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사는 인생-107화 (84/2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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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사는 인생 - 107

    파리를 경유하는 긴 비행시간을 보낸 후에 나리타공항에 도착한 두 사람은 거의 초주검이 된 상태로 입국장을 빠져나오고 있었다. 경환은 퀄컴이 터지기 시작하면 자가용 비행기부터 구매를 하겠다는 다짐을 할 정도로 경환은 지쳐있었다.

    “사장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경환과 코이치가 입국장을 빠져나 오자 마사토와 하루나가 급히 뛰어와 인사를 했다. 마중을 일절 금지하고 있던 경환은 두 사람의 출현을 반가워하지 않았다.

    “제가 마중은 나오지 마시라고 했는데, 왜 나오셨습니까?”

    “죄송합니다, 사장님. 급하게 알려드릴 사항이 있어 지시를 무시하고 나오게 되었습니다. 서류부터 확인을 하십시오.”

    머리를 숙이고 있는 마사토를 대신해 하루나가 경환에게 서류를 건네주었다. 굳은 인상을 한 경환의 모습에 하루나는 긴장하고 있었지만, 경환은 그런 하루나를 신경 쓰지 않은 채 건네준 서류를 읽어 내린 후 코이치에게 건네주었다.

    “좋은 소식이군요. 이유도 묻지 않고 화를 내서 죄송합니다.”

    마사토는 그제야 숙인 고개를 들어 올릴 수 있었다. 마사토를 앞세워 승용차에 올라탄 경환은 소나트락에서 자신의 제안을 받아들인 사실에 만족하고 후속 작업에 대한 계획을 정리하고 있었다.

    “오카다 소장님, JSC는 어떻게 대응을 하고 있습니까?”

    “그게, 정보를 입수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마지막으로 입수한 정보는 타케우치 회장이 전면에 나서 진두지휘를 하고 있다고 합니다.”

    운전을 하던 마사토는 경직된 자세를 취하며 경환의 질문에 답을 했다. 능구렁이 같은 타케우치 회장이 전면에 나섰다면 이번 소나트락의 조치에 대응하며 다른 변수를 만들기 위해 틈을 노릴 거란 생각에 급히 코이치를 찾았다.

    “부장님은 JSC의 대응을 차단하는 전략을 연구해서 보고해 주십시오.”

    “알겠습니다. 사장님이 미국으로 돌아가기 전까지 보고를 드리겠습니다.”

    코이치는 경환의 지시를 묵묵히 받아들이고 있었지만, 경환의 마음은 편치 못했다. 부친의 전략을 파악해서 부친을 무너트리라는 것은 자신이 생각해도 반인륜적인 지시였지만, 코이치 말고는 타케우치 회장의 전략을 막을 사람은 없었다. 경환은 미안한 마음을 코이치에게 보여줄 수는 없었다.

    “사장님, 황 부사장님을 포함해서 이번 입찰에 참여하는 업체들이 현재 미쓰비시중공업에서 사장님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쪽으로 먼저 모시겠습니다.”

    긴장해서인지 하루나는 사무적으로 또박또박 말을 끊었지만, 떨리는 음성까지 숨길 수는 없었다.

    “그렇게 하세요. 그리고 하루나 상, 고추장 잘 먹었습니다. 덕분에 속을 풀 수 있었네요.”

    운전을 하던 마사토는 무슨 얘기인지 감을 잡지 못한 채 하루나를 힐끔 쳐다봤지만, 하루나는 붉어진 얼굴을 서류로 가리며 떨리는 가슴을 주체하지 못하고 있을 때 경환은 쏟아지는 잠을 막지 못했다.

    “사장님, 도착했습니다.”

    비몽사몽 간에 코이치의 음성이 들리자 경환은 무거운 눈꺼풀을 억지로 올리며 힘들게 차에서 내렸다. 기지개를 켜는 경환에게 하루나는 급히 빗을 건네며 머리를 정리하라는 시늉을 보였다.

    “고마워요. 하루나 상.”

