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해머-57화 (57/500)

57화. 리트만? 후셀?

우우웅.

가까이 다가서는 순간 반갑다는 듯 울리는 빛의 파동.

그 따스한 빛을 온몸으로 느끼며, 타이니는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이게…… 7대 성물.”

그는 자연스레 빛 속으로 걸어가 수정 모양의 성물을 어루만졌다.

손끝에서부터 느껴지는 것은 순수하기 그지없는 에너지. 이 세상 그 어떤 것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는 빛의 덩어리였다.

‘반대로, 이 세상의 것이 아니라면 모든 것을 배척하는 힘…….’

이미 들어서 알고 있는 특성이었지만, 직접 체감하는 것은 또 달랐다. 주변 모든 이에게 초월적이라 평가받는 그의 감응력이, 쏟아지는 빛의 파장을 분석하며 그의 영감을 자극하고 있었다.

‘생각했던 것과는 전혀 달라…….’

처음에 그는 성물이 적게 잡아도 수천 년 전부터 꾸준하게 같은 힘을 뿜어내는, 무한에 가까운 에너지원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직접 체감해 보니, 성물이 힘을 뿜어내는 것이 아니라 빛의 파동 자체가 성물과 하나인 것 같았다.

‘그래, 애초에 무한으로 힘을 뿜어내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지.’

이것은 마치…….

‘이 빛이, 수호 결계 자체가 성물인 거야. 이 커다란 수정은 그냥 성물의 좌표를 고정해 놓은 것에 불과해. 일종의 주소라고 해야 하려나? 잠깐, 그럼 이 수정이 이렇게 클 필요는 없을 텐데?’

누가 알았다면 말도 안 된다고 비난할 만한 생각이었다. 신심이 깊은 사제라면 이단이라 매도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떠올린 직감을 확신했다.

단순히 자신의 감각이 그 누구보다 뛰어나기 때문은 아니었다.

우우웅.

이미 커다란 수정이…… 아니, 수호 결계 자체가 그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전해 주고 있었던 것이다.

자신의 정체와 그 힘에 대해서.

‘그런 힘도 있어? 거기다, 옮길 수도 있다고?’

우우웅.

오직 그와 같은 수준의 마나 감응력을 가진 이만이 전해 받을 수 있는 이야기.

지성이 있는 것은 아닌 듯, 성물은 오직 그 이야기만 반복하고 있었다.

마치 누군가가 그리 말하도록 심어 놓은 것처럼.

‘……신의 뜻일까.’

심지어 트루먼의 말과는 달리, 성물을 옮기는 일은 무척 쉬웠다. 자신이 이해한 게 맞다면 이 거대한 수정을 움직일 필요가 없는 것이다.

‘올바른 방법으로 절차를 밟기만 하면…… 허!’

수천 년 동안 한자리를 지키고 있던 성물이 어찌 갑자기 사라졌는지, 그 의문의 실마리가 조금씩 풀려 가던 그때.

“자, 자네! 지금 성물을 만진 건가!?”

놀란 트루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이내.

- 트루먼 대장! 전하께서 신입…… 타이니 경을 찾으십니다!

성물 수호대의 다른 기사, 마손의 목소리도 지하 공동에 울려 퍼졌다.

* * *

“인사하게, 타이니 경. 그대가 찾던 리트만 경일세.”

……이게 무슨 소리지?

자신을 갑자기 집무실로 불러낸 국왕이 대뜸 엉뚱한 소리를 내뱉었다.

당황한 타이니가 그저 멍하니 눈만 깜빡이고 있던 그때.

“아, 이분이 그분이시군요. 악마추종자들을 참살했다는 신성. 만나서 반갑습니다. 그런데, 저를 찾으셨다고요?”

리트만이라 불린 중년의 사내가 웃으며 인사를 건네 왔다.

타이니가 어리둥절한 눈으로 국왕을 바라보자, 국왕이 왜 그러냐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날 그리 보는가? 그대가 원하지 않았는가? 동방 대륙으로 향하는 항로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을 소개받고 싶다고.”

