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 리터너-45화 (45/118)
  • [■] 한 번 막 나가보기로 했거든 [■]

    ─────

    델카란은 긴장된 눈으로 이지혁을 노려보았다.

    그의 힘은 미약하다.

    과거 그저 움직이는 것만으로 주변을 숨 막히게 만드는 마력을 뿜어내던 아흔아홉 번째 마왕과 지금의 이지혁은 전혀 다른 존재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과거의 이지혁은 너무나도 강했다. 그의 주인마저도 충돌을 피할 만큼 말이다.

    "남겨진 꼴은 너무도 잔인하군."

    힘을 잃어버린 이지혁을 보는 것은 영 유쾌한 기분은 아니었다.

    인간으로서 정점의 자리에 올랐던 자가 다시 나약한 인간으로 떨어지는 것.

    어떤 마족들은 그 광경을 보고 꼴좋다고 할지도 모르겠지만, 아쉽게도 델카란은 그런 광경을 보며 즐거워할 수 있는 성격의 소유자가 아니었다.

    하지만 눈앞에 보이는 자는 적.

    반드시 절멸시켜야 하는, 지상명령이 떨어진 적이다.

    '그리고 방심해서는 안 되겠지.'

    어떤 이유가 있어서든 저 정도의 마력으로 벨트레체를 궁지로 몰아넣은 이지혁이다.

    아무리 열세 번째 마왕의 도움이 있었다고는 하나 저 정도의 마력으로 벨트레체와 승부가 되었다는 것 자체가 말이 되지 않는다.

    썩어도 준치라고.

    마력의 양은 줄었다고 하나 마력의 컨트롤과 활용에 있어서는 이지혁을 능가할 존재가 없다.

    마나 생명체라고 불리는 드래곤조차 이지혁의 정밀한 마력 활용에는 감탄을 거듭할 뿐이었다.

    "인간이기에 대단한 일이지. 그리고……."

    인간이기에 가능한 일일지도 모른다.

    일만 년 단위의 삶을 사는 드래곤.

    수명이란 개념이 없는 마족.

    그들에게 있어서 시간이란 무한에 가까운 것이다. 급할 것도 없고, 굳이 열심히 노력을 해야 할 필요도 없다.

    드래곤에게 마법이란 주어진 것이고, 마족에게 힘이란 가지고 태어나는 것이다.

    마법을 연구하는 드래곤도 있지만, 그들에게 있어서 마법이란 숨 쉬는 것과 같다.

    숨 쉬는 것을 연구하는 인간이 없듯이, 마법을 연구하는 드래곤도 흔치 않은 것이다.

    그들의 연구는 마법, 그 자체가 아니라 마법을 활용했을 때 벌어지는 현상에 집중되어 있다.

    하지만 인간은 다르다.

    인간은 모든 것을 연구한다.

    필요를 느끼면 연구를 시작하고, 그 연구를 바탕으로 학문을 세운다.

    타 종족들이 보기에는 광적일 정도로 연구하고 또 연구하여 최적의 루트를 찾아내는 것에 집착한다.

    그 결과?

    인간은 불과 백 년도 살지 못하는 주제에 아크 메이지를 찍어내 버리는 종족이다.

    아크 메이지를 상대하기 위해서는 최소 웜급의 드래곤이 필요하다. 드래곤이 웜급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이천 년이라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러나 인간은 불과 백 년이라는 시간만을 이용하여 드래곤의 이천 년을 따라잡는 종족인 것이다.

    그리고 그 인간에게 무한의 시간이 주어지게 된다면 어떻게 되는지를 이지혁이 보여주었다.

    인간의 열정과 무한의 시간.

    그 결과가 바로 멸망의 좌다.

    "하지만 그 열정으로 지금의 전력 차를 메울 수 있을까?"

    "뭐라는 거야?"

    이지혁이 델카란을 보며 이죽였다.

    저랬지.

    마계에서도 저랬다.

    어떤 상황에서도 저 주둥이는 절대 멈추지 않았지.

    "하지만 아흔아홉 번째 마왕이여, 그대는 이제 그저 인간일 뿐이다."

    "그런 소리 지껄이다가 뒈진 놈이 있었다니까 그러네."

    "후후후."

    델카란은 더 이상의 대화를 그만두기로 했다.

    우우웅!

    이 이상의 대화는 몸으로 나누면 된다.

    "받아보아라."

    델카란의 육체에서 뻗어져 나간 검은 마나가 거대한 뱀의 형상으로 화하더니, 이지혁에게로 쏘아져 나갔다.

    육중한 중량감이 그대로 느껴지는 뱀이 이지혁을 향해 날아든다.

    "흠……."

    이지혁이 그 광경을 보며 전신으로 검은 마나를 뿜어냈다.

    벨트레체는 육체를 무기로 이용하는 마족이었다. 굳이 분류를 하자면 근접계라고 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델카란은 방출계에 가까운 마왕이다.

    "오히려 이쪽이 쉽지."

    이지혁의 육체에서 뿜어져 나간 마나가 앞으로 쏘아지더니, 허공에 거대한 소용돌이를 만들어냈다.

    "튕겨라!"

    콰아아아앙!

    델카란의 뱀이 이지혁의 소용돌이에 부딪치면서 튕겨 나간다.

    "호오?"

    델카란이 탄성을 흘렸다.

    응축된 마나를 저런 식으로 튕겨낸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이지혁은 지금 마나의 회전력과 정확한 계산으로 극소의 마나만을 이용하여 자신의 마력을 튕겨낸 것이다.

    따라 하라고 해도 하지 못할 신기였다.

    마나의 활용에 있어서만큼은 드래곤은 물론, 마왕들조차 범접하기 힘들 것이라는 평가가 무색하지 않았다.

    하지만…….

    "아오!"

    이지혁이 가슴을 움켜쥐었다.

    분명 튕겨냈다.

    더 이상 완벽할 수 없을 만큼 튕겨냈는데도 그 여력만으로 내부가 진탕되고 입안에는 쇠 맛이 가득 느껴진다.

    "무식하게 마력만 많아서는."

    "그대가 하기에는 민망한 말 아닌가?"

    "쳇."

    하기야 이전의 이지혁은 마력의 양으로는 세상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존재였으니까.

    마력의 근원을 손에 넣은 자였다.

    "이것도 받아보지."

    카아앙!

    조금 전보다 두 배는 더 큰 뱀의 형상이 이지혁을 덮쳐 왔다.

    "…적당히라는 걸 모른다니까."

    이지혁의 우수가 앞으로 뻗어졌다.

    우우웅.

    크게 진동하는 소리와 함께 이지혁의 우수 앞에 거대한 게이트가 나타났다.

    끼이이이익!

    공간이 뒤틀리는 파공음과 함께 이지혁이 만들어낸 게이트 안으로 델카란의 뱀이 빨려 들어갔다.

    "받는 게 힘들면 없애 버리면 그만이지."

    "큭큭."

    델카란은 그런 이지혁을 보며 낮게 웃었다.

    "웃어?"

    이지혁이 미묘한 눈으로 델카란을 바라보았다.

    "너무 여유가 넘치는데?"

    그 여유… 없애주지.

    이지력의 양손에서 뻗어져 나온 촉수가 등 뒤를 향해 날아들었다.

    "으으……."

    자신을 향해 날아드는 촉수를 본 서아영이 노골적으로 싫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딱히 촉수를 피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지금은 고통을 피할 때가 아니다.

    저 마왕을 막아내지 못하면 무슨 일이 벌어질는지는 빤하지 않은가.

    "진짜 싫다니까."

    서아영은 자신의 몸을 감싸는 촉수를 느끼면서 몸을 떨었다.

    촉감 자체는 실제 뱀과 같지 않다고 하지만, 뱀과 같은 형상의 촉수가 몸을 감싸는 것은 역시나 좋은 기분이 아니었다.

    "으……."

    서아영이 이를 악물었다.

    촉수를 통해 흑마력이 육체 안으로 들어온다.

    흑마력이 전신을 질주하며 에테르와 섞여든다. 흑마력을 거부하는 에테르가 미쳐 날뛰며 전신에 찢어지는 듯한 격통이 느껴진다.

    "흐으읍."

    꽉 다물어진 이가 부러질 듯 맞물린다.

    몇 번이고 겪어보았지만, 아무리 겪어도 이 고통은 절대 익숙해지지 않았다.

    서아영의 눈에 핏발이 섰다.

    이 고통을 겪게 만든 델카란에 대한 분노와 증오가 절로 끓어올랐다.

    "후웁."

    서아영이 짧게 호흡을 끊어냈다.

    분노에 몸을 맡기면 안 된다는 것은 몇 번이나 들었다.

    서아영은 이성을 유지하기 위해 입술을 꽉 깨물었다.

