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 리터너-47화 (47/118)
  • [■] 어떻게 안 되는 겁니까? [■]

    ─────

    콰아앙!

    전차가 불을 뿜었다.

    포탄은 섬전처럼 날아 장갑에 틀어박혔고, 외갑을 뚫고 들어간 포탄이 전차 내부로 쇳물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아아아악!"

    짧은 비명성과 함께 전차가 멈춰 선다. 잠시 흔들거리다가 이동을 멈춘 전차 안에 타고 있던 사람들이 어찌 되었을지는 생각을 해보지 않아도 빤했다.

    "망할 놈들!"

    어느 날 갑자기 국경을 밀고 들어온 러시아의 전차 부대 앞에 우크라이나 군은 속수무책이었다.

    "무슨 생각들인 거냐!"

    지금까지 러시아가 온건하게 나와준 것은 아니지만, 이처럼 대책 없이 전차로 밀고 들어온 경우는 처음이었다. 국제사회의 견제를 생각하면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만 것이다.

    아무리 러시아가 강국이라고는 하나 전 세계가 지켜보고 있는 와중에 주변국을 대놓고 침공할 수는 없었다. 그런데 지금 그 암묵의 룰이 깨어지고 만 것이다.

    "능력자들은!"

    통상적인 화기 병력으로는 상대가 안 된다. 그렇다고 그냥 지켜보고 있을 수도 없는 일 아닌가.

    "지금 오고 있습니다!"

    "뭐하는 건가!"

    능력자들은 보통 국경 쪽보다는 대도시 위주로 방어선을 펼 수밖에 없다.

    게이트가 열리는 곳을 신속하게 방어하는 것이 그들의 임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인명의 피해가 나지 않게 하는 것 아니겠는가. 그러니 사람이 많은 곳을 우선적으로 막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곧 도착할 겁니다."

    "제기랄!"

    비탈리 볼로드미로비치는 이를 악물고 전선을 바라보았다. 필사적으로 저항했지만, 러시아의 무기들은 그들보다 우월하고 수로도 상대가 되지 않았다.

    그리고…….

    "으으!"

    비탈리의 얼굴에 절망이 어렸다.

    전차 사이로 튀어나오는 이들이 누구인지 알아챈 것이다.

    KGB.

    과거 러시아의 자존심이었던 KGB가 FSB로 바뀌면서 그 명맥이 끊겼건만, 이 미친 러시아 놈들이 소련 시대의 영광을 되찾겠다며 새로운 능력자 총국에 KGB라는 이름을 붙여 버렸다.

    덕분에 KGB 아닌 KGB가 새로이 생겨났고, 그 이름은 다시금 다른 나라에게 공포의 상징으로 군림하기 시작했다. 국가의 주도하에 강도 높은 훈련을 소화한 KGB의 능력자들은 미국과 함께 전 세계의 가장 강력한 능력자 전력이라 평가 받고 있었다.

    대한민국이 갑자기 급부상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걸어 다니는 시한폭탄이라 평가되는 이지혁 덕분에 그 위상에 금이 많이 가기는 했지만, 여전히 KGB는 타국에게 있어서 강대한 위협이었다.

    그리고 지금 그 KGB가 그들의 사나운 이빨을 우크라이나에 들이밀고 있는 것이다.

    비탈리는 절망 어린 얼굴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 * *

    "표정 한 번 볼만하군."

    블라디미르 베르게네프는 쌍안경을 내리고는 비릿하게 웃었다.

    블랙 먼데이 이전부터 국제사회에 호소하며 러시아의 개입을 막아오던 우크라이나다. 그리고 블랙 먼데이 이후로는 국내에서 열리는 게이트를 단속하는 것만으로도 여유가 없었기에 러시아는 주변국을 건드리지 못했다.

    인구에 비해 영토가 기이할 정도로 넓은 러시아다 보니 영토 내에 열리는 게이트를 정리하는 것만으로도 여력이 없던 까닭이었다.

    그러다 최근 겨우 여력이 생기고 체제가 안정되었다.

    "잘도 그동안 발 뻗고 잤단 말이지?"

    러시아에 여력이 없다는 것을 파악한 우크라이나는 대놓고 러시아를 도발하고 조롱하며 그들의 심기를 건드려 왔다. 그러니 이제는 그 대가를 치러야 할 때였다.

    "국제사회?"

    블리디미르는 웃었다.

    이제 국제사회란 것은 뜬구름 잡는 이야기에 불과하다.

    당장 자기 나라에 열리는 게이트를 단속하는 것만으로도 여력이 없는데 타국과 공조하여 국제 질서를 지킨다?

    꿈같은 이야기다.

    그게 지금 증명되고 있었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의 국경을 넘은 지 삼 일이 지나고 있건만, 당장 침략을 그만두라는 경고성 메시지만 날아다닐 뿐, 실질적인 대책은 전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이제는 힘이 지배하는 사회다."

    예전의 냉전시대처럼 말이지.

    블라디미르가 우크라이나의 병사들을 향해 달려드는 능력자들을 보며 낄낄 웃어 댔다.

    * * *

    "개판이네."

    이지혁은 머리를 벅벅 긁었다.

    그의 눈에 세계 각지에서 벌어지고 있는 교전들이 눈에 들어왔다. 대체 어디서부터 어떻게 손을 대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가까이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사태부터 시작해서 유럽도 심상치 않은 기류가 흐르고 있고,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은 이미 전면전을 치르고 있었다.

    아랍 쪽은 거의 세계 3차대전이 일어날 기세였다.

    "끄응……."

    이지혁이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당장 게이트 사태만 해도 해결하기 벅차 죽겠는데, 대체 이걸 어떻게 해결해야 한단 말인가.

    "쟤들 왜 저래?"

    "글쎄."

    이예원이 심드렁하게 말했다.

    "전쟁이야 항상 나는 거 아냐? 내가 듣기로는 전쟁이 안 난 시기가 거의 없다고 하던데?"

    "휴……."

    그 말이 틀린 건 아니지.

    베라프에서도 전쟁은 항상 일어났다. 여러 가지 사정이 있겠지만, 이유 따위는 아무래도 좋았다. 어떠한 이유로든 전쟁은 항상 벌어졌으니까.

    나중에는 이놈들이 그냥 싸우고 싶어서 전쟁을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심마저 들 정도였으니까.

    인간의 본성에 폭력성이 내재되어 있다는 것을 딱히 부정하고 싶은 생각은 없지만, 왜 하필 지금의 타이밍이냔 말이다.

    지금 인간끼리 싸우다 보면 공멸하는 것이 너무 빤히 보이지 않는가.

    "끄응……."

    "엄마, 이제 재미없다. 예능 보자!"

    "그럴까?"

    이지혁은 속에서 천불이 났다.

    "아니, 지금 전쟁이 났는데 예능이 문제야!"

    이예원이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왜!"

    "아니, 그럼……."

    이예원이 고개를 삐딱하게 꺾고는 그를 바라보았다.

    "내가 뭘 할까?"

    "응?"

    이지혁은 말문이 막혔다.

    인류가 멸망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전쟁까지 터졌는데, 거기에 관심을 두지 않는 것이 한심하여 한 말이었다.

    그런데 저런 식으로 나오면 이지혁이 되레 할 말이 없어졌다.

    "아니, 내 말은……."

    이예원이 심드렁하게 이지혁의 말을 끊었다.

    "내가 뭐 입대해서 총을 쏠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러시아로 갈 것도 아니고, 나보고 뭘 하라고? 뉴스 보고 있으면서 '오또케, 오또케' 하고 있으면 상황이 해결되기라도 한데?"

    "아니지."

    "그런데 뭘 할까? 응? 오빠?"

    "…미안하다."

    이지혁은 이예원의 논리 앞에 무릎을 꿇고 말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반박할 말이 없었다.

    "저런 건 높으신 분들이나 당장 파견 나가야 할지도 모르는 오빠나 고민하는 거지, 나 같은 애들은 그냥 예능이나 보고 꺌꺌대면 되는 거야. 오빠는 그런 것도 몰라?"

    "으으으……."

    뭔가 멍청이 취급을 당한 기분이지만, 반박할 말이 없다!

    생각해라! 생각해라, 이지혁!

    "그래! 너, 말 잘했다! 저기로 오빠가 파견 나갈지도 모르는데! 니가 그리 관심이 없으면 어떡하니!"

    오빠가 위험한데!

    하지만 이예원은 이지혁에게 전혀 말려들지 않았다.

    "파견 갈 거야?"

    "응? 아니, 아직은 모르지."

    "그럼 파견 가게 되면 이야기해. 아직 벌어지지도 않은 일을 뭘 미리 걱정하라고."

