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화. 후셀
‘벌써……?’
국왕의 태도도 그렇고, 그에게서 마기의 흔적을 찾지 못한 것도 그렇고.
어쩌면 진짜 후셀이 따로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악마추종자 놈들의 상황을 생각하면, 후셀이 본명이 아닌 암호명일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그런데 이렇게까지 즉각적으로 움직이면, 의심을 안 하려야 안 할 수가 없었다.
“……가자.”
다시금 스스로에게 확신을 불어넣은 뒤, 타이니는 창문 밖으로 몸을 날렸다.
탁.
중력 속성으로 최대한 가볍게 만든 몸에 마나의 힘까지 더하니, 5층 창문에서 뛰어내려 착지하는 순간부터 번개처럼 앞으로 튀어 나갈 때까지 아주 작은 소음밖에 나지 않았다.
- 컹! 컹!
놈의 뒤를 따르는 월랑의 영체가 알려 주는 거리를 실시간으로 좁혀 나가는데.
“거기! 정지!”
“누구냐!”
내성의 경비를 서던 병사들이 창을 들어 올리며 길을 막았다.
우웅.
그러나 타이니가 카룬의 기사임을 증명하는 은빛 신분패가 푸른 파도문양을 허공에 띄우는 순간.
“헙!?”
“이런!”
“기사님이다!”
병사들은 순식간에 창을 거두었고.
“……수고.”
타이니는 짤막한 한마디만 남긴 채 그대로 내성 문을 통과해 질주했다.
콰콰콰콰.
한 사람이 달려 나가며 만들어 낸 먼지 폭풍에 얌전히 서 있던 병사들의 머리가 흩날렸다.
“야, 근데 우리…….”
“……이름을 안 물어봤네.”
“……망했다.”
타이니의 기세에 눌려 바로 길을 내어 준 병사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울상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 컹!
‘항구 방향?’
타이니는 급격하게 방향을 꺾는 목표물의 행선지를 짐작하고는 인상을 찌푸렸다.
동대륙과의 중계 무역을 통해 막대한 부를 축적한 카룬.
그 수도인 이곳 오르투스는 외성에도 4~5층 높이의 건물이 흔할 정도로 발달한 도시였다. 그만큼 골목길도 많은 탓에, 추격이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 컹!
하지만 술사와 너무 멀어지지만 않으면 절대 목표를 놓치지 않을 정령이 방향을 지시해 주고 있었으니.
“쯧.”
오르투스의 지리를 전혀 모르는 타이니는 그대로 옆 건물의 벽면과 창가를 딛고 지붕으로 점프했다.
복잡한 골목길을 이리저리 움직이는 대신, 건물의 지붕에서 지붕으로 뛰어넘으며 최단 거리로 질주하는 것을 택한 것이다.
그 과정에서.
쨍그랑!
‘젠장.’
본의 아니게 창가의 화분 하나를 깨트리고 말았다.
- 중력 속성을 완벽하게 다룬다면 아예 허공을 자유자재로 날 수도 있다!
- ……는 전설도 있지.
그 탓에 검제의 허풍이 진실이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잡생각이 스쳐 지나갔지만, 금세 고개를 흔들며 털어 버렸다.
지금은 깨진 화분이나 검제의 말을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후셀!’
놈을 잡아야 한다.
국왕의 한탄을 들었을 때부터 이어진 복잡하고 산만한 잡념이 그 순간 완전히 사라지고, 타이니는 정신을 바짝 가다듬었다.
‘성문을 통과한 것도 아니고 몰래 성벽을 넘었어. 놈이 확실해.’
거기다.
- 컹.
주점으로 보이는 건물에 들어선 놈이 완전히 다른 얼굴로 바뀌어 뒷문으로 빠져나오는 것을 월랑이 확인해 줬다.
영혼의 냄새를 맡는 월랑이 있는 한 마법적 변장도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 크릉.
‘뭐? 다른 미행자가 있어?’
어떤 자들인지 궁금했지만, 지금 거기까지 신경 쓸 수는 없었다.
다행히 다른 미행자들은 놈이 두 건물을 거쳐 변장한 뒤로 떨어져 나갔다고, 월랑이 자랑스레 알려 왔다.
잘된 일이었다. 오히려 놈이 변장에 시간을 지체한 덕분에, 타이니는 금세 거리를 좁히고 놈을 시야에 둘 수 있었다.
- 크릉.
내 솜씨가 어떠냐고 말하는 듯 곁에 다가와 콧대를 높이는 월랑의 영체.
몰래 추적하느라 새끼 수준으로 작게 변한 영체의 모습이 귀엽기만 해, 타이니는 씩 웃으며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어 줬다.
- 킁.
그리고 뻐기는 듯 고개를 뒤로 젖히는 녀석에게서 시선을 돌려 항구로 향하는 검은 로브, 후셀을 주시하기 시작했다.
