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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사는 인생-106화 (83/2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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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사는 인생 - 106

    승용차는 알제리의 수도인 알제 중심지역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고 주위경관을 바라보고 있던 경환에게 뱅상은 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소나트락도 SHJ의 제안에 관심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번 입찰을 성공시키기 위한 단발적 이슈로 그칠 것을 우려하고도 있는 게 사실입니다. 그건 제임스가 어떻게 푸느냐에 달려 있다고 봅니다. 소나트락을 잘 설득해 보십시오.”

    뱅상의 말이 경환을 더욱 깊은 고민에 빠져들게 만들었다. 뱅상이 말처럼 이번 제안은 JSC와의 경쟁을 이기기 위해 급조된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아동건설이 KBR의 제안을 받아들여 이번 입찰에 참여한다는 소식은 경환에게도 큰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대후건설이 적극적으로 합작의사를 밝혔다고는 하지만, 분위기를 낙관할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이번 소나트락과의 만남이 그 무엇보다도 중요할 수밖에 없었다. 뱅상의 말을 곱씹고 있을 때 승용차는 소나트락에 도착했고 경환과 코이치는 뱅상과 함께 접견실에 들어섰다.

    “SHJ의 명성은 익히 듣고 있습니다. 소나트락의 사장 모하메드 할리체입니다.”

    턱수염이 수부룩한 모하메드의 환대에 경환은 오른손을 가슴 가운데로 몰아 존경의 표시를 한 뒤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모하메드는 경환의 악수를 받은 뒤 과장되게 경환을 맞아 주었다.

    “하하하, 명성만 자자한 게 아니라, 아랍 식 문화에도 익숙하십니다.”

    “인샤알라.”

    경환의 입에서 인샤알라라는 말이 나오자 모하메드는 놀라움을 표하며 경환의 어깨를 격하게 두드렸다. 경환은 과거 중동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이슬람 문화와 예절을 우선적으로 공부한 적이 있었다. 아랍인들은 과장된 제스처와 신체접촉을 통해 대화를 진행한다는 것과 한국과 달리 허리나 머리를 굽히지 않는다는 것, 절대 왼손을 상대방에 내밀면 안 된다는 것 등 복잡한 예절이 많았지만, 이런 문화를 먼저 배움으로써 많은 도움을 받았다는 것을기억하고 있었다. 모하메드는 경환을 안아주며 양쪽 뺨을 맞추어 친근함을 표시했다. 이런 두 사람을 뱅상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어 보였다. 긴 인사를 나눈 뒤 탁자에 앉은 경환은 비즈니스도 잘 풀려가기를 희망하며 모하메드의 생각을 읽기 위해 집중을 하기 시작했다.

    “PQ가 얼마 남지 않은 상황에서 이번 입찰에 참여하는 SHJ를 만난다는 게 일종의 혜택이라는 목소리가 많다는 걸 아실 겁니다. 지라드 사장의 요청이 없었다면 오늘 만남은 이뤄지기 어려웠을 것이고요. SHJ가 이런 제안을 해 온 이유가 무엇입니까?”

    경환은 아랍인들과의 대화에서는 상대방의 눈을 직시해야 된다는 것을 기억하고는 모하메드의 눈을 자신의 눈과 맞추며 정리한 생각을 말하기 시작했다.

    “저는 말을 돌리거나 거짓을 말하는 성격이 아닙니다. 솔직히 말씀 드리자면 JSC를 누르기 위해 이번 제안을 드린 것입니다.”

    “흠.”

    과한 제스처를 보이던 모하메드는 팔을 거둬들여 팔걸이에 올려놓은 후 경환의 시선을 외면해 버렸다. 단지 모하메드의 옆에서 뱅상만이 미소를 보일 뿐이었다.

    “그럼 SHJ의 제안은 오랜 시간 검토한 것이 아닌 단지 입찰에 성공하기 위한 이슈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인가요?”

    모하메드는 소나트락을 이용하려 했다는 생각에 웃음을 거둬들이고 노기 섞인 말투로 경환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모하메드는 경환의 입에서 적절한 답변이 나오지 않는다면 이것으로 정리를 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할리체 사장님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다면 죄송합니다. 저희는 중동과 북아프리카를 항상 주목하고 있었습니다. 많은 플랜트 공사가 이 지역에 집중되어 있지만, 플랜트기술을 넘기는 거에는 대부분의 기업들이 꺼리고 있는 게 현실입니다. 우리 SHJ는 단순한 컨설팅기업이지만, 이런 점을 항상 아쉬워하고 있었습니다.”

    경환의 말이 사실이란 것을 모하메드나 뱅상은 부인할 수 없었다. 그동안 산유국이란 이점으로 넘치는 오일달러를 주체하기도 힘들었는데 굳이 플랜트기술력을 확보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그러나 이슬람이 서방세계의 돈주머니 역할만 할 수 없다는 여론이 조성되면서 기술력 확보를 외치는 소리가 조용히 고개를 내밀고 있었지만, 대세에 영향을 끼치고 있지는 못했다. 경환은 2000년 중반 이후 현지제작을 옵션으로 내 거는 프로젝트가 증가한다는것에 착안하여 다른 기업들보다 적어도 십 년 먼저 이 시장을 선점하려고 했다.