    박선덕이 이예원을 거들었다.

    "그래. 넌 왜 애한테 괜히 짜증이니? TV야 보고 싶은 걸 볼 수도 있지!"

    "네……."

    시무룩한 이지혁이 고개를 푹 숙였다.

    내가 잘못한 건가?

    정말?

    하소연하고 싶은 것은 많지만, 하소연할 곳이 없다.

    서글픔을 억누르며 이지혁은 몸을 돌렸다.

    "씻니?"

    "네, 출근해야죠."

    "벌써 낮인데, 출근이라니."

    "아뇨. 나가봐야겠어요."

    휴일에도 출근하는 가장들의 심리를 알 것 같았다.

    쪼이는 집보다는 왕처럼 살 수 있는 사무실이 훨씬 나은 것이다.

    "힘내거라."

    "와, 씨, 깜짝이야!"

    이지혁이 화들짝 놀라 소리쳤다.

    "누, 누구……. 아, 아버지!"

    이지혁이 앞치마를 두르고 있는 아버지를 보며 놀라 말했다.

    "어디 다녀오셨어요? 진짜 오랜만에 뵙는 것 같은데?"

    "계속 집에 있었다……."

    "그래요? 이상하네?"

    그런데 왜 출연이 없으셨나?

    감독이 잊었나?

    그래도 시나리오 작가가 있으니까 아주 잊지는 않았을…….

    이게 뭔 생각이지?

    이지혁이 고개를 휘휘 젓고는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그래서… 지금 뭐라고 하셨어요?"

    "힘내거라."

    "아……."

    그래도 아버지는 아버진가 보다. 이 집에서 그나마 자신을 제일 걱정해 주고 있지 않은가.

    "처음에는 다 그렇게 시작하는 거란다."

    "예?"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조금씩 잊혀지는 거지."

    "…아부지."

    이지혁이 이철중을 끌어안았다.

    "남자는 다 그런 거다. 등 따시고 배부르면 필요 없는 존재가 되는 거지."

    "그런가 봐요. 저도 처음에는 이쁨 받은 것 같은데, 밥도 잘 받아먹고."

    요즘은 그냥 남는 찬밥으로 밥 먹는 게 일상이었다.

    예전에 집에서 놀고먹을 때는 대접을 받았는데, 일을 시작하고는 그 대접을 받지 못하는 게 아이러니했다.

    "너도 아비처럼 될 날이 머지않았다."

    "아, 그건 싫……."

    자신도 모르게 본심이 나온 이지혁이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자비로운 아버지는 모든 것을 이해한다는 듯이 그의 등을 두드려 주었다.

    "남자는 인내하고 사는 것이지. 요즘 세상이 안 그러냐. 세상이 다 그렇단다. 옛날에야 남자가 큰소리 치고 살았지, 요즘 세상에 그런 게 어딨겠냐? 그러다가는 소박맞는다. 쫓겨나요. 남자가 혼자 나가서 살아봐야 돌아오는 것은……."

    "아부지, 근데 저 나가봐야 하는데요."

    아버지의 어깨가 푹 처졌다.

    저 반짝이는 것은 마음의 땀이 아니던가.

    이지혁은 마음이 아팠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상황이 급박해지고 있으니 빨리 출근을 해야 하는 것이다.

    "일단 저 씻을게요."

    "그래."

    아버지의 대답에 힘이 없었지만, 이지혁은 일단 욕실로 들어갔다.

    아버지의 한숨이 등 뒤로 들려온다.

    "자식새끼 키워봐야 아무 쓸모 없다더니."

    전형적인 대사였다.

    * * *

    "이게 대체 무슨 일이지?"

    최정훈은 심각한 얼굴로 모니터를 바라보았다.

    그의 모니터에 떠 있는 세계 지도 위로 지금 분쟁이 벌어지고 있는 구역들이 눈에 들어온다.

    붉은 점이 지도 곳곳에 박혀 있었다.

    문제는 이 붉은 점들이 생겨난 시기가 얼마 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저번 벨트레체 결전 이후로 국제적인 분쟁이 극도로 늘어나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잠잠했던 것들이 한 번에 폭발하기라도 하듯이 말이다.

    "누군가 일부러 조작하지 않고서야……."

    이런 일이 자연스럽게 일어날 수는 없지 않은가.

    최정훈은 머리를 움켜 잡았다. 게이트 사태만 하더라도 인류 절멸의 위기나 다름없는데, 새로운 일이 자꾸 벌어지니 대체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끄응……."

    "많이 심각해요?"

    서아영이 최정훈에게 물어온다.

    "흐음, 뭐라고 말씀을 드려야 할지. 전쟁을 하고 있는 와중에 자국에 게이트라도 출현하게 되면 큰일이죠. 제대로 큰일이 벌어질 겁니다."

    "어차피 군대는 게이트를 막는 데 큰 도움이 안 되잖아요. 능력자들만 있으면 될 텐데요?"

    "그러니 문제죠."

    최정훈이 화면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 현장들에 능력자들이 투입되고 있습니다. 전쟁에 능력자들이 쓰이기 시작한 거죠."

    * * *

    "왔니?"

    이지혁은 당연하다는 듯이 현관 앞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는 김다솜을 보며 어색하게 웃었다.

    김다솜이 이지혁을 보고는 반색하며 그의 앞으로 강아지처럼 쪼르르 달려왔다.

    얘 좀 밝아진 것 같은데?

    예전에는 보기만 해도 뭔가 북풍한설이 몰아치는 이미지였는데, 그사이 애가 좀 밝아진 것 같았다.

    김다솜이 쓰다듬어 주길 기다리는 강아지처럼 눈을 초롱초롱하게 뜨고 있자 이지혁이 어색하게 말을 돌렸다.

    "오빠는 좀 어때?"

    "오빠요?"

    "김다현… 집에 안 왔나?"

    "왔는데요?"

    김다솜이 무슨 말을 하느냐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이놈 보게?'

    그만큼이나 심하게 다쳤는데…….

    동생에게는 고생했다는 말 한마디 안 한 모양이었다.

    '미묘한 인간이라니까.'

    하는 짓을 보면 상남자가 따로 없는데, 동생한테 하는 짓을 보면 그리 좋게만 봐줄 수도 없고… 사람을 딜레마에 빠지게 만드는 능력이 있었다.

    "끄응, 아니다. 됐다."

    어쨌든 김다현이 말을 하지 않았다는데 이지혁이 괜히 나서서 미주알고주알 떠들기도 애매했다.

    본인이 그걸 원한다면 입을 다물어줘야겠지.

    말한다고 뭐 달라질 것도 없고, 이지혁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래서 니 몸은 괜찮고?"

    "네, 괜찮아요."

    "아펠드리체가 괴롭히지는 않니?"

    "……."

    대답이 없구나.

    그러니까 왜 그랬니.

    사서 고생을 한다고 설치더니… 바보 같은 기집애.

    이지혁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가 아는 아펠드리체는 인정이라든가, 사정이라든가 그런 걸 모르는 도마뱀이었다. 조금의 인정이라도 있었다면 이지혁을 그리 집요하게 막아서지는 않겠지.

    그녀와 이지혁이 조금이나마 서로에 대한 배려라든가 관심이라든가 하는 인간적인 부분을 가지게 되기까지 천 년이 넘는 시간이 걸렸다.

    그런데 이제 겨우 서로 알게 된 사이인데 아펠드리체가 인간적인 배려를 해주고 싶은 생각이 있을 리 없지.

    아마 죽어라고 굴리고 있을 터였다.

    그래야 데이터를 뽑아내기도 좋을 테니까.

    "힘내라."

    "…예."

    방금까지 활달했던 애가 금세 풀이 죽어서 시무룩해졌다.

    이지혁은 그 광경을 보니 자기가 뭔가 잘못한 듯한 기분이 들어서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 같이 갈까? 집에 갈 거야?"

    "네, 집에 가요."

    "데려다 줄까?"

    "아뇨, 괜찮아요."

    얘가 웬일이래?

    "바쁘신 거 아니에요?"

    "어? 응, 조금."

    "그럼 일 보셔야죠."

    "오?"

    이지혁이 고개를 갸웃했다.

    얘가 원래 이런 캐릭터였나?

    뭐가 변한 것 같기도 한데, 왜 변한 거지?

    아펠드리체한테 개고생을 하더니, 심경의 변화라도 생겼나?

    "여기."

    이지혁은 그녀가 내미는 음료수를 받아 들었다.

    취익.

    이지혁이 음료를 받아 들기 직전에 김다솜이 뚜껑을 따서 내민다.

    '이거… 뭐 들어 있는 건 아니겠지?'

