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 리터너-44화 (44/118)
  • [■] 라트렐의 눈을 기억하십니까? [■]

    ─────

    이지혁이 긴장된 시선으로 게이트에서 나온 것을 노려보았다.

    "왜 저게 튀어 나왔지?"

    게이트에서 나온 것은 아주 작은 생물이었다.

    그 거대한 게이트에서 나온 몬스터라고 하기에는 이상할 정도로 작았다. 보통의 게이트에선 나왔다면 이런 어색함은 없었겠지만…….

    한편으로 납득도 된다.

    저건 보통의 게이트에서 나와서는 안 될 몬스터지.

    아니, 저걸 몬스터라고 해야 하나?

    "끄응……."

    이지혁은 머리를 벅벅 긁었다.

    "어찌하죠? 공격합니까?"

    정인수의 다급한 외침에 이지혁은 한숨을 푹 쉬고는 손을 내저었다.

    "잠깐만요."

    하…….

    공격을 하자니 좀 그렇고, 공격을 하지 않자니 그것도 그렇고. 대체 어찌해야 한다는 말인가.

    이지혁은 짜증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다가 천천히 게이트를 향해 걸어갔다.

    게이트에서 나온 존재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이지혁을 바라보더니 몸을 움찔 떨었다.

    "알아보겠냐?"

    끄덕.

    게이트에서 나온 존재는 아주 작았다.

    작은 강아지만 한 존재였다.

    아니, 정말 작은 강아지처럼 생겼다.

    강아지라기에는 주둥이가 조금 길어서 작은 개라는 느낌이 더 강하지만 말이다.

    새하얀 털은 거의 은빛으로 빛나고 있고, 네 개의 다리는 앙증맞았다.

    꼬리는 동그랗게 말려 있고, 눈은 검게 빛났다.

    "…개잖아."

    "개네."

    "개 같네."

    정인수와 최정훈이 중얼거렸다.

    "쯧."

    이지혁이 혀를 찼다. 겉으로 보기에는 완전한 개니까 저렇게 말한다 해도 하등 이상할 게 없지.

    하지만 이건 보통 개가 아니었다.

    "덜 처맞았냐? 어디 여길 오고 난리야?"

    끼잉.

    강아지가 이지혁의 목소리에 뒤로 슬금슬금 물러났다.

    "어휴."

    이지혁이 그 광경을 보며 짜증을 냈다.

    저 가증스러운 놈.

    지구에서 생물을 나누는 방법은 간단하다.

    인간, 인간이 아닌 동물, 동물이 아닌 곤충, 그리고 곤충이 아닌 미생물, 또 식물.

    하지만 베라프에서는 다르다.

    일단 지구에는 없는 몬스터라는 존재가 있다. 몬스터 역시 자연발생적 몬스터와 마수들로 나뉘기는 하지만, 싸잡아 몬스터로 분류할 수 있다.

    그리고 정령이라는 존재가 있고, 유사 인류가 있고, 그밖에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특이한 존재를 따지자면, 지금 눈앞에 있는 이런 놈들이다.

    신수.

    성력을 타고 태어나는 짐승들.

    몬스터 주제에 인간보다 뛰어난 지능을 가지기도 하고, 인간과는 비교될 수 없는 힘을 패시브로 가지지를 않나, 나름 신성하다며 과거에는 거의 신급으로 모셔지기도 했던 생물들.

    "아, 왜 왔냐고!"

    이지혁이 이를 으득으득 갈았다.

    그럴 수밖에.

    드래곤 중에 그를 가장 방해한 존재가 아펠드리체라면, 신수 중에 그를 가장 많이 방해한 존재는 누가 뭐래도 이 빌어먹을 강아지 놈이었다.

    베히모스.

    베라프의 수많은 신수 중에서도 최상위에 위치한 신수.

    그 육체적인 힘만큼은 드래곤에 필적했다.

    한달음에 산을 뛰어넘고, 그 한 번의 하울링으로 바다를 가른다.

    더구나 신성의 존재.

    어찌 보면 이지혁에게는 드래곤보다 더 껄끄러운 존재이기도 했다.

    물론…….

    베라프 후반기에는 지나가던 똥개 취급을 당하며 보일 때마다 죽도록 처맞고 도망가는 게 일상이었지만, 이지혁이 흑마도사로 전직한 직후에는 로아벨과 더불어 이지혁을 제일 괴롭혀 온 존재였다.

    "아오!"

    생각하니 빡치네!

    오늘 된장 한 번 발라?

    이지혁의 눈빛을 알아챘는지 베히모스가 목을 움츠렸다.

    "저거……."

    반응을 보아하니 자의로 이지혁을 쫓아서 온 것은 아닌 모양인데?

    "야!"

    움찔.

    이지혁이 한마디 할 때마다 베히모스는 몸에 경련을 일으켰다.

    하기야…….

    워낙 발이 재빠르고 전력으로 달릴 때는 음속을 초월하는 애다 보니 지금까지 요리조리 잘 빠져나간 거지 발이 좀만 늦었다면 이미 베히모스 통구이든가, 베히모스 전기통개가 되었겠지.

    당한 게 많다 보니 이지혁도 집요하게 베히모스만 때려잡던 시절이 있었거든.

    십만 대군 사이에 베히모스만 보이면 '일단 놈을 공격한다'가 기본 룰이었다.

    "이리 와봐."

    베히모스가 자리에서 꾸물꾸물 일어나더니 앞발을 슬쩍 내밀었다가 다시 제자리로 돌렸다.

    "뒈질래?"

    끼잉.

    베히모스는 정말 가기 싫다는 듯 구슬프게 한 번 울고는 이지혁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뭐?"

    끼잉.

    개 주제에 한숨을 푹 내쉰 베히모스가 터덜터덜 이지혁을 향해 걸어왔다.

    지가 가봐야 어디로 가겠는가.

    베라프도 아니고, 아는 것 하나 없는 이 동네에서 이지혁의 눈을 피해 달아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빨리 안 와? 뒈질래?"

    도도도도.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베히모스가 이지혁의 바로 앞까지 짧은 다리를 놀려 도도도, 달려왔다.

    "앉아!"

    턱!

    "손!"

    탁!

    "착하다."

    어? 이게 아닌데?

    "아, 미안하다. 너무 자연스러워서 그만."

    주르륵.

    베히모스의 눈에서 뭔가 투명한 것이 흐른다고 느낀 것은 이지혁의 착각이련가?

    "아, 뭐, 그런 걸로 울고 그래?"

    이지혁은 괜히 베히모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러고 보면 지금 상황이 조금 이상하기는 하다.

    베라프의 멸망의 좌였던 이지혁이면 몰라도 지금의 이지혁은 이 베히모스에 대해 딱히 우위를 점하고 있다고 할 수 없었다.

    전력으로 싸운다면 마지막에는 쓰러뜨릴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현재 가지고 있는 힘은 서로 대등한 수준일 것이다.

    그런데도 베히모스는 감히 이지혁에게 반항할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낑낑대고 있었다.

    '이래서 초장에 잡아놔야 하는 거지.'

    몇 백 년 동안 패놨더니 아주 그냥 뼛속 깊이 이지혁에 대한 공포가 각인되어 있는 듯했다.

    하기야.

    이지혁이 그렇게 얻어맞았어도 껄끄러움이라는 게 남았을 테니까.

    지금도 아펠드리체를 보면 알 수 없는 분노가 꾸물꾸물 올라오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너 왜 왔냐고? 나 잡으러 왔냐?"

    도리도리!

    베히모스의 고개가 급격하게 좌우로 돌아갔다.

    목 빠지겠네.

    그러지 마라. 나 요즘 착하게 산다. 니가 내가 요즘 어떻게 사는지 알면 울걸?

    "그럼 왜 왔어?"

    끼잉.

    베히모스의 고개가 뒤로 돌아갔다.

    "으응?"

    "그건 제가 설명드려야 할 것 같네요."

    "어?"

    그 순간, 게이트 안에서 또 하나의 존재가 걸어 나오고 있었다.

    이지혁의 눈이 점점 커졌다.

    "너?"

    이윽고 모습을 드러낸 존재는 늘씬한 미녀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허리까지 내려와 찰랑이는 백발.

    백발과 어울리는 새하얀 피부.

    슈퍼 모델이라도 데려온 듯이 길쭉길쭉한 팔다리.

    그리고…….

    뾰족한 귀.

    "엘프?"

    최정훈이 게이트에서 나타난 존재를 보며 놀라 외쳤다.

    로아벨과 흡사한 외모만 보아도 저 존재가 누구인지 정도는 알 수 있었다.

    엘프.

    베라프의 이종족이 스스로 이 세계에 그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응?"

    이지혁이 나타난 엘프를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어디서 봤던 엘프인데?

    쟤 누구더라?