    “사실 알제리가 검토대상은 아니었습니다. 현재 SHJ는 사우디의 아람코와 합작공장을 설립하기 위해 협의를 하고 있었지만, 계획을 변경하여 중동지역과 북아프리카로 지역을 분리, 두 곳에 합작공장을 설립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모하메드의 눈이 급히 크게 떠졌다. 자신도 서방의 플랜트기술을 습득해야 된다고 주장하는 그룹에 속해 있었기 때문에 중동지역에서 가장 규모가 큰 아람코와 합작을 추진하고 있다는 것에 관심을 보이지 않을 수 없었다.

    “아람코와 합작을 추진하고 있다는 게 사실입니까?”

    “사실입니다. 그건 TOTAL에서 보증하겠습니다. SHJ의 제작기술은 상당한 실력까지 올라왔습니다. 현재 나이지리아, 사우디, 쿠웨이트, 오만 등 각 현장에 공급되는 상당량을 SHJ에서 제작을 하고 있습니다.”

    모하메드의 의구심은 뱅상의 말로 정리가 되었다. 탐나는 제안이기는 하지만, 이번 입찰의 대가로 합작공장설립을 추진하기엔 무리가 있었다.

    “그렇다고 공개 입찰을 무시하고 SHJ의 손을 들어줄 수는 없습니다.”

    “소나트락에 부담을 주려는 것이 아닙니다. 저가 입찰에만 중점을 두신다면 시공과정 중에 큰 문제가 발생할 수도 있다고 보기 때문에 다른 시각에서 이 문제를 검토해 달라는 부탁을 드리는 것입니다.”

    모하메드는 JSC와 미쓰비시중공업이 같은 일본 기업이지만, 이번 입찰을 놓고 피 터지는 경쟁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경환이 지적한 문제는 JSC를 빗대서 한 말이란 사실은 굳이 설명이 필요 없었다.

    “시공상의 문제점이란 것이 뭡니까?”

    경환은 크게 심호흡을 한 뒤 머릿속으로 생각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이번 입찰의 성공 여부는 지금부터 시작하는 자신의 말에 모하메드가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따라 결정되었기 때문이었다.

    “이 정도로 되겠습니까? 아직 소나트락의 컨펌도 받지 않았는데 미리 선물을 준 게 아닌지 걱정입니다.”

    모하메드와의 긴 협상과 융숭한 접대를 받은 후 호텔로 돌아온 경환과 코이치는 기름기 많은 양고기를 먹어서인지 더부룩한 속을 맥주로 달래고 있었다.

    “MOU는 말 그대로 양해각서일 뿐입니다. 무턱대고 선물을 줄 생각은 없으니 타케우치 부장님은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모하메드는 경환의 문제 제기에 대해 긍정적으로 검토하겠다는 답변만 주고는 TOTAL에서 준비한 MOU를 체결하자는 의견을 내세웠다. SHJ 51%, 소나트락 29%, TOTAL 20%로 알제리에 플랜트 제작공장을 설립하고 일반 철 구조물로 시작, 단계적으로 특수플랜트 제작공장으로 성장시킨다는 MOU에 망설임 없이 사인해 버렸다. 경환은 이번 MOU 체결을 통해 간만 보는 아람코를 압박하는 수단으로 이용할 생각이었기 때문에 혹시라도 이번 입찰이 JSC로 넘어가게 된다면 이번 MOU는 휴지 종이가 될 가능성이 많았다.

    “미쓰비시중공업은 신일본제철을 대후건설에겐 포항제철을 단도리하도록 협조 요청을 하세요. 아직은 불확실하지만, 준비는 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알겠습니다. 바로 조치를 하겠습니다. TOTAL이 합작에 참여할 줄은 몰랐습니다.”

    경환도 이 부분은 의외로 생각하고 있었다. 단지 소나트락과의 연결을 부탁하기 위해 뱅상에 도움을 요청했지만, 뱅상은 MOU까지 작정해 알제리로 직접 건너올 줄은 경환도 몰랐던 사실이었다.

    “북아프리카는 TOTAL의 영향력이 강했던 곳이었지만, 점차 미국과 영국에 그 자리를 뺏기다 보니 이번 합작을 기회로 삼으려는 거 아니겠습니까?”

    코이치는 자신이 생각할 수 없는 방법으로 TOTAL과의 합작을 이끌어내며 꽉 막힌 상황을 돌파하는 모습에 감명을 받았다. 이번 전략이 실패해 입찰에 성공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SHJ의 영향력은 갈수록 커질 거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나저나 양고기를 먹었더니 속이 니글니글하네요.”

    “사장님,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기름지고 향신료 섞인 요리를 좋아하지 않았던 경환은 과하게 먹은 양고기가 탈이 났는지 속이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그런 경환의 모습을 바라보던 코이치는 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사라졌고 잠시 후 잘게 썰어진 바게트와 함께 조그만 유리병 하나를 들고 다시 나타났다.

