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사는 인생-178화 (155/264)

#178

다시 사는 인생 - 178

“청와대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감사합니다. 대통령님. 황태수라고 합니다.”

최대한 자제를 한다고는 하지만, 황태수는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 나라의 통수권자가 자신의 앞에 서 있다는 무게감은 황태수의 심장을 급히 뛰게 만들고 있었다. SHJ라는 배경이 자신의 뒤를 받치고 있지 않았다면 이 자리는 애당초 이뤄질 수 없는 자리였다. 황태수는 심호흡을 가다듬기 시작했다. 적어도 이 순간만큼은 SHJ의 이익을 위해 대통령과 긴 싸움을 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이경환 회장은 안녕하시지요?”

“평안하십니다. 회장님께선 대통령님의 건강을 걱정하고 계십니다. 건강하신 모습을 뵈니 안심이 됩니다.”

“하하하, 황 부회장은 립서비스도 아주 능하시군요. 여긴 답답하니 우리 밖으로 나갑시다. 식사나 같이 하면서 대화를 나눠봅시다.”

다른 수행원들을 대기시킨 황태수는 잭과 함께 김환수 대통령을 따라 나섰고, 김우상 비서실장이 급히 앞장서 길을 열었다. 집무실 뒤편 조그마한 안가에 도착한 네 사람은 식사가 준비된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중요한 대회가 필요할 거 같아 이곳으로 모셨어요. 여긴 안전한 곳이라고 하더군요.”

집무실을 두고 안가로 향할 때까지 황태수는 이유를 알지 못했다. 한국의 심장인 청와대도 강대국 특히 미국의 촘촘한 정보망을 빠져나갈 수는 없었다. NSA의 첨단장비는 이미 청와대를 24시간 감시하고 있었고 그보다 더 무서운 것은 청와대 내부에서 새어나가는 정보들이었다. 황태수는 안가에 들어서며 휴대폰을 살폈지만, 휴대폰의 신호는 이미 죽어있었다.

“대통령님의 배려에 감사합니다. 듣는 사람이 적을수록 정보의 가치는 커진다고 배웠습니다.”

“허허, 저도 그 정도의 센스는 있습니다. 우선 식사부터 합시다. 나이가 들어서인지 때를 거르면 힘이 빠지더군요.”

깔끔하게 차려진 한식은 황태수의 미각을 자극하기 시작했다. 대통령과의 식사가 불편하긴 했지만, 오랜만에 느끼는 정통 한식에 황태수의 손은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국적을 바꿨다 해도 황태수의 몸에 흐르는 한국인의 피는 인위적으로 바꿀 수 없었다. 김환기는 얼굴에 미소를 지으며 황태수의 속도에 보조를 맞추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오랜만에 맛보는 한식이라 제가 정신 줄을 놓았습니다.”

“입맛에 맞으셨다니 다행이군요. 한국인에겐 한식이 최고 아니겠습니까?”

식사를 마친 네 사람은 안가 내 접견실로 자리를 옮겼고, 후식으로 나온 수정과를 맛보고 있었다. 무거운 분위기는 아니었지만, 어색함이 접견실을 가득 채우며 황태수의 입을 더욱 무겁게 하고 있었다. 그 어색함을 김환기가 깨기 시작했다.

“이경환 회장은 한국정부에 대한 반감이 많더군요. 하나 묻겠습니다. 이경환 회장은 저를 믿습니까?”

전혀 예상하지 못한 김환기의 말에 황태수는 순간 움찔거렸다. 본론을 꺼내기도 전에 신뢰문제를 거론한 김환기의 강수에 황태수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가 떴다. 대통령이 듣기 좋은 말을 할 것인지 사실을 말해야 할지 순간 고민이 되었지만, 감언이설에 넘어갈 김환기라면 이 질문을 꺼내지 않았을 거란 생각에 황태수는 솔직함을 선택하기로 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백 프로 믿는다고는 말씀을 못 드리겠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러나 한국에 대한 회장님의 애정만큼은 식지 않으셨습니다.”