    천천히 앞으로 걸어온 엘프가 이지혁을 가만히 보더니 팔을 우아하게 저으며 엘프 식의 예를 표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베라프의 지배자시여. 수억 마수의 주인이며 대지의 주인이여, 고귀한 마계의 마왕이자 베라프의 유일한 멸망의 좌를 뵙나이다."

    "끙……."

    이지혁이 눈앞의 엘프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생각났다.

    "엉덩이 무거운 하이 엘프가 이 세계에는 웬일이지?"

    하이 엘프라 불린 엘프는 환하게 웃으며 이지혁을 바라보았다.

    "그대를 뵙기 위해 왔습니다."

    "저 강아지는 네가 데리고 온 건가?"

    "그분께서 저를 수호하겠다고 붙여주셨습니다."

    "강아지 새끼 주제에 수호는!"

    끼잉.

    이지혁이 눈을 부라리자 베히모스는 낑낑대며 하이 엘프의 다리 뒤로 숨었다.

    수호는 얼어 죽을.

    니가 수호 받아야겠구만!

    "그래서 무슨 일이지? 날 찾아온 건가?"

    "그렇습니다."

    "하……."

    게이트가 워낙 커서 나름 긴장했는데, 뭐 이런 것들이 나와서 사람을 허무하게 만들고 난리야.

    "…아니지."

    이지혁이 사태를 똑바로 파악하고는 하이 엘프를 바라보았다.

    "너, 종족 대표로 온 거냐?"

    생각해 보니 하이 엘프에 베히모스면 좀비 드래곤 따위와는 비교도 안 되는 거물이었다.

    저 여자는 저 순진한 얼굴을 하고서는 명색이 엘프 족 대표란 말이다.

    드래곤으로 치면 로드쯤 되겠지.

    베라프의 모든 생물 중에서 서열을 매긴다면 못해도 10위권 안은 깔끔하게 수성할 수 있는, 거물 중의 거물이었다.

    드래곤 로드라는 도마뱀이 만날 집에서 뒹굴거리고 게임만 하고 노는 꼴을 보니 현실감각이 좀 애매해졌는데, 사실 하이 엘프라고 하면 마왕들도 무시할 수 없는 존재였다.

    그런 존재가 이계로 넘어왔다는 것이 보통 일일 리 없었다.

    "흠……."

    이지혁이 지금까지의 장난기 어린 얼굴을 지우고는 딱딱한 무표정으로 돌아갔다.

    "무슨 일이지?"

    "아……."

    이지혁의 분위기가 일변한 것을 본 하이 엘프도 자세를 바로했다.

    그녀의 눈앞에 있는 자는 바로 이지혁.

    길고 길던 베라프 역사상 유일하게 신의 이름에 반기를 든 배덕자이자, 홀로 신성의 영역에 오른, 전무후무한 마도사였다.

    아무리 지금 그에게서 과거 그 광포했던 악마의 기운이 느껴지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그가 이룬 것만으로 존중을 받을 수 있는 존재였다.

    가는 길이 달라 존경을 겉으로 보일 수는 없겠지만 말이다.

    "라트렐의 눈을 기억하십니까?"

    "응?"

    이지혁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걸 기억 못할 리가 있나.

    그런데도 묻는다는 것은 그 라트렐의 눈에 관련된 무언가가 생겼다는 거겠지?

    "알지. 그런데 왜?"

    "그대가 라트렐의 눈을 이용하여 이 세계로 넘어온 이후로 베라프와 이 세계에 연결점이 생겼습니다."

    "그래?"

    그건 기분 나쁜 일이네.

    이지혁이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베라프와 연결된다고 해서 지금 당장 딱히 무슨 일이 생기는 것은 아니겠지만, 그 지긋지긋한 베라프와 연결이 되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기분이 나빴다.

    할 수만 있다면 베라프라는 세상을 완전히 도려내서 격리시켜 버리고 싶은 게 이지혁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그런데 그게 왜?"

    하이 엘프가 심각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그 말은 특별한 방법이 없더라도 이곳에서 베라프로 가는 게이트를 열 수 있다는 겁니다."

    "그건 원래 그런 거 아냐?"

    "원래대로라면 베라프에 접점이 있는 존재들만이 베라프의 좌표를 알아내 게이트를 열 수 있었죠. 이곳으로 따지자면, 멸망의좌와 로드처럼 말이죠."

    "응?"

    "하지만 이 세계에서는 신성력의 흔적을 쫓는 것만으로 베라프로 가는 게이트를 열 수 있게 됩니다."

    "근데 그게 어쨌다는 거야?"

    이지혁이 고개를 갸웃했다.

    이 동네에서 마나를 쓸 수 있는 존재라고 해봐야 이지혁과 아펠드리체뿐인데, 그게 무슨 상관인가.

    "이곳에 그가 왔기 때문이죠."

    "그?"

    하이 엘프가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비탄의 마왕, 델카란."

    "…뭐?"

    이지혁의 눈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 * *

    "이곳의 인간이란 아주 재미있는 건축물을 쌓는군."

    끝도 없이 솟아오른 마천루를 보며 델카란은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문명의 정점에 달한 신성제국이 하늘로 솟아오르는 성과 첨탑을 쌓아올린 것들을 보아왔지만, 이곳의 인간들이 쌓은 건축물은 정말로 하늘에 닿을 듯했다.

    게다가 거대한 쇠로 만들어진 배들을 하늘로 날리는 것을 보면, 이곳 인간들의 능력도 무시할 수가 없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다를 것 없지."

    어차피 인간.

    인간들은 그저 그의 앞에서 절망과 비탄을 토해내는 존재일 뿐이었다.

    그리고 이제는 이곳의 인간들에게도 알려줘야지.

    마왕이란 존재가 어떠한 것인지 말이야.

    카아아아아!

    델카란의 육체에서 뿜어져 나온 마나가 그의 몸 주위를 질주하더니, 솟아오른 건물들을 향해 쏘아져 갔다.

    * * *

    "델카란이 왔다고?"

    이지혁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확실한 거야?"

    "네."

    하이 엘프의 단호한 목소리에 이지혁은 끙,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드래곤 같지는 않지만 엘프들도 딱히 거짓을 말하지 않는다. 베라프에서 살아보면 거짓말은 인간의 종특이 아닌가 고민하게 될 정도니까.

    게다가 그녀가 이 세계까지 와서 델카란이 넘어왔다고 이지혁에게 거짓말을 할 이유도 없었다.

    "망했네."

    이지혁이 머리를 움켜잡았다.

    마왕 하나를 때려잡았더니, 또 마왕이 넘어온다.

    이 동네는 대체 어떻게 되어 있는 거지?

    베라프에서도 마왕이 넘어오는 것은 거의 천 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대형 이벤트란 말이다.

    지구로 치자면 대홍수 같은 개념이라고!

    마왕이 한 번 넘어올 때마다 문명 같은 것들이 죄다 리셋되고, 아주 깔끔하게 제로 베이스에서 다시 시작하게 해주는 문화 다양성의 수호자가 바로 마왕이란 말이다!

    그런데 뭔 놈의 마왕이 동네 마트 쇼핑 가듯 사흘들이 하나씩 넘어온다는 말인가!

    "꿀이라도 처발라놨나, 빌어먹을 놈들… 진짜!"

    이지혁은 입에서 불을 뿜을 기세로 소리쳤다.

    아무리 다른 동네라고는 해도 취급이 너무 다르지 않은가!

    베라프는 무슨 며느리가 친정 들르듯이 띄엄띄엄 현신하더니, 이 동네는 친정이냐? 친정이야?

    심심하면 와서 깽판을 놓는데, 이걸 뭐 어쩌라는 건가!

    게다가…….

    "왜 하필이면 그놈이야!"

    이지혁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델카란.

    마왕이란 개체는 매우 희소한 존재다.

    인류의 수십 배는 족히 될 만큼 수많은 마족과 마수들 중에서도 마왕의 위를 얻어낸 자는 100이 채 되지 않는다.

    그러니 얼마나 지고한 자리라는 말인가.

    하지만 사실 마왕이 백 마리나 된다는 것도 좀 어색한 일이기는 하다.

    지구의 개념으로는 마왕은 한 시대에 하나가 존재하고, 언제나 용사에게 퇴치당하는 존재였으니까.

    처음 마왕이 백 명쯤 된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얼마나 황당했던가.

    각설하고 그 많은 마왕 중에서도 델카란은 이지혁의 뇌리에 강렬하게 꽂혀 있는 존재였다.

    일단 베라프에서부터 유명했고, 직접 봤을 때는 뭐 저런 놈이 다 있나 싶을 정도로 황당했으니까.

    이지혁이 아는 델카란은 맹목적이고, 저돌적이고, 답도 없는 마왕이었다.

    무식하냐고?

    그건 아니다.

    마왕은 무식할 수가 없다. 그 정도 위치까지 가려면 지능은 필수니까.

    단순히 지능지수의 개념으로 말하자면, 마왕 중에 제일 멍청한 존재는 단연코 이지혁일 거다.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현실이 그러하다.