    비릿한 피 내음이 느껴지자 순간 시야가 확 밝아지는 느낌이었다.

    "가자!"

    서아영의 말에 좌우에서 짐승 같은 호응 소리가 들려왔다.

    그 호응을 들으며 심장이 끓어오른 서아영이 양손에서 거대한 불덩어리를 피워 올리며 앞으로 돌진했다.

    "흐음?"

    델카란은 그 광경을 보며 눈을 좁혔다.

    "흑마력을 받아들여?"

    이건 정보에 없던 일이었다.

    물론 마계와의 통신에 제약이 걸려 있는 이상 중요하지 않은 일은 보고하지 않을 수도 있는 일이다. 그러니 모른다는 게 이상하지는 않다.

    하지만…….

    "인간이?"

    이지혁이나 흑마도사와 같은 존재들이 있으니 놀랄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마족과 계약을 맺지 않은 인간들이 흑마력에 직접 노출되고도 변이하지 않는다는 것은 확실히 이상한 일이었다.

    "과연 아흔아홉 번째 마왕."

    변이가 시작되는 접점을 한 명, 한 명 일일이 파악하여 적정량의 마력을 주입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일부러 좋게 보려고 하는 것도 아닌데도 전투를 시작한 지 1분도 되지 않아 여러 가지로 놀라게 되는 델카란이었다.

    그리고 더욱 재미있는 것은 주입된 흑마력에 비해 저들의 기세가 놀랄 만큼 상승했다는 점이다.

    그들의 육체 내부에서 변형된 흑마력이 심상치 않은 기운을 뿜어내고 있었다.

    "재미있는 일이군."

    이 세계의 인간들이 가지고 있는 기운과 흑마력이 뒤섞이면서 상승작용을 일으키고 있었다.

    이래서 새로운 세상은 재미있다니까.

    델카란이 자신에게 날아드는 불덩어리를 보며 양손을 뻗어냈다.

    "하압!"

    이지혁의 앞으로 커다란 마법진이 생겨나더니, 게이트가 열린다.

    "와라!"

    우우웅!

    게이트가 진동하더니, 그 입을 쩌억 벌린다.

    카아아아아!

    그리고 그 안에서 야수의 울부짖음과 함께 무언가가 튀어나왔다.

    "하……."

    최정훈이 그 광경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런 몸으로 우렁차게 울부짖지 말라고!"

    최정훈의 시선 끝에는 앙증맞은 몸으로 뛰쳐나오는 오식이가 있었다.

    이지혁의 촉수가 뻗어져 나가 오식이의 육체에 박혀든다.

    커어어엉!

    오식의 전신이 뒤틀리는가 싶더니, 순간적으로 부풀어 올랐다. 거대한 오거의 형체를 되찾은 오식이가 붉은 눈을 빛내며 앞으로 돌진했다.

    '더 커진 것 같은데?'

    처음 오식이를 봤을 때를 생각해 보면 확연히 차이가 난다.

    지금의 오식이는 그가 처음 보았을 때보다 적게 잡아도 두 배는 더 커졌다.

    크르르륵!

    다른 게이트에서 히드라와 대망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다른 하나의 게이트에서는 흑마력으로 만들어낸 거대한 매가 하늘 위로 솟아올랐다.

    "하아아……."

    이지혁의 등 뒤에서 비음과도 같은 목소리가 새어 나오더니, 어둠의 정령 티리에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하아?"

    티리에는 이지혁의 주변을 유영하듯 떠돌다 그의 귓가에 낮은 한숨을 불어넣었다.

    "날려 버려!"

    우우우웅!

    이지혁의 머리 위로 떠오른 티리에의 육체에서 검은 빛줄기가 터져 나온다!

    콰아아아앙!

    레이저처럼 쏘아진 검은 빛줄기가 델카란의 육체를 관통했다.

    "큭?"

    불의의 일격을 얻어맞은 델카란이 불쾌한 신음을 내었다.

    "정령인가?"

    이지혁은 생각보다 많은 것을 가지고 있었다.

    이 정도의 정보는 얻지 못했는데…….

    이지혁을 경시하지 않겠다고 마음먹었으면서도 그에 대한 자세한 정보를 듣지 않은 델카란의 실수였다.

    "하지만 이 정도로는 안 된다."

    "알아."

    이지혁이 히죽 웃었다.

    마지막 남은 게이트가 공명을 시작했다.

    우우웅!

    게이트가 지체 없이 쫘악 열리더니, 그 안에서 광기에 몸을 맡긴 몬스터 떼가 터져 버린 송수관에서 뿜어져 나오는 물처럼 광포하게 질주했다.

    "음?"

    몬스터?

    이 세계에서?

    델카란의 붉은 눈이 흔들렸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격을 연속으로 얻어맞은 델카란이 새삼스러운 눈으로 이지혁을 바라보았다.

    "잘도 여기까지……."

    흑마력 하나 없이 떨어진 세계에서 잘도 이만한 전력을 다시 손에 넣었구나.

    그 상대가 델카란이 아니었다면…….

    웬만한 상급 마족만 되었더라도 이 정도 전력이라면 얼마든지 상대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조악하군."

    마계의 마왕에게 걸맞은 상대들은 아니었다.

    이지혁 역시 그것을 모르지 않을 텐데?

    "잊었다면 다시 떠오르게 해주지."

    마왕의 무서움을.

    마왕이 어떤 존재인지 말이다.

    델카란의 망토가 펄럭이더니, 그 안에서 수십 줄기의 검은 뱀들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 * *

    "세상에……."

    마이클 더글라스는 눈앞에서 벌어지는 광경을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진짜 인간인가?"

    그도 능력자를 보며 살아온 사람이다.

    5년 전, 블랙 먼데이가 일어났을 때부터 그는 영국의 능력자들을 통솔해 왔고, 지금까지 이끌어왔다.

    그 와중에 보아온 능력자들은 수도 없었다.

    유럽이라는 특성상 타국의 능력자들과의 교류 역시 적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그조차도 지금 이지혁이 보여주고 있는 일을 과연 능력자의 영역으로 잡아야 하는 것인가에 대한 혼란에 빠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저게 뭡니까?"

    크리스토퍼는 마이클의 물음에 혀를 차며 대답했다.

    "그래서 내가 지휘권을 달라고 한 걸세."

    "아니, 대체 이게 무슨……."

    마이클 더글라스는 말을 잇지 못했다.

    지금 자신이 눈으로 보고 있는 것이 정말 현실인가?

    "같은 사람이지 않습니까?"

    "우리 기준으로 보면 능력자들도 인간 같지 않기는 마찬가지 아닌가."

    "그렇다고 해도 저건……."

    "정도를 넘었다고?"

    "…예."

    공포가 들 정도였다.

    인간이 시커먼 연기를 마구 뿜어내며 마수들을 부리고, 전신에서 촉수를 뿜어내는 광경을 본다면 사람들은 그를 뭐라고 부를까?

    "악마 같군요."

    크리스토퍼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가 처음 이지혁이 싸우는 것을 보고 내렸던 평가를 마이클 더글라스가 그대로 다시 들먹이고 있었다.

    하기야 사람이라면 다들 비슷하게 생각할 수밖에 없겠지.

    벨트레체와 싸우는 이지혁을 보고 누가 인간과 악마가 싸운다고 생각하겠는가.

    악마와 악마의 싸움에 인간들이 휘말려 들어갔다는 것이 정확한 표현이겠지.

    크리스토퍼 역시 그런 딜레마에 빠졌다.

    "인간을 규정하는 건 나약함이 아니지."

    "……."

    "잊지 말게. 모습은 저럴지 모르겠지만, 저 사람은 지금 우리 대신 피를 흘리고 있는 거야. 그를 혐오스러워하는 자네를 지키기 위해서 앞장 써서 싸우고 있는 거네."

    "…제가 멍청했습니다."

    "그렇게까지 자책할 것은 아니지만, 여하튼 겉모습 때문에 본질을 놓치지는 말게. 앞으로도 말이야."

    그리고 다행인 줄 알라고.

    이지혁을 먼저 겪고 저 광경을 봤다면, 두 배는 더 그런 심정이 들었을 테니까.

    크리스토퍼는 굳이 뒷말을 붙이지 않았다.

    "화력을 집중할 준비를!"

    "예!"

    부관의 대답을 들으며 크리스토퍼는 미간을 좁혔다.

    틈이 있을 때마다 원거리 공격을 퍼붓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다.

    문제는 근접형 능력자들의 투입 시기.

    마왕에게 달려들라는 말이 가서 죽으라는 말과 다르지 않다는 것은 알고 있다.

    하지만 해야 하는 일이다.

    이지혁을 보호해서 끝까지 그가 마왕에게 화력을 쏟아낼 수 있게 만드는 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대처였다.

