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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해머-56화 (56/500)

56화. 성물 후마니타스(Humanitas)

꽈아아아아앙!

콰아아앙!

거대한 회백색 소울웨폰이 스탬프와 충돌할 때마다 연신 사방을 뒤흔드는 충격파가 울려 퍼졌다.

힘 대 힘의 대결.

타이니의 장기라고 할 수 있는 괴력을 일시에 쏟아붓는 공격에 리암이 정면에서 맞서면서, 공방은 점점 단순하고 치열해지는 듯했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둘의 힘이 비등한 것은 절대 아니었다.

“이거, 기술적으로는 굳이 충고할 것이 없겠어. 부족한 것이라고 해 봤자 경지와 경험뿐인가.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재능이…… 허허.”

혀를 내두르며 웃고 있는 리암의 모습과 그 앞에서 식은땀을 흘리고 있는 타이니의 모습.

두 사람의 차이는 겉으로 보이는 것만큼 극명했다.

‘멋지군. 이거 배울 만하겠어.’

리암과 공방을 나눌수록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돌 속성을 극대화한 챌린저급 기사 리암의 전투 스타일은, 어찌 보면 타이니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었다.

더구나 그의 속성 활용 방법은 중력 속성과 일부 비슷한 면이 있어 배울 점도 많았다.

‘무겁고 단단해진 상태에서 무게 중심을 이동하는 법, 검에 힘을 싣는 법……. 다 참고할 만해.’

충돌의 순간마다 쌓이는 경험은 이내 염체에 새겨져, 중력 속성의 전환을 한층 매끄럽게 만들기 시작했다.

콰아아앙!

콰콰콰콰콰.

그것이 다시금 리암을 감탄하게 했다.

“……천재라는 표현도 부족하군. 괴물…… 괴물이야, 자네는! 허허.”

연이은 충돌이 만들어 낸 충격파, 그 바람을 타고 오히려 깃털처럼 몸을 날리며 충격을 흡수하고는 이내 훨씬 빠르게 쇄도하는 모습.

“칭찬…… 감사!”

리암은 대체 이 앳된 기사가 무슨 속성을 개화한 건지조차 파악이 되지 않았다.

콰아아앙!

“근성 역시 훌륭하고…….”

몇 번이고 온 힘을 쥐어짠 탓에 식은땀을 흘리는 타이니의 모습에 또 혀를 내두르며 감탄하는 리암.

그러면서도 다시금 덤벼드는 타이니의 공격을 몇 번이고 받아 준다.

아무리 경지의 차이가 있다 한들 그것이 무시할 만한 공격은 아니었는지, 얼마 못 가 리암의 얼굴에도 비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그만, 그만하지! 이젠 과해!”

쾅!

크게 휘둘러진 소울웨폰을 스탬프를 들어 간신히 막아 냈지만, 그 충격에 타이니의 몸이 뒤편으로 훌쩍 날아가 버렸다.

탁.

후욱. 후욱.

“가, 감사합니다.”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는 와중에도 타이니는 가까스로 자세를 바로잡고 정중히 예를 표했다.

그에 리암 역시 흡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허허, 말년에 놀라운 경험을 하는군. 세상이 넓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되었어. 나야말로 감사하네.”

이마에 흐르는 땀을 훔쳐 내는 노년의 기사. 그 모습은 말 그대로 후학을 가르치는 데서 기쁨을 느끼는 바람직한 선배, 혹은 선생의 모습 그 자체였다.

‘카룬에 인재가 없는 것은 아니었어.’

이름을 들어 본 실력자는 해일의 마도사 게일 앤더슨뿐이었기에, 타이니는 카룬에 제대로 된 기사가 없는 줄 알았다.

하지만 오러유저가 아니더라도 기사는 기사.

리암 폰 피터슨은 실망감만 주던 카룬 왕실 기사들의 부정적인 이미지를 단번에 씻어 주었다.

‘이 정도라면 굳이…….’

노골적으로 도와 달라고 부탁하는 것보다는 이대로 친분을 유지하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그리고 그 판단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듯, 타이니를 바라보는 리암의 눈빛에는 호의만이 가득했다.

“성물 수호대가 지겨워지면 왕실 기사단으로 오게. 내가 전하께 청을 드려서라도 자리를 만들지. 부대장 자리 정도야 언제든 내어 줄 수 있네. 트루먼 녀석이야 나의 소싯적 동기니 서운해하지 않도록 말해 놓으면 되고.”