……내가? 언제??

더욱 당황스러울 뿐이었지만, 신호를 주듯 미간을 좁히는 국왕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호응을 안 해 줄 수가 없었다.

‘젠장, 연극을 할 거면 미리 귀띔이라도 해 주든가!’

속으로 그리 투덜대면서도 타이니는 국왕을 보며 웃었다.

“아, 하하. 죄송합니다……. 이렇게 빨리 소개해 주실지 몰라 잠시 당황했습니다. 전하의 은혜에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그렇게 국왕을 향해 예를 표한 후, 다시금 중년인을 향해 몸을 돌렸다.

“제가 생긴 게 이렇다 보니, 어쩌면 제 뿌리가 동대륙에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해 왔습니다. 그래서 전하께서 바라는 게 뭐냐 물으실 때 그곳에 가 보고 싶다고 대답했을 뿐인데……. 하하, 이거 좀 당혹스럽습니다.”

어째 상황이 피곤하게 돌아가는 것이, 저 늙은 국왕의 모습에서 얄미운 검제의 모습이 겹쳐 보이는 듯했다.

그래도 급작스레 둘러댄 핑계는 자신이 생각해도 그럴듯했다. 상대의 얼굴에 미소가 어리는 것을 보면 말이다.

“아……. 원래 우리 전하께서 보상은 화끈하게 해 주시지요. 제가 십수 년을 모시면서 새로운 항로를 찾아낼 때마다 과분한 은혜를 내려 주실 정도로 말입니다.”

“아, 그러시면……?”

“예, 제가 이 나라에서 동방 항로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인 건 틀림없습니다.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아니, 저야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자, 인사는 잘 나눴는데……

‘이게 대체 지금 무슨 상황이야!?’

생각해 보니, 리트만이라는 이름을 리암에게 들었던 것도 같다.

‘왕의 명만 받는 기사라고 했던가? 항로 개척? 그럼 후셀을 알까? 아니, 지금은 이 말을 꺼낼 때가 아니지.’

타이니가 열심히 머리를 굴리며 할 말을 생각하고 있을 때, 국왕이 또 불쑥 끼어들었다.

“아, 그런다고 바로 동방으로 갈 일정을 잡지는 말게. 나와 약속하지 않았나, 타이니 경? 이 나라, 적어도 수도 오르투스에서는 악마추종자들의 뿌리를 뽑아 주겠다고 말이야. 그 약속은 지키고 가야지.”

내가 또 언제 그런 말을……? 가만, 갑자기 악마추종자? 설마?

“……그랬지요. 걱정 마십시오, 전하. 그 약속은 반드시 지킬 테니까요.”

다시금 각오를 다지듯 말하고 슬쩍 리트만을 보는데.

- 크릉.

영혼 너머에서 월랑이 고개를 젓는 것이 느껴졌다.

안타깝게도 눈앞의 리트만이란 자는 악마추종자가 아닌 모양이었다.

‘하긴, 그랬다면 처음 봤을 때부터 월랑이 반응했겠지.’

다만, 특이한 점이 있긴 했다.

- 킁. 킁.

리트만의 영혼의 냄새를 맡은 월랑이 그가 느낀 바를 전해 왔다.

짐승과 사람이…… 섞였다고?

‘수인족이란 건가?’

- 후셀이요? 글쎄요……. 이거, 인간족 이름 같지는 않은데요? 오크나 수인족 쪽 같은데…….

순간 제이의 말이 머릿속을 스치고, 타이니는 자연스레 다시 국왕을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그럼, 이분이 제가 생각하는 그…… 조력자분이 맞습니까?”

그러자 국왕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네. 당장 게일이 귀환하지 않고 있으니, 그가 돌아올 때까지는 항로 개척은 할 수가 없네. 그러니 리트만이 자네를 도와 악마추종자들을 척결하는 임무를 하면 될 것 같네. 무려 슈페리어급의 기사이기도 하니까.”

자신이 생각한 대로, 리트만이 바로 후셀이라는 걸 의미하는 대답이었다.