“솔직한 답변 감사합니다. 저 또한, 미국기업인 SHJ를 백 프로 신뢰하는 것은 아닙니다. 서로 신뢰를 하지 않으니 대화가 잘 통할 수도 있겠군요. 허허.”

SHJ를 미국기업으로 선을 그은 김환기의 답변에 황태수의 입으로 작은 탄식이 흘러나왔다. 비선조직을 이용해 SHJ의 투자의향을 물었을 때만 해도 김환기의 의중이라 판단했지만, 지금의 분위기로는 확신이 서지 않았다. 그렇다고 김환기의 답변에 반박할 수도 없는 처지였다. SHJ는 김환기의 말대로 미국기업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신뢰란 것은 서로가 쌓아가는 것입니다. 저는 대통령이기 전에 인간적으로 이경환 회장을 존경합니다. 한국정부와의 대립 속에서도 외환위기와 대후 문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휴대폰과 MP3 생산기지를 한국에 설립하는 것은 SHJ의 이익보단, 한국에 대한 애정의 발로였다고 생각합니다. 핵융합로 개발 사업은 이번 정부가 추진한 사업은 아니지만, 한국의 미래를 위해 꼭 필요한 사업이라고 생각하고 있기에 이 회장의 의견을 듣고 싶었을 뿐입니다.”

황태수나 경환은 이번 정부가 추진하는 경제정책과 대북정책에 지지를 보내는 입장은 아니었지만, 한국의 민주화를 앞당긴 역할을 했다는 사실엔 깊은 존경심을 표하고 있었다. SHJ에 대해 색안경을 끼고 비판하는 여론이 조성되기도 했지만, SHJ 내부의 반대를 무릅쓰고 한국기업과의 합작이나 아시아본사를 한국에 설립한 것은 한국을 버릴 수 없는 경환이 밀어붙였기 때문이었다. 경환을 인정해주는 김환기에 황태수는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했다.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SHJ가 이 사업에 참여를 원하는 것은 물론 안정적인 미래 에너지를 선점하겠다는 뜻도 있지만, 가장 큰 원인은 죽 쒀서 개 주는 꼴을 막기 위해서입니다. ITER 가입을 방해한 일본과 미국을 생각해 보셔야 합니다. 혹시라도 KSTAR 프로젝트가 성공한다면 그 기술은 일본과 미국에 뺏길 수밖에 없고, 한국은 뒷방 신세로 전락하게 될 겁니다. 이경환 회장님은 결과가 뻔히 보이는 그런 사태를 막고 싶어 하십니다.”

“흠.”

김환기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KSTAR 사업 보고를 받는 자리에서 한국의 ITER 가입을 물밑에서 방해한 일본과 미국의 행태에 분노했던 기억을 떠올렸다. 황태수의 말대로 한국이 프로젝트에 성공한다면 ITER 가입을 미끼로 한국의 기술을 공동화한 후, 결국엔 토사구팽 시킬 것을 어렵지 않게 예측할 수 있었다. 그렇다고 SHJ를 끌어들인다면 하이에나를 내 쫓기 위해 호랑이를 끌어들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김환기는 선뜻 황태수의 의견에 동조할 수는 없었다.

“국제사회의 일원인 한국이 독불장군이 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미래 에너지를 독점하게 된다면 한국은 국제사회의 표적이 될 뿐입니다.”

“대통령님, 독불장군이나 독점을 하라는 말은 절대 아닙니다. 정당한 대우를 받을 기회를 한국 스스로 걷어차는 우를 범하면 안 되기 때문에 드리는 말씀입니다. 저희가 검토한 바로는 핵융합로 사업은 5년 정도의 시간이면 성공할 가능성이 많다고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핵융합에너지를 상용화하기 위해서는 최소 20년은 필요합니다. 기본이 되는 핵융합로 기술이 차기나 차차기 정권에 의해 타국으로 유출된다면 한국은 결국 손가락만 빠는 신세가 될 것입니다. 정권은 바뀌지만, SHJ는 바뀌지 않는다는 것을 기억해 주십시오.”

