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사는 인생-179화 (156/264)
  • #179

    다시 사는 인생 - 179

    청와대 방문을 끝낸 황태수의 행보는 은밀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오성그룹을 비롯해 서먹했던 대현중공업과의 관계회복에 노력하는 한편, 전문경영인 체제로 물갈이한 대후그룹과도 그 관계를 돈독히 하는데 힘썼다.

    이와 동시에 SHJ는 회장실 직속의 SHJ플랜트기술연구소를 한국에 설립하겠다고 공표하고 휴스턴 본사 사업본부별로 분산된 연구 개발팀을 SHJ플랜트기술연구소로 통합한다는 계획을 발표해 한국언론을 뜨겁게 만들었다.

    청와대는 다음 달 대통령의 방북을 준비하기 위해 모든 라인을 가동하고 있었고 그 와중에 한국정부의 특명을 수행하고 있던 대현그룹의 정규병 회장과의 독대가 잦아졌다. 군사적 긴장을 해소하려는 한국정부의 대북사업은 실익 없는 퍼주기라는 보수진영의 반발에 부딪히고 있었고 대현그룹이 불법자금 송금의 창구기능을 하고 있다는 소문이 암암리에 퍼지고 있었다.

    청와대와 정규병의 만남 이후, 대현그룹은 농지로 조성된 서산간척지 일부에 대한 용지변경을 신청했고, 보수진영의 극심한 비난에도 용지변경 승인은 초고속으로 진행되었다. 외환위기와 총풍사건으로 입지가 약해진 보수진영은 이를 반전의 기회로 삼고자, 대현그룹에 대한 특혜 문제를 정치권으로 확대하려 했지만, 대현그룹은 농지에서 풀리는 서산 부석면 일대의 토지 200만 평을 평당 2만 원에 SHJ에 매각하겠다고 발표하며 매각에서 들어오는 자금 4백억 원 전액을 장학재단에 기부하겠다는 의사를 밝혀 보수진영의 김을 빼버렸다.

    SHJ 아시아본사가 한국에 유치되면서 SHJ가 밝힌 SHJ제2타운 건설은 외환위기로 죽어가는 국내 건설시장의 활로가 될 거라는 기대감으로 이번 서산간척지 일부에 대한 용지변경을 보는 국민들의 시각이 우호적으로 바뀌고 있었기 때문에 보수진영도 더는 이 문제로 정부를 발목 잡을만한 명분을 찾을 수 없었다. SHJ타운을 유치하기 위해 총력을 펼쳤던 지자체들은 SHJ타운이 서산간척지로 결정되자 허탈감을 감출 수 없었고 SHJ타운 부지로 예측되며 급상승하던 땅값도 폭락하기 시작했다.

    국민들의 시선이 SHJ에 집중되고 있을 때, SHJ 아시아본사에선 한국이 추진하는 핵융합로 프로젝트인 KSTAR에 참여를 공식 발표하면서 연구개발과 함께 매년 3백억 원씩 십 년간 투자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국민적 관심을 받지 못하던 KSTAR 프로젝트는 SHJ의 공식 참여와 투자가 발표되자 인터넷을 뜨겁게 달구기 시작했다. 강대국들의 연합체인 ITER 가입도 실패한 한국의 독자개발은 무리라는 의견이 대세를 이루며, SHJ의 투자는 판단착오라는 분석이 전문가들을 통해 대두되고 있었다.

    한국에서의 바쁜 일정을 소화한 황태수는 한국을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부회장님, 대현그룹과의 토지 매입절차를 마무리했습니다.”

    “고생했습니다. 이후의 SHJ타운 조성 문제는 무어 사장 전권으로 처리하시기 바랍니다. 가장 시급한 사항이 기술연구소 인력 확보이니 오성과 대현, 대후와 밀접하게 연락을 하십시오. 휴스턴의 연구 인력은 검증절차를 거친 후 한국으로 발령을 내겠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런데 SHJ타운 시공사를 수의계약 하는 게 좀 마음에 걸리긴 합니다.”