“……너무 과한 배려십니다.”

아무래도 대련을 통한 친분 쌓기는 너무 과하게 성공한 것 같았다.

“아니, 절대 과하지 않아. 스물에 그 정도라면 후에 초인이 되어도 이상하지 않을 인재니 말일세. 가뜩이나 분위기가 어수선한 우리 왕국에, 자네는 충분히 활력이 될 수 있어.”

“……어수선하다니요?”

“아, 자네는 아직 모르나? 그럼 굳이 알 필요는 없네.”

어떻게 모를 수 있을까.

왕실에서 아무리 비밀로 한다 해도, 게일 앤더슨의 실종 소식은 이미 알게 모르게 퍼져 나가고 있었다.

타이니는 쓴웃음을 짓는 노기사의 심정을 헤아려 굳이 아는 척을 하지 않았을 뿐이었다.

그런 속내를 알 리가 없건만, 노기사의 호의는 끝이 없었다.

“후셀이라는 사람을 찾는다고 했지?”

“예, 그런데 아까 모르신다고…….”

“나야 왕실에만 박혀 있으니 모르지만, 워낙 특이한 이름이니 누군가는 알 수도 있지. 마침 떠오르는 녀석이 있네. 리트만, 그 녀석에게 물어보게. 내 자리를 마련해 줄 테니.”

“예?”

“리트만이라고, 왕실 기사단의 일원이지만 폐하의 명령만 받는 친구가 있네. 일종의 별동대라고 할까? 하필 지금은 평소 쓰지도 않던 긴 휴가를 써서 자리에 없지만.”

“아, 굳이 그러실 것까지야…….”

“왜? 반드시 찾아야 하는 사람 아닌가? 우리 애들 두드려 패고는 꼭 한 번씩 물어봤다면서?”

“……죄송하지만, 공개적으로 찾으러 다닐 만한 사람은 아니라서요.”

타이니가 난처한 기색을 표하자 리암이 고개를 갸웃했다.

“흠…… 무슨 사연이 있나 보군. 그런데, 자네가 기사들한테 일일이 묻고 다녔다면서? 그럼 그게 공개적으로 찾으러 다닌 거 아닌가?”

……그, 그런가?

“흐흐, 그건 생각 못 했나 보군. 자네 생각 외로 빈틈이 있구먼. 뭐, 천재 기사가 꼭 똑똑하란 법은 없으니…….”

제, 젠장.

리암의 호쾌한 웃음소리가 비수가 되어 가슴에 푹 틀어박힐 때.

“리트만 녀석도 그렇고, 요새 휴가를 길게 내는 녀석들이 유독 많아졌어. 시국도 어수선한데 말이야……. 기강이 느슨해진 거지. 우리 왕실 기사들이 바짝 긴장하도록, 자네가 자극제가 되어 줬으면 하네.”

리암은 훈계하는 듯한 말을 끝으로 그의 어깨를 두드린 채 사라졌다.

그리고 며칠 뒤.

“오호, 자네가 그 신성인가? 악마추종자들을 때려잡았다는? 이거 만나서 영광이군.”

직접 만난 성물 수호대의 대장 트루먼 경은 짐작과는 조금 다른 인물이었다.

새하얀 머리카락과 수염에 주름진 얼굴. 얼핏 보기에도 꽤 나이가 들어 보이는 트루먼 경은, 그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먼저 손을 내밀었다.

‘익스퍼트급인가.’

한 왕국의 일개 대를 이끄는 장이라고 보기에는 확실히 무력이 좀 부족했지만, 태도만큼은 그의 부하들과 달리 부드러웠다.

리암 경의 동기라더니, 나름대로 괜찮은 사람인 것 같았다.

“……저야말로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트루먼 경.”

“허허. 영광이라니, 은퇴를 앞둔 늙은이에게 너무 과한 예의네. ‘과례(過禮)는 비례(非禮)’라는 말도…… 아, 동방의 격언일세. 내가 말을 잘못 꺼냈군.”

“알고 있습니다. 과한 예의는 예의가 아니라는 뜻이지요. 그리고, 상급자를 존중하는 것을 과례라 보긴 어렵지 않겠습니까.”

