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6
다시 사는 인생 - 176
SHJ타운의 중앙에 위치한 그룹사옥이 완공되자 SHJ는 일주일 동안 휴스턴 다운타운에 있던 모든 SHJ 계열사와 사무실을 본사사옥으로 이전했다. 3년 동안의 긴 기다림 끝에 완공된 본사사옥의 가장 높은 층에 마련된 경환의 집무실은 이전 집무실과 비교하면 상당한 규모였다.
10년이란 길지 않은 시간 동안 쉬지 않고 달려온 결과물이 경환의 발밑으로 펼쳐져 있었고 그 결과물을 바라보는 경환은 깊은 감회에 빠져있었다. SHJ 심장부라 할 수 있는 그룹사옥과 좌우의 퀄컴과 구글, 수많은 연구소 건물들과 북쪽 숲으로 가려져 보이지 않는 저택과 SHJ시큐리티 훈련소는 SHJ의 미래를 담당하고 있었고 외곽으로 보이는 저택들은 잘 정비된 신도시처럼 보였지만, 외부인들의 출입은 철저히 차단하고 있었다. SHJ 직원이라 하더라도 출입에 따른 과도한 보안절차를 피해갈 수 없었기 때문에 휴스턴 시내에 거주하던 직원들도 SHJ타운 내 주거단지로 거주지를 옮기기 위해 주택구매신청이 끊이지 않고 있었다. 주택단지와 미래산업단지의 필요성이 대두하자, 휴스턴 시와의 협상으로 확보한 250에이커의 부지를 개발하기 시작했고 그 공사는 1차 공사를 무리 없이 마무리한 파슨스에게 돌아갔다.
“회장님, 뭘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창밖을 바라보며 우두커니 서 있는 경환은 그제야 인기척을 느끼며 뒤를 돌아봤다. 흐르는 세월을 잡지 못하는지 듬성듬성 흰머리가 내려앉은 황태수가 서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아닙니다. 그동안 달려온 시간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네요. 부회장님은 저와 같이 보낸 시간이 후회되지 않으십니까?”
“후회라니요. 전 회장님과 동행한 시간이 제 인생에 있어 가장 자랑스러운 시간입니다.”
경환은 흔들림 없는 황태수의 눈을 바라보았다. 오십을 훨씬 넘긴 나이에도 황태수는 경환이 건강을 염려할 정도로 SHJ 부회장직을 열정적으로 수행하고 있었다. 경환에 대한 황태수의 신뢰는 린다의 그것과는 차이가 있었다. SHJ를 넘겨줄 인물을 꼽으라고 한다면 경환은 주저 없이 황태수를 꼽을 정도로 황태수에 대한 신뢰는 누구보다도 확고했다.
“그렇게 말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부회장님이 계시니 제가 든든합니다. 건강에도 신경을 좀 쓰세요.”
“그렇지 않아도 회장님의 지시를 받았는지 비서실장의 닦달에 못 이겨 매일 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제가 회장님을 찾은 이유는 아시아본사 관련 일입니다.”
잭이 아시아본사 총 사장으로 임명되어 파견된 후 아시아본사는 잭의 진두지휘 아래 놀라운 성과를 이뤄내고 있었다. SHJ플랜트 산하의 SHJ엔지니어링의 플랜트 수주에 적극적으로 지원하면서 SHJ퀄컴과 SHJ구글의 아시아 투자를 설계하고 있었다. 경환은 5천만 불 이하의 투자와 사업에 대해선 잭의 전결하에 추진될 수 있도록 권한을 부여함과 동시에 L & K 재단의 후원을 지시해 놓은 상태였다. 경환의 장인인 김철수을 이사장으로 매제인 심석우를 본부장으로 설립된 재단은 서울과 부산, 광주, 원주에 직업훈련원을 건설하며 최고의 교수진을 구성하기 위해 정신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특별한 문제는 없다는 보고를 받았는데요.”
