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사는 인생-105화 (82/264)
  • #105

    다시 사는 인생 - 105

    피 말리는 회의를 마친 경환은 녹초가 된 몸을 이끌고 호텔에 돌아와 욕조에 몸을 담갔다. 코이치를 비롯해 SHJ의 T.F팀들은 미쓰비시중공업에 남아 세부사항을 정리하고 있었지만, 큰 원칙에 합의를 본 상태에서 회의실에 남아있을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아사히와 아키라의 끈질긴 접대 요청을 경환은 내일 출국을 해야 된다는 핑계로 뿌리칠 수밖에 없었다.

    ‘띠리리~, 띠리리~’

    욕조 안에서 잠시 눈을 붙이고 있던 경환은 울리는 인터폰을 무의식적으로 받아 들었다.

    “여보세요.”

    ‘사장님, 저, 야마시타 하루나입니다. 식사를 어떻게 하실지 전화 드렸습니다.’

    특별한 인원을 비서로 배치하지 말 것을 마사토에게 지시를 했지만, 이다나의 특별한 요청을 받아서인지 하루나는 경환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식사도 거른 채 방으로 들어간 경환이 걱정되었던 하루나는 수십 번의 망설임 끝에 인터폰을 누른 후 혹시라도 경환을 방해한 것은 아닌지 불안함에 목소리까지 떨리고 있었다.

    “알았어요. 로비에서 봐요.”

    경환은 무거운 몸을 욕조에서 꺼내 청바지와 티셔츠를 걸친 후 방을 빠져나갔다.

    “미스 야마시타, 오늘 힘들었을 텐데 집에 가서 쉬지 그랬어요?”

    로비에서 엘리베이터만 바라보던 하루나는 막상 경환이 자신에게 다가오자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 채 꿀 먹은 벙어리처럼 눈만 껌뻑 이고 있었다.

    “저, 저,”

    얼굴만 붉히며 말을 하지 못하는 하루나를 이끌고 경환은 벨 보이에게 택시 한대를 요청했다. 가 보고 싶었던 곳이 생각나서였다.

    “미스 야마시타, 아사쿠사로 갔으면 합니다. 같이 저녁이나 합시다.”

    하루나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며 택시에 올라탔지만, 아사쿠사에 도착할 때까지 두 사람의 대화는 단절될 수밖에 없었다. 택시가 아사쿠사에 도착하자 택시비를 계산한 경환은 하루나를 뒤에 두고 재래상가가 밀집한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사, 사장님.”

    일본어를 못하는 경환이 서둘러 앞서 나가자 하이힐을 신은 하루나는 도저히 경환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해 숨을 헐떡였지만, 경환은 하루나를 신경 쓰지도 않은 채 정신 나간 사람처럼 앞으로만 걸어나갔다. 마침내 어느 회전초밥집에 도착한 경환은 그제야 하루나가 옆에 없다는 사실을 알고 하루나를 찾아 주위를 둘러보기 시작했다.

    “헉, 헉, 사, 사장님.”

    “미안해요. 저만 생각을 했네요. 우리 여기서 저녁을 먹었으면 좋겠네요.”

    하루나가 도착하자 경환은 하루나의 답을 기다려 주지도 않고 식당 안으로 들어가 구석진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간단하게 생맥주 한 잔씩 하고 싶은데 술 괜찮아요?”

    하루나를 아직도 숨이 가쁜지 제대로 말을 하지 못한 채 고개만 끄떡이다 겨우 종업원을 불러 생맥주 두 잔을 주문할 수 있었다. 하루나는 경환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고 흘낏거리고 있었다. 생맥주가 탁자 위에 놓이자 경환은 급히 잔을 들어 올렸다.

    “오늘 수고했어요. 동경사무소에 없어서는 안 될 직원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좀 더 일을 배우게 된다면 분명 좋은 기회가 찾아올 겁니다. 같이 건배하죠.”

    두 사람은 맥주잔을 부딪친 후 차가운 맥주를 입으로 넘기자 하루의 피곤함이 가시는 듯한 착각에 빠져들었다. 회전판 위로는 초밥을 담은 각양각색의 접시들이 돌아가고 있었고, 경환과 하루나는 각자의 입맛에 맞는 초밥을 고르기 시작했다.

    “부친께서는 나아지셨나요?”

    하루나는 조용히 젓가락을 접시 위에 내려놓고 맥주로 입가심을 했다.

    “암이세요. 현대의학으로는 손을 쓸 수 없는 상태고요. 그래도 제가 번듯한 직장인이 된 걸 기쁘게 생각하고 계셔서 제 맘이 편해요.”

    “미안합니다. 그럴 의도는 아니었는데…….”

    경환도 전생에서 부모님을 병마로 잃었던 기억이 있어서인지 하루나의 어두워진 표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또한, 어떠한 말로도 하루나를 위로할 수 없다는 사실에 경환은 말을 잇지 못했다.