“……과연, 정말 보기보다 나이가 많은가 보군. 동방의 격언도 알고…… 허허, 정말로 감탄했으이.”

타이니의 대답에 놀란 표정을 짓던 트루먼은 이내 만면에 미소를 띠며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와서 기사들과 한바탕 실력을 겨뤄 봤다면서? 어떤가, 나와도 한판 붙어 보겠는가?”

그저 헛웃음이 나오는데, 자신을 바라보는 트루먼의 반짝이는 눈을 보니 굳이 찬물을 끼얹을 생각은 들지 않았다.

모든 마나유저가 자신처럼 상대의 경지를 한 번에 파악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니까.

아마도 트루먼에게는 엇비슷하게 느껴질 자신의 기파가 그의 호기심을 더욱 자극한 것 같았다.

다만 살짝 의아한 것은…….

‘내가 리암 경과 대련한 얘기는 못 들었나?’

들었다면 이런 제안을 할 리가 없는데?

친근하게 트루먼의 이름을 언급하던 리암의 모습이 떠올라 살짝 의아했지만, 이내 답변을 기다리는 노기사를 보며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아닙니다. 아무리 단독 작전권이 있다 해도 엄연히 성물 수호대 소속인데, 대장님께 그런 무례를 저지를 수는 없지요.”

본 실력대로 한방에 박살을 내기도 뭐하고 일부러 져 줄 수도 없는 노릇이니, 타이니는 적절히 응대하며 한발 물러섰다.

그 모습이 트루먼에게는 더욱 좋게 와닿은 것 같았다.

“겸손하기까지? 하하하, 아주 좋군! 참으로 오랜만에 보는 인재야. 전하께서 드디어 우리 수호대에도 관심을 두시려나 보군. 앞으로 잘해 보세나.”

인재가 영입되어서 기쁜 건지, 아니면 왕에게 관심을 받아서 기쁜 건지.

과연 어느 쪽일까 하는 호기심이 들었지만, 당장은 그보다 중요한 것이 있었다.

“그런데, 초면에 죄송하지만…… 제가 여쭤볼 것이 하나 있습니다.”

“음? 뭐든 물어보게! 수호대 임무에 관해서인가? 안 그래도 지금 성물을 보러 데려가려 했네만.”

트루먼은 생각보다 더욱 기꺼운 태도로 말을 받았다.

“아, 그게 아닙니다. 혹시 왕실에서 후셀이라는 이름을 들어 본 적이 있으신가 해서 말입니다.”

어차피 다 알려진 마당에 트루먼에게만 안 묻는 게 더 이상하니, 나름대로 기대를 품고 던진 질문이었지만.

“……후셀? 특이한 이름이로군. 수인족이나 오크족인가? 아쉽지만 카룬에 다른 종족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네. 도시 연합에서 찾아보는 게 빠를 텐데?”

돌아온 말에는 연륜만큼의 지혜가 담겨 있었지만, 바라던 대답은 아니었다.

이미 도시 연합 쪽은 블랙윙의 수장, 제이(J)가 찾고 있을 터였다.

‘그때 본 왕의 반응을 생각하면 카룬에 있을 확률이 더 높은데…….’

막막함에 자연스레 한숨이 나오는데, 그 모습을 본 트루먼이 타이니의 어깨에 척 하니 손을 올렸다.

“이것 참, 내가 실망감을 준 모양이군. 하지만 살다 보면 만나야 할 사람은 언젠가는 만나게 된다네. 그러니 서두르지 말고 기다려 보게나.”

……글쎄요, 그런 종류의 반가운 인연은 아닙니다만.

타이니는 입가에 맴도는 말을 뱉어 내지 않은 채 어색하게 웃었다.

그러자 트루먼이 어깨를 쥐고 있던 손에 힘을 주어 그를 잡아끌었다.

“일단 담소는 여기서 끝내고, 일부터 하세나.”

“……일이요?”

“자네가 지켜야 할 성물이 뭔지는 직접 봐야 하지 않겠나? 성물이 있는 곳의 출입증은 전하를 제외하면 나만 가지고 있으니.”

“아……!”

성물.

그 말에 정신이 확 들었다.

수인족의 왕국 웨어비스트, 엘프의 왕국 엘븐하임, 드워프의 지하 왕국 테르티우스, 오크들의 수도 바토르에 하나씩.