    마왕이라 불리는 존재들은 지능으로 따지자면 인간보다는 훨씬 똑똑했다.

    그런데도 맹목적이고 저돌적이다.

    보통 현명한 존재들은 목적의 달성이 어렵다 생각되면 목적 자체를 수정한다.

    하지만 델카란은 목적의 달성이 어렵다고 생각되면 그 좋은 머리로 온갖 수단과 방법을 강구하고, 그것도 안 되겠다 싶으면 직접 사고를 쳐 변수를 만들려고 해버리는 타입이다.

    뭔 소리냐고?

    온갖 발악을 다 하다가 안 되면 깽판 놓는다고!

    답도 없단 말이다!

    지능과 지혜가 같은 말이 아니라는 것을 이지혁은 델카란을 통해 실감했다.

    그런데 그런 마왕 놈이 지금 지구에 있다고?

    부르르르.

    이지혁이 몸을 거칠게 떨었다.

    "와, 이건 대형 사고다."

    순간적으로 정신이 아득해질 만큼 큰 사고란 말이다!

    이걸 대체 어떻게 해야 하지?

    "진짜 확실한 거야?"

    "그렇습니다."

    "그런데 너는 그걸 어떻게 알았는데?"

    "제가 알아낼 수는 없는 일이죠."

    "그런데?"

    하이 엘프는 뭘 당연한 것을 묻느냐는 듯 이지혁을 바라보았다.

    "교단에서 알려주었습니다."

    "교단? 라트렐?"

    "예. 라트렐 교단에서 저희에게 당신이 있는 세계에 델카란이 강림했다고 알려주었습니다."

    "음?"

    그 어떤 세계든 델카란이 강림했다면 하이 엘프가 직접 찾아온 건 이상하지 않았다. 오히려 엘프 대군을 이끌고 넘어오지 않은 것을 고맙다고 해야 한다.

    왜냐면 델카란과 엘프는 말 그대로 철천지원수이기 때문이다.

    이지혁이 차원을 넘어가기도 전에 베라프에 강림했던 델카란은 당시 존재하던 문명의 절반가량을 파괴했고, 그중 가장 철저하게 유린당한 것이 엘프였다.

    성향이 안 맞았는지, 그냥 마음에 안 들어서였는지, 그것도 아니면 그냥 어쩌다 그렇게 된 건지는 몰라도… 엘프들은 당시에 멸종 직전까지 처했고, 겨우겨우 델카란의 현신을 역소환시키고 나서야 수백 년에 걸쳐 그 상처를 치유할 수 있었다.

    그러다 보니 엘프들에게서 델카란이란 말은 표현 자체만으로도 저주나 다름없었다.

    그러니 하이 엘프가 델카란을 때려잡겠다고 이곳으로 넘어온 것까지야 익스큐즈할 수 있는 일이지만…….

    "라트렐이 그걸 어찌 알았지?"

    문제는 이거다.

    이 세계와 베라프는 전혀 다른 세계다.

    라트렐이 아무리 그쪽 세계에서는 신이라고 해도 지구에는 간섭할 수 없다. 신이 다른 차원에 간섭할 수 있었다면, 세상은 이미 신들의 전쟁터가 되었겠지.

    그런데 지구에 있는 이지혁도 모르는 사실을 라트렐이 어떻게 알고 신탁을 내렸냐는 거다.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응?"

    "이 세계와 베라프는 이미 어느 정도 연결이 되어 있습니다. 미세하지만 길이 생겨 버렸죠."

    "어째서?"

    "말씀드렸다시피……."

    하이 엘프는 침착하게 설명을 계속해 주었다.

    "라트렐의 눈 때문이죠."

    "라트렐의 눈?"

    "멸망의 좌께서 라트렐의 눈을 이용하여 이곳으로 넘어오신 바람에 세계에 균열이 생겼습니다. 미세하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균열이 베라프와 이 세계를 이어놓고 있습니다. 덕분에 이 세계에서도 신성력이 발휘되고, 그분의 예지도 닿는 것이지요."

    "으음……."

    이지혁이 머리를 벅벅 긁었다.

    그러고 보니 이쪽 세계로 넘어온 것들이 잘도 신성력을 써 댄다 싶더니, 이유가 있었구나.

    로아벨도 신성력을 퍼붓다가 얼마 안 가서 다 소진하고 퍼질 거라 생각했더니 예상외로 잘 버티고 있다 했는데, 그게 아니었어.

    "그럼 마나는 왜 안 넘어오는 거지?"

    "마나와 신성력은 개념이 다르니까요. 이 세계에 가득 찬 기운이 마나의 영향을 거부하고 있습니다."

    "흐음……."

    그러니까 에테르 기반의 세계다 보니 마나는 밀려서 넘어오지 못하는데, 신성력은 공백 상태다 보니 문제없이 넘어오고 있다, 이건가?

    그러니까…….

    "뭐가 그리 복잡해! 빌어먹을!"

    다짜고짜 화부터 내는 이지혁을 보며 하이 엘프의 동공이 흔들렸다.

    하지만 뭐…….

    원래 그런 인간인 건 이미 알고 있었으니까.

    예전이었으면 말이 조금만 어려워져도 속 시끄럽다며 마수 군단을 돌진시키거나 하늘을 가득 메운 흑마법을 내리꽂았을 사람인데, 이젠 입으로 저러는 걸 보니… 확실히 사람이 많이 유해졌다.

    "그러니까 정리하자면… 베라프와 여기 사이에 구멍이 뚫렸고, 그 구멍을 통해서 라트렐이 지구에 델카란이 강림했다는 것을 알아냈다?"

    "예."

    "그러고는 교단에 신탁을 내려서 너희한테 알려왔다, 이거네?"

    "그렇습니다."

    "흐음……."

    이지혁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물었다.

    "그래서 어쩌자고?"

    "무슨 말씀이신가요?"

    "너 하나 넘어와서 뭘 어쩌겠다는 거지? 상대가 누군지 모르지는 않겠지?"

    "물론 알고 있습니다. 그 증오스러운 델카란이지요."

    "썩어도 마왕이야. 게다가 걔는 썩지도 않은, 파릇파릇한 마왕이란 말이야."

    아주 그냥 팔팔한 전성기지.

    힘은 넘쳐 나고, 의욕도 넘쳐 나는, 말 그대로의 마왕이란 말이다.

    그런 마왕을 상대로 강아지 한 마리 데리고 덜렁 넘어와서는 뭘 어쩌자는 거지?

    "제가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은 저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델카란을 상대하는 것에 있어서 손 놓고 있을 수만은 없는 것이 저희들의 입장이라서요."

    "그러니까… 때려잡는 건 내가 해야 하고, 너희는 옆에서 숟가락을 얹은 다음에 아주 손 놓고 있던 건 아니라고 위안을 하시겠다?"

    "매우 가슴 아픈 지적이네요."

    보통 이런 말을 들으면 아니라고 반박을 하거나 되레 화를 내는 게 당연하겠지만, 하이 엘프는 하이 엘프.

    그녀는 모든 사실을 순순히 인정했다.

    "끙……."

    마음에 드는 대처는 아니었다.

    좀 아니라고 말도 하고 해야 이지혁이 드잡이질이라도 할 건데, 이런 식으로 순순히 인정해 버리면 괜히 꼬투리 잡는 기분이 되어버린다는 말이다.

    "그래서 그 델카란은 어디 있는데?"

    "그것까지는 저도 알 수 없습니다."

    "끄응……."

    이지혁은 머리를 쥐어 잡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제기랄, 심심하면 뭔 마왕이 넘어와."

    마왕급이 넘어와 버린 이상 상대하지 않을 수가 없다. 마왕이 맘먹고 설쳐 대기 시작하면 지구를 개미 새끼 하나 안 남기고 박살 내는 데 한 달도 걸리지 않을 것이다.

    귀찮음의 문제가 아니라 존망의 문제가 되어버린 이상 이지혁도 게으름이나 부리며 뒹굴댈 수가 없는 것이다.

    '그때 그 마족 새끼가 원인인가?'

    마왕이 이리 쉽게 넘어올 수 있을 리가 없는데, 마족이든 뭐든 지구로 마왕을 불러들이는 자가 분명 있을 것이다. 그 원인을 제거하지 않으면 이번에 델카란을 막아낸다 하더라도 또 다른 문제들이 생겨나겠지.

    "하지만 그건 나중 문제고……."

    "예?"

    "솔까말, 답이 없는데?"

    "……."

    마왕은 이미 한 번 막아냈다.

    벨트레체.

    개고생을 하기는 했지만, 어쨌든 막아내긴 막아내지 않았던가.

    하지만 벨트레체와 델카란은 다른 마왕이다.

    벨트레체조차도 그의 방심과 열세 번째 마왕의 개입이 아니었다면 절대 막아낼 수 없었을 텐데, 델카란은 벨트레체보다 더 까다로운 존재란 말이다.

