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7
다시 사는 인생 - 177
태평양 상공을 넘어 한국영공으로 날렵하게 빠진 SHJ의 전용기 한 대가 구름을 뚫고 서쪽을 향해 날고 있었다. 봄바르디에와 계약된 전용기 두 대를 인수한 SHJ는 경환의 개인 전용기를 포함해 세 대를 운영하고 있었지만, 전 세계를 누비는 SHJ 직원들이 이용하기에는 턱없이 모자란 숫자였다. SHJ매니지먼트의 최석현은 봄바르디에 BD-700 한 대와 보잉의 18인승 737 BBJ를 추가 계약했고, 전용기를 운용할 사설비행장 완공을 서두르고 있었다.
“회장님이 자네에게 거는 기대가 크니 최선을 다해 보게.”
“알겠습니다. 부회장님.”
황태수는 승연을 기특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SHJ 회장의 친동생이라면 가족을 끔찍이 여기는 경환의 성격으로 보아 자리 하나는 마련해 줬겠지만, 승연은 자신의 힘으로 구글에 입사해 바닥에서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이번 출장 또한, 강요가 아닌 자신이 직접 제안한 프로젝트였기에 황태수는 형을 닮아 자립심이 강한 승연에게 좋을 점수를 주고 있었다.
“그런데 자네가 래리, 세르게이와는 각별하게 지낸다고 들었네. 미국 애들은 친구가 자신을 속였다는 걸 알게 되면 관계를 회복하는데 어려움이 많아. 자네가 구글에서 어느 정도 인정을 받고 있으니 두 사람에겐 사실을 말해야 할 거야.”
승연은 대답 대신 고개를 살짝 숙였다. 경환을 제외하고 SHJ구글의 최대 주주인 두 사람은 자신에게만큼은 허물없는 친구사이로 대해주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래리의 혹독한 교육을 스펀지처럼 빨아들인 승연은 SHJ구글에서 차근히 자리를 잡아갔고, 올해부터는 팀장을 맡아 프로젝트를 수행할 정도로 성장해 있었다. 래리와 세르게이를 본의 아니게 속이게 된 승연 또한, 마음이 편하지 못했다.
이번 인수를 끝낸 후 사실을 털어놓으려고 마음먹는 순간 비행기 바퀴가 활주로에 닿았는지 덜컹거리는 작은 충격이 승연의 몸에 전달되었다. 3년 만에 처음 찾는 한국이었지만, 승연의 마음은 감상에 빠져들 만큼 여유롭지 못했다.
“자넨 어떻게 하겠나? 난 아시아본사를 갈 생각인데.”
“전 동창찾기 사이트 사장과 만난 뒤 최대 주주인 금영과 만나 볼 생각입니다. 지원이 필요하면 아시아본사로 연락하겠습니다.”
“그렇게 하게. 금액적인 배팅이 필요하면 주저하지 말고 배팅을 하게. 회장님께서 전권을 자네에게 준 만큼, 망설임으로 시간을 허비하지 말라는 얘기야. 한국의 IT 종사자들은 가치를 추구한다기보다는 일확천금을 꿈꾸는 사람이 많다고 들었어.”
“감사합니다. 부회장님. 그럼 저 먼저 출발하겠습니다.”
황태수와 헤어진 승연은 서둘러 택시에 몸을 실었다. 경환이 자신의 친형이긴 하지만, 승연은 형의 후광을 통해 성공할 생각은 애당초 꿈도 꾸지 않았다. 3년 만에 찾은 서울의 풍경을 바라볼 틈도 없이 승연은 동창찾기에 대한 자료에 머리를 파묻어 버렸다.