    "도와주소서."

    크리스토퍼는 이제는 반쯤 버려 버린 신앙에 대고 기도를 했다.

    * * *

    크아아아아아!

    오식이는 거친 괴성을 토해내며 델카란에게로 달려들었다.

    델카란은 그 광경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오거 따위가?"

    마족이라고 할 수도 없는 마수 따위가 감히 마왕에게 이를 드러낸다?

    이지혁의 지배하에 있기에 가능한 일이라는 것 정도는 알 수 있다.

    하지만 그 어떤 이유가 있다 하더라도 기분이 나쁜 것은 기분이 나쁜 것이었다.

    뻗어진 델카란의 우수에서 검은 마력이 용솟음치더니, 이내 거대한 뱀의 형상으로 화해 오식이에게 날아들었다.

    크륵!

    오식이가 자신에게 날아드는 마력의 덩어리를 보고는 양팔로 전면을 후려쳤다.

    콰아아아아앙!

    마력과 마수가 격돌하며 귀를 찢을 듯한 폭음이 터져 나왔다.

    그런 후, 오식이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가공할 속도로 뒤로 튕겨졌다.

    "큭."

    이지혁이 그 광경을 보고는 오식이에게 촉수를 날렸다.

    양팔이 송두리째 날아가고, 단단하던 육체는 갈비뼈가 훤히 드러날 만큼 처참하게 박살이 났다.

    오거의 강인한 생명력이 아니었다면 일격에 즉사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심각한 상처였다.

    이지혁은 오식이의 육체에 촉수를 박아 넣고는 마나를 주입했다. 흑마력을 퍼부어 대자 오식이의 육체가 재생을 개시했다.

    '일격에.'

    이지혁이 이를 갈았다.

    아무리 격의 차이가 있다고는 하나 그동안 이지혁의 마나를 끊임없이 빨아들여 이제는 오거라고 하기에도 무색한 존재가 되어버린 오식이를 단 일격에 죽음 직전까지 몰아가다니, 과연 마왕이라고 해야 할까.

    그 강력함을 다시 한 번 실감하며 이지혁은 신중하게 수인을 맺었다.

    "달려들어!"

    그와 동시에 입으로는 소리친다.

    게이트에서 빠져나온 몬스터 떼들이 제멋대로 얽혀들며 앞으로 질주하고 또 질주했다.

    발을 헛디딘 몬스터들이 바닥을 구르자 그 위로 다른 몬스터들이 쓰러진 몬스터를 짓밟으며 끝도 없이 앞으로 나아간다.

    카르르르르!

    크아아아아!

    괴성과 고통에 찬 비명이 한데 뒤섞여 끔찍하게 울려 퍼진다.

    "오랜만에 보는군."

    델카란은 그 광경을 보며 묘한 감흥에 빠졌다.

    아무리 마수들이 주인에게 복종한다고는 하나 저리 광기에 가까운 모습으로 명령에 절대충성하는 모습은 쉽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델카란 역시 마계에서는 군단을 이끄는 마왕이지만, 한 번도 마수들이 저런 모습을 보이게 만든 적은 없었다.

    "마력이 약화되었음에도 그 지배력은 굳건하다는 것인가?"

    과연 아흔아홉 번째 마왕.

    하지만 안타까운 일이다.

    과거 이지혁의 지배를 받던 마수들은 마계에서도 위험스럽기 짝이 없는 것들이었다. 그 마수들이라면 아무리 자신이라 하더라도 전력을 다해 상대해야 할 것이고, 그 수를 생각한다면 이길 수 있다고 확신할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저 나약해 빠진 찌꺼기들이 아무리 광기에 물들어 달려든다고 하더라도 델카란의 육체까지 닿을 수나 있을까?

    우우우웅!

    델카란의 몸을 둘러싼 망토가 미칠 듯이 펄럭이더니, 이내 뿜어져 나온 마나가 뱀의 형상을 하고는 몬스터들을 향해 마주 달려들었다.

    카아아아!

    "흠?"

    그와 동시에 허공에서 대망이 델카란을 향해 떨어져 내린다.

    "뱀인가?"

    뱀은 델카란의 권속.

    모든 뱀은 델카란에게 본능적으로 복종하게 되어 있다.

    하지만 지금 대망은 델카란을 향해 적의를 드러내며 공격을 해오고 있는 중이다.

    본능의 영역을 초월한 지배력.

    델카란은 살짝 심기가 상하는 것을 느끼며 허공을 향해 손을 뻗었다.

    "이건 조금 기분 나쁜데?"

    우우웅!

    델카란의 우수에서 뿜어진 마력이 부풀어 오른다.

    상공을 가득 메운 듯 느껴지는 거대한 대망보다 몇 배나 더 큰 검은 뱀의 형상이… 델카란에게 날아드는 대망을 그대로 집어삼켜 버렸다.

    콰드드득!

    키이이이이이!

    육체가 으스러지는 소리와 함께 대망의 비명성이 끔찍하게 터져 나온다.

    "갈겨!"

    서아영이 그 광경을 보다가 양손에 머금을 불꽃을 떨쳐 냈다.

    어차피 쉽게 쓰러뜨릴 수 있으리라고는 꿈도 꾸지 않았다.

    "으아아아아아!"

    그녀의 입에서 고함이 터지며 불꽃의 비가 델카란을 향해 떨어진다.

    이어 그녀의 뒤로 형형색색의 에테르들이 허공을 격해 델카란을 향해 날아들었다.

    빛과 눈보라, 불꽃과 바람의 칼날이 델카란을 향해 끝도 없이 쏟아져 내린다.

    "지원하라!"

    틈을 잡은 크리스토퍼의 입에서 비명과도 같은 고함이 튀어나오자 상황을 주시하고 있던 미국과 영국의 능력자들이 에테르를 날리기 시작했다.

    콰아아아앙! 콰아앙!

    에테르와 에테르들이 섞여들며 폭발이 연쇄적으로 일어났다.

    마치 폭격기에서 끝도 없이 폭탄이 쏟아져 내리는 것처럼 연쇄적인 폭발이 일어난다.

    이지혁은 그 광경을 보며 수인을 맺었다.

    그러자 이지혁의 육체에서 불꽃같기도 하고, 연기 같기도 한, 검은 마나들이 뭉클뭉클 피어올랐다.

    "끄으으윽."

    이지혁의 눈에 핏발이 섰다.

    과도한 마나를 뽑아내자 육체가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인간의 몸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수준의 마나들이 육체를 질주하며 뼈를 부수고 살을 터뜨렸다.

    개미 떼가 달려들어 전신을 물어뜯는 것처럼 지독한 고통.

    순간적으로 의식이 아득하게 날아가 버릴 것만 같은 격통 속에서도 이지혁은 수인 맺기를 멈추지 않았다.

    "으아아아아아!"

    고함을 질러 순간적으로 고통을 억누른 이지혁의 양손으로 주변의 마나들이 모여들더니, 이내 허공으로 솟아올랐다.

    검은 불꽃이 허공을 질주하며 거대한 마법진을 만들기 시작했다.

    이지혁의 칠공에서 핏줄기들이 흘러내렸다.

    여러 번의 공격 따위는 의미가 없다.

    단 한 번!

    모을 수 있는 마나를 모조리 끌어모아 단 한 번에 박살을 내버려야 한다!

    "뭉쳐라!"

    이지혁의 목소리와 함께 허공을 질주하던 마나들이 마법진의 정중앙으로 모이기 시작했다.

    이지혁의 양팔에 매달린 드래곤 하트가 검게 빛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티리에!"

    티리에의 육체가 허공으로 둥실 떠오르더니, 에테르의 폭격 사이로 희미하게 보이는 델카란의 동체를 향해 검은빛을 사정없이 날려 대기 시작했다.

    '조금만 더!'

    계산은 끝났다.

    준비도 끝났다.

    남은 것은 마력을 모아 날릴 수 있는 조금의 시간.

    그 시간을 버텨내도록 하기 위해서 이 모든 준비를 해온 것이었다.

    "크으윽!"

    이지혁의 육체 밖으로 빠져나온 마나들이 드래곤 하트를 통해 한층 증폭되어 허공에 그려진 마법진을 향해 빨려 들어간다.

    고오오오오!

    마나가 허공에서 뭉치고 또 뭉치며 검은 먹구름과 같은 형태로 변해간다.

    파지지직!

    과도하게 응축된 마나들은 마치 스파크가 튀듯 들썩이고, 화염이 피어오르듯 일렁인다.

    조금만 더!

    이지혁의 눈이 피눈물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육체 안에 있는 마력을 모조리 뽑아내겠다는 기세로 이지혁이 허공을 향해 마력을 뿜어냈다.