    "끄응……."

    이지혁이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최정훈 씨?"

    "네!"

    최정훈이 이지혁에게 달려왔다.

    "일단은 가용 인원들 전부 소집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NDF뿐 아니라 전력이 된다 싶은 건 모조리 모아요. 미국이고 뭐고, 연락 가능한 데는 모두 연락해서 비상 거시고!"

    "예!"

    "정인수 대령님."

    "예!"

    "방위사 전력도 전부 모아주세요. 일단 아무래도 이 좁은 땅덩어리에 떨어졌을 것 같지는 않지만, 일단 최악의 사태에 대비해야 하니까요."

    "모으란 말입니까?"

    "어디에 나타나도 바로 전력을 집중할 수 있게 24시간 비상 대기 상태로 운용해 주시면 됩니다."

    "그건 가능합니다."

    전국의 군인들이 들었으면 목을 따버리겠다고 피를 토할 지시를 아무렇지도 않게 내린 이지혁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하이 엘프를 노려보았다.

    "엘프 계집!"

    "레아."

    "어?"

    "잊으셨어요? 레아예요."

    잊고 말고가 어딨냐.

    처음부터 관심도 없었는데.

    "레안지 뭔지는 내가 알 바 아니고, 그래서 저 강아지를 데리고 온 이유는 있겠지?"

    이지혁이 내려다보자 베히모스가 끼잉, 대며 레아의 발 뒤로 숨었다.

    "물론이죠. 이분이 그를 추적할 수 있을 거예요."

    "흠……."

    다행히 이번에는 능동적으로 움직일 수 있게 된 건가?

    어디서 터져 나올지 모르는 상황을 무작정 기다리는 것보다야 백배 나은 일이었다.

    "그럼 이번에는 내가 찾아가야겠군."

    빌어먹을 마왕 놈아!

    내가 너를…….

    "이지혁 씨!"

    그 순간, 최정훈이 전화를 받으며 다급하게 달려오고 있었다.

    이지혁은 그 광경을 보며 나직이 한숨을 쉬었다.

    그럼 그렇지.

    내 팔자에 선공은 무슨.

    에휴!

    * * *

    크리스토퍼 맥클라렌은 간만에 찾아온 여유를 만끽하고 있었다.

    그 빌어먹을 좀비 사태 탓에 삼 일 철야에 세 시간 수면을 반복하며 산 지가 몇 주던가!

    이제야 겨우 사태가 진정 국면으로 돌아가 몇 달 만에 여유가 생겼다.

    "은퇴해야지."

    이대로 살다가는 제명에 죽지도 못할 것이다.

    적의 총탄에 죽는다든가, 자식들과 손주의 손을 잡고 침대에서 죽는 광경만을 생각해 왔지, 일하다가 과로로 책상에 쓰러져 죽는 것만은 사양이었다.

    "그것만은 안 돼."

    이미 수십 년 동안 충분히 일을 했다.

    그러니 이제는 은퇴하고 나서 편안하고 안락한 노후를 보낼 때가 온 것이다.

    워커홀릭으로 살아온 지 어언 오십 년.

    이제는 마누라도 그를 남처럼 대하고, 자식 놈들도 옆집 아저씨처럼 대하고 있기는 하지만, 은퇴만 하고 일만 줄어들면 그 관계를 회복하는 것도 어렵지는 않을 것이다.

    그는 사람의 심리를 움직이는 데 있어서는 전문가니까.

    "사직서를 내야겠어."

    대통령은 길길이 날뛰겠지만, 더는 이렇게 살 수 없었다.

    게다가 웬만하면 빗나가지 않는 그의 육감이 앞으로 더 큰일이 더 많이 벌어질 거라는 확신을 주고 있었다.

    그 일들에 휘말리기 시작하면 크리스토퍼의 끝은 책상 위가 아니면 화장실 변기 위가 될 것이다.

    그것만은 사양이었다.

    "걸렸나?"

    태평양을 누비는 요트 위에서 낚싯대를 내려놓고 있던 크리스토퍼가 간만에 찾아온 입질에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래.

    사람이 이렇게 살아야지.

    하지만 크리스토퍼의 여유는 길지 못했다.

    RRRR.

    크리스토퍼의 전화기가 울리기 시작했다.

    "음?"

    급한 일이 아니면 절대 연락하지 말라고 했는데, 이 빌어먹을 놈들은 급한 일에 대한 개념이 없다.

    아까부터 자꾸 별것도 아닌 일에 연락을 해서 사람을 짜증나게 한다.

    대통령에 대한 암살 위협이 감지되었다는 게 뭐 그리 큰일이란 말인가.

    미국 대통령쯤 되면 스나이퍼 열 명쯤은 상시 끌고 다니는 거 아닌가.

    냉전시대를 못 겪어본 것들이라 그런지, 위험에 대한 개념이 없었다.

    신경질적으로 전화를 받아 든 크리스토퍼가 다짜고짜 소리를 질렀다.

    "휴가가 왜 휴가인 줄 알고 있나? 쉬기 때문에 휴가인 거다! 별것도 아닌 일로 자꾸 전화하지 말란 말이다! 빌어먹을, 퇴근 후 연락 금지법이 발효된다고 했을 때 찬성해야 했어!"

    소리를 빽! 지른 크리스토퍼가 짜증이 어린 얼굴로 건너편에서 들려오는 말을 듣다가 되물었다.

    "영국? 우리나라 일도 아니고, 영국에서 벌어진 일 때문에 하루밖에 안 되는 소중한 내 휴가를 방해한다는 건가? 자네, 제정신이야? 영국에서 벌어진 일이면 영국 놈들이 해결하게 두면 그만이지, 그걸 왜 굳이 나한……."

    순간, 크리스토퍼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뭐?"

    - 정보원의 말에 따르면, 런던에 나타난 정체불명의 몬스터가 전에 사막에 출현했던 그 마왕이란 존재와 유사성을 보인다고 합니다.

    "…개 같은 소리!"

    말도 안 된다.

    그런 존재가 또 있다고?

    미국의 모든 전력을 동원해서도 생채기 하나 못 내고, 그 이지혁조차도 목숨이 날아갈 뻔했었다.

    하늘이 도왔는지 어찌 겨우겨우 해결할 수 있었을 뿐이지, 그게 아니었다면 지금쯤 미국이라는 나라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놈이 또 있다고?

    "영상! 영상 있나?"

    - 영상 확보가 불가능합니다. 그의 주변에 있는 모든 것들이 파괴되고 있습니다.

    "런던은!"

    - 완파까지 두 시간도 걸리지 않을 겁니다.

    "제기랄!"

    크리스토퍼의 뇌가 맹렬하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만약 그 마왕이라는 놈이 영국을 초토화시키고 유럽 본토로 넘어가게 된다면, 그 피해는 그야말로 괴멸적일 것이다.

    전 세계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지금, 유럽의 파멸은 세상의 파멸을 의미했다.

    막아야 한다.

    그것만큼은 어떻게 해서든 막아야 한다.

    "당장 정예부터 집결시켜! 어떻게든 지원해야 한다! 지금 당장 이쪽으로 텔레포터 보내고!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

    "한국에 연락해! 미스터 최에게 상황을 전하고 NDF의 영국 지원을 요청하란 말이야!"

    이지혁.

    이지혁이 필요하다.

    - 한국에서는 이미 연락이 왔습니다. 영국으로 급속 이동할 방법이 없다며, 텔레포터의 지원을 요청해 왔습니다.

    "당장 보내줘!"

    - 이미 보냈습니다.

    "좋아, 일단 내 쪽으로 텔레포터 하나 보내고, 남은 지시 사항을 최대한 신속하게 처리하게. 관계 부처 허가고 뭐고 다 무시해. 내가 책임진다!

    - 예.

    전화가 끊기자 크리스토퍼는 손에 들고 있던 낚싯대를 거칠게 집어 던지고는 조종실을 향해 뛰었다.

    이제는 너무 자주 찾아오는 세계 멸망의 위기 앞에 크리스토퍼는 계획하던 퇴직을 미룰 수밖에 없었다.

    * * *

    콰아아아아앙!

    검은 마기가 대지를 질주했다.

    "아아아악!"

    마치 거대한 뱀처럼 꿈틀거리는 마기는 건물을 휘감고 통째로 으스러뜨리며 눈앞에 걸리적거리는 차를 후려쳐 저 하늘 멀리 날려 버렸다.

    "살려줘어어!"

    "저게 대체 뭐야!"

    거대한 뱀과도 같은 마기는 하나가 아니었다.

    런던 중앙 광장에서 사방으로 뻗은 길을 타고 수십 개의 마기가 질주하며 건물과 차와 사람을 닥치는 대로 날려 버리고 있었다.

    "쏴! 쏴라!"

    대로를 가득 메운 전차와 장갑차들이 검은 뱀의 중심을 향해서 포탄을 날려 댔다.

    콰앙!

    콰아아아!