    그렇게까지야 할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오늘 보이는 모습이 조금 이상하다 보니 그리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래도 주는 걸 받아먹지 않을 수는 없지 않은가.

    그것도 직접 따서 주는데.

    이지혁은 미묘한 심정으로 음료를 받아 입에 가져갔다.

    "잘 먹을게. 그런데 너 웬일로 안 데려다 줘도 된다고 하냐?"

    "생각해 보니까요……."

    "응."

    이지혁은 음료를 벌컥벌컥 마셨다.

    "바깥사람 일하는 걸 방해하는 건 내조가 아닌 것 같아……."

    푸우우우웃!

    순간, 이지혁의 입에서 음료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다.

    "꺄악!"

    김다솜이 날아드는 음료를 피해내며 비명을 질렀다.

    "…미안하다."

    이게 미안해야 할 일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일단 미안하다고 하자.

    그런데 내가 뭘 들은 거지?

    이지혁이 고개를 갸웃하며 김다솜을 바라보았다.

    김다솜이 배시시 웃는다.

    '이쁘긴 무지 이쁘네.'

    애가 좀 이상해서 그렇지, 이쁘기는 정말 이쁘다.

    이지혁은 비워 버린 캔을 구겨 던져 버리고는 손을 흔들었다.

    "뭐, 그럼 나는 먼저 가볼게."

    "네. 일 잘하고 오세요."

    "으응……."

    저 '일 잘하고 오세요'라는 대사가 미묘하게 느껴져서 소름이 돋는다.

    이지혁은 떨떠름한 얼굴로 손을 흔들며 NDF를 향해 걸어갔다.

    오늘 일진이 사나울 것 같은데?

    * * *

    이지혁은 눈앞의 광경을 보며 고개를 갸웃하고 있었다.

    으음…….

    저기 보이는 개는 분명이 오식이다. 그리고 그 옆에 보이는 작은 강아지는 여자 친구 삼아 생포한 오거임에 분명했다.

    이지혁이 적당히 마나를 빨아들여 강아지 모양으로 만들어놓은 오거.

    오식이한테 물어보니 오거치고는 이쁜 편이라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그럼…….

    그 앞에 있는 저 작은 강아지는 대체 뭐란 말인가.

    "싸우는 거 같은데?"

    보아하니 오식이 여자 친구와 저 강아지가 이를 드러내며 깽깽대고 있고, 옆에서 오식이는 오무룩하여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이거, 어디서 많이 본 상황 같은데?

    개가 아니라 사람이었으면 빼박이다.

    아르르르르르!

    금방이라도 서로 물어뜯을 것 같은 기세에 이지혁이 헛기침을 했다.

    "크흐흐흠!"

    개들의 시선이 이지혁에게로 향한다.

    "…야, 이리 와봐."

    오식이가 힘없이 터덜터덜 걸어왔다.

    "뭔 일이야?"

    오식이가 고개를 푹 숙이고는 들지 않았다.

    개한테 설명을 바라는 이지혁도 문제지.

    아, 오식이 개 아닌가?

    "흐음……."

    상황이야 말로 안 들어도 알겠다만, 대체 저 강아지의 정체는 뭐란 말인가.

    쟤는 진짜 개 같은데?

    "…아."

    이지혁이 부릅뜬 눈으로 오식이를 노려보았다.

    "맞다! 너 여자 친구 있었지!"

    끼잉.

    "이 미친놈이!"

    이지혁은 어이가 없어서 오식이를 바라보았다.

    오거가 지구로 넘어왔으니 잡아올까 물었을 때 좋아서 날뛰던 것이 오식이다. 암컷이라 말했을 때 입이 찢어지는 줄 알았다.

    강아지나 다름없는 형태로 그런 다양한 감정 표현이 가능하다는 사실에 놀라기까지 했는데!

    생각해 보니 이 새끼가?

    "너 조강지처 두고 바람피우면 천벌 받는다?"

    끼잉.

    "하, 이 새끼……."

    이해는 한다.

    종족이 다른 것을 어떻게 하겠는가.

    아무리 급하다고 해도 사람이 원숭이와 사귈 수 없는 것처럼 오거가 강아지와 사귈 수는 없는 노릇이지.

    안다. 이해는 한다, 이해는.

    이해는 하는데…….

    '상황이 좀 더럽게 꼬였네.'

    애완동물의 연애사까지 신경을 쓸 상황은 아니지만, 눈으로 본 것을 그냥 지나치기에는 뭔가 찝찝했다.

    이지혁은 고개를 돌려 이곳의 유일한 개를 바라보았다.

    그래도 개는 개인지 오거들처럼 표정만으로 뭔가를 알아챌 수는 없었다.

    하지만 열이 잔뜩 받아 있겠지.

    내가 개라도 그럴 텐데, 오죽하겠는가.

    "크흐흠, 사실 내가 이런 이야기를 하기에는 좀 그렇지만……."

    이지혁은 아들의 결혼을 반대하는 시어머니가 된 심정으로 일장 연설을 늘어놓았다.

    "너랑 얘랑은 종족이 다르잖니.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인 거라니까. 그러니까 정신 차리고 이제 다른 잘생긴 개를 알아보는 게 어떨까?"

    개가 사람 말을 알아들을 리가 있나.

    하지만 이지혁은 뭔가 아쉬운 듯 자꾸만 강아지에게 말을 건넸다.

    "따지고 보면 얘 그리 좋은 남친감이 아니라니까. 폭력적이지, 고기 밝히지, 생긴 게 귀여울 뿐 알고 보면 짐승이야. 그러니까 이제 그만……."

    "뭐해?"

    "…으응?"

    이지혁이 고개를 돌려 위를 올려다보았다.

    정해민이 '너 대체 뭐하냐'는 듯한 얼굴로 이지혁을 바라보고 있었다.

    "음, 아니, 그게……."

    이 사태를 대체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 것인가.

    이지혁이 난감해할 즈음에 정해민은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간단하게 모든 일을 해결해 버렸다.

    "뭔 개들이 이렇게 많아? 여기가 개판도 아니고! 훠이!"

    정해민이 가볍게 엉덩이를 걷어차자 강아지가 깨갱거리며 도도도 달려갔다.

    "크흑."

    이지혁이 그 광경을 보며 눈물을 삼켰다.

    나를 용서해라.

    내가 잊은 탓이다.

    "너 왜 그래?"

    "슬픈 이야기가 있었어."

    "뭔 소리야?"

    "모르는 게 나을 거야."

    이지혁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오식이의 엉덩이를 뻥! 걷어찼다.

    "넌 일주일 동안 사료 먹지 마, 이 시키야!"

    깨갱!

    오식이가 깨갱대며 구석으로 도망가자 이지혁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건물 안으로 향했다.

    여하튼 별게 다 속을 썩인다니까.

    어휴.

    * * *

    "지금까지 능력자들은 게이트를 막는 데 활용되어 왔습니다."

    "그렇죠."

    "그런데 이제 전쟁에 투입되기 시작한 겁니다. 그것도 꽤나 동시다발적으로 말이죠."

    "흐음……."

    서아영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게 왜 문제가 되나요?"

    "전쟁이니까요."

    "그러니까 그게 왜요?"

    최정훈은 심각하게 굳은 얼굴로 서아영을 바라보다가 묵직한 어조로 씹어뱉듯 말했다.

    "전쟁은 인간을 대상으로 하는 겁니다."

    "…네?"

    "능력자들이 인간을 공격한다는 겁니다. 이게 뭘 의미하는지 모르시겠습니까?"

    서아영의 얼굴이 심각하게 굳어졌다.

    전쟁이라는 말만 듣고 무슨 뜻인지 몰랐는데, 최정훈의 말을 듣고 보니 이게 얼마나 심각한 상황인지 감이 잡혔다.

    "지금까지 능력자들은 시기와 질투의 대상이 될망정 공포의 대상이 되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전쟁이 일어나고 능력자들이 전투에 투입되게 되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지금까지 그들을 지켜주던 이들이 언제든지 그들에게 칼을 들이밀 수 있는 병기라는 사실을 실감하게 되어버린다는 말입니다."

    "말이 심한 거 아니에요?"

    능력자인 서아영은 그 병기라는 말이 마음에 걸렸다.

    "하……."

    최정훈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제게 말을 해도 소용없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리 생각을 할 테니까요."

    "아……."

    "지금은 그래도 수습이라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능력자들이 일반 군인들을 공격하는 영상이라도 뜨게 된다면 돌이킬 수 없어질 겁니다. 파급력이 얼마나 클지 예상조차 못하겠습니다."

    서아영은 입을 꾹 다물었다.

