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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사는 인생-58화 (250/2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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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사는 인생 - 58

    중국생활을 정리하고 돌아온 경환과 수정은 둘만의 시간을 보내며 천천히 미국으로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방송에서는 새롭게 출범하는 문민정부에 많은 기대감을 걸고 있다는 논평이 줄을 잇고 있었지만 경환의 표정은 그리 밝지 않았다. 역대 정부 중에서 대형사고가 가장 많았던 정부였고, 제2의 국치로 기억되고 있는 IMF라는 사상초유의 사태가 이 정권에서 일어나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장 내년에 있을 성수대교 붕괴와 후년에 발생할 대구지하철 가스폭발과 삼풍백화점 붕괴는 경환으로서도 잊을 수 없는 아픔으로 남아 있었다.

    경환은 사고가 일어나는 날을 기억하려 애써봤지만, 정확한 날짜를 알아 낼 수는 없었다. 단지 성수대교는 늦가을이란 사실과 회사의 지원인력으로 파견을 나갔던 삼풍백화점의 붕괴가 6월이라는 사실을 기억해 낸 것이 그나마 수확이었지만, 자신의 힘으로는 막을 방법이 없다는 사실에 좌절할 수밖에 없었다.

    “사장님 오셨습니까?”

    오랜만에 화성산업을 찾은 경환은 화성산업 입구에서 반갑게 자신을 맞이하는 박화수를 보며 가볍게 악수를 나눈 후 화성산업 안으로 들어갔지만 어딘가 모르게 달라진 분위기에서 묘한 느낌을 받고 있었다.

    “불편한 점은 없으신가요? 불편하시다면 따로 사무실을 알아보셔도 괜찮습니다.”

    경환은 중원그룹 궈청의 의뢰와 한국 건설기업의 동향파악 업무를 박화수에게 맡겨 놓고 있었다. 경환의 부탁으로 화성산업에 자리를 마련해 주기는 했지만, 번듯한 사무실을 차려 주지 못한 것이 항상 마음에 걸렸다.

    “아닙니다. 화성의 직원은 아니지만 다들 잘 대해 줘서 특별한 불편한 점은 없습니다. 단지….”

    박화수는 말을 마치기도 전에 입을 굳게 닫았다. 경환은 더 이상 박화수에게 되묻지 않고 급히 화성산업 직원들의 인사를 받아 주며 사장실 문을 열었다.

    “어. 이 사장, 중국 생활은 완전 정리를 했다고 들었네. 오늘 저녁엔 술 한 잔 해야지? 허허.”

    “건강해 보이시네요. KBR에서는 화성산업과의 협력체제에 대단히 만족을 한다고 들었습니다. 이 정도에 그치시면 안 됩니다. 완전히 화성산업 것으로 만들 때까지는 더 고개를 숙이셔야 됩니다.”

    경환의 뼈있는 조언에 최승 화는 알았다며 너털웃음을 지어 보였다. 분위기는 묘하게 틀려졌는데 경환은 그 이유를 쉽게 짐작하지 못하고 있었다. 화성산업은 KBR과의 기술이전을 빠르게 자신의 것으로 흡수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경환의 예상으로는 3년 정도만 시간이 더 흐르게 된다면 화성산업 자체적으로 특수플랜트 제작이 가능할 것으로 판단을 하고 있었다.

    “자네도 엄연히 화성산업의 대주주 아닌가? 자네가 더 신경을 써 주게. 아, 그리고 내가 소개 시켜줄 사람이 있네.”

    최승 화는 사장실 문을 열고 나가 30대 초반의 스마트 해 보이는 직원을 데리고 들어왔다.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화성산업의 전설로 통하고 계시더군요. 저는 곽기철 팀장입니다. 앞으로 많은 도움 부탁드리겠습니다.”

    갑작스런 곽기철의 등장에 경환은 엉겁결에 악수를 나누고는 곽기철을 쳐다보았다. 사무실에 들어오고 나서 느꼈던 묘한 분위기가 곽기철에 의한 것이란 걸 알아차릴 수 있었다.