    폭음이 터지고 폭발이 일어났다.

    "흠?"

    델카란은 자신에게 날아드는 쇳덩어리들을 흥미롭게 바라보았다.

    쇳덩어리를 날려 공격을 한다는 발상이야 베라프의 인간들도 했던 것이다. 화기라는 것은 드워프들이 즐겨 쓰던 것들이니까.

    하지만 그 날아드는 쇳덩어리가 목표점에 닿기 전에 스스로 폭발하여 피해를 주는 방식은 매우 흥미로웠다.

    '그것도 하나만 있는 것은 아니군.'

    그 옆으로 날아드는 뾰족한 쇳덩어리는 관통력으로 피해를 주는 방식인 것 같았다.

    인간이란 이런 식으로도 발전하는군.

    이 세계의 인간은 마법도 모르고, 마법을 이용하여 편리함을 추구할 줄도 모른다.

    하지만 그 모든 핸디를 딛고 이런 문명을 발전시켰다는 것은 칭찬해 줄 만했다.

    아니, 어쩌면 마법이 없었기에 이런 식으로 발전을 할 수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어느 쪽이든 상관없다.

    그들이 마법을 사용할 수 있든, 사용할 수 없든 결과는 달라지지 않는다.

    어떤 방식이든 델카란에게는 통하지 않을 것이니까.

    "흐음?"

    날아드는 포탄들을 튕겨낸 델카란이 고개를 들었다.

    "호오?"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거대한 쇳덩어리가 그의 머리 위로 떨어지고 있었다.

    "이게 전부가 아니었던가?"

    이 정도만 해도 꽤 칭찬할 거리가 많다고 생각했는데, 그 이상의 것이 또 남아 있었다니.

    이 세계의 인간들이야말로 정말 마법사라고 불려야 하지 않을까?

    마나와 관계없이 거대한 쇳덩어리들을 이리 자유자재로 날리는 것은 분명 굉장한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뿐."

    콰아아아아아앙!

    폭격이 런던을 뒤덮는다.

    구제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한 영국 정부가 자신의 수도를 향해 폭격을 퍼붓고 있었다.

    델카란이라는 마왕이 짧은 시간 안에 보여준 능력을 감안하면, 희생을 생각하며 머뭇대다가 전 국토가 순식간에 유린될 거라고 판단한 것이다.

    그 판단은 옳았다.

    누구도 그 판단을 비난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 판단조차 델카란의 발걸음을 조금도 저지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따끔하군."

    델카란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천천히 앞으로 걸었다.

    이 정도의 파괴력이라면 아크 메이지급의 광역 마법 수준은 되지 않을까?

    마나도 모르는 이들이 기술을 갈고닦아 아크 메이지급으로 올라서다니.

    "재미있는 곳이군."

    어쩌면 베라프보다 몇 배는 더 재미있는 곳일지도 모른다.

    이 세계 자체만으로 델카란의 흥미를 매우 끌고 있는데, 이곳에는 그 이지혁도 있지 않은가.

    아주 재미있는 놀이터였다.

    다만…….

    "건방짐에 대한 응징은 해야겠군."

    델카란의 손이 휘저어지자 까마득한 상공에서 폭격을 퍼붓고 돌아가던 폭격기들이 그대로 터져 나갔다.

    콰앙! 콰앙!

    허공에 폭죽이 터지듯 불꽃이 피어올랐다.

    * * *

    "갓 뎀!"

    영국 능력자들을 통솔하는 마이클 더글라스는 쌍안경으로 상황을 지켜보다가 욕설을 내뱉었다.

    지상 병력으로도 모자라 폭격까지 퍼부었음에도 불구하고 저 괴물에게 생채기 하나 내지 못했다.

    이미 런던의 반이 사라진 상황.

    건물들은 모두 으스러졌고, 곳곳의 가스 배관들이 터져 연쇄적으로 폭발을 일으켰다.

    피해액이고 뭐고를 떠나, 죽은 사람이 얼마나 되는지도 집계가 되지 않을 정도였다.

    "어쩌란 말이야!"

    갑자기 게이트도 없이 몬스터가 수도 한복판에 나타난 것도 끔직한 사태인데, 그 몬스터가 유래 없이 강하고 공격적이었다.

    단 한 번도 겪어본 적 없는 사태에 직면한 마이클 더글라스는 욕지거리를 내뱉는 것 외에는 딱히 할 것이 없었다.

    "미국은! 미국의 지원은 어떻게 되었나?"

    "최대한 빨리 지원해 주기로 했습니다! 전략팀이 편성되는 대로 텔레포터를 통해 바로 이동해 오기로 했습니다!"

    "그게 언제냐고! 이런 제기랄!"

    화를 낸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란 것 정도는 알고 있다. 짜증을 내 상황이 달라진다면 열 번이고 백번이고 짜증을 냈겠지만, 지금은 그래서 안 된다는 것 역시 알고 있었다.

    하지만 울화가 터졌다.

    할 수만 있다면 체면이고 뭐고 다 집어던지고, 펑펑 울어 제끼고 싶었다.

    저 무너진 건물의 잔해 사이로 얼마나 많은 이들이 죽어갔을까.

    얼마나 많은 피가 흐르고 있을 것인가!

    "이 괴물 놈!"

    블랙 먼데이의 게이트 사태 이후로 세계는 안정을 되찾았다. 수많은 이들이 죽어가기는 했지만, 세계는 게이트를 대처하는 방법을 찾아냈고, 이제는 그 게이트를 생활의 일부로 받아들여 사는 법까지 알아냈다.

    그렇게 겨우 안정이 된 세상인데…….

    저런 이레귤러가 갑자기 튀어나오기 시작하면 어떻게 하라는 것인가!

    "쏴! 쏴라! 갈기란 말이야! 2조도 지원 시작해!"

    콰앙! 콰앙!

    일선에 배치된 전차와 이선에 배치된 자주포들이 불을 뿜었다.

    동시에 하늘을 가득 메운 폭격기들이 자신들의 수도를 향해 폭격을 개시했다.

    콰앙!

    곳곳에 오폭이 터지며 자신들의 손으로 전 세계에 자랑하던 도시를 부수고 있었다.

    그들의 심정을 누가 짐작이나 할 것인가!

    "갈겨 버려!"

    마이클의 지시를 기다리던 능력자들도 형형색색의 에테르를 델카란을 향해 날리기 시작했다.

    콰아아아앙!

    거대한 폭발.

    전술핵이라도 갈긴 듯한 거대한 폭발이 버섯구름을 피워 올렸다.

    화력과 에테르의 조합이 만들어낸 진풍경이었다. 그 진풍경이 피어오른 곳이 하필이면 런던의 도심 한중간이라는 것이 서글픈 일이었지만.

    "해치웠나?"

    해치우지는 못하더라도, 자그마한 상처라도 입혔다면 가능성은 있을 것이다.

    하지만 델카란은 마왕.

    마왕 이전에 악마였다.

    악마는 인간을 농락하고 조롱하는 존재.

    거대하게 피어오른 버섯구름이 가라앉은 그곳에는 상처 하나 없는 델카란이 붉은 혀로 입술을 핥고 있었다.

    "좋군."

    인간의 힘이 이 정도까지 왔을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이 정도의 화력은 인간에게서는 받아본 적 없는 것이다. 에이션트급의 드래곤이 만들어내는 고위 마법이 아니고서야 그의 육체에 충격을 줄 수 없으니까.

    그런데 이 거대한 폭발은 델카란의 육체에 둔중한 아픔을 전달해 주었다.

    "아주 좋아."

    고통은 언제나 악마와 함께하는 것.

    고통과 쾌감을 함께 느낀 델카란이 그 어둠 속에 가려진 붉은 눈을 빛냈다.

    "그럼 보답을 해야겠지?"

    보여주마, 인간들이여.

    몬스터도, 신수도, 마계조차 없는 이 세계에…….

    마왕이란 어떤 존재인지 똑똑히 새겨주마.

    "하하하하핫!"

    커다란 광소와 함께 델카란의 육체에서 거대한 마나의 덩어리가 마치 거대한 뱀처럼 사방을 향해 뻗어 나가기 시작했다.

    * * *

    뱀이라기보다는 이무기.

    날개 없는 용처럼 뻗어져 나간 검은 마나가 델카란을 포위하고 있던 전차들을 집어삼켰다.

    "아아아……."

    전차 안에서 마나들이 날아오는 것을 본 전차병들이 절망 어린 침음을 삼켰다.

    으득! 으드득!

    전차의 외갑판이 마치 종잇장처럼 찢겨지며 전차 안으로 검은 마나가 울컥울컥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한다. 절망 어린 눈으로 그 광경을 바라보던 전차병들에게도 검은 마나가 쏟아졌다.

    "아아아악!"

    비명이라도 지를 수 있는 이들은 차라리 행복한 것이었다. 대부분의 전차병들은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일순간 분해되어 사라져 버렸다.

    콰아아앙!