황태수가 한국을 방문하기 전, 경환과 황태수는 밤을 새워가며 이 문제에 대해 난상토론을 벌였다. 많은 의견이 오갔지만, 이 사업이 한국정부의 주도하에 성공한다면 일부 지분을 얻는 조건으로 ITER에 가입하고 결국 우위를 점할 수 있는 기술만 빼앗긴 후, 핵융합에너지 사업의 주도권은 강대국으로 넘어간다는 일치한 결론에 도달할 수 있었다. 황태수는 양복 주머니에 넣어 두었던 한 통의 편지를 꺼내 들었다.

“대통령님, 저희 회장님의 친서입니다. 살펴봐 주십시오.”

입구가 봉해진 한 통의 편지를 황태수에게서 건네받은 김환기는 조심스럽게 편지를 꺼내 읽기 시작했다. 편지에 집중한 김환기의 미간이 좁혀지며 간간이 탄식이 섞여 나왔다. 편지를 갈무리한 김환기는 안가의 천정을 하염없이 바라만 보고 있었다.

“성공을 위한 실패라니, 쉽지 않은 결정이군요. 허허, 내가 이경환 회장을 많이 오해했나 봅니다.”

“대통령님께서도 미래에 대한 확신이 서지 않았기 때문에 SHJ와의 끊임없는 불협화음에도 불구하고 저희의 참여를 비선을 통해 제안했다고 생각했습니다. 비록 SHJ가 이윤창출에 그 목적을 두고 있다고는 하지만, 이 사업만큼은 한국의 이익을 최우선시하겠습니다.”

청와대 비서실은 오후 일정을 모두 취소하라는 김환기의 지시에 한바탕 소란이 벌어지고 있었다. 안가에 들어간 네 사람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어둠이 깔리는 시간임에도 안가를 벗어난 사람이 없었다.

‘띠리링, 띠리링’

“여, 여보세요.”

“손님, 부탁하신 모닝콜입니다.”

기대했던 김수재와의 만남은 서로의 입장만 확인한 채 별 소득을 얻지 못했다. 프로그래머인 자신에게 인수협상이라는 큰 숙제를 내준 경환의 뜻을 쉽게 이해할 수 없었다. 서로의 이익을 위해 상대방의 수를 읽으며 자신의 수를 최대한 감추는 피 튀기는 머리싸움은 자신과는 상관이 없는 일이라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제 있었던 금영과의 협상도 김수재와 마찬가지로 큰 성과 없이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벤처기업이 일확천금의 기회로 생각하는 사람들의 인식에 승연은 욕지거리가 치밀어 올랐다. 동창찾기의 포맷을 변형하고 재구성하는 건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인수가 원활하게 진행되지 않는다면 독자적인 개발에 중점을 둘 생각이었다.

한참을 망설인 끝에 침대에서 일어난 승연은 커튼 밖으로 펼쳐진 해운대의 넓은 바다를 온몸으로 맞이하고 있었다. 해운대 밤바다를 거닐다 우연히 눈에 띈 포장마차에서 마신 소주로 인해 승연은 필름이 끊기고 말았다. 어떻게 호텔로 돌아오게 되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던 승연은 커튼 열어젖힌 채, 샤워기를 틀어 머리로 떨어지는 찬물을 한참 동안 맞고 서 있었다. 자신은 협상가가 아니라 엔지니어라는 말을 되새김질하며 자신을 위로해 봤지만, 밀려오는 자괴감은 떨쳐낼 수 없었다.

‘띠리링, 띠리링’

“여보세요?”

‘스캇 리 씨, 다행히 방에 계셨네요. 정상철입니다. 식사 전이라면 같이 자리할 수 있을까 해서 연락드렸습니다.’

“옷만 갈아입고 내려가겠습니다. 기다려 주십시오.”