    흑마력을 감당하지 못하는 육체가 금방이라도 붕괴할 듯이 비명을 질러 대지만, 이지혁은 육체의 위험신호를 무시했다.

    어차피 델카란을 쓰러뜨리지 못하면 남는 것은 파멸과 죽음뿐이다.

    "으아아아아앗!"

    이지혁이 육체에서 흘러나온 마지막 마나가 마법진으로 빨려드는 것과 동시에 델카란의 머리 위에 뭉친 거대한 흑마력의 구름이 가공할 기운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아아아……."

    어떤 지시도 없었건만 델카란을 향해 에테르를 뿜어내던 능력자들이 모두 손을 멈추었다.

    그러고는 멍하니 허공을 메우고 있는 마력의 구름을 홀린 듯이 바라보았다.

    그 구름에서 뿜어져 나오는 가공할 기운이 그들의 이성마저 앗아가 버린 것이다.

    "뒈져라아아아앗!"

    이지혁의 피를 토하는 듯한 외침과 함께 먹구름이 바닥을 향해 하강하기 시작했다.

    폭격과도 같은 에테르의 공격 탓에 아직 가라앉지 않은 흙먼지 사이로 델카란이 고개를 들었다.

    "하?"

    하늘을 가득 메운 채 떨어지는 마력의 구름을 본 델카란의 붉은 눈이 마구 일렁였다.

    검은 연기가 뭉클뭉클 피어오르고, 검은 뇌전이 벼락 쳤다.

    검은 화염이 세상 모든 것을 태워 버릴 듯 강렬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그것은 어둠이요, 힘이었으며, 세상을 무너뜨릴 무언가였다.

    이지혁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마력의 구름.

    마계의 마왕들조차 보는 그 순간 도망가기에 바빴던 이지혁의 트레이드마크가 시전된 것이다.

    '이건 위험!'

    이성이 도주를 채 명하기도 전에 검은 구름은 델카란의 육체를 그대로 집어삼켜 버렸다.

    * * *

    콰아아아아아아!

    구름은 바닥에 닿는 즉시, 맹렬하게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큭."

    서아영은 그 광경을 보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처음 본 광경은 아니다. 이전에도 이지혁의 마법은 몇 번이나 봐왔다.

    하지만 지금 눈앞에서 벌어지는 사태는 이전까지 보아오던 마법과는 그 위력이 다르다고 확신할 수 있었다.

    서아영이 저 근처에 있다면 마력이 소용돌이치는 풍압만으로도 전신이 찢겨 나갈 것이다.

    "어마어마하네요."

    윤혁규의 말에 서아영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델카란은 강했다.

    벨트레체에게서 느낀 공포를 델카란에게서도 똑같이 느낄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당해낼 수 없는 마왕이라고 하더라도 저 마력의 폭풍 안에서 버텨낼 수 있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저 이상의 위력을 내려면 대체 뭘 해야 하는 걸까?

    '괴물도 아냐, 저건.'

    이 광경을 만들어낸 사람이 평소에 그녀와 함께 웃고 떠드는 사람이란 사실이 섬뜩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미국의 능력자들을 교육시키네, 마네로 징징대고, 엄마가 명품 백을 샀다고 징징대던 사람이 지금 그녀의 눈앞에서 세상 모든 것을 부숴 버릴 것 같은 마력의 폭풍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그 괴리감이 서아영을 떨게 만들었다.

    "아무리 마왕이라도 저건 못 버팁니다."

    "…그럴지도."

    윤혁규의 확신에 찬 발언에 서아영은 애매하게 동조할 수밖에 없었다.

    확실히 그녀나 윤혁규의 상식으로 미루어 볼 때, 피와 살로 이루어진 생명이라면 저 안에서 형체를 유지할 수는 없을 것이다. 절대로!

    하지만 그녀와 윤혁규는 마왕이라는 존재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는 것일까?

    벨트레체를 쓰러뜨렸다고 해서 너무 쉽게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콰콰콰콰콰!

    그녀가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에도 검은 구름은 미칠 듯이 회전하며 타올랐다.

    "사라진다."

    그러고는 천천히 흐려지기 시작했다.

    죽었겠지?

    죽었어야 한다.

    서아영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만약 이 공격으로도 죽지 않는다면, 이지혁은 이만한 공격을 다시 해낼 수 있을까?

    반드시 이 공격으로…….

    "아……."

    하지만 마력의 구름이 걷힌 곳을 본 서아영은 침음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흙먼지가 가라앉는 곳 사이로 어렴풋하게 어떠한 형체가 보이는 것을 확인하고 만 것이다.

    "그걸 버텨냈다고?"

    서아영의 눈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이윽고 흙먼지가 모두 가라앉고 나자 그곳에 우뚝 서 있는 델카란의 모습이 드러났다.

    그것을 버텼다는 것은 굉장한 일이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델카란이라고 해서 멀쩡하지는 않았다.

    그의 육체를 덮고 있던 망토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징그러워."

    서아영이 델카란을 보며 기겁을 했다.

    "흐흐흐."

    델카란은 낮은 웃음을 흘리며 이지혁을 노려보았다.

    망토가 사라진 탓에 드러난 그의 육체는 끔찍하기 짝이 없었다.

    마치 수천 마리의 뱀이 얽혀 있는 듯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모든 신체 부위가 뱀으로 이루어진, 기이한 형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잘도 이 정도의 마법을 사용하는군."

    델카란 역시 무사하지는 못했다.

    육체에 돋아나 있는 수백 개의 뱀 머리 중 삼분지 일에 달하는 뱀의 머리가 축 늘어져 있다.

    곳곳에는 잘려 나간 머리로 뿜어져 나오는 노란 핏줄기가 보이기도 했다.

    "이지혀어억!"

    델카란의 울부짖음.

    하지만 이지혁은 그 울부짖음에 답해줄 수가 없었다.

    "끄으……."

    반쯤은 붕괴되어 버린 듯한 육체를 추스르는 것만 해도 버거웠으니까.

    조금만 정신을 놓아버려도 의식은 아득하게 날아가 버릴 것이고, 그의 육체는 무너지기 시작할 것이다.

    스슷.

    그림자 속에서 도가윤이 솟아오르더니,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한 이지혁을 부축했다.

    휘청이듯 도가윤의 어깨에 기댄 이지혁이 긴숨을 몰아쉬었다.

    "마왕이란 것들은… 더럽게 끈질기다니까."

    양심상 그 정도의 공격을 맞았으면 죽어주는 것도 예의다. 그런데 저리 아등바등 버텨내 버리면 상대하는 쪽은 어쩌라는 말인가.

    "새삼스럽게."

    이지혁의 등 뒤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리체?"

    아펠드리체가 도가윤이 부축하고 있는 이지혁에게로 다가와 그의 육체를 살피기 시작했다.

    "늦었잖아, 이 도마뱀아."

    "많이 늦지는 않았어요. 육체 손상이 너무 심해요."

    그런 건 말 안 해도 알아.

    이지혁이 바닥을 꽉 누르듯 딛고 서며 델카란을 노려보았다.

    "피해 없이 어떻게 할 수 있는 놈이 아니잖아."

    "그렇기는 하죠."

    아펠드리체와 함께 나타난 로아벨과 하이 엘프 레아, 그리고 베히모스가 이지혁의 등 뒤에 포진했다.

    "거, 미친 엘프 하나 데리고 오는 데 뭐가 이리 오래 걸려?"

    "정확한 위치를 잘 몰라서 게이트를 몇 번이나 열었어요."

    "도마뱀 주제에 그거 하나 똑바로 못한다고?"

    아펠드리체는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이곳은 제 세계가 아니잖아요."

    "쳇."

    이지혁은 가볍게 혀를 찼다.

    델카란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조금의 전력이라도 더 필요하다고 판단한 이지혁은 아펠드리체를 통해 레아를 로아벨에게 보냈다. 그녀를 설득하여 데려올 수 있는 가장 적격인 이가 레아였으니까.

    하지만 생각 외로 시간이 걸려 한창 전투가 치열하게 진행되는 중에야 그들이 합류하게 된 것이다.

    "이제 어쩔 셈이죠?"

    "글쎄."

    이지혁도 조금은 난감한 표정으로 델카란을 바라보았다.

    잘려 나간 뱀의 머리들이 다시 돋아나고 있었다.

    그도 마족.

    마력이 끊기지 않는 이상 그들의 육체는 끊임없이 재생된다.

    마족을 상대하는 것은 상대의 육체를 얼마나 부수었는가가 아니라 상대의 마력을 얼마나 갉아냈는가의 싸움이다.

    "그래도 조금은 피해를 입을 거라 생각했는데……."

    이전의 이지혁이었다면 지금의 일격으로 델카란을 회생 불가 상태로 만들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무리였다.

    아무리 같은 마법을 시전한다고 하더라도 마력의 양이 이전과는 차원이 달랐다.