    전차들과 장갑차들이 폭발을 일으킨다.

    마이클은 그 광경을 보면서 치를 떨었다.

    그만한 화력을 퍼부었는데도 저리 상처 하나 없으면 대체 어떤 방식으로 저 괴물을 잡아야 한다는 말인가.

    "…제기랄."

    답은 하나뿐이다.

    최대한 빠르게 후퇴해서 지금 남아 있는 전력이라도 보존을 하고, 다시 방법을 찾아 공격하는 것. 그것 하나뿐이었다.

    하지만 그것 역시 여의치 않았다.

    그들 뒤에는 아직 미처 피난하지 못한 시민들이 가득 있단 말이다.

    군인의 신분으로 민간인을 두고 도주하라고?

    "사령관님!"

    마이클은 등 뒤에서 들려오는 말을 무시했다.

    하고 싶은 말이 뭔지는 안다. 마이클 역시 이성적으로 생각할 때 그리해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안 된다.

    군인이라는 신분을 가진 이상, 그가 군인의 길을 선택한 이상 민간인을 두고 물러선다는 선택지는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다.

    "옥쇄한다!"

    "사령관님!"

    "아직 대피 못한 사람들이 있다! 우리가 물러서면 그 사람들은 어쩌는가!"

    "…우리가 제때 못 물러서면 어차피 그 사람들도 죽습니다. 다른 사람들까지 모두 죽겠죠."

    "이……!"

    마이클이 이를 악물었다.

    부관의 말이 틀린 말이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어느 군인이 이런 상황에서 후퇴를 명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가 고민 아닌 고민에 빠져 있는 순간에도 전차들은 쉴 새 없이 터져 나가고 있었다.

    콰앙!

    콰아앙!

    한 번에 한 대씩.

    그렇게밖에 부수지 못해서가 아니었다.

    마치 고양이가 궁지에 몰린 쥐를 슬슬 유린하듯이 델카란은 가볍게 뱀의 촉수를 뻗으며 전차를 한 대씩, 한 대씩 부숴 나갔다.

    공포를 참지 못한 전차병들이 전차를 버리고 도주하기 시작했다.

    델카란은 그 광경을 보고 눈을 빛냈다.

    "멍청하지는 않은가?"

    생존 본능이라는 것이 나름 발휘가 되고 있는 모양이었다.

    집단 군집을 이루는 생명체들은 가끔 집단을 위해서 자신을 희생한다.

    개미는 알을 보호하기 위해 상대도 되지 않는 침략자와 싸우기도 한다.

    평소에는 위험을 피해가는 곤충들도 집단이 위협을 받는다고 느끼면 자신의 목숨을 도외시하고 적에게 달려든다.

    그럼 인간은 어떨까?

    '이중적이군.'

    전차를 버리고 달아나는 군인들과 피해 범위의 안에 있다는 것을 자각하면서도 결코 물러나지 않는 군인들이 보인다.

    같은 종족임에도 같은 상황에서 서로 다른 대처를 보인다는 것이 인간이라는 종족이 가지는 특이점이라고 할 수 있었다.

    같은 지성체임에도 가장 특이한 것이 인간이다.

    드래곤은 지성체들 중 개인주의적 성향이 강하다. 그들은 종족이라는 이름으로 엮이기는 하지만, 하나의 개체가 하나의 종족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서로에 대한 유대감이 없었다.

    그리고 엘프는 지성체임에도 불구하고 종족이라는 이름으로 엮여 사는, 마치 개미와도 같은 성향을 보였다. 종족을 위해서 자신을 희생하는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는 이들이 바로 엘프였다.

    그리고 그 가운데에 인간이 있다.

    인간은 지성체이며 하나의 종족이지만, 그 안에 수많은 타입이 뒤섞여 사는 존재들이었다.

    인류를 위해서 희생하는 고귀함의 화신도 있고, 자신만을 위해서 인류 전체를 희생시키기를 마다하지 않는 개인주의의 화신도 있다.

    혼돈.

    타 종족이 보기에 인간이라는 존재는 혼돈, 그 자체였다.

    "그래서 재미가 있지."

    혼란스럽고 제멋대로 살기에, 그래서 뿜어져 나오는 에너지도 강렬하기 짝이 없다.

    마족을 비롯한 각종 종족들이 인간에게 집착하는 것도 그들이 가진 에너지가 다른 종족들과는 비교할 수 없이 크기 때문이다.

    짧은 생을 살아가는 주제에 어느 종족보다 열정적이고 활동적이다. 그리고 그 누구보다 혼란스럽다.

    그러니 어찌 이 종족에 대해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방향은 다르지만 말이지."

    마족이 인간에게 관심을 가지는 것은 그들의 마이너스 에너지다.

    마족을 살아가게 하는 힘.

    마계를 이루는 근원.

    그리고 인간은 죽음에 이르렀을 때, 가장 강렬한 마이너스 에너지를 뿜어낸다.

    그러니 이 세계에서 그가 해야 할 것은 극명하다.

    더 많은 죽음과 더 많은 파괴.

    때로는 인간을 더 많이 살려둔 채 그들에게서 얻어지는 에너지를 유지하자고 주장하는 마족도 있지만, 델카란은 아무래도 좋았다.

    그가 지금 굳이 이 귀찮은 일을 하고 있는 것은 마이너스 에너지 따위의 목적이 아니니까.

    이유는 아주 간단하다.

    굳이 그를 찾아갈 필요는 없다.

    화려하게 시작해 버린다면 그는 알아서 델카란을 찾아올 것이다. 자신이 속한 세상이 멸망하는 것을 좌시하지는 않을 테니까.

    "후후후."

    델카란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남아 있는 것은 잔해 뿐.

    인간들이 쌓아올린 건물도ㅡ 용도를 알 수 없는 건축물들도… 모조리 파괴되어 검은 연기와 뿌연 흙먼지를 뿜어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사이사이 녹색의 거대한 쇳덩어리들이 파괴되어 불타오르고 있다.

    "다르지 않군."

    세계는 다르지만 파괴된 이후의 모습은 어디든 비슷했다.

    그리고 이 정도로 끝낼 생각도 없다.

    이지혁이 도착하지 않는 이상 그는 파괴를 멈출 생각이 없었다.

    이지혁이 마지막까지 나타나지 않는다면 이 세계는 개미 새끼 한 마리 남기지 못하는 죽음의 별이 될 것이다.

    "후후후."

    그는 낮은 웃음소리를 흘리며 천천히 앞으로 걸어 나갔다.

    그는 마족.

    천성적으로 파괴와 살해에 쾌감을 느끼는 종족이었다. 필요에 의해서 시작한 일이지만, 파괴를 지속할수록 그의 가슴속에서 뭔가가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눈앞에 보이는 모든 것을 부숴 버리고 싶은 충동.

    마계에서 태어나 마계에서 살아가는 존재들이 본능적으로 안고 살아가야 하는 파괴 본능이다.

    "후우……."

    델카란은 심호흡을 하며 피어오르는 파괴 본능을 억눌렀다.

    이따위 도시…….

    마음만 먹으면 일격에 모두 부숴 버릴 수 있다. 하지만 이렇게 비효율적으로 일을 진행하는 건 그 와중에 피어나는 마이너스 에너지를 만들어내기 위해서였다.

    "짜증은 좀 나지만 말이다."

    "너만 짜증 나는 게 아니지."

    "흠?"

    등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델카란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돌렸다.

    익숙한 얼굴이 그를 바라보고 서 있었다.

    "오랜만이라고 해야 하는가?"

    "말이 짧다?"

    "큭큭큭큭."

    델카란은 눈앞에 나타난 이지혁을 보며 환희에 떨었다.

    이지혁.

    아흔아홉 번째 마왕.

    인간의 몸으로 마계에 떨어져 마왕의 위를 획득하고, 그 잔인한과 과단성으로 다른 마왕들마저 떨게 만든 자.

    그 이지혁이 지금 그의 눈앞에 있었다.

    "반갑군, 정말 반가워. 이런 말이 어울릴지는 모르겠지만, 보고 싶었다."

    "남자의 관심은 별론데."

    "큭큭큭, 여전하군."

    "흐음……."

    이지혁은 머리를 벅벅 긁었다.

    이 마왕 새끼들은 하나같이 친한 척이다. 이지혁의 기억 속에서는 그리 큰 부분을 차지하지도 못하던 것들이 보는 놈들마다 엄청나게 친했다는 듯 말해 대니 혼란스러울 지경이었다.

    "그래서 이 난리를 피웠나?"

    "살살 해줬지. 알 텐데?"

    "눈물 나게 고맙다, 뱀 새끼야."

    "후후후."

    이지혁이 낮게 웃는 델카란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여하튼 마왕이라는 것들은 하나같이 죄다 음흉한 것들뿐이다. 음흉하지 않고서야 그 험난한 마계에서 살아남을 수 없었을 테고, 음흉하지 않고서야 그곳에서 마왕의 위치까지 오르지도 못했겠지만.