승연은 서둘러 옷을 걸치기 시작했다. 어제만 해도 지분 인수제안에 별 관심을 보이지 않던 정상철이었기에 승연의 의구심은 깊어졌다. 청바지에 흰 와이셔츠만 걸친 승연은 서둘러 호텔 방을 나섰다.

“속은 좀 괜찮으세요?”

“네. 네?”

급히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승연이 조식뷔페가 차려진 식당에 들어가기 위해 종업원을 기다리고 있을 때, 한 여성이 가벼운 미소와 함께 아는 체를 하며 승연의 뒤로 다가왔다. 짙은 쌍꺼풀에 긴 머리를 자연스럽게 빗겨 넘긴 미인이었지만, 승연은 그 여성을 기억해 낼 수 없었다. 마침, 정상철이 손을 들어 자신의 위치를 알려오자 승연은 가벼운 목인사만 건넨 후 급히 정상철을 향해 몸을 돌렸다.

“정 사장님, 아침부터 무슨 일이신가요?”

“하하하, 저녁에 호텔로 전화를 드렸는데 연결이 되지 않았습니다. 스캇 리 씨가 제안한 내용에 대해 다시 생각해 봤습니다.”

능글능글하게 웃는 정상철이 맘에 들지 않았지만, 아침부터 호텔로 찾아왔다는 것은 제안에 관심을 보이고 있다는 것이었기에 승연은 서둘지 않았다.

“그러셨군요. 저는 본사에 인수가 어려울 수도 있다는 보고를 했습니다. 물론 본사에서도 인수에 큰 관심을 보인 것은 아니었기에 이 일을 추진한 저만 우스운 꼴이 되었네요.”

“시장에서 물건을 살 때도 흥정이란 게 있지 않습니까? 서로 바쁘니 딱 잘라 말하겠습니다. 시가총액을 400억 원으로 해서 우리가 가진 지분 40%를 160억에 넘길 용의가 있습니다.”

어이가 없었는지 승연은 멍한 표정으로 정상철 바라만 보고 있었다. 100억 원이 SHJ에게 부담되는 금액은 아니었고 황태수로부터 인수가격에 대한 전권을 위임받았다 하더라도 정상철의 뜻대로 움직이고 싶지 않았다.

“죄송합니다. SHJ는 지분 100%가 필요하지 반쪽만 원하지는 않습니다. 만약 정 사장님께서 김수재 사장님과 우호지분 60%를 설득하신다면, 350억 원까지 투자할 용의는 있습니다. 이건 제가 드리는 마지막 제안입니다. 이 제안을 받아들이지 말지는, 두 분께서 결정하십시오. 어제도 말씀드렸지만, SHJ구글이 기술이 없어 동창찾기를 인수하려는 건 아닙니다. 제가 아침 비행기라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머리를 굴리는 정상철을 뒤로하고 승연은 미련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식당을 빠져나갔다. 어제 마신 소주가 속을 뒤집고 있어 게워내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스캇! 사람이 왜 그래요?”

엘리베이터로 향하던 승연은 망부석처럼 굳어지는 몸을 느끼며 뒤를 돌아봤다. 아랫입술을 이빨로 지그시 깨물고 눈물까지 글썽이는 좀 전의 여성이 자신의 뒤에 서 있는 모습이 승연의 눈에 들어왔다. 자신의 이름까지 알고 있는 거로 봐서 만났던 것은 분명한데 도통 기억해 낼 수가 없었다.

“뺨이라도 후려치고 싶지만, 제 잘못도 있으니 이것으로 끝내겠어요.”

찬바람을 일으키며 사라지는 여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승연은 급히 호텔 방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방에 들어온 승연은 침대 시트를 걷은 후, 망연자실할 수밖에 없었다. 침대 중간엔 선홍색의 핏자국이 선명하게 보였기 때문이었다. 침대 옆 스탠드 밑에 놓인 메모지를 손에든 승연은 눈을 감아 버렸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