    “곽 팀장은 하버드에서 MBA를 졸업한 수잴세. 이 사장 자네를 보면서 우리 화성에도 젊고 신선한 인재가 필요하다는 걸 느껴서 말이지. 정말 어렵게 화성으로 끌고 올 수 있었네.”

    최승화의 말을 이해를 못할 정도로 꽉 막히지는 않았지만, 아직 화성산업은 젊은 패기 보다는 노련한 경험이 더 필요한 시기라고 경환은 생각하고 있었다. 우선은 곽기철이 어떤 인물인지를 파악하는 게 우선이 되어야 했다.

    “화성산업은 미래를 대비하는 가장 중요한 시기라고 봅니다. 곽 팀장님은 플랜트의 전망을 어떻게 보시는지요?”

    경환은 가벼운 질문으로 곽기철의 생각을 읽어 보려고 했다.

    “플랜트 업종의 미래는 밝다고 봅니다. 더군다나 KBR의 기술이전이 이뤄지고 있는 만큼 화성은 한국의 특수플랜트 제작을 선도할 것으로 판단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경영이 뒷받침 되지 못한다면 모래성에 불과 하다고 봅니다. 저는 화성의 미래를 경영혁신으로 이뤄 보려고 합니다.”

    ‘경영혁신’ 애매모호한 말이었다. 큰 틀에서 보자면 경환이 화성산업에서 했던 일들도 경영혁신의 일환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결국은 플랜트에 대한 부족한 이해를 경영혁신이라는 애매한 말로 포장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곽 팀장님께서 생각하시는 경영혁신의 목적은 비용절감에 따른 기업이익 창출로 보시는지요? 혹시 비용절감을 위해 공장의 해외이전도 검토를 하고 계시나요?”

    “아직은 해외이전까지는 검토를 하고 있지 않지만 급격한 인건비 상승은 경영에 가장 큰 압박을 줄 수 있다고 봅니다. 그때를 대비하는 차원에서 검토는 하고 있어야 된다고 봅니다. 비용절감을 통해 이익을 창출하는 건 기업경영의 기본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경환은 곽기철의 생각에는 동의 할 수 없었다. 물론 비용절감을 통해 원가를 줄이는 방법은 반드시 필요하지만, 근로자의 이해를 구하지 않은 임금조정과 무분별한 비용절감은 근로자의 사기를 저하시켜 숙달된 기술자의 이탈과 불량률 증가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곧 화성의 위기로 나타날 수 있었다고 판단했지만, 경환은 더 이상 화성의 직원이 아니었기에 지켜봐야만 했다.

    “허허, 소희하고 곽 팀장이 곧 약혼을 할 예정이네. 자네도 꼭 참석을 해 주게.”

    최승화의 저녁식사 제의를 다음 기회로 돌린 경환은 박화수에 화성산업의 동향에 대해 주시해서 보고해 줄 것을 지시하고 급히 화성산업을 빠져 나갔다.

    ‘가시나, 좀 기다리라고 했더니, 그새를 못 참고.’

    KBR의 도움으로 미국법인 설립을 마친 황태수는 경환이 도착하기 전 회사의 형태를 갖추기 위해 사방팔방으로 뛰어 다니고 있었다.

    “최 차장, 자본금은 언제 송금이 된다고 하나?”

    “김 부장님 말로는 이번 주에 150만 불을 송금을 한다고 했습니다. 이미 에릭을 통해 준비가 다 된 상태라고 하니 별 문제 없을 겁니다. 부사장님.”

    미국법인이 설립되고 나서 경환은 황태수를 부사장에 앉히고 박화수를 부장으로 임명했다. 아직 머리들만 있고 하부 조직을 갖추지 않은 기형적인 형태였지만 경환이 미국에 도착한 후 미국법인의 현지 직원을 채용할 계획이었다.

    “황 부사장님, KBR 건물로 들어 오셨으면 업무 협조도 빨리 이뤄질 수 있었을 텐데 아쉽습니다.”