“문제는 없습니다. 솔직히 잭의 능력은 저보다 더 낫다고 보고 있으니까요. 다름이 아니라 한국 L & K 재단이 직업훈련원 일로 KAIST와 서울대학과의 연구지원 업무에 손을 대지 못하고 있습니다. 잭이 그 일을 임시 주관을 하고 있는데 두 건에 대해 투자에 대한 승인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5천만 불에 대한 전결권을 잭에게 줬는데도 투자에 대한 승인을 요청하는 걸 보면 굵직한 연구라는 사실은 알 수 있었지만, 한국대학에서 연구하는 프로젝트치곤 이해하지 못할 정도로 규모가 크다는 사실에 경환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자세히 말씀해 주십시오.”
“하나는 KAIST에서 개발된 프로그램인데 에릭과 래리가 상당한 관심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건 곧 도착하는 두 사람에게 확인하시는 게 좋으실 거 같습니다. 다른 하나는 한국의 핵융합연구소에서 개발하는 KSTAR 프로젝트입니다.”
“KSTAR 말씀입니까?”
경환은 회귀 전 어렴풋이 들어 봤던 기억이 떠올랐다. 세계최초로 개발된 기술이 대통령에 의해 일본에 유출되고 있다고 온라인을 뜨겁게 달궜던 기억이었다. 그러나 그 당시 오성건설을 퇴사하고 먹고사는 일에 집중하고 있던 시절이라 경환의 관심 밖의 일이었다. 경환은 서둘러 황태수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렇습니다. 현재 한국의 국가적인 사업으로 진행되면서 대현중공업과 두산중공업, 오성중공업, 한국원자력발전소 등 30여 개의 기업과 연구소가 참여하고 있는 대형프로젝트입니다. 핵융합에너지 연구는 미국과 유럽연합, 일본, 러시아 4개국이 참여하는 ITER 프로젝트에 미국과 일본의 방해로 한국이 배제되자 한국 독자적으로 연구를 시작한 거 같습니다. 이 핵융합에너지 개발은 에너지 고갈에 대비한 대체에너지로 여러 나라가 사활을 걸고 있는 분야이기도 합니다.”
꿈의 에너지로 표현되는 핵융합에너지는 고갈될 염려가 없어 무한한 자원을 제공하고 방사능의 양이나 기간이 짧아 친환경에너지로 주목받고 있었지만, 독자적인 개발이 모두 실패로 돌아가자 기초기술을 가지고 있는 몇 개 나라가 연합체를 구성 집중적으로 연구되고 있는 분야였다. 이 연구가 성공하기라도 한다면 세계패권국가 질서가 다시 개편될 수도 있었기 때문에 ITER 사업에 참여한 국가들은 일절 정보공유를 하지 않고 있었다.
“이런 국책사업이 우리에게까지 오게 된 이유가 있습니까? 우린 미국기업이란 인식이 한국정부에 깔렸을 텐데요.”
“개발 사업단이 96년 출범했지만, 막대한 자금이 투입되는 연구개발에 예산과 투자가 제대로 지원이 되지 않는 거 같습니다. 그리고 미국이나 일본도 아직 큰 성과를 보지 못하다 보니 망설이는 거라고 봅니다. 정식 루트는 아니지만, 한국정부의 비선조직에서 투자가 가능한지 접촉이 왔다는 보고입니다.”
“투자금은 어느 정도입니까?”
“총 사업비는 3억 불 규모라고 합니다. 핵융합로 개발사업이 성공한다면 플랜트나 IT와는 비교조차 거부되는 사업입니다. 제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투자 가치는 충분하다고 봅니다.”