    능력자들이 군인들을 공격하고, 사람을 죽이는 모습을 보통 사람들이 보게 된다?

    외국인이 사람 하나만 죽여도 그 국가에 대한 혐오가 팽배하는 것이 지금의 사회였다.

    그런데 그런 광경을 본 사람들은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

    "막아야 하는데……."

    그때, 문이 열리며 이지혁이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뭘 어떻게 막아요?"

    "이지혁 씨!"

    최정훈이 이지혁을 보며 외쳤다.

    "어떻게 안 되는 겁니까?"

    "흠……."

    이지혁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무리죠."

    "역시……."

    급한 마음에 지푸라기라도 잡아봤다만, 이지혁이라고 딱히 방법이 있을 리 없었다.

    이건 열심히 한다고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답이 나와 있는 문제도 아니었다.

    "무엇보다 세상 사람들이 능력자를 병기로 활용할 수 있다는 인식을 가지게 된 게 커요. 지금 사태를 어떻게 막는다고 하더라도 앞으로 그런 일은 계속 벌어질 거고, 막고 또 막아봤자 악화되는 여론을 돌릴 수는 없을 거예요."

    "으으음……."

    최정훈이 이지혁을 보며 침음했다.

    가끔 한 번씩 보면 이 사람이 똑똑한 거 같다는 착각을 하게 된단 말이지.

    "저희가 할 수 있는 일이 없군요."

    "음……."

    이지혁이 자리에 앉으며 머리를 벅벅 긁었다.

    "일단은 게이트에 집중하는 게 나을 거예요. 위쪽에 보고해서 이미지 관리 좀 해달라고 해주세요."

    "그것도 쉽지가 않습니다."

    "왜요?"

    지금까지 잘도 통제해 온 일들 아닌가.

    최근에 능력자들의 이미지가 나빠져서 정해민이 실업자가 되기는 했지만, 사태의 심각성을 조금이라도 안다면 움직이지 않을 수 없을 텐데?

    "런던 사태 때문에 상황이 좀 미묘해졌습니다."

    "네?"

    이지혁이 의문 어린 눈으로 최정훈을 바라보았다.

    * * *

    "런던이 왜요?"

    "반파되었죠."

    "그거야 우리 잘못은 아니잖아요. 델카란이 난리를 쳐서 그렇게 된 건데, 그거 때문에 분위기가 나빠질 일이 뭐가 있나요?"

    "이성적으로 보자면 그렇죠."

    최정훈은 쓴웃음을 머금었다.

    이지혁의 잘못은 아니다.

    NDF의 잘못도 아니고, 능력자들의 잘못도 아니었다.

    잘못이 있다면 하필이면 델카란이 런던 한중간에서 그 난리를 쳤다는 것 정도일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리 이성적이지 않다.

    인구 800만의 도시가 순식간에 박살이 났다. 이지혁과 델카란의 충돌의 여파로 죽은 사람만 해도 부지기수였다.

    그런데 원망할 대상이 없다.

    원인이 정확히 밝혀지지도 않았다.

    마왕이 와서 이런 일이 벌어졌다고 설명한들, 누가 이해할 것인가.

    원인은 명확하지 않은데 팔백만의 삶이 박살 났다. 거기에 영국이라는 나라의 수도가 날아가 버린 최악의 상황이다.

    그러니 갈 곳 잃은 원망은 분노할 대상을 어떻게든 찾아내고 있었다.

    '이해 못할 바는 아니지만…….'

    인간이라는 존재가 그리 이성적이지 못하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던 바였다.

    인간이 이성적 존재고 합리적인 존재라고는 하지만, 의외로 비이성적이고 감성적이며 불합리한 존재이기도 했다.

    사실 자신과 다른 존재와의 공존을 이만큼이나 참아냈다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것이었다.

    게이트의 위협만 아니었다면 사단이 났어도 진즉 사단이 났을 것이다.

    억눌려 있던 것들이 런던 사태를 기점으로 제대로 터지기 시작했는데, 거기에 전쟁이 벌어지며 불에 기름을 끼얹은 격이 되어버렸다.

    "납득이 안 가시겠지만……."

    "아뇨. 뭐……."

    이지혁이 귀를 후비더니 입으로 훅 불었다.

    "뭐, 흔한 일이죠."

    "네?"

    "전염병이 돌았는데 옆집 여자가 마녀라서 벌어진 일이라고 멀쩡한 새댁을 태워 죽인다거나, 마을 사람들이 오거에 물려가니 사냥할 생각은 안 하고 제물을 바치겠다고 처녀를 색출한다거나."

    "으음……."

    "흔한 일이죠, 흔한 일. 사건이 생겼을 때 해결하는 것보다야 고개를 적당히 돌려 버리는 게 더 편하니까요."

    이 사람, 이렇게 염세적이었나?

    "뭐, 배척당하는 거야 익숙하지만……."

    이지혁이 심드렁하게 등을 기댔다.

    그야 뭐, 욕먹고 배척당하는 게 익숙한 사람이지만, 다른 능력자들은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억울하겠지.'

    따지고 보자면 나라의 명령을 받고 강제로 전쟁에 투입된 것인데, 그것 때문에 되레 욕과 원망을 맨몸으로 받아야 하는 상황인데 누가 좋아하겠는가.

    다만, 그 억울함이 증오로 표출되지 않아야 할 텐데.

    "쉽지 않겠지."

    인간은 자신이 당하면 갚아주고 싶어 한다. 그러니 원망을 듣는 쪽도 그리 담담하게 나오지는 못할 게 빤했다.

    잘못한 게 없는데 일방적으로 욕을 얻어먹는다면 누구라도 울컥하지 않겠는가.

    "골치 아프게 됐네."

    당장의 전쟁이 문제가 아니었다.

    이 전쟁을 기준으로 인간과 능력자 사이에 대립이 시작될 수도 있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국내 분위기는 어떤데요?"

    아무래도 민감할 수밖에 없는 정해민이 물어왔다.

    "으음……."

    최정훈이 대답하기 껄끄러운지 조금 시간을 끌다가 '에라, 모르겠다' 싶었는지 술술 토해내기 시작했다.

    "일단은 최악입니다."

    "최악……."

    "사실 우리나라도 능력자에 대한 인식이 좋은 나라는 아니었습니다. 방송이나 이미지 메이킹을 통해서 그동안 최대한 막아오기는 했습니다만, 최근 그 둑이 터져 버렸죠."

    "네."

    정해민이 시무룩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급작스럽게 상황이 변할 거라고는 그녀도 생각하지 못한 일이었다.

    "능력 이상의 것을 손에 넣고 있었으니, 빨리 버려 버리는 게 나아."

    "응."

    이지혁의 말에 정해민도 동의했다.

    어쨌거나 그 덕분에 정상에 올라보기도 했으니 미련이야 남을지언정 후회는 없었다.

    "어쨌든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이지혁이 최정훈을 보며 말했다.

    "그래서 국내적으로 이상 징후 같은 게 발견된 게 있나요?"

    "지금 당장은 없습니다. 국내에는 아직 큰 문제가 벌어지지는 않았잖습니까. 만약 런던처럼 피해가 있었다면 지금쯤 광화문이 터져 나갔겠죠. 하지만 인터넷 여론이 영 좋지 않습니다."

    "인터넷이 왜요?"

    "사람은 불만이 생기면 적의를 드러내죠. 예전 블랙 먼데이 이전에는 한국에 들어와 있는 외국인들에게도 적의를 드러냈습니다. 지금은 그런 적의가 능력자들에게로 옮겨간 것이죠."

    "흠, 뭐……."

    이지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인터넷이라는 것은 딱히 생각해 보지 못했지만, 과거에도 소문에서 소문으로 일이 커져 나가는 것은 자주 봐온 일이니까.

    "하지만 직접적으로 움직인다는 것은 역시나 좀 의외네요. 능력자들이 없으면 당장의 문제가 생긴다는 것을 그들도 모르지는 않을 텐데 말입니다."

    "그래서 아직은 불만이 팽배해 있는 수준으로 끝낼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앞으로는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습니다. 해외에서 먼저 움직인다면 국내에서도 동조의 움직임이 생겨날 테니까요."

    "흐음……."

    이지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참을 곰곰이 뭔가 생각하는 것 같던 이지혁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더니 컴퓨터를 켰다.

    "뭐, 검색이라도 하시게요?"

    "아뇨."

    이지혁은 당당하게 말했다.

    "게임할 건데?"

    "……."

    최정훈이 말문이 막혀서 이지혁을 바라보았다.

    그럴 거면 방금 전까지의 심각한 분위기는 다 뭐였다는 말인가.

    "게임요? 이 상황에서요?"