‘그냥 나한테 따로 알려 주면 되잖아! 왜 이렇게 상황을 복잡하게 만드는 건데!?’

당장이라도 소리를 지르며 따지고 싶었지만, 국왕에게도 무슨 사정이 있었으리라 생각하며 억지로 화를 억눌렀다.

무엇보다, 지금은 그보다 더 신경 쓰이는 점이 있었다.

“저, 전하! 제가요? 전 당장 내일 사라진 게일 님과 로즈마리호를 찾으러 떠나는 것 아니었습니까?”

당황하는 리트만이 정말 후셀이라면, 이자에게선 왜 마기가 느껴지지 않는 것인가.

악마추종자들이 월랑의 감각을 속일 수준까지 마기를 은폐할 수도 있는 것일까?

- 크르르.

그럴 리 없다고, 월랑이 격하게 거부 반응을 보였다.

사실 타이니도 그렇게 생각했다. 영혼의 냄새를 맡는데, 어찌 숨길 수 있겠는가. 영혼 자체를 바꿔 끼울 수 있는 것이 아니라면 말이다.

‘하긴, 애초에 마기를 가지고 있다면 성물이 있는 내성을 이렇게 돌아다니지도 못하겠지.’

타이니의 머릿속이 복잡해지는 가운데, 국왕과 리트만의 대화가 이어졌다.

“그 임무는 취소일세, 리트만. 나는 게일 앤더슨이라는 초인을 믿네. 해일의 마도사가 바다에서 실종이라니? 무언가 문제가 생긴 것뿐이겠지. 그러니 당장은 눈앞에 닥친 위협을 처리하는 데 손을 보태 주게.”

“하지만 게일 님이 도움이 필요한 상황일 수도 있습니다! 통신이 없는 것만 봐도……!”

“그만. 후…… 흠흠, 리트만, 나는 이미 결정을 내렸네. 당장 동원할 수 있는 최고급 인력이 자네밖에 없어.”

국왕은 이름을 잘못 부르는 척하며 타이니에게 확실한 신호를 주었다.

“……명을 받들겠습니다.”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이는 리트만.

그런 그를 보며 타이니는 슬쩍 눈을 빛냈다.

‘이자가 후셀이다.’

국왕은 어떻게 해서든 저자를 자신과 함께 묶어 놓을 생각인 것 같았다.

대화를 들어 보니 이미 십수 년이나 된 인연.

그리고 국왕이 신분을 숨겨 주고자 하는 수인족인 데다 슈페리어급 기사라면…….

‘웬만한 인간 슈페리어보다는 훨씬 강하겠지. 경험도 많을 테고.’

국왕에게 무슨 사정이 있는지는 몰라도, 그는 이 리트만…… 아니, 후셀과 자신을 저울에 올려놓고 한쪽을 택하지 못한 것이 틀림없었다.

그렇다고 불쾌해할 일은 아니었다.

‘악마추종자 몇 죽였다고 십수 년 된 충신을 의심하게 한 거야. 날 쳐 내지 않은 것만으로도 감사한 거지.’

자신은 왕에게 성물이 있는 내성에서 잘만 돌아다니는 이를 악마추종자라고 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니 신하를 믿긴 하겠지만, 그래도 만에 하나의 경우를 대비해 이런 상황을 만든 게 아닐까.

‘왕이라면 다 이렇게 해야 하는 건가.’

늙은 왕의 마음이 무섭게 느껴지는데.

“타이니 경, 그대도 따라 주겠는가?”

그런 왕의 명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물론입니다, 전하. 명을 따르겠습니다.”

“그래, 고맙군. 자네 능력이라면 보는 것만으로도 알 수 있겠지?”

……이 양반이 왜 남의 능력을 다 까발리지?

당황스러웠지만, 번뜩이는 왕의 눈빛을 보는 순간 타이니는 얌전히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럼 내일부터 본격적으로 청소를 시작하게. 일정은 리트만 경과 함께 맞춰 보고…… 아!”

국왕은 무언가 생각이 났다는 듯 갑자기 손뼉을 쳤다.