핵융합에 대해선 기초지식이 없어 전문적인 판단을 할 수는 없었지만, 연구개발이 성공한다면 SHJ의 안정적인 미래를 보장하는 사업이란 황태수의 말에 동의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연구가 성공한다면 주변국과 강대국들의 논리에 한국이 처할 상황이 경환은 걱정이었다. 자신의 기억으로도 경제를 살리라고 뽑아 준 대통령에 의해 핵융합로 사업이 큰 위기를 겪었다는 기억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경환은 고민은 그리 길지 않았다. 플랜트와 IT 이후의 미래산업이 절실한 SHJ에겐 이 핵융합에너지 사업은 하나의 전환점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선 잭에게 오성과 대현중공업과 접촉을 지시하세요. 투자뿐만 아니라 연구개발에 SHJ의 참여를 보장하고 정당한 지분이 SHJ의 몫으로 할당된다면 적극적으로 투자할 용의가 있다고 전하세요. 우선은 잭에게 협상을 맡기시고 때가 무르익으면 부회장님이 직접 나서십시오. 그리고 이 기술이 성공하게 된다면 강대국 특히 ITER에 주도적으로 참여하는 미국이나 일본에 들어가게 해서는 안 됩니다. 핵융합로의 총 사업비가 3억 불이라니 우리는 핵융합로 이후의 연구개발에도 투자하겠다는 의사를 전달하시면 대화가 쉬워질 수도 있을 겁니다.”
“알겠습니다. SHJ타운의 부지조성으로 한국에 들어갈 예정이니, 그것과 맞물려 한국정부와 협상을 벌이겠습니다. 그런데 회장님께서는 이 연구가 성공한다는 가정하에 말씀하시는 거 같습니다.”
“투자를 결정했으면 성공을 가정하고 일을 추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한국정부도 지금은 성공 가능성을 판단할 수 없을 테니, 무리한 조건만 아니라면 수용을 할 것으로 봅니다. 절대 이 기술이 한국 밖으로 빠져나가지 않도록 안전장치를 마련해 놓으세요.”
경환과 황태수의 대화가 길어지자, 밖에서 대기하던 세르게이가 기다림을 참지 못하고 하루나의 만류에도 집무실 문을 빼꼼히 열어젖혔다.
“회장님, 저희도 시간 없습니다. 연구할 시간도 부족한데 자꾸 이러시면 곤란한데요.”
실실 웃으며 머리를 긁적이는 세르게이가 경환은 싫지만은 않았다. 신중한 에릭과 래리에 비해 장난과 농담을 좋아하는 세르게이는 SHJ구글에 있어 활력소였지만, 그 실력은 SHJ구글 안에서도 당해낼 자가 없었다. 경환과 얘기를 마친 황태수가 청바지 차림의 세르게이가 못마땅했던지 불편한 심정을 헛기침으로 표현했지만, 경환은 개의치 않고 손을 까딱거리며 수신호를 보낼 뿐이었다.
“부회장님한테 찍혀봐야 자네만 손해야. 빨리 들어와.”
경환은 세르게이와 함께 에릭과 래리, 승연이 들어오자 눈을 크게 뜰 수밖에 없었다. 연구소에서 숙식을 해결하는지 그동안 자주 볼 수 없었던 승연이 반가웠지만, 아직 둘의 관계를 아는 사람은 황태수와 린다, 알이 전부였기에 내색할 수는 없었다.
“슈미트 사장님, 부회장님께 보고를 들었는데 한국의 KAIST와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네, 회장님. 이건 저보다는 스캇에게 듣는 게 좋으실 거 같습니다.”
경환은 고개를 살짝 옆으로 숙여 의문을 보였다. 적응했다고는 하지만, 아직 하나의 프로젝트를 맡을 정도의 승연의 실력이 일취월장했다고는 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경환이 긴장하고 있는 승연의 얼굴을 무심히 바라보자 승연을 대신해 래리가 노트북을 꺼내며 입을 열었다.
“회장님, 이 사이트를 보십시오. 한국어로 되어 있으니 무슨 사이트인지 이해할 수 있으실 겁니다.”
경환은 래리의 노트북을 바라보고는 헛웃음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 래리의 노트북엔 2000년 대 초 한국을 강타한 동창찾기 사이트가 보였기 때문이었다. 경환도 이 사이트를 통해 수정을 찾으려 부단히 노력했던 기억이 있었다.