    입찰이 아닌 수의계약으로 진행되고 있는 시공사 선정문제가 잭은 불안했다. 한국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잦은 설계변경 요청과 부실시공이 한국 건설업계의 문제란 것을 알기까진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얻은 게 있으면 우리도 줘야겠지요. 예정대로 A 구역은 오성건설, B 구역은 대현건설, 주택단지는 대후건설을 우선협상 시공사로 선정해 계약을 추진하십시오. 이 부문은 회장님의 재가를 받았습니다. 그 대신 한국 감리회사는 배제하라는 회장님의 지시가 있었습니다.”

    “알겠습니다. 이미 SHJ매니지먼트에서 준비를 마친 상태입니다. 최석현 사장이 입국하면 바로 진행을 하겠습니다.”

    핵융합로 사업이 성공하기 위해선 세 그룹과의 공조체제가 절실히 필요하다는 것을 느낀 경환은 30억 불이 넘게 소요되는 SHJ타운 건설의 시공을 세 그룹에 분배하면서 핵융합로 사업과 관련된 각 그룹의 연구인력을 SHJ플랜트기술연구소가 흡수하기로 협약을 맺었다. 핵융합에너지가 미래 대체에너지란 점은 세 그룹도 모두 동의를 했지만, 성공이 불확실했고 핵융합로 개발이 성공한다더라도 언제 상용화될지는 어느 누구도 장담할 수 없었다. 이런 이유로 세 그룹은 황태수가 제안을 받아들이며 SHJ타운의 시공을 맡아 실질적인 이익을 챙기게 되었다.

    “부회장님, 회장님의 지시가 있었다고 하더라도 실패할 KSTAR 프로젝트에 3천억 원을 투자한다는 게 쉽게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무어 사장이 미국인이다 보니 한국상황을 이해하기 힘들 겁니다. 한국이 성과를 보인다면 강대국의 입김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을 회장님은 우려하고 계십니다. 저도 회장님과 같은 생각이고요. 3천억이 우리에게 큰돈일 수도 있지만, 우리가 기술을 확보할 수만 있다면 3천억 원은 그만한 가치가 있지 않겠습니까? 핵융합로보다는 상용화 기간을 얼마나 단축할 수 있느냐가 우리에게 닥친 문제라고 봅니다.”

    KSTAR 사업에 필요한 총 자금은 SHJ의 유동자금에 큰 영향을 줄 수는 없었다. 그러나 KSTAR 이후 상용화까지 필요한 막대한 자금은 SHJ에게도 큰 부담이 될 수 있는 문제였기에 황태수나 잭의 표정은 밝지 못했다. 핵융합에너지의 사업성엔 동의하지만, 이 기술을 선도하는 유럽이나 미국, 일본도 국가의 지원을 받으며 자금을 쏟아 붓고 있는 상황에서 기술력 차이를 보이는 한국 기업들을 다독이며 SHJ의 막대한 자금을 투입하는 게 과연 옳은 결정이었는지에 대해선 확신이 들지 않았다.

    “SHJ가 지금까지 성장한 가장 큰 이유는 회장님의 추진력과 결단이라고 봅니다. 회장님께서는 본인이 추진하는 마지막 사업이라고 하십니다. 아직 결과를 예측하긴 어렵지만, 우리는 회장님의 결정을 지지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부회장님의 말씀에 동감합니다. 회장님이 아니었다면 전 샌프란시스코에서 술에 찌들어 살았을 겁니다. 저나 조안나는 한국에 뼈를 묻을 생각입니다.”

    잭의 확고한 결심을 황태수는 느낄 수 있었다. 배신자란 낙인을 안고 살기엔 휴스턴은 너무 힘든 곳이었다. 잭은 자신을 믿어준 경환과 SHJ에 마지막 남은 정력을 쏟아 붓기 위해 한국을 제2의 고향으로 삼을 계획이었다.