    "오늘 아침에 내 동생한테 들은 이야긴데요……."

    "네."

    "내가 걱정하고 있다고 해서 상황이 뭔가 달라지거나 하지는 않잖아요?"

    "그거야……."

    틀린 말은 아니지. 이지혁이 뭔가 고민을 한다고 해도 한국에서는 할 것이 없었다. 상황을 바꿔보려면 전쟁이 일어나고 있는 곳으로 직접 가든가 해야 하는데, 지금 그랬다가는 타국의 전쟁에 한국이 개입한다는 인상을 줄 수밖에 없다.

    그런 일만큼은 절대 피해야 한다.

    "뭐가 어떻게 흘러가든 결국에는 높으신 분들이 결정하는 게 먼저죠."

    한국에 너보다 높으신 분이 어딨어?

    대통령도 니 눈치 보는데.

    남들이 아무리 결정해도 니 마음에 안 들면 안 할 거잖아.

    그러니까 너는 게임이나 하고 놀고 있을 테니, 알아서 니 마음에 가장 잘 들 만한 해결책을 찾아와서 결제 받으라는 건가?

    최정훈이 부글부글 끓는 얼굴로 이지혁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이지혁은 그런 최정훈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이미 게임을 켜고 있었다.

    "하……."

    최정훈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하기야 돌이켜 보면 언제 저 인간이 그와 함께 고민해 주었던가.

    고민은 최정훈의 몫이고, 해결은 이지혁의 몫이었지.

    그나마 같이 고민해 주는 척이라도 해준 게 어디냐.

    "아니, 거기에서 그리로 들어가면 안 되지! 죽고 싶어 환장을 했나!"

    게임 시작한 지 5분 만에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기 시작한 이지혁을 보며 최정훈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느님.

    어쩌자고 저 인간에게 그런 능력을 주셨습니까.

    차라리 나에게 주지!

    최정훈의 시름이 깊어져만 갔다.

    * * *

    "아, 자꾸 죽네."

    이지혁은 신경질적으로 마우스를 집어 던지고는 고개를 뒤로 젖혔다.

    게임이 잘 풀리지 않아서 짜증이 나는 건지, 짜증이 나서 게임이 잘 풀리지 않는 건지… 그 모호한 경계에 있다 보니 답답함이 자꾸만 밀려왔다.

    "왜 그리 화가 나 있죠?"

    아펠드리체가 부드럽게 손을 뻗어 이지혁의 머리를 감쌌다.

    "화난 거 아냐."

    "화나 있는 거 같은데요?"

    "사람이 말을 하면 들은 척이라도 하지? 뭔 말만 하면 아닌 것 같은데, 아닌 것 같은데."

    아펠드리체는 부드럽게 웃었다.

    "말은 목소리로만 하는 게 아니죠. 손짓, 몸짓, 그리고 눈빛으로도 의사는 전달되는 거예요. 그렇게 화를 내고 있으면서 말로만 화를 내지 않았다고 한들 그대로 믿을 수야 없죠."

    "…잘나셨네."

    이지혁이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마음에 안 들어."

    "인간들이?"

    "으음……."

    이지혁은 눈을 감아버렸다.

    다른 사람들 앞에서야 사람들 하는 짓이 마음에 안 든다고 쉽게 말할 수 있겠지만, 도마뱀 앞에서 인간의 흉을 보려니 뭔가 찝찝한 기분이었다.

    특히나 인간이란 종족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 드래곤 앞에서다 보니 더더욱.

    "인간은 원래 그런 존재죠. 비이성적이고, 감정적이고, 도무지 알 수 없는, 혼돈 같은 존재."

    "나도 인간이거든?"

    "그래요. 당신은 누구보다 인간이죠."

    "응?"

    "비이성적이고, 감정적이고, 도무지 알 수 없는……."

    "거기까지."

    이지혁이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이 도마뱀이 사람 앞에 두고 엿을 먹이네?

    아주 그냥 비늘을 다 뽑아버릴까 보다 그냥.

    "왜 그렇게 화가 났는지 알 수가 없네요. 원래 알고 있던 사실 아닌가요?"

    "그렇긴 한데……."

    이지혁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인간이란 존재가 완전하지 않다는 거야 누구나 아는 사실이었다.

    인간이 언제나 이성적으로만 움직일 수 있다면 세상에 다툼 따위는 없을 테니까.

    한 발 위에서 내려다보며 하는 말이 아니었다.

    이지혁 역시 완전하지 못한 존재였기에 베라프에서 무수한 트러블을 만들어냈고, 결국에는 악마로 몰려 전 세계의 추적을 받는 입장까지 처했으니까.

    지금에 와서야 하는 생각이지만, 자신이 조금만 더 현명하게 굴었더라면 그런 거친 방식이 아니더라도 지구로 돌아올 방법을 찾아냈을지 몰랐다.

    하지만 이지혁이 너무도 모순적이기에 그런 식이 아니고서는 방법이 없던 거다. 화합할 수가 없었으니까.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할 셈이죠?"

    "흐음……."

    이지혁이 머리를 박박 긁었다.

    "원인을 찾아내야지."

    "네?"

    "아무 이유 없이 이런 일이 동시다발적으로 벌어진다는 것은 너무 부자연스럽잖아. 구린 냄새가 나. 어떤 놈들이 뒤에서 조작하고 있는 것 같아. 그놈들을 찾아내야지."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들을 어떻게 찾아내겠다는 거죠?"

    "짐작 가는 놈들이 있어."

    아펠드리체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야 너는 모르겠지. 모를 수밖에 없겠지.

    "찝찝한 냄새가 나거든."

    이지혁이 먼 곳을 응시했다.

    마족, 드래곤, 마왕, 신.

    이지혁은 지금껏 수많은 적들을 상대해 왔다.

    하지만 마음에 남아 있는 한 가지 명제가 언제나 이지혁을 찝찝하게 만들었다.

    '인간의 적은 언제나 인간이다.'

    그의 뇌리에 박혀 있는 한 남자.

    '알파.'

    * * *

    "재미있게 돌아가는군."

    알파는 모니터를 보며 싱긋 웃었다.

    각국의 전쟁 상황이 눈에 훤히 들어온다. 따로 정보 수집을 명할 필요도 없었다. 그들 대신에 상황을 수집하여 알려주는 언론사들이 수도 없었으니까.

    "누가 보면 가만히 구경하는 사람인 줄 알겠습니다."

    등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알파는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대답했다.

    "구경하는 중이지."

    사람을.

    이 변해가는 세상을.

    알파는 싱긋 웃으며 말했다.

    "나는 그저 구경하는 것뿐이야, 세상이 어떻게 변해가는지. 옆구리를 조금 찔러주기는 했지만, 선택은 저들이 한 거잖아?"

    "그렇기는 하죠."

    하지만 당신이 찌르지 않았다면 벌어지지 않을 일이지.

    "그래서 이제는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간단하지."

    알파의 시선이 화면으로 꽂혔다.

    * * *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알파의 말은 농담처럼 들렸다.

    상황을 이렇게 몰고 간 것은 누가 뭐라고 해도 알파였다.

    그런데 이런 호기를 만들어놓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니?

    "그게 무슨 소립니까?"

    "말 그대로야. 왜 흥분하지?"

    알파는 조금은 어리둥절하다는 듯이 웃었다.

    그의 표정, 말투 하나하나에 진실이란 것이 조금도 담겨 있지 않다는 것을 알기에 알파가 저런 표정을 지을 때면 속이 뒤집히는 느낌을 받았다.

    그는 조롱한다.

    세상을 조롱하고, 자신을 조롱하고, 심지어 악마들마저 조롱하고 있었다.

    그리고 자기 자신조차 조롱하는 사람이 알파였다.

    그와 함께한 시간이 그리 길지는 않지만, 한 대상이 어떤 인간인지 파악하는 데는 충분한 시간임에도 그는 아직 알파가 어떤 부류의 인간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는 때로는 무척이나 순수한 사람 같기도 하고, 어떨 때는 세상에 다시없는 악마와도 같이 느껴졌다.

    알 수 없는 사람.

    그것이 알파에 대한 그의 가장 확고한 인상일 것이다.

    "그럼 대체 무얼 위해 이런 일을 한 겁니까? 분열을 획책한 것 아니었습니까?"

    "분열?"

    알파가 고개를 갸웃했다.

    "분열이라니? 뭘 분열시켜야 한다는 거지?"

    "각국의 관계 말입니다. 지금처럼 단단한 공조 체계로 이어져 있다면 그들의 틈을 파고들기가 어려울 테니, 혼란스럽게 만들어서 틈을 파고들려는 것 아니었습니까?"