인간의 국가에서는 아스란, 왕국 연합의 주축 마탑, 이곳 카룬에 하나씩 도합 일곱 개의 성물이 있다.

그리고 그 성물들은, 이십 년 뒤 미래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지금이야 카룬 왕의 말처럼 그저 상징에 불과한 것이 되어 버렸지만.

- 7대 성물들이 하나라도 남아 있었다면 이 싸움이 한결 쉬워졌을 거야.

미래의 현자들이 대부분 그리 말했을 정도로 중요한, 꼭 지켜 내야 할 인류의 보물들이었다.

‘반드시!’

타이니가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는데, 그 모습을 본 트루먼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성물 수호대가 한직으로 평가받기는 하지만, 직접 성물을 보면 생각이 달라질 걸세. 가세나.”

마물들이 대륙에 판을 치던 시절, 고대의 인류를 보호하고 명맥을 잇게 해 준 일곱 개의 보물 중 하나.

그 실물을 보러 가는 타이니의 걸음이 조금씩 빨라졌다.

* * *

저벅저벅.

내성의 중심부, 지하로 이어지는 통로는 조용하기만 했다.

간간이 걸려 있는 횃불이 아니었다면 어디 지하 미궁에 들어선 것으로 착각했을 만큼.

조금 길어진 침묵이 어색했을까.

앞서가던 트루먼이 다시금 입을 열었다.

“자네, 왜 성물 수호대가 한직 취급을 받는지 아나?”

“……성물의 수호 결계가 미치는 범위 이상으로 도시가 커져서가 아닙니까?”

“그게 전부일까? 그래도 고대에서부터 이어진 인류의 보물을 지키는 자린데, 왜 능력 없는 이들이 수호대로 밀려날까? 아, 딱히 자학을 하는 것은 아니네. 우리 왕국뿐 아니라 다른 나라도 마찬가지라고 알고 있으니까.”

뒤를 돌아보며 빙긋 웃는 트루먼의 얼굴에는 정말 그늘 한 점 없어 보였다.

은퇴를 앞뒀기 때문인지, 홀가분하게까지 보이는 모습.

그에 타이니도 그 질문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보았지만, 바로 떠오르는 답은 없었다.

“……죄송하지만 말씀드렸던 것 외에 다른 이유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래……. 성물을 직접 보지 않은 이라면, 다 그렇게 생각하지.”

“예?”

피식.

“그 이유는 생각보다 간단해. 왜냐하면……!”

그 말과 함께 멈춰 선 트루먼이 목에 건 신분패를 복도의 벽에 대는 순간.

우우우웅.

그그그그긍.

작은 틈조차 보이지 않던 어두운 통로의 가운데가 진동과 함께 갈라지며, 그 사이로 새하얀 빛이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점차 강렬해지는 빛, 하지만 눈이 부시다기보단 따스한 느낌이 드는 그 빛을 보며, 트루먼이 빙긋 웃었다.

“……굳이 지킬 필요가 없기 때문이지.”

어느새 사람이 드나들 수 있을 정도로 갈라진 벽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 빛나는 물체. 타이니는 멍한 눈으로 그 물체를 바라보았다.

‘이게 성물…….’

성물, 후마니타스(Humaitas).

고대어로 인간성, 자비, 혹은 인류애 등의 뜻을 가진 이 성물은 정팔면체로 반듯하게 깎인 수정 같은 모양새였다.

분명 처음 보는 것이지만, 그것이 뿜어내는 따스한 빛은 이것이 왜 성물인지를 확실하게 알려 주었다.

다만 상상했던 것과 가장 큰 차이라면.

“크군요…….”

“그래, 거의 작은 집만 한 크기지. 심지어 알 수 없는 원리로 공중에 살짝 떠 있는 데다가, 자격이 없는 이는 건드리지도 못한다는 전설까지 내려오고 있어. 그러니 굳이 지킬 필요도 없는 게지.”

그렇게 말하는 트루먼의 얼굴에는 순간적으로 어두운 그림자가 스쳤지만, 이내 그는 그 그늘진 감정을 지우려는 듯 부러 과장된 표정을 지으며 타이니를 향해 팔을 벌렸다.

“자, 자네도 성물을 만질 자격이 있는지 시험을…… 응?”

그가 그렇게 말하는 순간, 타이니는 이미 공동의 안쪽에서 성물에 손을 뻗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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