    “참, 인수를 위해 한국을 방문한 SHJ구글의 스캇이 통 눈에 띄질 않네요.”

    “오전에 상대 측의 연락을 받고 마지막 협상을 벌인다고 나간다는 보고를 받았습니다. 인수 협상을 린다가 아닌 스캇이란 친구를 보낼 줄은 몰랐습니다.”

    “무어 사장은 모르시겠군요. 스캇이란 친구는 회장님의 친동생입니다. 아직 SHJ구글에서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은 없습니다. 본인 실력으로 입사했거든요.”

    “네? 친동생이라고요? 프로그래머로만 알고 있었는데 회장님이나 스캇이란 친구나 두 사람 모두 대단하네요.”

    잭은 스캇이 경환의 친동생이란 사실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친동생이 자신의 힘으로 SHJ구글에 입사한 것도 대단해 보였지만, 그런 동생을 바닥에서부터 시작하도록 내버려뒀다는 것이 쉽게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그건, 경환과 스캇이 핏줄에 대한 애정이 강한 한국인이란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황태수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잭을 바라보며 조용히 미소 띤 얼굴로 SHJ의 투자를 대서특필한 신문으로 관심을 돌렸다.

    같은 시각, 동창찾기를 다시 찾은 승연은 김수재와 부산에서 급히 올라온 정상철과 자리를 같이하고 있었다. 그동안 두 사람과의 연락을 일절 끊은 승연은 SHJ구글 한국지사의 프로그래머들과 소셜네트워크서비스에 대한 의견을 교환하며 인수협상과는 거리를 두고 있었다. 오늘 정상철의 연락을 받은 승연은 마지막이란 생각으로 만남을 요청한 정상철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스캇 리 씨, 그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바쁘게 지냈습니다. 인수협상보다는 한국의 프로그래머들과 서로 의견을 나누는 시간이 저에겐 더 재밌었거든요.”

    김수재를 비꼬는 승연의 태도에 김수재의 미간은 급속히 좁혀졌지만, 정상철과의 합의를 깨지 않으려는 듯 입을 굳게 닫아버렸다. 어색한 웃음으로 승연의 질문을 넘긴 정상철이 회의용 탁자에 팔꿈치를 올리며 냉랭한 태도를 보이는 승연을 바라보았다.

    “그동안 SHJ구글의 제안을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죄송하지만, SHJ구글의 제안을 다시 한 번 말씀해 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정상철의 요청이 무례하다고 생각한 승연은 경환의 조언에도 불구하고 눈썹을 가운데로 모으며 불편한 기색을 드러내 보였지만, 정상철의 요청을 거절하지는 않았다.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저희의 제안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지분 100%를 넘기신다면 시가총액을 350억 원으로 산정해 투자할 용의가 있습니다.”

    “좋습니다. 저와 김 사장은 의견일치를 봤습니다. 350억 원에 지분 100%를 넘기겠습니다.”

    정상철의 뜻밖의 결정에 승연의 눈은 커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아직 김수재의 답변을 듣지 못한 승연은 김수재의 입이 열리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정 사장님과 마찬가지로 저도 동의합니다.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는데, 경영은 어떻게 하실 계획이십니까?”

    “동창찾기는 SHJ구글의 사업부 형태로 존재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사업부 운영에 대한 계획은 지금 말씀드릴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특별한 하자가 없는 직원들에 대해서는 고용승계 원칙이 적용되겠지만, 경영권을 인정하는 문제는 제가 결정할 문제가 아닌 점 양해 바랍니다.”

    경영권 문제가 자신이 원하는 대답을 얻지 못했는지 김수재의 얼굴이 급히 굳어졌지만, 승연은 신경을 쓰지 않았다. 어차피 일확천금을 꿈꾸는 사람에게 돈과 함께 경영권을 인정해 줄 수는 없는 문제였기 때문이었다. 350억의 적지 않은 금액이 투자되더라도 광고 마케팅을 보완하고 구글스토어와 애드센스를 연결한다면 350억 원 정도의 투자금은 단기간에 회수할 수 있다는 계산이 섰다.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는 말처럼 시간을 끌수록 지분 매각에 불만을 보이는 주주들이 발생할 수 있다는 생각에 승연은 서둘러 계약을 마무리 짓고 싶었다.

