는 별달리 놀랄 일이 아니었다.

    문제는 그 전차가 불을 뿜는 대상이 같은 인간이라는 점이었다.

    "전쟁인가?"

    이지혁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몬스터와 인간의 싸움.

    마왕과 인간의 싸움.

    그 지옥 같은 전투의 연속에 이제 인간과 인간의 전쟁까지 벌어지기 시작했다.

    "제기랄."

    이지혁의 주먹이 꽉 움켜쥐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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