단돈 3천만 원으로 시작한 동창찾기 사이트는 서비스를 시작한 지 일 년도 되지 않아 회원 수가 25만 명을 넘어서고 있었다. 작년 말 KTB와 금영의 투자제안을 받고 많은 고민 끝에 40%의 지분을 넘기는 조건으로 금영의 투자금 10억 원을 받아들였다. 자신의 지분 30%와 공동 창업자와 우호지분을 합치면 60%로 금영이 경영권을 장악할 수는 없다는 판단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회원 수가 예측이 불가능할 정도로 증가하자 플랫폼과 회원정보 관리를 위한 투자가 절실한 상태였지만, 금영이 약속한 재투자는 이뤄지지 않고 있었다. 창업자이면서 사장인 김수재의 얼굴에는 초조함이 서려 있었다. 공동 창업자인 이석춘이 조용히 문을 열고 들어왔다.
“뭘 그렇게 고민해? 오늘 SHJ구글에서 온다는 손님은 아직 도착하지 않은 거야?”
“곧 도착할 시간이야. 야후에서도 관심을 보이고 있는데 자네는 어디가 좋을 거 같아?”
“글쎄, 야후는 아직 간을 보고 있으니까, SHJ구글을 이용해 몸값을 불리는 것도 좋지 않겠어?”
벤처의 기본정신인 위험, 모험, 도전 정신이 이미 퇴색해져 갔고, IT 열풍에 편승한 한탕주의가 만연한 시기였다. 이석춘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김수재는 증가하는 가입자 수를 확인하기 위해 PC 모니터에서 눈을 떼지 않고 있었다.
“사장님, SHJ구글에서 오셨습니다.”
여직원의 노크와 함께 노타이 차림의 사내가 들어오는 모습이 김수재의 눈에 들어왔다. 훤칠한 키의 사내는 나이를 가늠할 수는 없었지만, 30대로는 보이지 않는 얼굴이었다. 자신과 비슷한 나이라고 판단한 김수재는 명함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처음 뵙겠습니다. SHJ구글의 스캇 리입니다.”
“반갑습니다. 김수재입니다. 이쪽은 공동 창업자인 이석춘이라고 하고요.”
명함을 교환하며 악수를 나눈 세 사람은 회의용 탁자에 둘러앉았다. 여직원이 들어와 음료가 담긴 종이컵을 탁자 위에 놓고 나가자 승연을 유심히 살핀 김수재가 먼저 말을 꺼냈다.
“사실 SHJ구글에서 우리에게 관심을 보일 줄은 몰랐습니다.”
“SHJ는 좋은 기술이라면 정당한 가치를 부여하고 있습니다. 동창찾기의 최대주주가 금영이긴 하지만, 김 사장님을 먼저 찾아뵌 것은 SHJ가 엔지니어를 우대하기 때문입니다.”
승연이 한국을 찾기 전 경환은 승연을 저택으로 불러들여 협상에 대한 노하우를 급히 알려주었다. 컴퓨터만 붙잡고 프로그램 개발에 몰두한 승연도 결국은 엔지니어에 불과했기 때문에 인수 협상을 진행하기엔 사실 무리라고 경환은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승연은 경환이 알려준 매뉴얼을 머리에 떠올리며 경환이 강조한 포커페이스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다.
“동창찾기의 사장은 접니다. 금영이 지분 40%를 가지고 있다고는 하지만, 저와 우호지분을 합치면 60%란 말입니다.”
최대주주가 아닌 것을 비꼬며 자신을 엔지니어로 격하시키자 김수재는 얼굴까지 붉히며 승연의 말에 반박하고 나섰다. 승연은 미소를 잃지 않고 있었지만, 경환의 예상대로 김수재가 반응하자 경영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절실히 깨닫고 있었다.
“기분 상하셨다면 죄송합니다. 그러나 저희가 인수를 검토하기 위해서는 최대주주인 금영의 의견을 무시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사과하시니 받아들이겠습니다. 본론으로 들어갔으면 합니다."
김수재의 표정은 아직 풀려있지 않았다. SHJ구글의 애드센스와 구글스토어와는 조족지혈이란 표현도 과했지만, 한국에서만큼은 뜨거운 반응을 보이며 무서운 속도로 가입자를 늘려가는 중이었다. SHJ구글과 야후라는 두 떡을 손에 쥔 김수재의 얼굴엔 도도함마저 흐르고 있었다.