“리트만, 자네는 잠깐 나가 주겠나? 악마추종자를 솎아 내는 일은 타이니 경이 주가 될 테니, 그에 관해 잠시 따로 할 이야기가 있네.”

“……알겠습니다, 전하.”

굴러들어 온 돌이 박힌 돌도 아닌 집의 주춧돌을 흔드는 격이라.

딱딱하게 굳은 리트만의 표정에는 언짢은 기분이 여실히 드러나 있었다.

* * *

“……어떻던가?”

“악마추종자는 아니었습니다.”

“그래, 그랬겠지.”

“그냥 따로 말씀해 주시지 그러셨습니까? 번거롭게…….”

“어쩔 수가 없었네.”

다시금 둘만 남은 자리.

말없이 자신의 심장 부근을 가리키는 국왕의 모습에 타이니는 역시나 하며 한숨을 쉬었다.

“마나의 맹세 때문에 말씀을 못 하신 겁니까?”

“그래.”

늙은 국왕의 수명을 연장시키고 있는 마나서클이 그 힘을 다해 가고 있다는 게 확연히 느껴졌다.

사실 3서클은 그리 높은 경지도 아니기에 마나의 맹세를 어겼다 해도 서클이 흔들리는 정도의 충격만 받겠지만, 지금 국왕의 건강 상태로는 그 흔들림조차 치명적일 수 있을 것이다.

“그가 아니라 확신하신다면, 굳이 제게 보여 주실 필요도 없지 않습니까.”

타이니는 안쓰러운 생각으로 그리 말했는데, 국왕은 쓴웃음을 지었다.

“자네 역시 의심을 털어 내야 하지 않겠나. 한번 같이 다녀 보게. 그리고, 확신……했었지. 얼마 전까지는 말일세. 하지만 지금 내 상황이 그 확신을 흔들고 있으니……”

확신했었다? 그리고 지금 상황이라니? 그게 무슨……?

의아한 점이 한둘이 아니었지만, 일단 국왕이 자신에게 보내는 전폭적인 신뢰가 가장 의문이었다.

“왜 저에게 이렇게까지 해 주시는 겁니까? 전하를 뵌 게 이제 고작 두 번째인 소년일 뿐인데 말입니다.”

조심스레 꺼낸 말에, 국왕이 푸핫 하며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 그렇지만 세상에 다시 보기 힘든 천재이기도 하지. 그 나이에 블레이더급의 마병을 일격에 때려죽인 소년……. 나는 전설 속에서도 그런 사람의 얘기를 들어 본 적이 없네.”

“그거야 놈이 방심해서…….”

“그렇지 않았다면 처리하지 못했겠는가?”

“…….”

대답하지 못하는 타이니를 보며 다시 웃은 국왕은 이내 작게 한숨을 쉬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우리 카룬의 핏줄은 이 나이까지 살다 보면, 이상한 예지력이 생긴다네. 뭐, 예지라기보다는 소심해진 탓에 그저 불길한 꿈을 꾼 걸 수도 있겠지.”

“예?”

“성물이 없어지고, 거대한 괴물이 수도를 부수는 꿈……. 그 꿈을 반복해서 꾸고 있는 와중에 전설에나 나올 법한 재능을 가진 소년이 나타났네. 그리고 성물에 문제가 생길 것이라 말했지.”

“……아!”

타이니의 눈이 경악으로 커졌다.

그런 그를 보며, 국왕은 힘없이 웃었다.

“차라리 소심한 늙은이의 꿈일 뿐이라면, 충성스러운 신하에게 원망의 눈초리를 받고 끝날 일이라면 오히려 마음이 편할 것 같네. 그러니 과하다 생각지 말고 하고자 한 일을 하게. 설마하니, 정령술사가 카룬에 해악을 끼치지는 않겠지?”

늙은 왕의 눈에는 노인의 지혜와 걱정이 모두 담겨 있었다.

비록 그 판단의 근거에는 잘못된 고정 관념이 있었으나, 그 사실을 희망으로 삼는 이에게 어찌 지적할 수 있을까.