    사무실 문을 열고 잭이 들어오고 있었다. 사무실을 임대하는 과정에서 KBR은 거의 무상으로 사무실 임대를 제안했지만 경환은 KBR의 제안을 거절해 버렸다. 아직은 서로 호의를 갖고 있었지만 기업 간의 신뢰는 서로의 이익에 따라 언제든지 바뀌는 것이 기업생리였기 때문이었다.

    “미스터 무어, 덕분에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소개해준 로펌에서 주택까지 임대계약을 해 주더군요.”

    KBR은 SHJ가 휴스턴에 빨리 자리를 잡을 수 있도록 잭을 통해 최선의 도움을 주고 있었다. 아직은 SHJ 아니 경환의 정보력이 절실히 필요한 상황이었다.

    “하하, KBR과 SHJ는 한 가족 아닙니까. 다름이 아니라 미시즈 리와 미시즈 최의 입학허가를 통보 받아서 이를 알려드리려 찾아 왔습니다.”

    잭의 말을 듣고 있던 최석현은 함박웃음을 보이며 기뻐하고 있었다. 케이티의 입학허가가 떨어 졌다는 것은 케이티를 만날 날이 가까웠다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이었다.

    “미스터 무어, 감사합니다. 제가 드디어 홀아비 신세를 면하나 봅니다. 하하하.”

    “저도 기쁩니다. 두 분 다 우선은 어학원을 먼저 등록하고 가을학기에 들어가는 것으로 준비를 해 놓았습니다. 제임스는 언제쯤 입국을 하는지 아시는지요?”

    올해 있을 나이지리아 입찰 건 때문에라도 경환의 입국을 기다리고 있던 잭은 대학입학 허가를 핑계로 SHJ를 찾았다는 걸 황태수는 어렵사리 알 수 있었다. 경환의 지시로 앞으로 KBR은 자신이 상대해야 되었지만 잭에게는 경환의 입국 뒤에 통보를 할 생각이었다.

    “사장님께서는 다음 달 말에 입국을 하실 예정입니다. 임대한 집의 인테리어가 속도가 나질 않더군요. 인테리어 공사가 마무리 되어야 오실 수 있지 않겠습니까?”

    황태수의 말에 잭은 인상을 찡그리고 있었다. 그렇게 주의를 줬건만 인테리어 업체는 세월만 축내고 있다는 사실에 잭은 돌아가는 길에 인테리어 업자의 목을 비틀어서라도 공사를 빨리 마무리 시킬 생각이었다.

    오랜만에 수정과 함께 달빛한스푼을 찾은 경환은 수정이 따라주는 레몬소주를 홀짝거리며 마시고 있었다. 수정과 자신의 사랑을 확인한 장소였던 만큼 두 사람에게는 특별한 의미로 다가올 수밖에 없었다.

    “야, 오랜만이네. 혈색 좋아졌는데. 제수씨도 오랜만에 뵙네요. 하하하.”

    달빛한스푼으로 군대동기인 심석우가 들어와 경환의 맞은편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넉살 좋게 빈 잔을 들어 보이는 석우에게 경환은 술 한 잔을 따라 주었다.

    “자식, 그래 오랜만이긴 하다. 여자 뒤꽁무니는 아직도 쫓아다니고 있냐?”

    “진작에 포기했다. 어디 제수씨만한 여자들이 있어야 말이지.”

    석우의 말에 수정은 얼굴을 붉혔지만 석우의 말이 싫지는 않은 표정이었다. 경환은 큰 그림을 그려보고 싶었지만 석우에 대해서 자신을 못하고 있었다.

    “졸업인데 뭐 하려고? 진로는 결정을 한 거야?”

    “작년에 오성에 합격을 하긴 했는데, 내 길이 아닌 거 같아서 입사를 포기했다. 아는 형님께 부탁해서 야당의원 수습보좌관으로 일하는 중이야.”

    석우는 자신의 기억과 다르지 않게 진행되고 있는 석우에 대해 일단은 안도를 했지만 결국엔 석우는 팽을 당할 운명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기에 불안감을 지울 수 없었다.

    “너 내가 사업을 시작했다는 알고 있지? 그리고 난 조만간 미국으로 다시 떠나게 될 거다. 예전에 내가 신촌에서 널 밀어 줄 수도 있다는 말 기억하냐?”