    "뭐 주워 먹을 것 있다고 여기까지 왔냐?"

    "몰라서 묻는 건가?"

    "알면 묻겠냐? 머리는 좋은 것 같더니, 멍청하기 짝이 없네."

    델카란의 붉은 눈이 일렁였다.

    "아흔아홉 번째 마왕… 아니, 인간 이지혁이여."

    "말해."

    "그 입을 조심하는 게 좋을 것이다. 그대를 수호해 주던 마력은 이제 미약하기 짝이 없고, 그대를 보호하던 마수의 군대는 이곳에 없다. 그대는 이제 마왕이라는 이름을 붙이기도 민망한, 그저 한낱 인간일 뿐이다."

    이지혁이 귀를 후비적대고는 입으로 훅, 불어내며 대답했다.

    "아아, 그래. 그 비슷한 말을 하다가 골로 간 놈이 있었지. 이름이 뭐더라? 벨, 벨……."

    "벨트레체."

    "아, 그래. 벨트레체였지. 너도 조심하는 게 좋지 않겠냐? 처음 뒈진 놈이야 방심했다거나 실수했다거나 변명할 거리가 그래도 있는 건데, 너는 그런 변명도 못할 테니까 말이야."

    "그와 나를 비교하는 건가?"

    "큭큭큭."

    이지혁은 낮게 웃고는 말했다.

    "인간이든, 마왕이든, 마족이든… 하는 말은 다들 비슷하다는 말이야. 별다를 것도 없는 것들이 자기는 다르다는 듯 특별하다는 듯 말을 해 대지. 내가 보기엔 너나 그놈이나 별다를 것도 없는데?"

    "그리 생각하는가?"

    "그래, 그리 생각한다. 왜? 다르다는 걸 이제 몸소 보여주시려고?"

    델카란은 고개를 저었다.

    "그대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런 거겠지."

    "얼레? 왜 이리 정중하셔?"

    델카란은 웃고 말았다.

    지금 그의 눈앞에 있는 것은 한낱 인간인 이지혁이다. 마음만 먹는다면 순식간에 그를 핏덩어리로 만들어 버릴 자신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존중 받을 가치가 있는 존재이기도 했다.

    마족도 아닌, 나약하기 짝이 없는 인간으로 태어나서 마왕의 위를 차지한 것도 대단한데, 그것을 넘어 마왕 중에서도 최고의 자리에 오르고 결국에는 신성에 이른 자.

    마왕들도 감히 대적하기 힘들어 하는 신의 의지에 정면으로 반기를 들고, 마침내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킨 자.

    델카란은 그를 존중했다.

    모시는 분이 있기에 대놓고 존경할 수는 없어도, 그라는 객체가 이룩한 업적을 존중해 주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한때 너를 보는 것만으로 굴욕에 떨어야 하던 시절도 있었지."

    "한때라니? 지금도 그래야지."

    델카란의 눈이 가늘어졌다.

    "나는 그대를 존중한다. 그러니 그대에게 내가 줄 수 있는 최선의 것을 주어야겠지."

    "흐음……."

    이지혁이 귀를 후비고는 고개를 까딱까딱 저어 도발했다.

    어차피 마왕 놈이 하는 말이야 빤하지.

    "완전한 죽음. 네게 선사해 주지."

    "어, 뭐."

    이지혁이 머리를 벅벅 긁었다.

    "그렇게 짠 듯이 똑같은 말 하지 말라고, 지겨우니까. 결국은 싸우자는 거잖아? 그러니 잔말 말고 덤벼. 한판 붙어보면 알게 될 테니까."

    "알게 된다고?"

    이지혁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그때도, 지금도… 너 같은 건 내 상대가 되지 못한다는 걸 말이야. 와봐, 그 굴욕 다시 느끼게 해줄 테니까."

    이지혁의 육체에서 검은 마나가 울컥울컥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 * *

    "누구냐! 저들은?"

    마이클이 다급하게 소리쳤다.

    꼬리에 불이 붙은 소처럼 미쳐 날뛰던 델카란의 움직임이 거짓말처럼 멈췄다. 그리고 그를 멈추게 한 이는 처음 보는 동양인들이었다.

    "정보! 정보 없는가!"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이럴 상황에 올 동양인들이라면 빤하지 않겠습니까?"

    "그렇군."

    대한민국.

    NDF.

    이 세계적 재난이 될 사태를 해결할 만한 이들이라면, 그들밖에는 생각이 나지 않았다.

    "어떻게 알고 온 거지? 지원 요청을 했나?"

    "잘 모르겠습니다."

    "흐음……."

    마이클은 떨리는 눈으로 다시금 그들을 바라보았다.

    어떻게 알고 온 것이든 상황이 더 진행되기 전에 잘 와주었다고 말해야겠지.

    "저자가 이지혁인가?"

    가장 앞에 나서고 있는 젊은 청년을 본 마이클이 중얼거렸다.

    "소문처럼 보이지는 않는데?"

    소문대라로면 인류 역사상 다시없을 개차반이어야 하는데, 그의 눈에 비친 동양인 청년은 눈꼬리가 조금 날카로운 게 흠이라는 것만 빼면 나름 괜찮아 보이는 타입이었다.

    게다가 조곤조곤 말하는 것을 보니 성격도 급해 보이지 않고 말이다.

    "소문은 믿을 게 못 되는가?"

    "소문은 믿을 게 못 되지."

    "아?"

    등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마이클이 황급히 뒤를 돌아보았다.

    삼엄한 호위를 받으며 크리스토퍼 맥클라렌이 마이클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오셨습니까?"

    "오랜만이군. 한 5년 만인가?"

    "블랙 먼데이 대책 회의 이후로는 서로 바빴으니까요."

    "그렇지."

    "그런데 무슨 말씀이십니까? 소문은 믿을 게 못 되다니요."

    "미스터 리를 두고 한 말 아닌가?"

    미스터 리?

    "이지혁 말씀이십니까?"

    "그렇네."

    "예. 소문으로 듣자니 답도 없는 인간이라고 하던데, 지금 보이는 청년은 멀쩡해 보여서 그럽니다."

    "그래, 소문은 믿을 게 못 되네."

    "역시 그렇군요."

    "소문보다 정상적이기도 하고, 소문 따위로는 도저히 짐작도 할 수 없을 만큼 막장이기도 하지."

    "네?"

    그게 대체 무슨 소리인가.

    "종잡을 수 없는 사람이야, 정말 종잡을 수 없는 사람이지."

    "흐음……."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알아들을 수는 없지만, 지금은 느긋하게 이지혁의 성격에 대해서 논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지금은 그런 것보다 저 악마를 처리하는 것이 더 급했다.

    "지원 오신 거겠죠?"

    "물론이다만."

    "다만?"

    크리스토퍼가 씁쓸한 얼굴로 시가를 꺼내 물었다.

    "나름 정예로 모아 오긴 했지만,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군."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보지 않았나?"

    "……."

    "수의 차이는 있을지 모르겠지만, 우리 요원들이 귀국의 요원들에 비해 그리 뛰어나지는 않아. 귀국의 요원들이 생채기 하나 못 낸 상대를 어떻게 하겠나. 그저 머릿수 채우기밖에 되지 않는 거지."

    "…그렇군요. 하지만 미국은 이미 마왕의 침공을 한 번 막아내지 않았습니까!"

    "우리가 막았겠나? 저들이 한 거지. 우리가 한 것이라고는 그들의 머릿수를 채워주고 고기 방패를 해준 것밖에 없네."

    "그렇습니까?"

    알려지기로는 NDF의 공조를 받은 미국이 마왕을 막아냈다고 되어 있었다.

    하지만 마왕이라는 말이 정확히 뭘 의미하는지 알 수 있는 국가가 없기에 지금까지는 그저 그런가 보다 할 수밖에 없었다.

    미국 내에서도 상황을 정확하게 아는 이가 많지 않고, 상황을 아는 이들은 하나같이 입을 다물었으니까.

    마이클은 이지혁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델카란을 바라보았다.

    저런 존재가 강림하고, 그것을 이지혁이 막아냈다면 미국의 입장에서도 할 말은 없겠지.

    저건 불가해의 존재다.

    물량을 쏟아붓고 화력을 집중한다고 어떻게 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아무리 많은 이들이 창을 들고 모인다고 해도 하늘을 날고 있는 매를 떨어뜨릴 수는 없으니까.

    "그런데 이상하군요."

    "뭐가 말인가?"

    "지금 대화를 나누고 있는 것 아닙니까?"

    "그렇네만."

    "이지혁이라는 자는 뭐하는 사람이기에 저 악마와 말이 통한다는 말입니까?"

    "으음?"

    순간, 크리스토퍼의 눈이 커졌다.

    그러고 보니 그런 쪽으로는 생각해 보지 못했다.

    '하기야…….'