    “괜찮아요. 미국에서 살다 부모님이 이혼을 하고 저는 아버지를 따라 일본으로 돌아왔어요. 어머니는 미국인과 재혼을 했고요. 아버지는 평생을 저만 바라보고 사셨어요. 병이 악화되다 보니 일도 못 하시고, 저는 취직도 안 되는 상태에서 처음 나간 자리에서 사장님을 만나게 되었어요.”

    하루나는 술집에서 경환을 처음 알게 된 것이 참기 힘들었는지 눈자위에 눈물이 맺히기 시작했다. 경환은 아버지를 따라갔다는 하루나의 말에 희수 얼굴이 오버랩 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가슴이 먹먹해진 경환은 일부러 시선을 돌려 회전판을 바라봤고 회전판 위로는 조그마한 케이크 위에 생크림과 딸기가 얹어진 디저트를 보자 서둘러 접시를 꺼내 하루나 앞에 놓아주었다.

    “제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좋아하던 거에요. 난 아직 먹어보지 못했지만, 하루나와 어울리는 디저트인 거 같아 보이네요.”

    경환은 오성 건설에서 퇴직하기 전 일본만화를 좋아하던 희수를 위해 짧은 일정으로 동경에 여행을 온 적이 있었다. 지금 이 회전초밥집은 가족들과 함께 찾았던 곳으로 희수는 이 디저트를 세 개나 먹었던 것을 경환은 기억하고 있었다.

    “초밥집에 디저트가 있다니 저도 오늘 처음 알았어요. 정말 맛있어요.”

    “미스 야마시타, 이전의 안 좋았던 기억은 다 지워요. 저는 미스 야마시타가 SHJ에서 능력을 발휘하기를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앞으로 제 이름을 불러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경환은 하루나를 향해 미소를 보이고는 다시 식사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하루나는 혹시 자신이 실수를 한 건 아닌지 고개를 숙인 채 더 이상 식사를 하지 못하고 있었다.

    “하루나 상, 식사 끝내고 하라주쿠에 같이 가 줄래요?”

    “네, 사장님.”

    식사를 마친 두 사람은 하라주쿠로 이동해 골목을 누비기 시작했고, 큰 키의 두 사람이 하라주쿠에 나타나자 주위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두 사람에게 쏠리고 있었다. 경환과의 데이트 아닌 데이트를 한 하루나는 자신도 알 수 없는 설렘에 밤잠을 설쳤다. 짧은 일정을 마친 경환은 코이치와 함께 아침 일찍 알제리를 향해 떠났고 하루나는 허전한 마음에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대후건설에는 일본에서 방금 도착한 아키라와 황태수가 회의실에 들어서고 있었다. 사실 SHJ의 제안을 받아들이긴 했지만, 미쓰비시중공업은 자신들과 가까운 오성그룹과의 합작을 대안으로 제시했었다. 오성그룹의 성장에 지대한 도움을 준 미쓰비시그룹에겐 대후건설보다는 오성건설이 편할 수 있었지만, 경환은 북아프리카에서 인지도가 떨어진다는 이유를 들어 오성건설의 참여를 단칼에 거절해 버렸다. 이것은 미쓰비시중공업이 오성건설을 이용해 주도권을 잡지 못하게 하는 이유도 있었지만, 오성전자에 투자를 결심한 이후 오성그룹에 SHJ가 쏠리지 않게 하기 위한 이유도 있었다.

    “황태수 부사장님, 모모이 전무님, 오늘 좋은 결과가 나오기를 희망합니다.”

    “감사합니다. 저희들 또한, 대후건설과 좋은 만남이 되기를 바랍니다.”

    김준성은 SHJ가 미쓰비시중공업과 손을 잡자 알제리 프로젝트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다음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대후건설에서도 SHJ와의 합작을 쌍수로 들고 바라고 있지만, 우선은 대후건설의 이익을 위해 조심스럽게 접근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아무런 이유 없이 대후건설과 미쓰비시중공업의 합작을 제안할 정도로 SHJ와 대후건설이 밀착된 관계는 아니라고 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갑작스럽게 대후건설과의 합작을 제안하시는 이유를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아키라를 의식해서인지 김준성이 영어로 질문을 던지자 아키라는 자신이 김준성의 질문에 답변을 하기 위해 황태수의 동의를 얻었다.

    “대후건설도 이미 상황을 파악하고 있다고 봅니다. 솔직히 말씀 드리자면 JSC가 중국과 밀착되는 바람에 원가차이를 도저히 메울 수 있는 방법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미쓰비시중공업은 SHJ의 제안을 받아들여 대후건설과 합작을 추진하게 된 것입니다.”

    아키라의 숨김없는 솔직한 답변에 김준성은 놀라긴 했지만, 이 정도로 미쓰비시중공업이 막다른 골목에 몰리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미 주도권은 김준성의 손에 놓인 상태였다.

    “솔직하게 말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한가지 정보를 더 드린다면 KBR이 아동건설과 물밑접촉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나이지리아 공사를 문제없이 진행하는 아동건설에 신뢰가 쌓였다는 증거겠지요. 아동건설까지 알제리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된다면 더욱 힘든 싸움이 되지 않겠습니까?”