    알파는 묘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이봐, 베젤."

    "예, 알파."

    알파가 고개를 갸웃갸웃하더니 웃으며 말했다.

    "난 네가 하는 말이 무슨 말인지 하나도 이해할 수가 없는데? 분열? 공조? 대체 뭘 보고 그런 말을 하는 거지?"

    "……."

    "이 세계는 이미 분열되어 있어."

    "네?"

    알파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벅저벅.

    그는 이 방에서 유일하게 빛이 비쳐 들어오는 창으로 다가가더니, 손가락을 들어 손톱으로 유리를 긁었다.

    끼이이이익.

    그 날카로운 소음에 베젤은 눈을 찌푸렸다. 사람 신경을 긁는 소리가 귀를 파고든다.

    "보여?"

    알파가 유리창을 가리킨다.

    무슨 말을 하는 걸까?

    무엇을 보라고 하는 걸까?

    베젤은 고개를 저었다.

    "안 보입니다."

    "왜 안 보이는 거지? 이리 선명하게 나타나 있는데 말이야."

    "무슨 말씀이신지?"

    알파는 답답하다는 듯 유리창과 베젤을 번갈아 바라보더니, 두리번거리며 무언가를 찾기 시작했다.

    구석의 책상 위에서 펜을 찾아낸 알파가 유리창을 향해 다시 다가가더니, 뭔가를 그리기 시작했다.

    "음?"

    찌이이익.

    마카와 유리창이 마찰하며 기이한 소리가 난다. 그 소리 역시 듣기 좋은 것은 아니었다.

    이내 거미줄과 같은 선을 죽죽 그은 알파가 싱긋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이젠 보이나?"

    "장님이 아니고서야 당연히 보이겠죠. 그걸 못 볼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정말 보여?"

    알파가 기괴하게 웃었다.

    "뭐가 보이지?"

    "선이 보입니다."

    "어떤 선이?"

    "당신이 그어놓은 선이 보입니다."

    "그래?"

    알파는 키득대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봐야 할 것은 그게 아니지. 네가 봐야 할 것은 내가 이 선을 왜 그었느냐야."

    "예?"

    이 사람의 말은 이해하기가 힘들다.

    "봐."

    알파가 가볍게 유리를 향해 손을 뻗었다.

    챙!

    짧고 날카로운 파열음과 함께 유리가 깨어져 나간다.

    그리고 그 순간, 베젤은 볼 수 있었다.

    유리가 정확히 알파가 그어놓은 선을 따라 깨어져 나간 것이다.

    "……."

    "안 보이나?"

    "보입니다."

    대답을 하면서도 베젤은 눈앞의 현상이 어떻게 벌어지고 있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균열이라는 것은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지. 이 세상의 균열은 이미 파열 직전이야. 곧 터져 나가겠지."

    "흐음……."

    "이 전쟁은 균열을 만들기 위한 전쟁이 아니야. 균열이 아니라 모순을 만들기 위한 전쟁이지."

    "모순?"

    "그래, 모순이지."

    알파는 다시 몸을 돌려 자신이 있던 자리로 돌아가 의자에 앉았다.

    "인간이되 인간이 아닌 자들이 인간과 어울려 인간처럼 살아가고 있다는 것은 모순이잖아. 그렇지 않아?"

    "물론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스스로가 인간이라고 생각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게 모순인가 아닌가는 중요하지 않을 겁니다. 그들이 인간으로 남고 싶어 하니까요."

    "그래. 그래서 전쟁이 필요한 거지."

    "……."

    알파가 밝은 목소리로 노래하듯 말했다.

    "곧 알게 될 거야, 그들이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인간으로 남고 싶어도 인간으로 남아 있을 수 없다는 것을 말이야. 그들이 인간으로 남을 방법은 하나뿐이야. 지금 인간인 자들을 인간의 자리에서 끌어내리는 거지."

    "당신의 뜻대로."

    "그거 꽤나 오글거리는 대사군. 자제해 줘. 마치 내가 히틀러라도 된 것 같은 기분이니까. 나는 인종차별주의자가 아니라고."

    그렇겠지.

    알파의 머릿속에서 인간이란 종족과 성별, 노소를 구분하지 않고 멸절시켜야 할 존재니까.

    마왕을 소환하고, 악마와 손을 잡고, 전 세계의 전쟁을 부추긴다.

    하고 있는 짓을 보자면 영웅물에 등장하는 악당 같지만, 그는 근본이 다른 사람이다.

    그는 지배도, 파괴도 원하지 않는다.

    그가 원하는 것은 새로운 탄생.

    새로운 질서의 탄생이다.

    "그래서 그 인간은 뭐하고 있대?"

    "그 인간이라고 하시면?"

    "내가 신경 쓸 인간이라고는 하나밖에 없잖아. 인간도 아니면서 인간의 편에서 개처럼 일하고 있는 그자 말이다."

    "이지혁입니까?"

    "빙고."

    베젤은 그의 머릿속에 있는 이지혁에 대한 정보를 끄집어냈다.

    "여전히 두문불출 중입니다."

    "흐음……."

    알파는 고개를 갸웃했다.

    "나의 도발이 먹히지 않은 건가? 지금쯤 안절부절못하고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말이야."

    "패턴 자체는 변화하지 않았습니다."

    "그럼 속에서 부글부글 끓고 있겠군. 나를 직접 잡으러 올 수도 있고."

    "당신을 말입니까?"

    베젤은 알파가 괜한 생각을 한다고 생각했다. 알파는 직접 움직인 것이 없다. 지휘 자체를 맡은 것도 다른 사람이고, 알파가 이러한 일을 벌였다는 접점을 찾아낼 수 있는 사람도 존재할 리 없었다.

    그런데 이역만리 떨어진 곳에서 이지혁이 알파가 이러한 일을 저질렀다는 것을 알아채고 찾으러 온다?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너무 나가신 것은 아니신지?"

    "그리 보이겠지."

    알파는 휘파람을 불었다.

    "그렇게 보는 게 정상일 테고 말이야. 그런데 그런 예감이 드는군. 나는 육감이 잘 맞는 사람인데 말이지."

    알파는 몸을 기대며 말했다.

    "그가 강한 것은 인정합니다. 능력자의 눈으로 보기에도 그는 규격에서 벗어나 있는 존재입니다. 애들이 싸우고 있는데 갑자기 격투기 선수가 난입한 것 같은 이레귤러니까요. 하지만 그가 강한 것과 그의 통찰력이 뛰어나다는 것은 별개의 문제 아니겠습니까."

    "그렇지."

    "그의 지능이 그리 높아 보이지는 않습니다만? 그리고 심지어 그가 아인슈타인급의 두뇌, 아니, 홈즈급의 두뇌를 갖추었다고 해도 지금 상황만으로 당신의 개입을 예측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모르는군."

    "…제가 말입니까?"

    알파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몰라. 이건 두뇌의 문제가 아니야. 그냥 아는 거지. 그도, 나도 말이야."

    "…이해하기 힘듭니다."

    "이해할 수 없을 거야. 나도 설명하기가 어렵군. 뭐라고 할까, 그와 나는 무척이나 닮은 사람이거든?"

    "네?"

    "그런 느낌이 든다. 그저 그는 이 세계를 원하는 것이고, 나는 이 세계가 아니라 다른 세계를 원하는 것뿐이지. 입장이 반대가 되었다면 그는 나보다 더 과격하게 세상을 파괴하고 있을지도 모르지."

    베젤은 입을 다물어 버렸다.

    어차피 알파의 모든 생각을 이해하여 따르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알파의 생각과 사상에 동조했을 뿐이다.

    그를 따르다 보면 다른 세상이 보일 것이라는 확신으로 움직이는 것이다.

    그러니 그의 모든 것을 이해할 필요도 없다.

    "그래서 아무것도 하지 않으신다구요?"

    "지금 필요한 것은 시간이다."

    "시간?"

    "진실에서 눈을 돌린 어린양들이 자신들이 제단에 바쳐진 제물이라는 것을 깨달을 시간. 그 시간을 느긋이 기다리면 돼. 결국에는 알게 되겠지. 그리고 혼란에 빠져들 것이다. 우린 그걸 기다리면 되는 거야."

    "예."

    뜬구름 잡는 것 같은 말이지만, 알파라면 무언가 생각이 있을 것이다.

    베젤은 그리 생각했다.

    "그래서 말인데……."

    "예?"

    "조금 더 재미있게 판을 돌려보는 것도 괜찮겠다 싶군. 잘못하면 판이 망가지겠지만, 그것도 재미 아니겠어?"

    "하아……."