    “부장님, 고추장은 어디서 구하셨습니까?”

    경환은 급히 고추장에 바게트를 듬뿍 찍어 입에 넣었고 매운 고추장이 목으로 넘어가자 부글거리던 속을 진정시킬 수 있었다.

    “동경사무소의 야마시타 군이 사장님을 위해 챙겨주더군요. 이렇게 요긴하게 쓰일 줄은 몰랐습니다.”

    “하루나 상이요?”

    코이치는 경환이 하루나의 이름을 부르자 고개를 갸우뚱거렸지만, 두 사람이 특별한 관계를 맺을 시간이 없었다는 걸 알고는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

    “알제리 일정이 예상보다 빨리 끝나다 보니 시간이 좀 생겼네요. 하루 정도는 지중해를 감상하며 재충전을 하고 모레 출발하는 거로 하시죠.”

    삼 일로 예상했던 소나트락과의 회의가 도착한 첫날 마무리가 되자,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말을 상기하며 다음날 출장을 정리하겠다는 코이치를 강제로 끌고 지중해를 감상하며 휴식을 취했다. 소나트락의 반응은 아직 나오지는 않았지만, 황태수를 지원하기 위해 알제리 일정을 마무리하고 두 사람은 일본 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PQ 서류마감이 일주일 앞으로 다가오자 JSC는 모든 역량을 이번 입찰에 쏟고 있었다. 모든 서류를 완벽히 갖추고 출장을 준비하는 카이토는 노크도 없이 급하게 들어오는 입찰팀장을 못마땅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전, 전무님. 소나트락에서 들어온 팩스입니다.”

    입찰팀장이 건네는 팩스를 신경질적으로 낚아 채 훑어보던 카이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고함을 질렀다.

    “사장님을 뵙고 올 때까지, 모든 작업을 중지하고 대기해!”

    그 시각 료스케는 중국출장에 대한 성과를 케이스케에게 보고를 하고 있었다. 경무부 부부장까지 나서 JSC의 지원을 약속 받았다는 사실을 강조하며 이번 입찰을 성공한 후 중국과의 합작에 본격적으로 나설 것을 설명하고 있었다.

    “중국이란 나라는 한국보다도 다루기 어려운 나라라는 걸 명심해야 돼. 지금은 고픈 배를 채우기 위해 머리를 숙이지만, 배를 채운 다음에는 먹이를 주던 사람을 잡아 먹으려 들 거야. 중국은 하청으로만 이용을 해야 된다는 생각엔 변함이 없다. 이 문제는 신중하게 다시 검토하도록 해라.”

    뜻밖에도 케이스케는 정확한 시각으로 중국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료스케는 그런 케이스케의 의견을 받아들일 생각이 전혀 없었다. 이번 입찰만 끝나면 케이스케를 명예회장으로 올리고 자신이 경영권을 틀어잡을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때 문이 열리고 카이토가 급히 뛰어들어왔다.

    “아버지! 아, 아니, 회장님! 심각한 문제가 생겼습니다.”

    카이토는 급히 팩스를 케이스케에게 건넸고 팩스를 확인 한 케이스케는 한숨을 내쉬며 의자에 몸을 파묻었다. 료스케는 케이스케가 떨어트린 팩스를 읽으며 마른침을 삼켰다.

    “이, 이런, 말도 안 되는. PQ를 일주일 남기고 옵션을 추가하면 어쩌겠다는 거야!”

    료스케는 주먹을 쥐며 분노에 몸부림치고 있을 때 케이스케가 감았던 눈을 떴다.

    “이건 누가 뭐라 해도 SHJ의 작품이겠지. 료스케, 네놈이 중국에 집중하고 있을 때 이경환이라는 친구와 코이치는 소나트락과 물밑교섭을 했을 거다. 이 서류가 그걸 증명하는 거란 말이다!!”

    케이스케는 소나트락의 팩스를 료스케 얼굴에 던져버렸다. 그 팩스에는 C/O(원산지증명서)를 강화하겠다는 내용과 함께 일반 철 구조물을 제외하고 중국에서 제작된 모든 파이프는 자격을 부여하지 않겠다는 명시가 되어 있었다. 또한, 알제리 현지에서 플랜트를 제작하는 기업에게 가산점을 부여하겠다는 내용도 첨가되어 있었다. 료스케는 초점 잃은 눈으로 허공만 바라보고 있었고 케이스케가 전면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

    “카이토는 밤을 새워서라도 비용분석을 다시 하도록 하고, 료스케 네놈은 아동건설에 연락해 한국의 철 구조물 제작업체를 수배하도록 해라. 정신 차려! 이놈아!”

    소나트락의 팩스 한 장으로 입찰은 다시 미궁 속으로 빠져들었지만, 케이스케는 이번 입찰이 JSC에게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자신의 마지막 작품으로 준비하던 이번 입찰이 실패로 돌아가게 하지 않기 위해 케이스케는 다시 지휘봉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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