    “나머지 주주들도 합의하셨다면 계약을 끌 필요는 없을 거 같습니다. 인수 계약서는 저희가 준비할 테니 담당 변호사를 부르시기 바랍니다.”

    인수 협상을 마친 승연은 서초동 근처의 조용한 바를 찾았다. 인수에 따른 MOU 체결과 계약진행은 자신의 몫은 아니었기에 승연은 아시아본사 법무팀에 인수절차를 넘기고 뒤로 빠졌다. 위스키를 스트레이트로 연거푸 두 잔을 넘긴 승연은 잘 피지도 못하는 담배를 입에 물었다. 위스키 술잔 옆에 놓인 메모지를 손으로 두들기던 승연은 휴대폰을 들어 번호를 찍기 시작했다.

    ‘감사합니다. 혜성 법무법인입니다.’

    “죄송하지만, 김혜리 씨를 부탁합니다.”

    ‘김혜리 변호사님을 말씀하시나요?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승연은 순간 긴장하고 있었다. 확실한 기억은 아니지만, 승연은 꿈속에서 하루나를 품었다고 생각했었다. 몇 번 식사 같이했을 뿐, 하루나와의 관계는 그 이상 진도를 보이지 못했고 그런 감정이 꿈속에 나타난 거라고 치부해 버렸지만, 그건 꿈이 아닌 현실이었다. 상대가 바꿨을 뿐이지만. 승연은 찜찜한 상태로 미국에 돌아가고 싶지 않아 연락을 취했지만, 김혜리가 변호사란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전화 바꿨습니다. 말씀하세요.’

    “저, 스캇 리라고 합니다. 뵙고 싶어서 전화했습니다.”

    수화기에선 아무 말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승연 또한, 김혜리를 재촉하고 싶지 않았다. 수화기에선 두 사람의 숨소리만 흘러나왔고 한참 후에야 김혜리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장소를 말해 줘요.’

    장소를 말해 준 승연은 위스키 한 병을 주문한 후 비워진 잔에 술을 따랐다. 승연은 포장마차에서 소주잔을 서로 주거니 받거니 한 기억이 조각조각 떠올랐지만, 통성명도 하지 않은 여자와 하룻밤 찐한 정사를 펼쳤다는 게 도저히 믿어지지가 않았다. 위스키 몇 잔이 더 들어가자 바의 문이 열리며 화사한 투피스 차림의 김혜리가 들어서는 모습이 승연의 눈에 들어왔다.

    “먼저 시작했나 보군요. 술 한잔 주세요.”

    김혜리의 당돌한 모스에 승연은 얼어있었다. 침대 시트 위로 선명하게 보였던 선홍색의 핏자국을 봐선 김혜리가 첫 경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자신도 첫 경험이었다.

    “변명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일부러 김혜리 씨를 모른척한 건 절대 아닙니다. 오해는 풀고 싶었습니다.”

    승연은 자신의 명함을 탁자 위로 건네주었다. 승연의 명함을 슬쩍 쳐다본 김혜리는 핸드백 안에 넣고는 자신의 명함을 꺼내 건네주었다.

    “저도 그 일을 문제 삼고 싶은 생각은 없어요. 제게도 절반의 책임은 있으니까요. 새벽에 저도 경황이 없어 도망가듯 제 방으로 돌아갔던 거예요. 아침엔 무시당했다는 생각이 들어 화를 냈지만, 구질 하게 남자 발목을 잡는 여자는 아니니 걱정하지 마요.”

    술을 권하기도 전에 김혜리는 위스키를 목으로 넘겼고 긴 목을 통해 술이 들어가는 모습을 바라보던 승연은 묘한 감정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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