    베젤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 사람은 항상 이런 식으로 변덕스럽다.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야 한다고 말한 지가 얼마나 되었다고.

    "어쩌실 생각이십니까?"

    "놀고먹는 잉여 악마 놈도 일은 좀 해야지. 마왕이라는 것들이 둘이나 와서 아무것도 못하고 뒈져 버렸으니, 의기소침해 있잖아. 가만 보면 귀엽다니까?"

    악마를 귀엽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또 있을까?

    이 사람이 아니고서야 누가 그런 말을 할 수 있겠는가.

    "그에게 무언가를 시키실 생각이십니까?"

    "음, 그래야겠지?"

    "알파."

    "으응?"

    베젤은 진심을 담아 이야기했다.

    "괜한 생각이라고 생각하지 마시고 들어주십시오. 아무리 생각해도 악마들과 이런 관계를 유지한다는 것 자체가 부담스러운 일이라 생각합니다."

    "그래?"

    "그들은 말 그대로 악마입니다. 지금이야 도움이 될지도 모르지만, 언제 당신의 등에 비수를 찌를지 모릅니다. 사실 우리가 그들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도 그리 없지 않습니까?"

    "뭐, 그렇지."

    "그런데도 계속 이런 관계를 유지하려는 겁니까?"

    "베젤."

    "예."

    알파가 이전보다는 조금 굳은 것 같은 얼굴로 가만히 베젤을 바라보았다.

    베젤은 그 시선에 담긴 무거움에 자신도 모르게 침음을 삼키고 말았다.

    "여전히 모르는군, 몰라."

    "예?"

    "그들이 내 등에 칼을 꽂는다는 것은 더 이상 내가 필요 없어졌다는 뜻이겠지. 그렇지 않나?"

    "그렇습니다. 그러니 문제가 아닙니까."

    "아니, 그러니 문제가 없지."

    무슨 말인 걸까?

    그런 일은 절대로 벌어지지 않을 테니, 배신당하지 않는다는 뜻인가?

    "하지만 그들은 악마입니다. 꼭 그렇게만 생각할 수는 없지요."

    "모르는군, 몰라. 여전히 몰라."

    알파가 낮게 한숨을 쉬었다.

    "이봐, 베젤."

    "예, 알파."

    "그놈들이 내 등에 칼을 꽂는다면 나 없이도 이 세상을 망가뜨릴 수 있다는 거 아니겠어?"

    "그렇겠죠."

    "그럼 그걸로 된 거잖아?"

    "……."

    베젤의 동공이 커졌다.

    "세상이 무너진다면 그걸로 우리의 목적은 달성되는 거지. 어차피 세상을 바꿔서 내가 뭔가를 누려보겠다고 이러고 있는 것도 아닌데 말이야. 그렇지?"

    지배하지 않는다.

    알파는 세상을 지배하려 하지 않는다. 세상을 그저 파괴하려 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가 원하는 것은 이 세상은 바꾸는 것.

    그 변화의 끝이 파멸이라 해도 그는 결코 멈추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까 판을 깔아주자고. 그가 어떻게 나올지, 나도 무척이나 궁금하거든."

    알파의 낮은 웃음소리를 들으며 베젤은 묘한 비애에 잠겼다.

    인간들의 가장 큰 실수는 이 사람을 내버려 두지 않은 것이다. 그 대가를 이제 인간이 치러야 한다.

    그 육체와 그 영혼으로 말이다.

    * * *

    "아몰랑!"

    이지혁은 모든 것을 놓아버렸다.

    사람끼리 치고받는 걸 가지고 그가 뭘 어쩌겠는가.

    그렇다고 각국 지도자들을 한데 모아놓고 빠따를 칠 수도 없는 노릇이고.

    하기도 힘들지만, 하고 싶지도 않다. 막상 그랬다가 후폭풍이 얼마나 클까를 생각하면 손도 대지 않는 게 맞았다.

    "뭐가?"

    "아니."

    정해민은 아이스 아메리카노의 빨대에 입을 대고 쪼옥쪼옥 빨아대는 이지혁을 보면서 고개를 갸웃했다.

    얘가 왜 이리 심통이 나 있지?

    이지혁이 짜증이 나 있는 것은 패시브와도 같지만, 지금의 짜증은 이전까지의 모습과는 조금 다르다는 느낌이었다.

    이전까지의 짜증이 귀찮음이 베이스로 깔려 있는 감정이라면, 지금은 정말 말 그대로 짜증이었다.

    "무슨 일 있어?"

    "일은 무슨."

    이지혁이 심드렁하게 말하며 빨대를 쪽쪽 빨더니, 손을 뻗어 옆에 있는 시럽을 아메리카노 안으로 부어넣었다.

    "…그냥 설탕물을 마시지."

    "남이사."

    "커피를 왜 먹는지 알 수가 없네. 그렇게 먹으면 맛있어?"

    "응."

    이지혁은 빨대를 빼고는 아메리카노를 쭉쭉 들이켰다.

    정해민이 살짝 한숨을 쉬었다.

    "그나저나 큰일이다. 지금 중국도 티베트 쪽이랑 상황이 안 좋다던데."

    "흐음?"

    "티베트 쪽에서 독립 전쟁을 할 건가 봐. 진압하려고는 하는데, 티베트 능력자 전력도 만만치 않잖아."

    "그래?"

    "몰라?"

    이지혁이 알 리가 있나.

    대한민국 능력자가 어떤지도 잘 모르는데, 다른 나라의 능력자 전력이 어떤지 관심이 있을 리가 없었다.

    "뭐, 그건 그렇고, 요즘 분위기 어떻대?"

    정해민이 조금은 고민스럽다는 얼굴로 한숨을 쉬었다.

    "최정훈 씨가 말한 것보다 더 심각한 것 같아. 이제 어디 가서 능력자라고 말도 못하겠어."

    "왜? 괴롭혀?"

    "일단 눈초리부터 예전이랑 좀 달라. 우린 진짜 열심히 싸운 죄밖에 없는데, 이게 무슨 일인지 모르겠어."

    "흐음……."

    이지혁이 한숨을 쉬었다.

    뭔 죄가 있겠는가.

    다르다는 게 죄라면 죄지.

    이지혁은 마시던 커피를 내려놓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 가?"

    "담배 피우러 간다."

    "영화 시작할 시간 다 되어가는데?"

    "한 대 피우고 가면 그만이지, 뭘."

    "빨리 와."

    이지혁은 끄응, 한숨을 내쉬며 흡연실이 있는 3층으로 올라갔다.

    기분 전환 겸 영화라도 보고 오자는 정해민의 말에 무심코 고개를 끄덕인 게 실수였다.

    그냥 하는 말인 줄 알았지, 이렇게 추진력 좋게 설칠 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그런 게 아니라고 말을 하는데도 말이 전혀 통하지 않는다.

    남아일언중천금이라는 말에 나는 사나이가 아니라고 저항했지만, 자꾸 그렇게 꿍해 있으면 사무실 분위기만 나빠지니까 제발 좀 나갔다 오라는 최정훈의 구박에 시무룩해진 이지혁이 정해민의 손에 이끌려 나온 것이다.

    "아침부터 이게 무슨……."

    이지혁은 한숨을 푹 쉬었다.

    그놈의 영화야 내일도 볼 수 있는 거고 천천히 봐도 되는데, 뭐가 그리 급하다고 말이 나오자마자 쳐들어와서 사람을 들들 볶아대는가.

    귀찮아 죽겠네, 진짜.

    이지혁은 흡연실로 들어가 담배를 입에 물었다.

    거절하려 마음먹으면 거절할 수도 있다.

    하지만 거절하려는 찰나, 이지혁의 머리를 스쳐 지나가는 것이 있었다.

    "설마 처음일 줄이야."

    생각해 보니 이지혁은 현대에서 단 한 번도 데이트를 해 본 적이 없었다. 따져 보면 그가 여자를 만난 것은 전부 다 베라프에서였던 것이다.

    인간 여자와의 데이트는 명백히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러니 어찌 해보지 않을 수 있겠는가.

    치익.

    담배에 불을 붙이고 바깥을 바라보자 차가운 공기가 흡연실 안으로 불어닥쳤다.

    "으음, 날이 차가운데……."

    이지혁은 한기를 느끼며 몸을 떨었다.

    너무 얇게 입었나?

    아니, 그렇다고 치더라도 이렇게 추운 게 말이 되나?

    자신은 이지혁인데?

    베라프의 북풍한설도 우습게 넘기던 그였지만, 오늘은 이상하게 한기가 들었다.

    몸이 안 좋은가?

    이지혁은 옷깃을 여몄다.

    * * *

    "…데이트?"