    지금 이지혁이 육체 가득히 채운 정순한 흑마력으로 모아모아 시전한 마법 따위, 과거의 이지혁이라면 손가락 하나로 시전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이럴 때면 베라프에서의 삶이 그리워진단 말이야.'

    과거였다면 델카란 따위를 상대하기 위해 이리 무리를 할 필요가 전혀 없었을 것이다.

    최전성기의 이지혁이었다면 굳이 직접 손을 쓰지 않고 마수들만으로도 델카란 정도의 마족은 상대할 수 있는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지금 그는 멸망의 좌가 아니다.

    인간 이지혁으로서 어떻게든 그를 막아내야 하는 것이다.

    "델카란!"

    하이 엘프 레아의 입에서 고운 얼굴과 어울리지 않는 날카로운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하이 엘프인가?"

    델카란은 낮게 웃었다.

    "재미있는 일이라고 해야 하나? 이 다른 세계에 아흔아홉 번째 마왕과 드래곤 로드, 거기에 하이 엘프까지 와 있군. 이 세계는 대체 뭐지?"

    "증오스러운 너의 끝을 보기 위해 이곳까지 왔다."

    "그 의지는 높이 사지. 하지만……."

    순간, 델카란의 붉은 눈이 일렁였다.

    "누구의 끝을 보겠다고?"

    콰아아아!

    델카란의 마력이 뿜어져 나오며 광풍을 만들어냈다.

    "큭!"

    그 풍압에 밀린 이지혁의 입에서 고통에 찬 신음이 흘러나왔다.

    "베라프가 아닌 곳에서 보니 잊어버린 건가? 나는 델카란, 마계의 고귀한 마왕이다. 내가 너희의 동족을 멸망까지 몰아넣었다는 사실을 잊진 않았겠지?"

    "잊을 리 없지."

    "그래, 그때도 너는 있었지. 그때 너도 나를 막아내지는 못했다. 그런데 동족 하나 없는 이곳에서 네가 나를 죽이겠다는 건가? 어떻게?"

    델카란의 이죽거림에 레아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흥분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고는 있지만, 몇 천 년간 증오를 간직해 온 적을 눈앞에서 보니 도무지 진정이 되지 않았다.

    그의 손에 수많은 엘프들이 죽어 나가는 것을 눈으로 보았다.

    아무리 동족을 집합체의 일부분으로 보는 엘프라고 하나 그 많은 엘프들이 죽어 나가고, 종족이 멸망 직전까지 몰리는 모습을 보았으니 그 증오야 오죽하겠는가.

    "델카라아아안!"

    자비로운 물의 신을 모시는 로아벨마저 얼굴을 일그러뜨린 채 증오를 참아내지 못하고 있었다.

    델카란은 자신에게 쏟아지는 증오를 온몸으로 받으며 즐거움을 느꼈다.

    마족에게 향하는 증오는 그 무엇보다 높은 찬사다.

    "아쉽군. 베라프에서 만났으면 더 좋았을 텐데 말이지."

    "이곳이라도 충분하다. 너를 소멸시켜 주지."

    델카란이 붉은 눈으로 레아를 쏘아보았다.

    "베라프였다면 또다시 동족의 죽음을 그 두 눈으로 지켜보게 만들어줄 수 있었을 텐데. 이곳에는 너의 동족이 하나밖에 없군. 그게 아쉬워."

    "이이!"

    레아가 금방이라도 앞으로 달려들 듯 몸을 들썩이자 이지혁이 이죽거렸다.

    "하, 내가 아는 엘프라는 것들은 어찌 된 게 하나같이 드워프보다 더 다혈질인지 모르겠네."

    "……."

    이지혁의 말을 들은 레아가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가다듬었다.

    전투에서 분노는 언제나 실수를 낳는다.

    지금은 흥분해서는 안 되는 때다. 가슴이 아무리 일렁여도 머리는 차가워야 한다.

    "죄송합니다."

    겨우 가라앉은 레아의 목소리를 들은 이지혁이 고개를 끄덕이며 도가윤의 부축을 밀어냈다.

    "상황이 영 좋지 못하네."

    이지혁이 혀를 찼다.

    이 모든 상황의 원인은 공격력의 부재였다.

    그에게는 수많은 수단이 있다.

    드래곤 로드인 아펠드리체가 있고, 하이 엘프인 레아와 신성력 생성기인 로아벨이 있다.

    그리고 마수의 군단과 능력자들도 자신을 돕기 위해 움직이고 있었다.

    그 전력을 따지자면 웬만한 마왕급의 전력이라 칭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런데 왜 이리 막막하게 느껴지는가.

    그건 바로 공격력의 부재 때문이었다.

    아무리 많은 수를 모은다고 해도 다른 이들의 공격은 델카란의 방어를 뚫지 못한다. 벨트레체 때 그랬듯이 말이다.

    그들 중 델카란에게 직접적인 타격을 입힐 수 있는 자는 오로지 이지혁뿐이었다.

    결국은 이지혁이 해결해야만 하는 것이다.

    '알고는 있지만…….'

    마력만 충분하다면 얼마든지 해결해 주겠지.

    하지만 마력이 보충되지 않는 이상 이지혁은 싸우면 싸울수록 약해져 간다.

    마력이 충분하다고 해도 육체의 손상을 감안하면 강대한 공격을 퍼부을수록 이지혁 쪽의 피해가 더 클 수밖에 없다.

    아무리 생각해도 계산이 서지 않는다.

    "어쩔 셈이죠?"

    아펠드리체 역시 그 사실을 인지하고 있는지 이지혁에게 물어왔다.

    그녀가 본체를 지니고 있다 해도 마왕을 상대하는 것은 버거운 일인데, 본체도 아닌 인간의 육신으로 마왕을 상대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끙……."

    이지혁은 고개를 휘휘 젓고는 아펠드리체를 보며 이를 악물었다.

    "치료해 봐."

    "네?"

    "내 몸 좀 치료해 보라고."

    "…제정신이에요?"

    아펠드리체가 역정을 냈다.

    이지혁의 육체는 흑마력에 말 그대로 찌들어 있다.

    세포 하나하나에 흑마력이 스며들어 있는 것이다.

    흑마력은 본질적으로 백마력, 그리고 신성력과 반발을 일으킨다.

    강대한 마력을 퍼부으면 육체가 어떻게 회복되기야 하겠지만, 그 반발을 고스란히 이지혁이 감당해야 한다.

    그 고통이면 일반적인 인간이라면 천 번은 더 쇼크사하고도 남을 것이다.

    이지혁은 히죽 웃으며 말했다.

    "안 죽어, 안 죽어. 다 생각이 있어서 하는 말이야."

    아펠드리체가 불안한 눈으로 이지혁을 바라보았다.

    * * *

    "다른 방법 있으면 그렇게 하고."

    "이……."

    아펠드리체가 답지 않게 짜증이 어린 얼굴로 이지혁을 노려보았다.

    "일단 시간 좀 벌어볼까?"

    이지혁이 손짓을 하자 대기하고 있던 마수들이 다시금 델카란에게로 달려들기 시작했다.

    "서아영!"

    "네."

    이지혁의 부름에 서아영이 단호히 대답했다.

    이지혁이 말하는 것이 뭔지 알고 있다.

    그녀가 해야 할 일은 이지혁이 회복할 시간을 벌어주는 것, 주문과 주문 사이에 존재하는 공백을 메워주는 일이다.

    서아영이 눈짓을 보내자 김다현이 번들거리는 눈빛을 한 채 앞으로 걸어 나갔다.

    "두 번 죽을 일이야 있겠어?"

    머리까지 끓어오른 혈기를 억제하지 않고 풀어버린 김다현의 눈이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몸을 타고 흐르는 파괴 충동이 델카란에게로 향했다.

    "하아앗!"

    김다현이 앞으로 튀어나가자 서아영이 그 뒤로 화염을 날렸다.

    "스핏!"

    "알고 있습니다!"

    윤혁규도 양손을 앞으로 모아 화력을 집중했다.

    "먹어라!"

    콰아아아아!

    윤혁규의 양손에 모인 화염이 작렬하듯 터져 나가며 김다현의 등 뒤로 따라붙는다.

    델카란은 이 하찮은 생명체들의 발악을 그 두 눈으로 지켜보았다.

    그러면서도 그의 촉각은 저 뒤쪽에서 뭔가를 준비하는 이지혁에게서 떨어지지 않고 있었다.

    "두 번 당해줄 생각이야 없지."

    이들의 공격 따위는 무시해도 된다. 중요한 것은 이지혁이 더 이상의 마법을 사용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캐스터에게 거리를 준 것 자체가 문제인데, 마음껏 공격하게 했다가는 아무리 델카란이라 하더라도 위험을 감수해야 할 테니까.