    경환이 다시 한 번 자신의 이름을 부르자 하루나는 태연한 척 급히 정문을 통과하고 있었고 경환은 하루나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머리를 빗어 내렸다.

    “이 사장님, 수고하셨습니다. 이런 결과를 만들어 오실 줄은 전혀 기대도 하지 못했습니다. 피곤하신데 이쪽으로 먼저 모시게 돼서 정말 죄송합니다.”

    아사히는 회사 정문까지 내려와 경환을 반겼고 아사히 뒤로는 황태수가 자신의 보스에게 흐뭇한 진심을 담은 미소를 보내고 있었다. 아사히와의 인사를 마친 경환은 김준성에게 다가갔다.

    “대후건설에서 큰 결심을 해 주셨다고 들었습니다. 신세를 졌습니다.”

    경환은 고개를 숙여 김준성에게 감사를 표했지만, 김준성은 경환의 어깨를 들어 올리며 손사래를 쳤다.

    “아닙니다. 신세는 우리 대후건설이 지고 있습니다. 이런 기회를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김준성은 자신의 결정이 잘못되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돌아가는 황태수, 아키라와 함께 일본으로 건너왔다. 경환과의 첫 만남은 좋지 못했지만, 끝이 중요하다고 김준성은 생각하고 있었다. 김준성은 이번 기회를 통해 SHJ와의 관계를 공고히 만들겠다는 생각으로 그룹 회장까지 설득했다.

    “자, 자. 여기서 이러지 말고 회의실로 들어갑시다.”

    아사히가 나서 경환의 주위에 몰려드는 사람들을 정리하자 다들 들뜬 기분을 가라앉히고 담소를 나누며 회의실로 들어갔다.

    “우선 이번 소나트락과의 협의 내용에 대해 간략히 말씀 드리겠습니다. 그동안 보안 때문에 계획을 말씀드리지 못한 점 우선 이해를 양해해 주십시오.”

    경환을 대신해 코이치가 나서 소나트락, TOTAL과의 MOU 체결에 대해 설명하자 아사히와 김준성은 자신들은 생각할 수도 없는 방법으로 역전의 발판을 만들어 낸 SHJ의 능력에 혀를 내두르며 이번 입찰에 강한 자신감을 보이고 있었다. 코이치의 설명이 끝나자 경환이 마이크를 잡았다.

    “저는 역전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JSC를 잡을 수 있는 거리까지 좁혔을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JSC 뒤에는 KBR이라는 강력한 지원군이 포진되어 있다는 것을 잊으면 안 됩니다.”

    경환은 케이스케와 윌리엄의 집요함을 알고 있었다. 행여 들뜬 기분에 비용분석에 소홀히 대처한다면 겨우 잡은 기회를 놓칠 수도 있었다. 경환의 말에 회의실은 침묵에 휩싸였다. KBR은 SHJ-화성플랜트의 발주물량을 서서히 줄여가며 나트람과의 관계를 회복시키고 있었다. 경환은 이번 기회에 KBR이 가지고 있는 지분을 인수하려 했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윌리엄은 이 지분만큼은 포기하지 않고 있었다.

    “우리가 JSC와 중국의 밀월 관계를 막았다고는 하지만, KBR은 한국의 아동건설과 인도의 나트람을 내세워 JSC의 후방을 지원하며 반격에 나설 것입니다. 이럴 경우 우리가 밀리는 형국이 될 수도 것을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도 소나트락과의 합작이 성공한 만큼 우리가 유리하다고 볼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TOTAL도 한 손을 거들게 될 거고 말입니다.”

    아사히가 나서 너무 과민하게 대응하는 것이 아니냐는 투로 질문해 오자 경환은 예상이라도 한 듯 한숨을 내쉬며 아사히를 바라보았다.

    “단지 MOU를 체결한 것뿐입니다. KBR이나 JSC가 더 큰 떡밥을 던져 준다면 소나트락도 관망하는 태도로 바뀔 수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최대한 비용을 절감해 JSC의 입찰가를 따라 잡아야 된다는 겁니다.”