    따져 보면 자신들이 이지혁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어느 날 갑자기 튀어나온 한국의 능력자이며, 어마어마한 능력을 갖추었다는 게 그들이 알고 있는 이지혁의 전부였다.

    평범한 학생으로 살다가 5년간 실종되었다 최근 돌아왔다는 것뿐.

    "그렇군."

    그렇다면 그 5년의 시간 동안 무엇이 있었는가를 밝혀내는 것이 이지혁이 지닌 강함의 열쇠가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지.'

    지금 중요한 것은 일단 저 악마를 막아내는 것이다.

    "일단은 지원을 준비하게. 지휘권은 받겠네."

    "지휘권은 드리기 힘듭니다."

    "자네 이지혁 씨와 함께 싸워본 적이 있나?"

    "…없습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저 걸 쓰러뜨리는 것이 아니라 이지혁 씨의 공백을 메우는 일이네. 그의 전투 패턴을 보지 못한 자네가 그걸 할 수 있겠나? 나도 타국에 지원 와서 지휘권을 요청하는 것이 도리가 아니라는 것은 잘 알고 있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니지 않은가."

    "알겠습니다."

    마이클은 자존심이 상했지만, 지금은 그걸 따질 때가 아니란 걸 모를 만큼 멍청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국가의 안녕이니까.

    "그럼 준비하게."

    마이클이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하자 크리스토퍼는 낮게 가라앉은 눈으로 전방을 주시했다.

    '쉽지 않겠지.'

    저번 마왕을 잡아낸 것도 천운에 가까웠다.

    그런데 또 하나의 마왕을 잡아내는 것이 쉬울 리가 없겠지.

    어쩌면 지금 이 순간이 인류의 멸망을 결정하는 자리일지도 모른다.

    무거운 중압감이 그의 위를 콕콕 찔렀다.

    '잘도 버티는구나.'

    지켜보는 자신조차 이리도 힘이 드는데, 세계의 운명을 등에 걸고 싸우는 저 청년은 이 무거운 중압감을 잘도 버텨내고 있었다.

    걸물은 걸물이다.

    "청년이 이끌고 나가면, 노인은 밀어줘야지."

    크리스토퍼가 무전기를 꽉 움켜잡았다.

    * * *

    "호오?"

    델카란은 조금 놀랐다는 눈으로 이지혁을 바라보았다.

    이지혁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마나가 마계의 근원에서 볼 수 있는 그것처럼 정순하기 짝이 없다는 것을 알아챈 것이다.

    "잘도 이런 마나를 모았군."

    "선물 받았지."

    "열세 번째 마왕인가?"

    "그런가 보더라고."

    "큭큭큭큭, 여전하군, 여전해."

    델카란이 키득 웃더니 팔을 살짝 들고 이지혁에게 너스레를 떨었다.

    "그걸 믿은 것인가? 겨우 이 정도로?"

    "하……."

    이지혁은 찡그린 얼굴로 델카란을 노려보았다.

    이 마왕이란 놈들은 제멋대로 상황을 해석하고, 제멋대로 결론을 내려 댄다.

    너무 오랜 세월을 살아온데다가 자신의 힘과 능력에 대한 절대적인 자신이 있기에 세상을 자신의 주관으로 보는 것을 당연히 여기는 것이다.

    "같은 말을 자꾸 반복하는 게 귀찮은데."

    휴, 하고 한숨을 내쉰 이지혁이 입을 열었다.

    "나는 아무것도 믿지 않아. 믿는 것이 있다면 오직 하나, 나 자신뿐이지."

    "확실히 그렇지."

    델카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마음가짐만은 훌륭한 마왕이라고 할 수 있겠군. 여전히 너는 마왕으로 살아가고 있구나."

    "천만에."

    이지혁의 단호한 목소리에 델카란의 붉은 눈이 일렁였다.

    "나는 인간이다. 인간이 되기 위해서 이곳까지 왔지. 사람의 정체성을 네 멋대로 재단하지 말라고. 애당초 그놈의 마왕 같은 거 되고 싶어서 된 적도 없어."

    "그런 주제에 잘도 마계를 휩쓸어 댔군."

    "그야 뭐……."

    이지혁이 어깨를 으쓱했다.

    "약해 빠진 것들이 제 잘났다고 설쳐 대는 꼴을 보면 배알이 뒤틀리잖아. 보통은 그렇지 않나?"

    "하하하하하하핫!"

    델카란은 유쾌하게 웃어버렸다.

    약해 빠졌다라…….

    이 세상에서 마왕들에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존재는 이지혁 하나뿐일 것이다.

    설사 신이라고 해도 마왕들을 그런 식으로 취급할 수는 없었다.

    저 말도 안 되는 자신감과 언행.

    그것이 바로 아흔아홉 번째 마왕의 트레이드 마크였다.

    그때와 다른 것이 있다면 하나.

    그때의 이지혁은 입에서 나온 말은 힘으로 관철시킬 능력이 있었다는 것이고, 지금의 이지혁에게는 그런 힘이 없다는 것뿐이다.

    "그대의 생각은 충분히 알았다. 이제야 알겠군. 나는 그대를 꽤나 좋아했던 모양이다."

    "남자는 됐다니까."

    "큭큭큭."

    마족이란 존재는 자신의 욕망에 충실한 존재들.

    하고 싶은 것을 하고, 원하는 것을 손에 넣는다.

    그 욕망에 충실한 것이 바로 마족이라는 존재들이었다.

    하지만 마왕이라고 해도 자신의 의지대로만 살 수는 없다. 현실과의 타협이란 언제나 존재하는 것이니까.

    그러나 이지혁은 달랐다.

    그는 자신이 원하는 대로 사는 존재였다.

    마왕의 자리를 손에 넣고 마계를 제멋대로 질타했다.

    마계 일통이라도 노리는가 싶었더니, 기분이 나쁘다고 자신에게 해가 될 일을 마구 저지르고, 그걸 어떻게든 힘으로 누르고 수습하며 다시 사고를 저지른다.

    인간인 주제에 그 누구보다 마족 같았다.

    아흔아홉 번째 마왕으로서 이지혁이 마계를 뒤흔들 때, 델카란은 알 수 없는 굴욕감을 느껴야 했다.

    이지혁이 강하니까?

    그래서가 아니었다.

    그렇다면 그보다 강한 다른 마왕에게는 모두 굴욕감을 느꼈을 테니까.

    그것과는 다른 무언가가 있었다.

    지금 이 순간, 델카란은 그를 굴욕적이게 만들었던 원인을 찾아낼 수 있었다.

    이지혁.

    저 마왕은 인간인 주제에 누구보다 마족스럽다.

    "내 의지로 이 세상에 왔다면… 어쩌면 지금쯤 너와 술잔을 기울이고 있을지도 모르겠군."

    이지혁이 인상을 썼다.

    "이 동네는 술이 맛없어. 사양하지."

    "큭큭, 안타깝군. 하지만 됐어. 지금 나는 내 의지로 이곳에 온 것이 아니니까. 그분이 너의 목을 원하신다."

    "흐음?"

    이지혁이 머리를 벅벅 긁었다.

    "난 이제 마계와 관련될 생각이 없는데, 자꾸 그쪽에서 괴롭히고 있다는 생각은 안 해봤나? 나도 이제 좀 지겹거든, 앞으로 절대 마계 쪽으로는 발도 안 들일 테니, 그냥 좀 가주면 안 될까?"

    "무리라는 건 알고 있겠지? 그분의 명령은 세상 그 무엇보다 우선한다."

    "그걸 충성심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이쪽 세계에선 그런 인간을 외골수라고 하거든."

    "아무래도 좋다. 내가 어떻게 평가 받는가는 중요한 게 아니니까. 중요한 것은 단 하나지. 이지혁……."

    "음?"

    "너는 죽는다. 이곳에서 너는 반드시 죽는다. 이제 내가 너의 그 짧은 생애의 끝을 내려주지."

    "…너희 기준이면 짧아도, 인간 기준으로 나 정도면 역대 최고로 오래 산 거야."

    "말장난은 됐다."

    델카란의 육체가 전투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 기색을 읽은 이지혁이 어깨를 으쓱했다.

    "거, 싸우려던 사람 붙들고 말 늘어놓던 게 누군데 이제 와서 엄한 사람 떠벌이로 만드는 건지 모르겠네."

    뭐, 떠벌이는 맞지만.

    "그리고 하나 착각하는 모양인데……."

    델카란은 대답하지 않았다.

    이지혁 역시 대답을 기다리고 한 말은 아니었다.

    "그건 내가 할 말이다, 델카란. 너의 그 길고 길었던 생애의 끝이 마계가 아니라는 게 안타깝군. 그래도 걱정하지 마. 시체가 남아 있다면 최대한 마계로 보내주도록 해줄 테니까."

    이지혁의 눈도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이곳.

    런던의 한중앙에서…….

    마계의 마왕들이 서로의 목을 노리고 격돌하기 시작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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