“SHJ구글은 동창찾기 서비스를 한국에 국한할 생각은 없습니다. 저희도 사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에 관심을 가지고 개발 중입니다. 동창찾기를 인수하든 못하든 SHJ구글의 개발방향은 달라지지 않다는 것을 먼저 말씀드립니다. 저희는 지분 100%를 인수하고 엔지니어와 일반 직원들을 흡수하는 조건으로 300억 원을 인수자금으로 투자할 용의가 있습니다.”
300억이란 소리에 김수재는 침을 삼켰다. 90억 원이란 엄청난 금액이 자신의 손에 떨어진다는 계산에 김수재의 입술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그러나 한국의 MP3 기술을 인수해 막대한 부를 창출하는 SHJ가 300억이라는 거금을 쉽게 투자할 기업은 아니란 것을 머릿속에 떠올리며 김수재는 한발 물러서는 모습을 보였다.
“흠, 흠. 생각해 보겠습니다. 솔직히 야후에서도 관심을 보이고 있어서요.”
“그렇게 하십시오. 야후코리아는 동창찾기에 관심이 있다기보다 부족한 커뮤니티를 동창찾기로 만회하며 상장을 하려는 계획입니다. 저는 지금 부산으로 내려가 금영과 만날 생각입니다. 마지막으로 제가 드리는 제안은 제가 출국하기 전까지 유효합니다. 사장님의 현명한 판단을 기대합니다.”
말을 마친 승연은 미련없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엔지니어 대 엔지니어로 많은 기대를 하고 찾은 자리였지만, 승연의 기대는 처음부터 무너져버렸다. 기술적인 토론과 투자에 따른 발전방향과는 무관하게 모든 대화는 돈에서 시작해 돈으로 끝났기 때문이었다.
부산으로 향하는 승연과는 달리 황태수는 아시아본사에 도착해 잭의 환영를 받고 있었다. SHJ 부회장이란 직함은 그 무게감이 달랐다. 황태수의 입국이 결정되자, 한국의 내로라하는 기업과 단체는 물론이고 한국정부 역시 막후에서 만남을 요청하는 제안이 봇물 터지듯 들어오고 있었다. 이번 방문은 SHJ타운 조성과도 무관하지 않았지만, 최우선 목표는 핵융합로 개발에 발을 담그기 위해서였다.
“환영합니다. 부회장님.”
“하하하, 한국 사람이 다 되셨나 봅니다. 한국어 발음이 아주 정확하시네요.”
어눌하긴 했지만, 잭은 한국어로 환영인사를 대신하고 있었다. SHJ홀딩스의 지분을 받지는 못했지만, 경환은 SHJ플랜트의 지분 10%를 잭에게 양도해 잭의 위치를 확고하게 만들어 주었고, 쉽게 휴스턴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잭은 한국에 녹아나기 위해 언어와 함께 역사와 문화까지 배우는 중이었다. 황태수는 노력하는 잭의 모습을 보며 엷은 미소를 지었다.
“다른 일정은 뒤로 물리고 오성그룹 회장과 청와대 방문 일정을 잡았습니다.”
“오성을요? 핵융합로 사업에 오성을 먼저 만나야 할 필요가 있습니까?”
“핵융합로 사업에 초전도자석 개발이 가장 핵심입니다. 초전도자석을 만드는 데 필요한 것이 초전도도체인데 오성전자 연구소에서 다음 달이면 샘플이 나온다고 합니다. 이 초전도도체 개발부터 우리가 참여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예산도 가장 많이 배정된 거로 알고 있습니다.”
황태수에겐 오성그룹 회장과 만난다는 것이 껄끄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과거에 모셨던 분이라 해서 SHJ 부회장이라는 직함을 버리고 미리 죽고 들어갈 생각은 없었다.