    산 넘어 산이었다. 원가를 절감하기 위해 대후건설과의 합작을 추진했지만, 아동건설이 참여하게 된다면 시공원가를 줄이려던 대안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KBR은 SHJ와 미쓰비시중공업의 약점을 정확히 파악하고 무섭게 파고들어 오고 있었다. 황태수와 아키라의 표정은 급격히 굳어지고 있었다.

    “흠, 더 어려운 싸움이 되겠군요. 아동건설도 우리와 계약이 되어 있다고는 하지만, KBR의 제안을 거절하지는 않을 거고요.”

    황태수는 다음 말을 쉽게 꺼낼 수 없었다. 자신이 생각해도 JSC와 KBR의 전략에 마땅한 대응책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알제리로 날아가고 있는 경환을 믿으며 자신이 맡은 일은 처리를 해야만 했다.

    “지금은 말씀드릴 수 없지만, SHJ는 마지막 한 수를 가지고 있습니다. 김 전무님께서는 이번 미쓰비시중공업과의 합작에 대해 어떻게 생각을 하십니까? 시간이 많이 없는 점 양해 바랍니다.”

    김준성이 열심히 주판을 튕기고 있다는 것을 파악한 황태수는 대후건설이 제안을 거절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알제리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고 낮은 시공비용을 제공할 수 있는 대후건설과의 합작이 필요했지만, 싫다는 놈을 억지로 끌고 갈 생각은 없었다.

    “너무 어려운 질문을 주셨습니다. SHJ의 능력을 의심하는 것은 아니지만, 객관적인 시각으로는 이번 입찰은 SHJ도 넘기 힘들 거라고 봅니다.”

    명백한 거절의사이라고 판단한 황태수와 아키라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뻔히 보이는 싸움에 피를 흘릴 이유가 없다는 것에는 황태수나 아키라도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김준성은 허탈해하는 두 사람의 표정을 재미있다는 듯 쳐다본 후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나 우리 대후건설은 이번 SHJ의 제안을 받아들이겠습니다. 우리의 마진을 포기해서라도 아동건설이 따라오지 못할 정도의 시공비를 제공할 의향이 있습니다. 우리가 이번 제안을 받아들이는 이유는 SHJ와 미래동반자로 함께 성공하기 위해서입니다.”

    김준성이 제안을 받아들이자 황태수는 막혔던 통로에 한 줄기 빛이 들어오는 것을 느꼈다. 김준성이 이익을 고려하지 않고 이번 합작에 참여할 것을 선언하자 아키라도 이에 호응하고 나섰다.

    “대후건설의 결단에 감사드립니다. 우리 미쓰비시중공업도 대후건설과 마찬가지로 이익을 고려하지 않고 입찰 성공에 무게감을 실어 원가분석을 다시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우리 SHJ와 SHJ-화성플랜트도 이에 동조하겠습니다. 우선 포항제철과의 협상은 대후건설이 맡아 주셨으면 합니다. 포항제철에서 생산하지 못하는 특수합금강판을 제외한 전 물량을 포항제철에서 공급받는 거에 대해 미쓰비시중공업도 동의했습니다.”

    입찰의 결과는 아직 장담할 수 없을 정도로 불리했지만, 쉽게 지지는 않을 거라는 생각이 세 사람을 흥분시키고 있었다.

    파리를 경유해 알제리 우아리 부메디엔 공항에 도착한 경환과 코이치는 서둘러 입국수속을 마치고 택시를 잡기 위해 빠르게 입국장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제임스, 오랜만입니다.”

    경환은 자신의 이름이 들리자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주위를 살폈고 경환의 뒤로 TOTAL의 뱅상이 다가오는 것을 보고 놀랄 수밖에 없었다.

    “뱅상, 어떻게 공항에 나오셨습니까?”

    “하하하, 명성이 자자한 SHJ의 오너가 택시를 타고 활보한다면 웃음거리가 될 수도 있을 거 같아 마중을 나왔습니다. 같이 이동을 합시다.”

    자신을 반갑게 맞아주는 뱅상을 따라 TOTAL에서 준비한 승용차에 오른 경환은 자신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에 안도하고 있었다. 알제리는 프랑스의 오랜 식민지에서 벗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국가였지만, 프랑스의 입김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는 상태였다. 경환은 소나트락을 움직이기 위해 TOTAL과의 합작을 제의했고, 뱅상이 공항에 마중을 나왔다는 것을 봤을 때 TOTAL도 경환의 제의에 관심을 보이고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경환은 뱅상의 답변을 초조한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었다.

    “SHJ가 제안한 내용이 재미있더군요. 제임스의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아프리카의 플랜트 시장은 커질 수밖에 없다고 보고 있습니다. SHJ의 힘 만으로는 어렵다는 판단 하에 TOTAL에 제안을 하게 된 것입니다.”

    뱅상은 SHJ와 KBR이 결별해 경쟁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부터 경환의 행보를 유심 있게 지켜보고 있었다. JSC와 KBR이 대세를 굳혀가고 있는 상황에서 경환이 내민 카드는 자신의 호기심을 자극했고 경환보다 앞서 알제리에 도착한 것이 그 이유를 설명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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