“동창을 찾는 사이트인 거 같은데, 뭔 문제라도 있는 거야? SHJ구글의 최고 경영진들이 모두 모일 정도로?”
“이 사이트의 가능성을 처음 알아본 사람은 스캇입니다. 스캇, 자네가 회장님께 직접 보고를 해 봐.”
경환은 승연을 바라보았다. 자신의 친형이긴 하지만, SHJ의 회장이란 자리는 승연을 주눅이 들게 하고 있었다. 가끔 형수인 수정과 조카들과의 통화를 위해 가끔 전화를 거는 거 외에는 경환과 직접적인 연락도 거의 하지 않고 있었다. 경환은 재밌는 장난감을 발견이라고 한 듯 승연을 빤히 쳐다만 보고 있었다. 큰 숨을 한 번 내쉰 승연의 입이 떨어졌다.
“이 사이트는 한국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사이트입니다. 이 사이트를 우리가 인수해 일부 프로그램을 수정한 후 개인의 블로그를 제공해 사용자들의 인맥을 서로 연결하는 서비스를 제공한다면 애드센스 이상의 가입자를 확보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애드센스와 구글스토어를 이 프로그램과 상호 연동이 되게끔 한다면 큰 시너지 효과를 볼 수 있습니다.”
경환은 승연의 말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애플이 아이팟을 출시한 이후 애플의 골수팬들이 자연스럽게 이동하자 컴페니언-3,4의 구매율은 5% 정도의 감소세를 보이고 있었다. 그러나 아이튠즈의 활용성이 떨어지는 문제로 구매율에 큰 영향력을 보이지는 않지만, MS에 의해 정보를 얻은 스티브 잡스는 스마트폰 개발에 박차를 가할 것이 분명한 상태에서 방심할 수는 없었다. 그런 와중에 페이스북의 기초가 될 수 있는 한국의 이 사이트 인수 제안이 승연의 입에서 나올 줄은 몰랐다.
“재밌는 제안이네요. 인수하는 것도 좋을 거 같은데, 슈미트 사장님, 구글에서 협상을 진행해 보시지요.”
“그게 좀 문제가 있습니다. 아시아본사를 통해 확인한 결과 이 사이트의 개발자는 KAIST 박사과정에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최대 주주는 금영이란 곳으로 40% 가지고 있습니다. 투자금은 100만 불 정도로 확인되고 있습니다. 그 금영이란 곳과 개발자 사이에 불협화음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문제는 야후가 눈독을 들이고 있다는 겁니다.”
동창찾기 사이트가 야후에 인수되었다는 기억은 없었다. 구글에서 소셜 네트워킹 서비스에 눈을 떴다면 굳이 인수에 나설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지만, 경환은 동생인 승연의 첫 제안을 거절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좋습니다. 스캇, 당신이 제안한 만큼 한국에 가서 인수에 성공하고 돌아오세요. 인수에 관련된 모든 권한을 주겠습니다. 가능하겠습니까?”
“알, 알겠습니다. 회장님. 성공하고 돌아오겠습니다.”
경환의 집무실을 빠져나가는 스캇의 어깨를 래리와 세르게이가 두들기며 성공을 빌어주는 모습이 경환의 눈에 들어왔다. 텅 빈 사무실에 혼자 남은 경환은 앨 고어 부통령의 담화를 듣기 위해 급히 CNN을 켰다.
‘저는 부친에게 물려받은 옥시덴털 피트롤리엄 주식 전부를 지구온난화 방지를 위한 재단 설립에 기부할 계획입니다.’
이후에도 말 잘하는 앨 고어의 장황한 말이 흘러나왔지만, 경환은 서둘러 티비를 끄고 어느새 노을이 감싸는 SHJ타운을 바라보고 있었다. 앨 고어의 화답을 받은 지금, 백악관의 주인을 바꾸기 위한 다음 수를 천천히 머릿속에 떠올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