“핵융합과 관련한 기술자와 연구진을 모으는 중입니다. 철저히 SHJ에 동화될 인물들 위주로 접촉을 진행하고 있다 보니 아직 눈에 띄는 성과는 없지만, 준비는 해야 되겠군요. 회장님께서는 KSTAR 프로젝트와 관련된 모든 일을 잭에게 위임하라고 지시하셨습니다. 이 프로젝트의 성공 여부에 따라 SHJ의 미래가 바뀐다고 보시는 거 같습니다.”
“회장님의 지시는 따로 받았습니다. 핵융합로가 성공한다 해도 핵융합에너지가 상용화되려면 50년은 걸린다는 게 전문가들의 의견입니다. 무한대의 자금이 소요되는 사업이라 솔직히 엄두가 나지 않습니다.”
“SHJ타운은 핵융합에너지 개발에 중점을 두고 건설되게 될 겁니다. 필요하다면 우리 독자적으로 개발을 시도할 생각도 회장님은 가지고 계십니다. 그러나 한국이 핵에서 자유롭지 못한 국가다 보니 미국이나 강대국들의 압력을 어떻게 견디느냐가 관건입니다.”
“시간이 많이 필요한 사업이니 차근히 검토하시죠.”
경환은 핵융합로 개발이 성공했다는 기억만 있을 뿐, 그 결과는 알지 못했다. 핵융합에너지의 상용화가 단기간에 이뤄질 수 없는 상황에서 깨진 독에 물 붓기 식으로 투자되는 자금은 SHJ에도 부담일 수밖에 없었지만, 황태수와 잭은 경환의 결정을 전폭적으로 지지하고 있었다.
잭과 함께 방문한 오성그룹에서 황태수는 이형우의 환대를 받으며 시종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SHJ의 핵융합로 개발 사업에 오성그룹의 전폭적인 지지를 이끌어 내는 데 성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오성전자 기술연구소의 초전도도체 개발 사업에 참여를 제안한 황태수의 의견에는 쉽게 합의를 하지 못하며 지루한 회의를 지속할 수밖에 없었다.
끝없이 논쟁이 이어지고 있었지만, 이형우도 SHJ에 잡힌 약점으로 황태수의 제안을 강하게 거절하지는 못하고 있었다. 그건 오성전자의 지분 5.8%를 SHJ가 가지고 있고 지금도 시티은행이 소유한 지분을 매입하기 위해 물밑협상 중이라는 사실 때문이었다. 경영권을 위협할 수준은 아니지만, 경쟁자로 인식하는 SHJ가 자신의 발목을 잡고 있다는 게 이형우는 찝찝했다. 또한, SHJ퀄컴의 칩셋을 비롯해 오성건설과의 플랜트 합작과 오성전자의 플래시메모리 등 SHJ와 오성그룹은 경쟁 속에서도 많은 부문에서 합작을 진행하고 있었기에 감정싸움으로 인해 두 기업이 결별 수순을 밟게 된다면 SHJ보단 오성의 피해가 크다는 것이 이형우의 결정을 강요하고 있었다.
결국, 이형우는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는 황태수와 타협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매년 100억 원의 연구자금을 지원하는 조건으로 SHJ의 개발 참여를 승인해 버렸다. 이 결정으로 인해 SHJ는 핵융합로 개발에 명분을 쌓을 수 있었고 한국정부와의 협상에 유리한 고지를 선점할 수 있는 무기를 손에 쥘 수 있었다.
이형우가 주최하는 만찬을 마치고 호텔에 돌아온 황태수는 미리 정해 놓은 단어를 이용해 경환에게 오성과의 협상 내용을 전달했다. 황태수는 호텔 밖으로 비치는 화려한 네온사인을 바라보며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한국정부와 매번 부딪히고 국적마저 바꿨지만, 한국을 향한 경환의 애정이 각별하다는 것은 항상 느끼고 있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핵융합에너지 개발이 SHJ의 미래에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지 지금은 알 수 없었지만, 황태수는 경환의 결정을 의심하지 않았다. 긴장이 풀려서인지 침대 위로 황태수의 몸이 무너져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