    그녀의 눈은 마치 먹잇감을 노려보는 맹수와도 같았다.

    어둠이 내린 건물들 사이, 으슥한 골목에서 그녀의 눈은 마치 고양이처럼 번쩍이고 있었다.

    "…데이트."

    그리고 그녀의 목소리는 그야말로 음산했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데이트라니…….

    그리고 그 데이트가 하필이면 저 성격 나쁘고, 조그맣고, 나이 많은 여자라니.

    이건 그녀에 대한 모독이었다.

    "데이트 아님. 영화 관람."

    끄덕.

    옆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그녀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다.

    이걸 데이트라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직장 동료와 영화 한 편 보는 것까지 데이트라고 해버리면 세상에 데이트가 아닌 것이 뭐가 있겠는가.

    그랬다가는 커피 먹다가 손만 스쳐도 결혼해야 할 판이다.

    그러니 이걸 데이트라고 할 수는 없다.

    부들.

    하지만 뭔가, 이 이상한 기분은.

    손에 쥐고 있던 아이스크림을 통째로 도난당한 것 같은 찝찝함과 분노가 그녀를 안절부절못하게 만들었다.

    길 건너 카페의 3층.

    흡연실로 나와 담배를 피우고 있는 이지혁이 보인다.

    그녀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그를 응시하면서 몸을 어둠 속으로 숨겼다.

    감이 좋은 사람이니 좀 더 은밀하게 미행해야 한다.

    "의미 없음."

    "응?"

    그녀가 뒤를 돌아보았다.

    도가윤이 고개를 내젓고 있었다.

    "미행의 의미가 없음. 결국 달라지는 게 없음. 죄지은 거 아님. 차라리 합류를 권장함."

    "핫!"

    그랬다.

    생각해 보니 미행을 해서 뭐가 달라진단 말인가.

    꼬리를 잡는다고 해도 지금의 그녀는 이지혁에게 뭔가를 요구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이런 식으로 둘만 있는 시간을 늘리는 것은 되레 정해민에게 있어서 플러스가 될 확률이 컸다.

    "…자연스럽게 합류하도록 하죠."

    "예매 완료."

    "언니……."

    이 언니, 무섭다.

    거기까지 내다보고 이미 같은 영화를 예매해 두었다는 건가?

    왠지 좌석도 이어져 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이 언니가 제일 위험해.'

    따지고 보면 이지혁과 같이 있는 시간도 가장 길었고, 이지혁에 대해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도 도가윤일지도 모른다.

    처음 봤을 때는 무척이나 무덤덤한 사람이라 생각해서 그리 경계하지 않았는데, 요즘 하는 짓을 보면 결코 무덤덤한 게 아니었다.

    지금 하는 것만 봐도…….

    하지만 지금 도가윤을 경계할 수는 없었다.

    적의 적은 친구인 법.

    지금은 연합 전선을 구축할 때였다.

    "그 언니가 선수를 칠 줄이야."

    김다솜이 한기를 마구 뿜어냈다.

    "춥다."

    "언니, 카페로 쳐들어가는 건 어떻게 생각해요?"

    "별로. 영화관에서 우연히 만남. 같은 자리."

    "그것도 좋네요."

    확실히 이 언니도 도움이 된단 말이지.

    잠재적인 경쟁자이기는 하지만, 지금은 도움이 되는 사람이다.

    김다솜은 일단은 도가윤의 의견을 따르기로 했다.

    RRRR.

    그 순간, 전화기가 울렸다.

    김다솜은 조금은 짜증이 난 얼굴로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 어, 다솜아. 집엔 언제 오니? 오빠가 밥 맛있게 해놨는데, 같이 먹을 거지?

    "안 들어가.

    - 응? 다솜아, 그게 무슨 소리니? 안 들어온다니! 늦게 올 수도 있다는 말이지? 그렇지?

    "안 들어가."

    - 다솜아아아아아아! 너 지금 어디니! 남자랑 같이 있는 건 아니겠지? 그거 아니지? 그렇지?

    뚝.

    김다솜은 전화를 끊어버렸다.

    전화가 다시 울리기 시작하자 아예 배터리를 빼버린 김다솜이 무시무시한 눈빛으로 다시 이지혁이 있는 곳을 살폈다.

    "놓치지 않아."

    그녀가 조용히 투지를 불태웠다.

    도가윤은 말없이 그녀의 등 뒤로 바짝 따라붙었다.

    * * *

    "얼씨구?"

    이지혁이 혀를 찼다.

    저것들은 뭔 생각으로 저기서 저러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설마 안 보일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물론 일반인이면 못 보겠지.

    그런데 저렇게 투지를 불태우고 있으니 이지혁의 기감에 걸려들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하……."

    이지혁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새삼 느끼는 거지만, 주변에 제대로 된 인간이 없다, 제대로 된 인간이!

    아니, 그게 다가 아니지.

    생각을 해보면 주변에 제대로 된 생물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드래곤도 미친 드래곤이지를 않나, 오거도 미쳐서 바람을 피워 대고.

    "아?"

    그러고 보니 그 엘프들은 다 어디로 갔지?

    로아벨과 레아?

    "잊고 있었네."

    미친것들을 생각하다가 떠올려지다니, 그들에게 있어서도 매우 불행한 일이었다.

    아펠드리체에게 물어봐야겠다.

    걔들이 딱히 갈 데가 있을 리가 없는…….

    "음?"

    이지혁이 한쪽 구석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까는 한산했는데, 사람들이 꽤 몰려 있었다. 고성도 오가고 있는 것을 보니 무슨 일이 터진 것 같았다.

    "뭔 일이지?"

    이지혁이 안력을 돋웠지만, 사람들에 가려 그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잘 보이지 않았다.

    "뭐 봐?"

    "응?"

    어느새 흡연실로 따라 들어온 정해민이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왜 저래?"

    "글쎄?"

    저기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는 알 수가 없다. 거리가 있어서 말소리도 잘 들리지 않고.

    그런데 하나 알 수 있는 것이 있긴 했다. 분위기가 갈수록 뭔가 달아오른다는 것이다.

    '언젠가 비슷한 광경을 본 것 같은데…….'

    베라프에서도 저런 분위기를 내뿜는 현장이 있긴 했다.

    마녀 사냥.

    죄도 없는 사람을 마녀로 모아 화형시킬 때가 딱 저랬다. 처음에는 그저 호기심에 다가온 사람들이 점차 분노에 전염이 되고, 나중에는 자신들이 그의 철천지원수라도 된 양 분노를 뿜어 댄다.

    지금 눈에 보이는 게 딱 그랬다.

    저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이 딱 분노를 모아가는 과정이었다.

    '사고 나겠는데?'

    끓어오른 분노는 분출될 곳을 찾기 마련이다.

    지금 이지혁이 보기에 저곳은 비정상적으로 끓어오르고 있었다. 안에서 살인이라도 나지 않은 이상 저런 반응이 나오기도 쉽지 않을 텐데.

    "가볼래?"

    "음?"

    정해민의 말에 이지혁이 고개를 갸웃했다.

    가본다고?

    저기를?

    왜?

    자신과 관련된 일도 아닌데 굳이 가 볼 필요가 있을까?

    "뭐하러?"

    "궁금하잖아."

    그것도 말 되네?

    관련된 일이고 아니고를 떠나서 저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궁금하기는 했다.

    "영화 시간 다 됐다며?"

    "아직 시간 좀 있어. 너 담배 피우러 가는 거 꼴 보기 싫어서 그런 거야."

    "성격 진짜……."

    "왜왜! 뭐뭐!"

    이지혁이 피식 웃고는 몸을 돌려 계단으로 향했다.

    저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획!

    이지혁의 고개가 부러질 듯 뒤로 꺾였다.

    그의 눈에 인파들 사이에서 푸르스름한 스파크가 튀어 오르는 모습이 보인다.

    능력?

    등 뒤에서 느껴지는 싸늘한 기운에 몸을 돌리기는 했지만, 진짜 능력자가 날뛰는 건가?

    저 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이런 미친!"

    전신에 소름이 돋아 올랐다.

    이지혁의 몸이 쭈욱 늘어나며 인파들을 향해 돌진했다.

    그의 우수에 검은 마나가 살짝 뭉쳤다.

    이지혁이 팔을 앞으로 쭈욱 내뻗자 촉수 수십 가닥이 튀어나와 스파크가 튀는 곳을 향해 날아갔다.

    뭔가 파직거리는 소리가 작렬했지만, 다행히 스파크는 이지혁의 촉수를 타고 바닥으로 스며들었다.

    "어느 미친놈이야!"

    이지혁이 이를 갈며 인파들을 헤치고 안으로 들어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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