그가 할 수 있는 말은 한마디뿐이었다.

“……물론입니다.”

“그래, 그럼 돌아가 보게.”

“예, 전하.”

그렇게 타이니가 돌아서는데, 아예 등을 돌리고 선 국왕이 독백하듯 허공을 보며 말했다.

“사연이 많은 사람이지, 그는.”

……그. 후셀 - 리트만을 말함이라.

순간 걸음을 멈춘 타이니가 귀를 쫑긋 세우는데, 국왕이 엉뚱한 말을 꺼내 들었다.

“수인족들 사이에서는 가끔씩 돌연변이가 태어나지. 대개 육지 짐승의 능력을 이어받는데, 가끔 고래(Whale)의 특성을 타고나는 아이가 있단 말이지. 이유는 아직 아무도 모르고.”

마치 혼잣말하듯 창문을 보고 말을 시작하는 국왕.

후셀의 이야기임이 분명했다.

“마치 신화시대에 신에게 맞섰던 고대의 인어족을 연상시키는 외모라서, 웨어비스트에서는 그런 아이들이 태어나면 바로 죽여 버리지. 하지만 부모의 마음이 어찌 법을 따라갈까.”

쿨럭.

“가끔 어떻게든 목숨을 건지는 돌연변이도 있다네. 그러나 그들은 고향인 웨어비스트 왕국에는 감히 얼씬도 못 하고 외부에서도 정체를 숨긴 채 살아가게 된다네. 알려진다면 바로 수인족들에게 추살당할 수 있으니까. 그리고 나는, 그런 그의 능력이 필요했기에 기꺼이 마나의 맹세까지 해 가며 그의 정체를 숨겨 주었지.”

콜록. 콜록.

국왕의 기침이 심해지고, 목소리에도 힘이 없어졌다.

아마도 대화가 아닌 혼잣말을 연기하며 편법으로 맹세를 어긴 반동이 오고 있는 모양이었지만, 국왕은 말을 멈추지 않았다.

“부모에게 버림받고 종족에게 버림받은 한이 얼마나 깊을지 그 누가 알까. 그런 한을 품은 이라면, 어쩌면 악마추종자들과 손을 잡을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런 의심을 하게 됐다네. 충성스러운 신하에게는 미안하게도……. 쿨럭.”

커흑.

가쁜 숨과 함께 국왕이 무언가 토해 내는 소리가 들렸지만, 타이니는 감히 고개를 돌릴 수 없었다.

정말로 대화하는 형식이 되어 맹세를 어긴 반동을 온전히 받아 버린다면, 국왕의 상태가 얼마나 심각해질지 모르니까.

그저 주먹을 불끈 쥔 채 귀를 기울일 뿐이었다.

“더구나 그는 최근에 긴 휴가를 썼어. 좀처럼 쓰지 않던 휴가를. 최악의 경우에는, 게일의 일도 그가 관여한 게 아닌지 의심하게 되는 못난 국왕이라네. 그러니…….”

쿨럭.

“혹시나 그가 적이라면, 바다 위에선 싸울 생각을 하면 안 되네. 그는 범고래(killer whale)니까.”

커으읍. 쿨럭.

다시금 마른기침을 토해 낸 왕은 한동안 말을 잇지 않았다.

“전하!”

혹시나 큰일이 났나 싶어 다급히 돌아보았지만, 차분히 숨을 몰아쉬는 왕의 얼굴은 다행히 안정되어 보였다.

“악마추종자를 추살하라 했으니, 그가 진정으로 관련이 있다면 금세 움직이겠지.”

국왕의 마나서클이 아직은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걸 재차 확인한 타이니는 무거운 한숨을 토해 냈다. 얼마나 복잡한 마음일지 짐작이 가지 않아, 그가 할 수 있는 말은 많지 않았다.

“……쉬십시오.”

그리고, 그날 밤.

- 크르르르.

리트만…… 아니, 후셀이 야밤에 내성을 벗어나고 있다고 월랑이 신호를 보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