항만으로 들어서자 주변 건물들이 낮아진 탓에, 지붕 위에서 쫓는 추격이 힘들어졌다.
탁.
타이니는 바로 지붕에서 뛰어내려 으슥한 골목길에 내려서고는 이내 어둠 속에 숨어들었다.
캄캄하고 냄새나는 골목을 조용히 걷던 그는 자신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렸다.
‘쯧.’
전생에서도 추격전은 꽤 해 봤지만, 이런 형태는 아니었다.
괴력의 기사 타이니의 추격전이란, 가로막는 모든 것을 부수고 일직선으로 목표를 향해 돌진해서 박살을 내 버리는 것이었다.
‘지금은 그게 가능한 실력도 아니고…….’
그래서도 안 되는 상황이다.
하지만 성미에 맞지 않는 이 추격 방식이 영 어색한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게다가.
“어? 웬 애새끼야? 오! 부티 나는데?”
“꼬마야, 일단 그 가죽 갑옷부터 벗어 봐라! 헤헤.”
“어디서 갑자기 튀어나온 거야? 클클, 내가 약을 너무 했나?”
달빛도 비치지 않는 골목에서 이상한 냄새가 나는 연초를 태우는 양아치들이 시비를 걸어 오며 불쾌감까지 더해 주었다.
“쯧.”
물론 시간을 끌 이유도, 그럴 생각도 없었다.
탓.
우드득.
콰드득.
“끄…….”
한순간에 짚단처럼 쓰러지는 양아치들.
급하게 처리하다 보니 한 놈의 신음이 새어 나오긴 했지만, 목이 반대 방향으로 돌아간 놈들이 다시 눈을 뜨는 일은 없을 터였다.
타이니는 골목 밖으로 슬쩍 고개를 내밀어 어느 함선으로 향하는 후셀의 모습을 확인하고는 다시 그를 뒤쫓기 시작했다.
‘당장 덮칠 수도 없고.’
놈을 잡는 것 자체는 어렵지 않을 것이다.
문제라면, 지금 타이니가 있는 골목에서 항만에 정박한 배들 사이까진 숨을 만한 건물이 없다는 것.
‘월랑, 사람 말 알아들을 수…….’
- 크르르.
‘……그래, 없겠지.’
월랑의 영체만 붙여서 염탐한다면 가장 좋겠지만, 월랑이 직접 소통할 수 있는 사람은 자신뿐.
간단한 말 정도는 감으로라도 이해할 수 있다지만, 그 이상의 복잡한 대화는 타이니가 간접적으로라도 듣고 번역해 줘야 했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 월랑에 빙의하려면…….
‘어쩔 수 없지, 실체화해!’
- 킁.
들킬 위험을 감수해야 했다.
상황이 상황인 만큼, 월랑도 이내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곧.
멀어지는 검은 로브의 사내 뒤로, 작고 귀여운 은빛 강아지 한 마리가 멀찍이서 쫄쫄쫄 따라붙었다.
* * *
부둣가에 매인 배.
함선이라 부르기에는 다소 작은 카락(Carrack)은 겉으로 보기에는 평범한 상선 같았다. 야심한 밤에도 선원들이 주변을 지키고, 그 아래에선 짐꾼들이 배 안으로 분주히 드나드는 광경은 조금 특이했지만 말이다.
경계를 서던 선원들은 검은 로브의 남자가 가까워지자 안색을 굳히며 일어섰다.
그러나 다가온 검은 로브가 품 안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자, 무기를 꺼내려던 선원들은 곧바로 무릎을 꿇었다.
“아니, 내일 오신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일이 틀어졌다. 지금 출발한다.”
검은 로브를 입은 사내, 후셀의 말에 가장 앞에 나섰던 선원의 미간이 좁혀졌다.
“예? 아직 준비 중입니다. 시간이…….”
“준비를 서둘러라. 밤중에 마무리하고, 내일 해가 뜨기 전에 다시 들어온다. 그리고 나를 제외한 조직원들은 ‘그곳’에 남는다.”
“갑자기 왜 계획을 변경하시는……?”
“국왕이 그 꼬마 놈을 내게 붙였다. 하필 ‘우리’를 찾아낼 수 있는 능력을 가진 놈을.”
그 말에 선원들의 안색이 동시에 굳어졌다.
“국왕이요? 놈이 이곳에 온 지 얼마나 되었다고요?”
“흐, 그 속을 누가 알까. 닥치고 준비나 해!”
“예!”
신경질적인 목소리에 움츠러든 선원들이 일사불란하게 흩어지기 시작했다.
- 서둘러, 이 느림보들아!
차아악.
채찍을 휘두르며 재촉하는 선원들의 목소리와 함께 짐꾼들의 움직임이 한결 빨라지기 시작할 때.
그 모습을 그늘진 구석에서 지켜보던 은빛 강아지가 신경질적으로 일어서며 이빨을 드러냈다.
“크르르.”