    델카란이 양손을 모아 앞으로 내밀었다.

    전신에 돋아난 뱀의 머리들이 공명하듯 입을 쩌억 벌린다.

    날카로운 뱀의 이빨이 위협적으로 번쩍였다.

    * * *

    "치료해."

    이지혁이 진심이라는 것은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아펠드리체는 선뜻 그를 치료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하지만 지혁 씨……."

    아펠드리체는 이지혁의 몸을 보며 침음을 삼켰다.

    혈인.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멀쩡한 곳이 하나도 없었다. 눈의 모세혈관이 모두 터져 붉다 못해 검붉게 물든 눈은 섬뜩하기 그지없고, 팔다리의 뼈들도 드문드문 부러져 제대로 서 있지도 못했다.

    근육이란 근육은 다 터져 나갔고, 피부도 쩍쩍 갈라져서 바닥에 고인 피가 흥건하다.

    인간의 몸으로 흑마력을 과도하게 사용한 대가를 몸으로 치르고 있는 것이다.

    '정신은 버티고 있는 게 다행이지만…….'

    그걸 위안 삼을 수 없을 만큼 이지혁의 몸은 심각했다.

    그런데 이 몸이 백마력과의 반발을 버틸 수 있을까?

    아펠드리체의 심정을 알았는지, 이지혁이 심드렁하게 입을 열었다.

    "어차피 이러고 있으면 다 죽어."

    "……."

    "그리고 지금도 죽어가는 것 같은데? 내버려 둔다고 해결될 부상이 아니잖아?"

    아펠드리체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저 혼자서는 무리예요."

    "알아. 그런데 상관없잖아, 신성력이 있으니까. 보조야 확실하지."

    이지혁의 시선이 로아벨에게로 향했다.

    아펠드리체만 있었다면 시도조차 할 수 없는 방법이다. 마법으로 하는 치료와 신성력으로 하는 치료는 그 근본부터 달랐으니까. 하지만 로아벨이 있다면 치료는 가능하다.

    "그러다가……."

    "노닥거릴 시간 있어?"

    이지혁의 말에 아펠드리체는 입을 닫았다.

    마지막 방법은 존재한다.

    하지만 그 방법을 이지혁에게 말할 수는 없었다.

    이지혁도 그걸 몰라서 이곳에서 끝을 내려 하는 것은 아닐 테니까.

    "마음대로 해요."

    결국 아펠드리체는 이지혁의 마음을 돌릴 수 없다는 걸 인정했다.

    "어쩔 셈이죠?"

    둘의 대화를 듣던 로아벨이 물어왔다.

    "…제가 지혁 씨의 몸에 마력을 불어넣어 치료를 할 거예요. 도와주시면 돼요."

    "흑마법사를 신성력과 마법으로 치료하겠다구요? 육체 붕괴가 일어날 거예요."

    "네."

    이만큼이나 흑마력에 찌들어 있는 육체라면 마력의 반발로 육체가 무너질 것이다. 그걸 알고 있기에 저번에도 아펠드리체는 이지혁을 치료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사람을 치료한다는 생각이 아니라 가진 신성력을 모두 부어버릴 기세면 돼요."

    "설마……."

    "붕괴 속도보다 치료 속도가 빠르면 되는 거죠."

    "몸은 그렇다 치고, 정신이 버틸 수 있겠어요? 단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일인데……."

    "보통은 미치거나 혀를 물겠죠. 하지만……."

    저 사람이니까.

    세상 누구보다 고통과 죽음에 익숙한 남자니까 혹시나 버텨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말 참 많네."

    이지혁이 투덜거리며 로에벨을 노려보았다.

    "날 죽이고 싶은 것 아니었어?"

    "……."

    "그러니까 죽일 기세로 쏟아부어 보라고. 혹시 알아? 죽어줄지 말이야."

    "그 말, 후회하지 마세요."

    로아벨이 표독하게 외쳤다.

    "시작해. 더 이야기할 시간 없어."

    "으음……."

    아펠드리체가 두말없이 이지혁의 어깨를 꽉 붙잡았다.

    "할 거예요."

    "빨리하라고!"

    이지혁이 다급하게 외친다.

    안 그런 척하려고 해도 시간을 끌면 끌수록 NDF들이 위험하다는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다.

    아펠드리체가 이지혁을 가만히 내려다보다 이윽고 눈을 질끈 감고 외쳤다.

    "힐링!"

    "브즈고트시여, 당신의 어린 양에게 가호를!"

    이지혁의 육체로 백마력과 신성력이 동시에 쏟아지기 시작한다.

    "흐아……."

    이지혁은 육체에 쏟아지는 고통을 참지 못하고 비명을 내질렀다.

    상상한 것 이상의 고통 앞에 입이 절로 열리며 찢어지는 비명을 질러 댔다.

    하지만 소리는 새어 나가지 않는다.

    신성력과 백마력이 쏟아져 들어온 순간, 터져 나가 버린 성대와 목은 소리조차 만들어내지 못했다.

    이지혁은 바람 빠지는 소리만을 연거푸 토해내며 경련했다.

    "조금만 더!"

    아펠드리체가 그런 이지혁의 모습을 보며 소리쳤다.

    로아벨이 쏟아내는 물빛의 신성력이 주위를 새파랗게 물들이며 이지혁의 육체 안으로 스며 들어간다.

    살이 터진다.

    몸이 녹아내린다.

    하지만 터져 나간 살은 순식간에 다시 복구되었고, 녹아내린 자리에는 어김없이 새살이 돋았다.

    "끄으으으으으으……."

    제자리서 마구 경련을 하던 이지혁의 몸이 축 늘어졌지만, 아펠드리체는 이지혁의 어깨를 잡은 손을 놓지 않았다. 여기서 멈추면 이지혁의 육체는 순식간에 붕괴될 것이다. 그건 이지혁의 완전한 죽음을 의미한다.

    "더! 더!"

    아펠드리체의 재촉에 로아벨이 식은땀을 흘려 대며 이지혁의 몸에 신성력을 남김없이 쏟아부었다.

    짐승처럼 웅크리며 경련하는 이지혁을 보는 아펠드리체의 가슴이 욱신거리기 시작했다.

    '뭐지?'

    그 욱신거림이 뭔지 채 파악할 시간도 없이 아펠드리체는 이지혁의 육신에 마나를 있는 대로 쑤셔 박았다.

    * * *

    "큭큭큭!"

    김다현의 눈이 번들댄다.

    "이 하찮은 것들이!"

    델카란은 짜증이 잔뜩 섞인 얼굴로 김다현을 향해 마력을 방출했다.

    하지만 김다현은 엉망이 된 몰골을 한 채 잘도 그 마력들을 피해냈다.

    한 팔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붉게 물든 단면만이 남아 있고, 두부에서 피를 철철 흘리고 있지만, 그럼에도 김다현은 멈추지 않았다.

    그도 아는 것이다.

    자신이 멈추는 순간, 뒤에서 지원하고 있는 이들은 다 죽는다.

    현재 인류가 델카란에 비해 우위를 가질 수 있는 유일한 부분이 바로 김다현의 스피드였다.

    벌레처럼 앵앵대며 달려들어 이지혁에게 관심을 주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 김다현의 역할이었다.

    그리고 그런 김다현을 지원하는 것이 다른 이들의 역할이었다.

    '이거지.'

    김다현은 날아드는 마력탄들을 맞이하여 허공을 박차며 피해냈다. 그러면서 히죽 웃고야 말았다.

    어찌 보면 지금 이 순간, 인류의 운명을 어깨에 짊어지고 있는 것은 이지혁도, 서아영도 아니고, 바로 자신, 김다현이었다.

    능력자로 각성했을 때부터 언젠가는 이런 위치에서 세상을 구하겠다 다짐하며 살아온 김다현이다.

    이지혁의 등장으로 반쯤은 깨져 버린 그 다짐이 지금 이 순간 되살아나고 있었다.

    과다 출혈로 머리는 어질어질하고, 스쳐 가는 마력탄의 위압만으로도 뼈가 부러질 듯 출렁이는 느낌이지만, 그 어떤 때보다 김다현은 충실감을 느꼈다.

    '나는 패스 드리프터다!'

    그러니까 그런 눈으로 사람을 보지 말라고.

    난 지금 누구보다 잘하고 있잖아. 저 마귀 놈이 열이 올라 어쩔 줄 몰라 하는 게 안 보여?

    "다현 씨!"

    서아영의 다급한 목소리가 김다현의 귀를 찔렀다.

    어?

    왜 그러지?

    순간, 김다현은 등 뒤에서 무언가가 다가오는 느낌을 받고 고개를 돌렸다.

    이미 피했다고 생각한 마력탄이 방향을 돌려 자신을 향해 날아들고 있었다.