    경환은 정색을 하고 석우를 바라 봤다. 경환의 기세가 심상치 않다고 느낀 석우는 마시던 술잔을 내려놓았다.

    “자식, 갑자기 왜 분위기를 잡고 그래? 제수씨 앞이라도 가오 세우냐? 기억이야 하지, 그리고 예쁜 여자도 소개시켜 준다는 말도 기억하고.”

    이런 모습이 석우의 장점이기도 했다. 심각한 분위기를 농담으로 풀어보려는 석우를 보며 경환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을 수밖에 없었다.

    “네가 한 가지만 약속하면 네 반려자뿐만 아니라, 내가 말했던 너의 정치가의 길을 최대한 밀어 줄 생각이다. 진지하게 생각해 봐라.”

    수정은 혹시 라는 생각에 놀란 눈으로 경환을 쳐다봤지만, 경환은 석우만 직시하고 있었다. 석우는 경환의 진지한 모습에 농담이 아니라는 걸 느끼고는 경환에게 지켜야 될 약속이 무엇인지 물었다.

    “네가 결혼을 하게 된다면 한 여자만 바라보고 평생을 가겠다는 약속을 한다면 내가 널 밀어 볼 생각이다. 네가 원하는 곳까지. 너도 알다시피 정치가는 여자와 돈 때문에 살기도 하고 죽기도 한다. 돈은 내가 해결해 줄 수 있다지만 여자는 네 의지가 있어야 된다고 생각해. 네 이름을 걸고 약속할 수 있겠냐?”

    예전 경환의 말을 단순한 농담으로 받아 들였었다. 가끔 경환의 소식을 들을 때마다 석우는 하나씩 자신의 계획대로 움직여가는 경환을 다시 볼 수밖에 없었다. 오늘 이 자리도 경환의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자리란 것을 알게 된 석우는 경환과 함께 자신의 미래를 꿈꿀 결심을 했다.

    “좋다. 내 이름을 걸고 너한테 약속하마. 그 대신 내가 원하는 곳까지 반드시 날 밀어줘라. 네 이름을 걸고.”

    경환은 석우를 향해 고개를 끄떡이며 웃어 주었다. 그때 가게 문이 열렸다.

    “오빠, 언니, 여기 찾느라 혼났어. 찾기 쉬운 곳으로 부르면 좀 좋아?”

    석우는 늘씬한 키에 이목구비가 뚜렷한 미인을 보고 어안이 벙벙해 말도 없이 바라만 보고 있었다.

    “정아 왔니. 이 친구 옆에 앉아라. 오빠 군대 동기고 머리 좋은 친구니까 잘 한번 사귀어봐.”

    정아는 모르는 남자의 옆에 앉는다는 게 부끄러웠던지 한참을 망설이다 석우의 옆에 슬며시 자리를 잡고 앉았다. 서로를 소개시킨 후 경환과 수정은 두 사람을 위해 자리를 피해주려 술값을 계산하고 가게 문을 나섰다. 급히 경환의 뒤를 쫓은 석우가 경환의 팔을 붙잡았다.

    “경환아. 아니, 형님. 나 너한테 충성할 테니까, 제대로 밀어 줘봐.”

    석우를 안으로 들어 보낸 경환은 수정의 손을 잡고 오랜만에 방배동 거리를 걸었다. 아직 한 겨울이라 싸늘했지만 수정의 손을 잡고 있던 경환의 손은 뜨거웠다.

    “자기야. 아가씨를 소개시켜줘도 될 만한 친구에요? 자기가 아가씨를 아끼는 거 내가 아는데.”

    “적어도 정아를 울릴 친구는 아니야. 그 친구의 꿈을 내가 사고 싶었어. 그 꿈이 현실이 될 수 있다면 정아에게도 좋은 기회가 될 수도 있고. 아무리 그래도 정아가 무지 아깝기는 하다.”

    수정은 경환의 말을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아끼는 동생을 아무한테나 소개시켜 주지 않을 것이란 건 잘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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