    피 터지는 입찰전쟁에서 기업 간의 의리는 깨지기 쉬운 유리그릇만도 못했다. 지금은 한 배를 타고 모여 있지만, 다음에도 같은 배를 탄다는 보장은 전혀 없었다. 그렇다 보니 합작에 참여한 기업들은 마지막 한 수는 숨기고 있다는 것은 자명했고 경환은 마지막 한 수를 꺼내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러기 위해선 SHJ가 먼저 나설 수밖에 없었다.

    “SHJ는 이번 입찰에 한 해 컨설팅 비용을 1%로 산정함과 동시에 SHJ-화성플랜트도 마진율을 7% 이하로 다운시키겠습니다.”

    경환의 발언은 주위를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다. 컨설팅 비용만 보자면 4천만 불을 포기한다는 거였고 플랜트제작의 마진율이 그 당시 20% 안팎이었기 때문에 7%라는 수치는 마진을 포기한다는 의미였다. 이 때문에 황태수와 코이치는 경환을 바라보며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었다.

    “이 사장님께서 강한 의지를 보여주셔서 감사합니다. 미쓰비시중공업도 일본 국내제작분을 최소화하는 방향으로 원가분석을 재산정하겠습니다. 이 사장님의 결단에 지지를 표합니다.”

    “우리 대후건설 또한, 시공일정을 다시 수립하는 방법으로 시공비용을 줄이는 방법을 연구하겠습니다.”

    들뜬 분위기를 정리하고 전투 의지를 살리는 데 성공한 경환은 급격하게 밀려오는 피로에 식사요청도 거절한 채 호텔로 급히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눈을 좀 붙이겠습니다. 호텔에 도착하면 깨워 주십시오.”

    계획을 정리하기 위해 황태수와 코이치가 미쓰비시중공업에 남아있었기 때문에 마사토와 하루나가 경환을 보좌했지만, 경환은 승용차에 오르자마자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시체처럼 잠에 빠져들었던 경환은 마른 목을 축이기 위해 침대에서 일어나 미니바를 열었다. 생수 한 병을 전부 털어 넣은 후에야 겨우 정신을 차린 경환은 침대 옆에 놓인 시계를 확인하고선 전화기를 들었다.

    ‘헬로우?’

    수화기로 들리는 수정의 목소리는 밝아 보였다.

    “자기야, 나야. 아침은 먹었어?”

    ‘자기예요? 자기 전화받으러 막 일어났어요. 많이 바쁘죠?’

    바쁘게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느라 일주일 동안 집에 전화를 걸지 못했던 경환은 미안함과 고마운 마음에 쉽게 말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바쁜 일 거의 다 끝냈어. 며칠 후면 돌아갈 수 있을 거야. 정우 보느라 고생할 텐데 집을 너무 오래 비워서 미안하다.”

    ‘자기 오늘 이상하네. 안 하던 말도 다 하고. 나하고 정우는 괜찮으니까 일 잘 보고 돌아와요. 정우는 아직 자고 있어서 바꿔주기는 힘들 거 같아요.’

    “괜찮아. 자기 목소리 듣고 싶어서 전화한 거니까. 휴스턴에서 보자고.”

    전화를 끊은 경환은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오전부터 강행군을 하다 보니 한끼도 챙겨 먹지 못했던 경환은 요란하게 울리는 배 시계 때문에 방을 나설 수밖에 없었다. 무작정 택시에 올라탄 경환은 일본어를 못한다는 것을 떠올리고 급히 벨 보이를 불렀다.

    “아사쿠사에 가려고 합니다. 택시기사에 통역을 부탁합니다.”

    벨 보이의 도움으로 아사쿠사에 도착한 경환은 지난번과는 다르게 주변의 경치를 감상하며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희수와의 추억이 남아있는 회전초밥집에 들어선 경환은 앉고 싶던 자리에 이미 손님이 있는 것을 확인하고 다른 자리로 이동하다 다시 고개를 돌려 손님의 뒷모습을 확인하고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하루나 상, 집에 가지 않고 여기서 뭐 해요?”