    '아…….'

    직감.

    저건 피할 수 없다.

    그리고 김다현의 육체는 결코 저 마력탄을 버텨낼 수 있을 만큼 강하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오직 하나.

    죽음.

    죽음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김다현은 이를 악물었다.

    어차피 피할 수 없는 죽음이라 하더라도 천분의 일 초라도 더 시간을 버는 것이 그의 역할이었다.

    김다현이 전력을 다해 몸을 뒤로 날렸다.

    마력탄이 그를 죽이는 순간을 찰나라도 뒤로 미룰 수 있다면, 이지혁이 회복할 수 있는 시간을 그만큼이라도 더 벌 수 있었다.

    '다솜아.'

    자신의 몸에 적중하기 직전인 마력탄을 보며 김다현은 두 눈을 부릅떴다.

    죽는 순간이라고 해서 눈을 감는 것은 그의 철학에 맞지 않았다.

    마지막의 마지막 순간까지 당당하게!

    "크아악!"

    하지만 김다현의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어느새 그의 앞으로 튀어 오른 박성찬이 에테르를 잔뜩 끌어 올린 채 날아오는 마력탄을 후려쳤다.

    쿠우웅!

    묵직한 타격음과 함께 마력탄이 머리 위로 꺾여 날아갔다.

    "멍청한 놈아!"

    "아?"

    박성찬이 허공에서 몸을 빙글 돌리더니, 김다현을 그대로 걷어찼다.

    "아악!"

    박성찬의 강렬한 발차기에 격중당한 김다현의 몸이 총알처럼 옆으로 날아갔다.

    그런 후…….

    김다현을 구해낸 박성찬은 날아드는 마력탄들의 세례를 온몸으로 받아낼 수밖에 없었다.

    콰앙! 쾅! 콰아앙!

    한 발, 한 발이 마치 미사일이라도 터진 듯한 거대한 폭발을 만들어낸다.

    "박성차아아아안!"

    바닥에 처박혀 겨우 고개를 든 김다현이 폭발에 휩싸인 박성찬을 보며 절규했다.

    "끄윽……."

    덜덜 떨리는 다리로 김다현은 몸을 일으켜 세웠다.

    한 팔이 없다 보니 균형도 잘 잡히지 않고, 속도를 내기도 힘들었지만, 이리 편히 누워 있을 시간이 없었다.

    박성찬은 죽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슬퍼하고 있을 겨를도 없다.

    구해줘서 고맙다는 말을 할 시간조차 낭비다.

    다시! 또다시!

    다시금 달려든다.

    "으아아아아!"

    속도를 높이며 자신에게 달려드는 김다현을 본 델카란이 조금은 질린 듯한 눈으로 진저리를 쳤다.

    "나약해 빠진 것들이……."

    인간들은 생존 본능이란 것도 없나?

    그가 알고 있는 인간들이 이리 처절했던가?

    델카란은 자신이 가지고 있던, 인간이라는 개념이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여기의 인간들은 베라프의 인간들과는 다르다.

    어째서일까?

    "뭐가 다른 거냐?"

    김다현이 붉어진 눈으로 달려들었고, 델카란은 고함을 지르며 양손을 뻗어 마력을 방출했다.

    고오오오오!

    김다현을 향해 델카란이 만들어낸 마력의 뱀이 그 입을 쩌억 벌리며 날라들었다.

    "다현 씨이이!"

    서아영의 고함 소리가 무색할 만큼 김다현의 육체는 너무도 쉽게 검은 뱀에게 덮쳐졌다.

    * * *

    "끄으으윽!"

    이지혁의 육체가 마치 슬라임처럼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안 될 것 같습니다!"

    로아벨이 다급한 어조로 소리쳤다.

    하지만 아펠드리체는 단호했다. 어차피 이 방법으로 안 된다면 모두 죽는다.

    이 세계는 멸망할 것이고, 이지혁 역시 죽는다.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는 쪽으로 도박을 할 수밖에 없었다.

    "지혁 씨!"

    이지혁은 대답하지 못했다.

    기관지가 모두 녹아버린 사람이 대답을 할 수 없는 건 당연했다.

    "조금만! 조금만 더 참아내요!"

    고막이라고 멀쩡할 리가 없다.

    이지혁에게는 아마 자신의 말이 들리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말할 필요도 없다.

    알고는 있다.

    이성적인 사고가 기본일 수밖에 없는 드래곤인 그녀가 의미 없는 일을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었다.

    평소라면 결코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아펠드리체는 소리칠 수밖에 없었다.

    이지혁의 귀에는 들리지 않더라도 간절함을 담아 외칠 수밖에 없다.

    이지혁의 고개가 천천히 들어 올려진다.

    피부가 모두 녹아내려 끔찍한 형상을 한 이지혁이 하늘을 향해 소리 없이 포효했다.

    그리고 그 순간.

    화아아악!

    주변의 마나와 신성력이 이지혁의 몸으로 순간적으로 빨려 들어간다.

    "아!"

    아펠드리체는 그 광경을 보며 탄성을 질렀다.

    빨려 들어간 마나들이 이지혁의 육체를 급속으로 회복시켰다.

    뼈가 갈리고, 근육이 재생성된다. 신경 다발이 새로 자라나고, 피부가 다시금 자리를 잡는다.

    "끄으윽!"

    성대도 다시 본연의 모습을 찾았는지 이지혁이 앓는 소리를 냈다.

    "아… 아……."

    낮은 침음을 토하던 이지혁이 눈을 번쩍 떴다.

    아펠드리체의 얼굴에 환희가 들어찬다.

    도박이나 다름없던 일을 이지혁이 해낸 것이다. 버텨내고 만 것이다.

    하지만 아펠드리체는 완전히 안심할 수 없었다.

    육체는 돌아왔을지 모르지만, 정신까지 돌아왔다고 장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과도한 고통을 겪은 자의 정신이 아주 나가 버리는 것은 흔한 일 중의 하나다.

    더구나 과거에는 불변의 정신을 가지고 있던 이지혁이다 보니 이러한 일에 대한 면역이 어떨지 확신할 수 없었다.

    아펠드리체는 조심스레 이지혁의 표정을 살펴보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굳이 그럴 필요가 없었다.

    아펠드리체가 채 앞으로 다가가기도 전에 이지혁이 입을 열고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으아아아아아아!"

    이지혁이 비명을 지르기 시작하자 아펠드리체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설마…….'

    로아벨도 좋지 않은 얼굴로 아펠드리체를 바라보았다.

    아니겠지.

    하지만 이상할 것도 없다. 그 정도의 고통을 지속적으로 겪었는데, 정신이 멀쩡하다는 게 더 이상하다.

    "안 돼!"

    그 순간, 이지혁이 눈을 번쩍 뜨더니 앞으로 손을 뻗었다.

    우우웅!

    이지혁의 손 바로 앞에 작은 게이트가 만들어졌다.

    "으음?"

    아펠드리체가 흠칫하여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뭘 하는 건가…….

    우웅!

    곧 게이트 안에서 상처투성이가 된 김다현이 구르듯 나와 바닥에 널브러졌다.

    델카란의 공격이 집어삼키기 직전에 이지혁이 게이트를 만들어 김다현을 뽑아내 온 것이다.

    "치료를!"

    상황이 어찌 돌아가는 것인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김다현의 상세 역시 좋지 않다는 것을 순간적으로 파악한 아펠드리체가 로아벨을 채근했다.

    로아벨은 망설이지 않고 김다현에게 신성력을 퍼부었다.

    "끅……."

    그러는 동안 이지혁의 몸이 앞으로 기울어진다.

    아펠드리체가 손을 뻗었지만, 이지혁은 속절없이 바닥으로 털썩, 쓰러졌다.

    "지혁 씨!"

    이어 커다란 소리가 터져 나왔다.

    "아이고오오오! 아파아아아아아아아!"

    "헐……."

    아펠드리체는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이지혁은 바닥을 데굴데굴 구르며 꽥꽥! 소리를 질러 댔다.

    "아이고! 나 죽는다! 아파! 아씨, 진짜 더럽게 아프네! 해도 해도 너무한다, 진짜!"

    "……."

    아펠드리체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저 망할 인간의 머리에 메테오 하나 꽂아 넣으면 제정신으로 돌아올 것도 같은데…….

    "으, 진짜 뒈지는 줄 알았네."

    이지혁이 고개를 휘휘 젓더니, 자신의 몸을 둘러보았다.

    "다 나은 거 같은데?"

    "다 나았겠죠."

    "오, 가끔 해야겠어."

    "…진짜 죽고 싶어요?"

    "그거… 의미가 좀 이중적인 거 같은데?"

    또 이런 일을 하면 죽는다는 건지, 아니면 지금 죽여 버리겠다는 뜻인지.