마기(魔氣). 악마의 힘이 검은 로브를 제외한 선원들 전원에게서 느껴지고 있었는데, 그 더러운 힘이 주는 불쾌감을 더는 참기 힘들어진 것이었다.
- 진정해, 월랑!
놈들의 이야기를 좀 더 들어 보고 싶은 타이니가 전언으로 월랑을 진정시켜 보려 했지만, 이미 검은 로브의 얼굴이 월랑에게로 향한 뒤였다.
“개가 마나를……? 정령!!”
로브 속에서 푸른 안광이 번지는 순간.
- 젠장, 이렇게 된 이상……. 공격해!
“크와아아앙!”
타이니의 전언과 함께 부풀어 오른 월랑의 몸이, 이내 거대한 늑대가 되어 검은 로브를 덮쳤다.
꽈아아아앙!
몸길이 3m, 체고 1.5m의 거대한 늑대가 휘두른 앞발이 검은 로브가 들어 올린 쌍검에 막히며 폭음이 터져 나왔다.
짐승의 앞발과 가벼운 검이 부딪친 것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강렬한 소음.
늑대의 앞발에 실린 강력한 힘에 검은 로브의 눈빛이 흔들렸다.
“이게 무슨……!?”
공격이 막힌 순간 번개처럼 옆으로 돌아간 월랑의 입이 크게 벌어지며 로브의 옆구리를 물었다.
아니, 물려 했다.
콰직.
그 순간 스르르 옆으로 물러나며 월랑의 이빨을 피한 검은 로브.
그의 쌍검이 십자로 교차하며 늑대의 몸을 갈랐지만, 그 순간 늑대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온 푸른빛이 검날의 위력을 대부분 반사해 옅은 상처만이 남았을 뿐이었다.
심지어 보통의 생명체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듯, 그 가벼운 상처마저 순식간에 아물어 버렸다.
“크르르.”
그것을 보는 순간 검은 로브의 입에서 욕설이 터져 나왔다.
“한낱 개새끼 따위가!!”
“크와아아앙!”
나 개 아니다!
콰아아앙!
분노한 월랑의 몸통이 물러나는 검은 로브를 후려치고, 그에 맞서는 검은 로브의 쌍검이 한밤중의 부두에 연신 폭음이 울려 퍼지게 했다.
그렇게 몇 번의 공방이 오간 끝에, 처음의 위세와는 달리 늑대가 조금씩 밀리기 시작했다.
스가각.
쩌억.
“크르르르!”
주르륵 밀려나며 다시금 상처를 회복하는 월랑.
하지만 그 모습을 보는 검은 로브는 한결 여유로워진 걸음으로 천천히 다가설 뿐이었다.
연달아 터져 나온 폭음을 제외하면 조용하기만 한 부두.
내성이나 외성 방향에서도 아무 소란이 없는 것이 그의 이성을 일깨운 것이다.
왕의 도움 없이 정령술사 하나만 왔다?
아무래도 이 건방진 꼬마 놈이 증거부터 잡으려 한 모양이었다.
“흐흐. 이거 참.”
역으로 왕은 아직 자신을 믿는다는 확신도 생겼다.
그렇다면 오히려 잘된 일이다. 변수를 만든 놈이 직접 죽을 자리를 찾아온 꼴이니까.
‘명령보다 빨리 놈을 처리할 수 있겠어.’
아직 놈이 눈에 보이지는 않았지만, 정령을 역소환시키면 술사 역시 큰 충격을 받는다는 사실은 상식.
증거를 확보하지 못한 놈은 도망치지도 않을 터였다.
“네놈부터 처리하고, 네 주인도 찢어 죽여 주마!”
자욱한 살기와 함께 후셀이 월랑을 향해 번개처럼 돌진했다.
“캬오오오오!”
그 살벌한 기세에도 전혀 기죽지 않은 월랑 역시 우렁찬 포효와 함께 정면으로 놈과 격돌했다.
콰아아아앙!
그 공격을 막아 낸 검은 로브 안에서 새하얀 이빨이 드러났다.
“제법이지만…….”
조직의 암수를 격파해 낸 놈의 정령답게 슈페리어급의 무력도 어느 정도 견뎌 내는 저력을 보였지만.
“거기까지다.”
딱 그 정도, 그저 견뎌 내는 수준일 뿐이었다.
놈의 나이를 생각하면 그것만으로도 대단한 것이니, 아마도 정령술에 특화된 놈일 것이다.
후셀은 조직에 추가로 보고할 정보 하나를 머릿속에 새겨 두며 드디어 자신의 소울웨폰을 꺼내 들었다.
우우웅.
“끝내 주마.”
바다에서 솟구친 푸른 물줄기가 새파란 검기와 어우러지며 그의 쌍검에서 넘실거리는 순간.
꽈아아아아아아아아앙!
엄청난 폭음과 함께 선미가 터져 나가는 것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