    갑작스런 경환의 출현에 하루나는 잡고있던 젓가락을 손에서 놓치며 어쩔 줄을 몰라했다. 경환은 하루나 앞에 놓인 딸기가 올려진 디저트를 물끄러미 쳐다보다 하루나 맞은편에 자리를 잡았다.

    “전화를 주시지 혼자서 여길 어떻게 오셨어요?”

    “택시타고 왔지요. 내가 애도 아닌데 무슨 걱정을 그렇게 해요? 그나저나 하루나 상은 여기 어쩐일이에요? 미쓰비시중공업에서 만찬을 준비한 거 같은데.”

    “제가 참석할 분위기가 아닌 거 같아 빠져나왔어요. 그리고 집이 이 근처라……”

    “잘 됐네요. 혼자 저녁먹는 거 처량해 보일 수도 있으니 같이 먹자고요.”

    지난번과 같이 생맥주를 시켜 시원하게 들이킨 경환은 이것저것 접시를 골라 급하게 배를 채우기 시작했다. 이틀동안 입에 맞지 않는 기내식을 먹어서인지 경환은 평소보다 많은 양을 먹고있었고 경환의 앞에는 접시들이 수북히 쌓였다.

    “저, 사장님. 입 주위에…….”

    하루나가 건네는 냅킨을 보지도 못하고 그냥 손으로 입주위를 아무렇게나 문지른 경환은 하루나를 향해 겸연쩍은 웃음과 함게 뒷머리를 긁적였다.

    “걸신 들린 거처럼 먹는다고 직원들한테 소문내지 마요.”

    “푸흡.”

    하루나는 경환의 모습에 터지는 웃음을 참느라 건네려던 냅킨으로 급히 입을 틀어막았다. 경환은 처음으로 하루나가 귀엽다는 생각이 머리에 떠올랐다.

    “하루나 상은 웃는 모습이 예쁘니, 항상 웃으면서 일 하도록 해요.”

    하루나는 한참을 고민하다 디저트를 한입 베어 물고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이 디저트는 사모님께서 좋아하신다고 들었는데, 저도 좋아질 거 같아요.”

    경환은 급하게 돌리던 젓가락을 잠시 멈추고 하루나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경환은 자신이 착각을 한 거라는 생각에 고개를 좌우로 저으며 다시 먹는 데 집중을 했다.

    “아내는 여기 온 적이 없어요. 그 디저트를 좋아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이고요.”

    경환의 말에 충격을 받아서인지 하루나의 표정은 어두워졌다. 아내 이외에 다른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믿기가 어려웠다. 젊고 능력이 있는 남자라면 주위에 한두 명의 여자는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쉽게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다.

    “하루나 상, 식사도 얼추 마쳤는데 오늘은 내가 하루나 상을 배웅해 줄게요. 집도 여기서 멀지 않다고 했잖아요.

    “아, 아닙니다. 사장님. 호텔에 먼저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저녁에 혼자 집에 보내는 게 불안해서 그럽니다. 그럼 택시를 타고 하루나 상 집에 간 후에 호텔로 돌아가는 거로 해요.”

    경환이 종업원을 불러 계산서를 요청하자 하루나는 급히 핸드백에서 무언가를 꺼내 경환에게 건넸다. 그건 코팅처리 된 백 불짜리 지폐 다섯 장이었다.

    “사장님께서 주셨던 돈입니다. 지금까지 이 돈이 제게 많은 위로를 주었습니다. 제가 앞으로도 이 돈을 가지고 있어도 되겠습니까?”

    “위로가 된다면 앞으로도 이 돈은 하루나 상의 돈입니다. 어떻게 할지는 하루나 상이 결정하세요. 그리고 저는 하루나 상의 능력만 보겠습니다.”

    돈을 돌려받은 하루나는 평생을 간직하겠다는 다짐을 하며 조심스럽게 핸드백에 다시 집어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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