    어느 쪽이야?

    차마 물어볼 용기는 나지 않았다.

    괜히 입을 잘못 떼었다가 헬 파이어가 틀어박히면 뜨거우니까.

    죽어?

    아, 죽겠네. 그래, 죽을 수도 있지.

    "진짜 뒈질 뻔했다고."

    이지혁의 눈이 불타올랐다.

    아픈 건 둘째 치고, 진짜 쇼크사 일보직전까지 갔다.

    이제는 죽으면 되살아날 수가 없단 말이다!

    이지혁의 이글거리는 눈이 델카란에게 틀어박혔다.

    "저 새끼……."

    이 고통의 원인이 저기 있지 않은가.

    하지만 이지혁을 마주 보는 델카란의 눈도 결코 호의적이지는 않았다.

    "쥐새끼 같은 것들이!"

    이지혁이 김다현을 빼내간 것에 화가 났는지, 델카란이 이를 갈았다.

    "이지혀어어어억!"

    "하, 씨, 저 뱀 새끼가 미쳤나, 진짜."

    이지혁이 델카란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지혁 씨!"

    아펠드리체가 걱정 어린 목소리로 불렀지만, 이지혁은 고개를 내저었다.

    "이제 처리해야지."

    아펠드리체의 동공이 떨렸다.

    무슨 자신감일까?

    이지혁이 방금 전의 공격으로 마나를 소진해 버리지 않았더라면 감히 이런 치료를 해볼 생각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마나가 줄어들었기에 해볼 수 있던 치료 덕에 목숨을 부지한 것도 사실이지만, 거꾸로 말하면 이지혁은 지금 가용한 마나가 채 반도 되지 않았다.

    조금 전 같은 공격은 단 한 번밖에 할 수 없다.

    그리고 그 공격이 심대한 타격을 줄 수 없다는 것도 이미 증명된 것이다.

    그런데 이지혁은 무얼 믿고 저리 당당할까?

    "지원해!"

    "네."

    이지혁이 뭘 믿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이지혁이 미쳐서 저러는 게 아니란 것은 알고 있다.

    그리고 이지혁이라면 무언가 대책을 내놓을 거라는 믿음도 있다.

    그는 이지혁이니까.

    멸망의 좌니까.

    아무것도 아닌, 그저 인간에서 스스로의 힘으로 세상의 정점까지 기어 올라간 자니까.

    이런 상황일지라도 무언가 방법을 찾아냈을 것이다.

    "잘도 회복했군? 인간의 육체는 불편하겠어. 겨우 그 정도의 반동에도 걸레 조각이 되어버리니까 말이야."

    "하하하."

    델카란의 눈이 가늘어졌다.

    '웃는다고?'

    자신을 앞에 두고?

    델카란은 분노와 기이함을 동시에 느꼈다.

    자신에게 공격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이지혁은 이미 경험했다.

    그런데도 웃는다?

    공포로 미쳐 버리기라도 했단 말인가.

    '그럴 리가 없지.'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이지혁이 그럴 리는 없었다.

    아무리 약해졌다 하나 그런 추태를 보인다면, 아흔아홉 번째 마왕이라는 이름이 아깝다.

    그럼 뭘 믿고 저러는 것일까?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군."

    이지혁은 가만히 델카란을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모르겠다고?"

    "그렇다. 무슨 생각이지?"

    "빤한 걸 묻는군. 일단 첫 번째로 하는 생각은……."

    이지혁의 우수가 한쪽으로 뻗어졌다.

    우르르릉.

    땅이 진동을 한다.

    바닥에 제멋대로 쌓여 있던 잔해들이 떠오르더니, 그 사이로 한 남자의 몸이 둥실 떠올라 이지혁에게로 날아왔다.

    "흠……."

    원래의 모습을 짐작하기도 힘들 만큼 망가진 박성찬의 몸이 그곳에 있었다.

    이지혁은 박성찬을 유심히 살펴보다가 로아벨에게로 날렸다.

    "살아 있다. 치료해!"

    "…네."

    이지혁이 나직하게 이를 갈았다.

    박성찬이 아니었다면…….

    NDF에서 제일가는 방어력을 가진 박성찬이 아니었다면 죽어도 열 번은 더 죽었을 타격이다.

    그나마 숨이라도 붙어 있다는 것에 감사해야 할 지경이었다.

    "두 번째로 하는 생각이 뭔지는 내 입으로 말 안 해도 알 것 같은데?"

    "큭큭큭큭."

    델카란이 웃음을 터뜨렸다. 뱀의 머리들이 일제히 떨린다.

    "나를 상대하겠다는 거냐?"

    "뭐, 그렇지."

    "이미 실패했음에도?"

    "음, 그게 좀 복잡한데……."

    이지혁이 머리를 벅벅 긁었다.

    "나도 이제 목숨이 하나잖아?"

    "…목숨이 두 개인 존재도 있나?"

    "여하튼 들어봐. 나도 이제 목숨이 하나란 말이야. 그러다 보니 사람이 좀 조심스러워지더라고. 예전 같으면 아무렇지도 않게 했을 일을 이제는 잘 못하게 되더란 말이야. 걱정이 앞서거든. '이걸 했다가 큰일이 벌어지면 어떡하지?'라는 생각이 먼저 들어서 해야 할 것을 못하게 되는 거지. 천하의 이지혁이 겁쟁이가 되었을 줄 누가 알았겠어."

    델카란의 눈이 일렁였다.

    이놈이 지금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지?

    "예전이었더라면 리스크라는 부분을 신경 쓰지 않고 최선으로 갈 수 있었는데, 이제는 리스크를 먼저 고려해야 하는 입장이 되어버렸단 말이야. 그래서 최선을 선택하지 못한 거지. 멍청한 짓이었어. 까딱했으면 어차피 죽을 거, 네놈도 못 데려갈 뻔했단 말이지."

    "무슨 소린지 모르겠군."

    "너도 멍청한 놈이 아니니 알겠지만……."

    이지혁의 눈이 천천히 가라앉기 시작했다.

    "이미 한 번, 마왕이 이 세상을 침공했다."

    델카란은 말없이 이지혁을 노려보았다.

    "그럼 두 번도 침공할 수 있다는 뜻이지. 시간이 얼마나 걸리든 간에 두 번째 마왕이 넘어올 수 있다는 것은 내가 알았단 말이야. 그럼 묻겠는데. 너라면 그 상황에서 뭘 하겠나?"

    "…대비."

    "빙고."

    이지혁이 손뼉을 쳤다.

    "역시 마왕. 똑똑하다니까."

    "그러니까, 너는 내가 올 줄 알고 있었고, 그 대비책까지 이미 마련을 해두었다, 이 말인가?"

    "하나를 말해주면 열을 아는군. 똑똑해. 역시 마왕."

    그 비꼬는 듯한 말투에 델카란이 이를 갈았다.

    "방금 죽을 뻔했던 주제에 말은 잘하는군. 그 대책이 있다면 왜 진즉에 쓰지 않았지?"

    "말했잖아, 그래서 후회했다고. 이제는 후회할 일 없을 테니까, 걱정할 것 없어."

    "그럼 지금 볼 수 있는 건가, 너의 대책이라는 것을?"

    이지혁은 웃었다.

    그저 웃을 수밖에 없었다.

    저 멍청한 마왕 놈이 이지혁이 허세라도 부리고 있는 줄 아는 모양이다.

    감히.

    "델카란."

    "……."

    "기억해야지, 내가 누군지."

    델카란의 안색에 긴장이 어리기 시작했다.

    이지혁의 한마디가 그가 잊고 있던 것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그랬다.

    그의 눈앞에 있는 것은 이지혁.

    아흔아홉 번째 마왕이자, 베라프의 멸망의 좌였다.

    아무리 그가 힘이 약해졌다고는 하나 언제 무슨 짓을 벌일지 모르는, 마계 역사상 최악의 마왕이 지금 그의 눈앞에 있는 것이다.

    "너희도 나를 잊고 살았구나."

    너희가 나를 두려워한 것은 내 힘 때문이 아니었을 텐데 말이야.

    힘은 그저 나를 구성하는 요소 중 하나일 뿐이야.

    힘이 없어졌다 해도 나는 나다.

    그걸 증명해야겠지.

    "어차피 뒈질 거……."

    이지혁은 코웃음을 치고는 양팔을 들어 올렸다.

    "조심하는 게 좋아."

    무슨 일이 벌어질지 이제 나도 잘 모르겠거든.

    다만, 하나는 알지.

    이건 나도 처음 가보는 영역이지만, 그 여파는 정말 만만치 않을 거야.

    "한 번 막 나가보기로 했거든."

    그 순간, 이지혁의 몸에서 폭풍 같은 마기가 뿜어져 나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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